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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41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03

                    <제 41 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03

(Pure Zen Peace of Mind Cultivate Dharma Meeting)

1995년1월20일오전 8시 삼보사(三 寶 寺 : Sam Bo Sa)



* 서기 1995년 1월 20일부터 22일(성도절) 미국(美國) 카멜에 위치한 삼보사(三寶寺)에서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동안거(冬安居) 중에 2박3일간 사부대중(四部大衆)을 대상으로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를  펴셨습니다. 그때 설법하신 법어 말씀 가운데 3째 시간 녹음(錄音) 테이프를 채록(採錄)하여 재편집합니다. *



2. 4종연기(四種緣起)


1. 업감연기(業感緣起:十二因緣法).....혹(惑).업(業).고(苦)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며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임.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장식(藏識)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삼법전전(三法展轉) 인과동시(因果同時)함을 말함.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함.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眞如)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부증부감(不增不減)한 실체(實體)인데 염정(染淨)의 연(緣)에 따라 종종(種種)의 법(法)을 생(生)함을 말함. 곧 그 실체(實體)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이의(二義)가 있어서, 진여문(眞如門)으로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이나 생멸문(生滅門)으로는 염연(染緣)에 따라서 육도(六道)를 현(現)하고 정연(淨緣)에 따라서 사성(四聖)을 나툰다.


4. 육대연기(六大緣起).....지(地).수(水).화(化).풍(風).공(空).식(識)의 육대(六大)가 우주(宇宙) 법계(法界)에 두루 가득하여 만유제법(萬有諸法)을 연기(緣起)함을 말함.


부처님 법(法)은 연기법(緣起法)을 기본으로 합니다. 부처님 법은 인연법(因緣法)을 줄거리로 합니다. 논리적인 줄거리는 바로 인연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을 알면 부처님 진리를 알고 인연법을 모르면 부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을 저급한 차원에 머물게 되면 이것은 세간적인 하나의 상대적인 원리 그런 것밖에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중요한 점은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런 차원까지 높여져야 참다운 대승적 연기법이 됩니다.

이 시간은 주로 연기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법(佛法)을 얘기하는 분이 연기법을 말하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앞서 말씀과 같이 세간적인 차원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차원에서만 그쳐 버리면 사실은 우리 생활에 큰 힘이 못됩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것밖에 안 됩니다.

불교 연기법은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여래장연기, 육대연기, 이렇게 4종으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먼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업감연기는 우리가 업(業)을 짓고서, 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행동이나 입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사 우리가 무엇이 좋다 그러면 그냥 좋다는 것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다 흔적(痕迹)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것이 그만치 흔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한 마디 말을 한다든가 생각을 한번 한다던가.  행동으로 옮긴다던가, 이른바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인데, 업을 지어 놓으면 그대로 없어지는 게 아니라 꼭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짓고 또 업을 지어 놓으면 그 하나의 업보(業報)로 해서 고(苦)를 받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또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결과적으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전생에 지은바 그런 하나의 업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그 업의 과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금생에 또 업을 지어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내생 가서 태어나고, 이것이 이른바 삼세인과법칙(三世因果法則)인 것입니다. 즉,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라. 이것은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실 분들은 역시 삼보사제(三寶四諦)라! 부처님(佛)과 부처님법(法)과 부처님법 따라서 수행하는 승(僧) 이것이 삼보 아니겠습니까. 삼보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도리 대자연의 도리가  부처인 것이고, 그 부처님 법을 깨달으면  또 부처인 것이고, 그래서 천지 우주의 도리 이것이 하나의 부처인 동시에 바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우주의 근본적인 법에 따라서 행동하면 좋은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업을 짓고서 거기에 상응된 고를 받는 것입니다.

12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업(業)을 받는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업을 받는가.

과거 전생에도 무명(無明)이라 하는, 무명 이것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무명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전생에 무지 무명 때문에 부모 연(緣)을 만난단 말입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따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지한 행 따라서 식(識)이 생기고,  그 식이 중음계(中陰界)를 헤매다가 부모 연 만나서 태 가운데 잉태하고, 또 자라나 열 달이 차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서 또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죽은 뒤에는 내생 가서 그대로 또 다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항시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혹업고(惑業苦)라, 혹(惑) 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를 가리킵니다.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받는 결과가  고(苦)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외워 두시면 편리합니다.

내가 가사 누구를 미워한다. 그러면 그것은 혹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탐착(貪着)을 한다. 이것도 혹입니다. 혹이 있으면 그런 번뇌에 따라서 행동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항시 이와 같이 혹업고가 되풀이됩니다.

무지한 번뇌 때문에 행동을 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人生苦)를 받고, 혹업고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이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항상 이것이 상속이 되어 간단 말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상속되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삽니다.

뱅뱅 도는 인생고, 그것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이 성자의 가르침이요 성자의 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이와 같이 죽고 나고 살고죽고 해 가지고서 끝도 갓도 없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바퀴를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인생고의 바퀴를 다 끊어 버려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는 낮은 차원의 연기법으로 해서는 영생해탈이라는 그런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번뇌 무지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를 받고 이런 것만이 업감연기라 하는 것은 차원이 낮은 연기법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부처님 진리 법을 확실히 알고 부처님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그때는 불법을 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고 할 때는 불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모르면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연기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현대말로 하면 인과율(因果律)이라, 인과율을 떠나서 과학도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이라는 것은 인과율을 공리(公理)로 합니다. 인과율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 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르침이 부처님 연기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인과율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인 연기법은 그 인(因)과 연(緣)과 과(果)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과 이것이 합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다 심오하고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업감연기법 정도는 우리 눈앞에서도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범주에 속한 연기법 이것이 업감연기법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근원은 뭣인가 연기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원인을 캐서 물을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이나 과학적인 가르침은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도 상대성(相對性)이 어데서 왔는가. 그 원인을 어떻게 풀지를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참다운 본질(本質)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을 초월(超越)한 세계, 상대(相對)를 초월한 세계가 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이와 같은 연기법의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아뢰야(阿賴耶)란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장식(藏識)이라, 우리 마음이나 우주 만유는 중생들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모두를 거기에다 다 담는 하나의 식(識)이 있단 말입니다. 알 식(識)자 이것은 마음이나 똑 같습니다.  마음이란 뜻이나 식이란 뜻이나 똑 같습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 모든 존재가 다 식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마음은 마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시 어느 물질이나 근본은 다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가 성립됩니다.

마음, 식 이것은 하나의 순수 에너지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정기(精氣)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알식(識)자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개념의 차이가 있어 놓으면 혼돈하기 쉬우므로  개념을 정확히 알아 둬야 어려운 공부를 할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근본은 마음이고, 또 다른 존재도 근본은 마음입니다. 산도 근본은 마음이고, 해나 달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마음이라는 하나의 식입니다.

앞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것을 긍정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끄트머리에 가면 동물과 식물도 한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가사 화분(花盆)에 좋은 꽃을 가꿀 때도  화분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게 꽃을 피우기만 하는 식물인 것이지 무슨 뜻이 있으랴? 하지만 똑 같은 화분을 놓고서 거름이나 관리도 똑 같이 하면서 한쪽 화분에 마음을 더 주고 다른 한 쪽 화분에는 마음을 덜 두면 이상하게 마음을 더 두고 관심을 느끼고 있는 화분이 훨씬 더 성장이 빠르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서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의 순수 에너지이기 때문에 관심을 두면 그만큼 화분의 꽃에 대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마음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 인생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자기 아들딸이 있다고 생각할 때  어머니나 아버지가 기도를 모셨다고 합시다. 저 멀리 있는 아들딸한테 아무 도움이 없다면 무슨 필요로 기도를 모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오랜 경험으로  어디가 있던지 간에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틀림없이 그만큼 정성이 닫음으로 기도를 모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오랜 경험으로 해서 알려져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마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축생(畜生)들도 마음이 다 있습니다. 단지 인간 같이 의식(意識)이 발달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되었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불법에서 만법(萬法)이라고 말할 때는 일체 존재를 다 가리킵니다. 오직유(唯)자 알식(識)자 오직 식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요. 모두가 다 마음이라 하는 순수 생명(純粹生命)으로 만들어지고 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식이다.

식이라는 말이나 마음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다만 식 이것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가릴 때  식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래도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고 본질에 가서는 똑 같아 버립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불법 공부를 하셔야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이것은 장식이라, 감출 장(藏)자 입니다. 모두를 다 그 속에다 담아 두는 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뭣이 좋다 하면 좋다 하는 그 것으로 끝나 버리고 흔적이 없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좋다는 흔적을 남깁니다. 남을 밉다 하면  미워하는 그것은 끝나 버리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은 밉다는 흔적을 둡니다. 자꾸만 남을 미워해 싸면 그 때는 더욱더  미워진단 말입니다.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때는 그것이 더욱더 사랑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각이나 행동이,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도, 남을 한번 딱 때리면 그 행동은 그쳐 버리지만  때렸다는 그 에너지는 역시 식에 갈무리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말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에 역시 머물러 둔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 식에 종자(種子)를 심어 둡니다. 나쁜 생각은 나쁜 종자를 심어 두고  좋은 생각은 좋은 종자를 심어 둡니다.

좋은 사람은 마음속에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  좋은 종자를 많이 심은 사람이고  나뿐 사람들은 나뿐 말 많이 하고 남도 미워도 많이 하고 해코지 많이 하고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나쁜 종자가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나쁜 일 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장식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 우리가 가사 저 사람이 밉다. 그럴 때는 그냥 우연히 미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벌써 밉다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종자에서 현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것이나 궂다는 것이나 그런 것이 그냥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연인 것 같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 우리가 미처 못 느끼는  마음의 그런 바탕에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자가 현행 행위를 나투고, 가사  때리기도 하고 안 때리기도 하고  밥도 먹고 걸음걸이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다시 훈종자(熏種子)라, 다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보면 선악이 없지만  우리 과거 전생의 업식(業識) 마음에 들어 있는 선악의 종자가 인연 따라서 현실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이 종자생 현행인 것이고, 그리고 현실로 행동하면 또 그것이 거기에 걸 맞는 종자를 다시 심는 것입니다.

종자를 심는걸 보고 불교 술어로 훈종자(熏種子)라, 훈 이것은 더웁게할 훈(熏)자 입니다. 우리 마음에다  따습게  종자 훈기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법전전 인과동시(三法輾轉 因果同時)라.

이 삼법(三法)은 뭣인고 하면 맨 처음에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종자가 있고, 종자가 있으면  그 종자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면  다시 그 행동으로 해서 종자를 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인과동시(因果同時)라. 인(因)과 과(果)가 서로 동시에 돼서,

우리가 남 미워하면  미워하는 즉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종자를 심어 놓으면  그때는 또 인연이 있으면 그냥 바로 현실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의 행동이 규정(規定) 되는 것입니다.

종자생 현행이라, 우리 마음에 있는 선악(善惡)의  종자가  현실 행동을 낳는  것이고, 행동을 하면 그 행동 때문에 종자를 다시 심고, 그 종자에서 또 현실적인 행동 나오고,  다시 또 종자를 심는 이 삼법이 이와 같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식(識) 마음이라 하는 거기다 종자를 애초에 심어 놨으므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서 텅텅 비어 가지고 있을 때는 종자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도 물질적인 세계 시간 공간적인 세계만 파괴되는 것이지 마음의 세계는 절대로 파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천상계 어딘가에 그대로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종자 그대로 남아 가지고서  다시  우주가 구성되면 종자에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나무로 태어나고 합니다.

이렇게 그  마음이라는 데다 종자(種子)를 심어 가지고 거기서 현실로 행동(行動)이 나오고 다시 또 그 현행(現行)이 인(因)이 되어 종자를 심고 삼법(三法)이 전전(輾轉)하는 이것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입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연기법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업감연기 즉, 십이인연법 보다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식(識)이란 대체로 뭣인가?

불교는 꼬치꼬치 밝혀서 끄트머리까지 다 알아 버리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불교는 모두를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덮어 놓고 믿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중생의 합리적인 사고(思考)를 그대로 이끌어 갑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약 500년 분 아닙니까.  그는  우주는 정확한 수리(數理)로 구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주는 정확한 수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 같은 그런 어려운 것도 역시 다 하나의 괘(卦)라는 수리로 푼단 말입니다.

우리가 음악을 본다 하더라도 한 옥타브(octave)는 팔진법에 따라서 화음(和音)이 되어 간단 말입니다. 진동수에 따라서 전파 광파가 있는 것이고, 음파도 가청 주파수대의 음파가 있고 초음파가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몇 사이클인가? 얼마만큼 진동하는가?

그런 정확한 수리로 해서 우주의 현상적인 문제가 규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물리학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수학(數學)을 잘 모르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 물리는 정확한 수리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불교라는 것은 이와 같이 정확히 우주의 근원을 따지고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식은 도대체 뭣인가?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식(識)에다 종자(種子)를 심어 놓으면 다시 행동(行動)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또 다시 종자가 심어지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식이라는 것은 대체 뭣인가?

식의 근본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따라서 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인연법 이것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입니다.

여래(如來)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여래라는 뜻이나 부처라는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우주의 도리에서 그대로 왔다. 그래서 여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우주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식이라는 것은 그냥 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의 본체는 바로 여래입니다. 바로 부처란 뜻입니다.

따라서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다 부처까지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래장연기라. 이것은 또 진여연기(眞如緣起)라고도 합니다.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합니다. 여래(如來)란 뜻이나 진여(眞如)란 뜻이나 법계(法界)란 뜻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는 진리 그대로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하는 것이고, 또 진여 이것도 역시 바로 진리다. 진리와 똑 같다. 진리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법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경계 이것이 법계입니다. 바로 진리의 세계란 말입니다. 이것은 다 똑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말하고 나쁜 생각하고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마음에다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가사 개나 소나  그런 축생들도 다 나름대로 행동을 하므로 종자를 자기 마음에 심겠지요.

그런 것들의 근원이 뭣인가 파고들면 모두가 다 부처라는 데까지 이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인연법(因緣法)의 가장 시초  가장 기본적인  틀은 가장 본 바탕은 역시 부처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인간이 미처 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지 원인(原因)을 캐고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들어가면 다 부처님한테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연(緣)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지금 현상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금생에 태어난 것이나, 또 살다 죽는 것이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나, 누구를 좋아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겉만 보면 별것도 아니고 상대적인 걸로 해서 되는 것 같지만 근본 뿌리를 캐 들어간다고 할 때는 다 부처님의 도리란 말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攝理) 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미신(迷信) 같이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라는 것이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님의 섭리요 근본 도리입니다. 다 진리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뚝 떼어서 현상적인 세계만 볼 때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렇게 되겠습니다마는 가장 근본적인 도리에서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여래장연기 즉, 진여연기 이것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두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는 진여 즉, 진리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여 진리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해서 구분해 보는 것입니다. 진여라는 부처님의 실상을 이렇게 저렇게 나눌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우주의 생명 그 자리의 참다운면 이것이 진여문이고, 또 진여문에서 인연 따라 현상계가 이루어지는 생멸문, 나고 죽고하는 문, 우리가 태어나고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고, 일본 고베 같은 지진이 생기고, 이런 것은 모두가 생멸문에서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졌다 불행해졌다 이런 것들은 다 생멸문 입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 볼 때는 일미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한 우주의 한(하나의) 실체라. 즉 말하자면 우주는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서 나고 죽고하는 생멸문에서 볼 때는 염연(染緣)이라,  별로 좋지 않는 때 묻은 인연에 따르면 그때는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아닙니까.

지옥도 가고 인간 세계로도 나고 천상도 가고 이것은 아직 부처 경계가 못되므로 아직은 청정한 인연은 아닌 것입니다.

지옥은 더 오염되고 천상은 덜 오염 됐다 하더라도 때 묻은 번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천상 역시 욕계(欲界) 천상이나 색계(色界) 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이나 인간보다는 더 좋다 하더라도 아직은 역시 때가 번뇌가 다 가신 것이 아닙니다. 번뇌가 남아 있습니다.

가사 우리가 죽을 때 남을 굉장히 미워한 채로 죽어 버리면 그것은 틀림없이 싸움 잘하는 아수라 세계로 갓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죽는 순간에 독한 마음 잔인한 마음을 품을 때는 지옥 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금생에 좀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을 무렵에 좋은 스승 만나서 정말로 본래가 다 부처 아닌가. 원래 번뇌라는 것은 씨앗이 없는 게 아닌가. 근본 자취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서 부처님만 오로지 믿고 밀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평소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도 그 임종(臨終) 때  좋은 마음 때문에 좋은데 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 보면 십염왕생(十念往生)이라! 평소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 좋은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을 외운다면 그 공덕으로 해서 좋은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임종 때 우리 마음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임종 공부라, 평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임종 공부를 나이 자신 사람들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만 나이가 들어 황혼이 되면 참 주의해야 됩니다. 평소에 내가 무던히 양심(良心)대로 살았거니 안심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때까지 고이고이 잘 살아서 꼭 내생에는 좋은데 가서 태어나야 합니다. 성불하면 더욱 좋고요.

금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과거 전생이 있었으므로 금생이 있는 것이고, 또 금생이 있었으므로 내생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시겠지요.

그래서 때 묻은 좋지 않은 인연 염연(染緣)을 만나면 그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런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고, 청정(淸淨)한 인연 정연(淨緣)을 만나면 그 때는 사성(四聖)이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을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고 친구들과 우정(友情)을 맺고 하는 그런 경우도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저 친구를 지금 좋은 길로 이끌고 있는가? 이렇게 한번씩 자기 반조(返照)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슨 이익 있는 일이나 하고, 당이나 만들어서 나중에 정권이나 잡을 그런 일이나 하고, 그러면 결국 때 묻은 인연이기 때문에 자기 친구도 그런 쪽으로 엉뚱하게 이끌어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치해도 좋고 경제 활동 해도 좋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나와 남이 성불하는 쪽으로, 나와 남이 동시에 다 좋은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런 뜻으로 돈도 벌면 좋고 정치를 하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와의 우정에도 우리가 때 묻은 인연이 될 것이 아니라 맑은 인연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정연(淨緣)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실상은 염정(染淨)이 둘이 아니지만 우리가 의미로 나누어 보면 염연(染緣)과 정연(淨緣)이라.

내외간에 함께 계실 때도  내가 저 사람한테 때 묻은 인연이 되는가? 내가 맑은 인연이 되어서 저이가 나 때문에 보다 더 맑아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육도 가운데는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축생계(畜生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鬼神)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부인을 합니다만  귀신도 존재하기 때문에 절에서 천도(薦度)도 모시고 다하지 않습니까.

귀신 세계는 스승이 없는 어두운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걸로 해서는 인도(引導)를 못합니다. 부처님 법으로 비로소 인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비밀주(秘密呪)로 해서 ‘그대 이리로 오너라’ 하면 올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보소청진언(普召請眞言)이라, 이 진언을 하면 그때는 귀신도 ‘누구누구 영가(靈駕)여’ 하면 다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우주의 기본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순수 에너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참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들도 부처님 힘으로 해서 ‘그대가 지금 너무 헤매지 말고, 그대가 헤매는 것은 그대한테도 좋지 않고 그대 가족에게도 안 좋으니까 그런 망념을 다 끊어 버리고서  극락세계라든가 극락세계에 못 가면 천상이라든가 천상에 못 가면 인도 환생해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든가 하소서’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 천도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꼭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쁜 쪽으로 가는 것을 항시 주의하고 자기 점검을 잘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불행해지지 않는가. 나 때문에 누가 실패하지 않는가. 그리고 꼭 한 걸음씩이라도 성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여기 사성(四聖)이란 말씀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도 구분이 있습니다. 완벽한 진리를 깨달은 그런 분은 바로 부처고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은 보살, 보살은 나와 남을 다 더불어서 진리로 이끌어 가는, 자기도 성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하고 남도 성자의 길로 인도하는 이가 보살 아니겠습니까.

연각(緣覺) 이것은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자기만 성자가 되려고  애쓰는 그런 분이 연각승입니다.

성문(聲聞)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충실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별로 안보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공부만 주로 하는 그런 성자가 성문승입니다.

아무튼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이것이 사성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장연기라, 따라서 인연법은 여기까지 이르려야 됩니다. 그래야 온전한 인연법이 됩니다. 여기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진여라 하는 여래라 하는 진리에서 왔단 말입니다.

요새 무슨 지존파가 하는 나쁜 사람들도 역시 겉모습만 지존파지 그 본성은 똑 같이 여래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도 미워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 사람은 과거 전생에 나쁜 죄악의 씨앗을 너무 많이 심고, 금생에도 스스로 지은 죄악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하고서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측은히 생각했으면 생각했지 그 사람을 성자들은 미워를 못합니다.

가장 깊은 도리가 여기 있는 여래장연기라.  이 진여연기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각을 깊이 해보십시오. 

우리 행동 하나 하나가 그 근본 뿌리를 모르고서 겉에서만 뱅뱅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고, 보통은 말도 번뇌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고 생각도 그럽니다. 그러면 결국 차근차근 나쁜 번뇌 종자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상대성 원리에도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가 부처라는 것은 불법에만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이라. 맹자(孟子)는 성선설 인간성은 본래 선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는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다. 인간성은 나쁜 것이므로 교육을 잘 시켜서 훈도(訓導)를 해야 된다. 맹자는 본래가 선량하므로 선량한 인간성을 때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역시 맹자의 주장이 보다 공자(孔子)의 뜻에 맞고 인간성은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겉만 그런 것이지 본래는 선량(善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도 부처님 사상 같이 철저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냥 선량한 정도가 아니라 앞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춘 것입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능력도 원만, 일체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장연기의 인연법 따라서 태어난 것이 또 우리 인간(人間)인 것이고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코끼리에다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독주를 마신 코끼리가 이것저것 앞뒤도 가리지 않고  할퀴고 유린하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가서는 그냥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앞발을 꿇고서 그대로 유순(柔順)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 코끼리한테도 순수한 성품은 다 있습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식물(植物)에도 다 있습니다. 식물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든 일체존재가 근본 성품은 역시 진여불성입니다.

어느 물질이든 에너지가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순수 에너지, 에너지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만 온전히 생각할 때는 우리 신앙심(信仰心)은 한결 더 수승하게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거북하다. 이런 때도 나한테는 만능(萬能)한 진여불성이 내 생명의 본질이 아닌가. 이렇게 한번 생각한 그걸로 해서 그냥 웬만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가까스로 내 몸무게는 얼마고 내 힘은 얼마고  내가 배운 것은 뭐 대학교 나오고 뭣도 좀 하다 말았고, 이렇게 자기 능력을 제한시켜 놓으면 그만 그밖에는 못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배웠던 안 배웠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 자비 행복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불법 말로는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부처님 공덕을 말할 때에 삼명육통은 자연히 거기에 따라갑니다. 삼명육통은 뭣인가 하면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육통이고 그 중에 특히 천안 숙명 누진 셋을 삼명이라 합니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면 같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런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기적도 과장시킨 것이지 무슨 기적이랴.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원자력 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우리가 지금 원자력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자력보다도 더 무한한 성능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광명 파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그 광입자(光粒子)의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과거 전생에 잘 못 살아서 자기 마음을 제한해 왔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배우고, 누구한테 말 듣고, 부모한테 영향 받고, 사회에서 나쁘게 배우고,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왜소화되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디로 마음을 여는 것인가 무한(無限)의 광장(廣場) 무한의 자비 지혜 행복이 갖추어진 광장으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입니다. 마음 열지 않고 부처님 믿는다면 그건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내 본래의 생명(生命)의 고향(故鄕) 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좋아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아무도 없이 모두가 다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이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2조 혜가(慧可)스님이 달마(達磨)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달마스님 말씀이 ‘그래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번 내 놔 바라’

좋은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나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에다 자기 스스로 나뿐 버릇만 잔득 종자로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인데 자취가 없는 그 마음을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의 번뇌에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 법계연기, 여래장연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항시 여기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진여연기 법계연기라, 우리가 진여의 자리 여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다 부처님 차원에서 영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 본단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차원에서 보니까 바로 못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굴곡(屈曲)시켜 보는 것입니다.


4.육대연기(六大緣起)


네 번째 가서 육대연기(六大緣起)라,  육대라는 이것은 밀교에 있습니다. 밀교도 요새 무슨 「탄트라」나 그런게 아니고  순수밀교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육대란 이것은 땅기운(地) 물기운(水) 불기운(火) 바람기운(風) 또는 텅빈 공기운(空) 마음기운(識)입니다.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성품(性品)으로 해서 기운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는 성품으로 해서 무한의 성품이 있지마는 대개 여섯 개의 속성으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에너지 가운데는 모든 것을 굳게 만드는  고체를 형성시키는 그런 땅기운도 있고,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드는 물기운도 있고, 또 산소와 같이 모든 것을 다습게 만드는 불기운도 있고, 또는 모든 운동에너지 즉, 동력인 바람기운도 있고, 그리고 끝도 갓도 없는 텅빈 모든 존재의 공간성 공기운도 있는 것이고, 그 모두의 근본이 바로 마음기운 식(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 존재라는 것은 이와 같이 본래 진여불성이 갖추고 있는 그런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또는 빈기운 또 마음기운  이런 것이 어울리고 어울려서 존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대 역시 진여불성 여래장 가운데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앓으셔야 바르게 보는 것이고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 이진여(二眞如):수연진여(隨緣眞如)와 불변진여(不變眞如)

1. 수연진여(隨緣眞如):자성(自性)을 불수(不守)하고 염연(染緣)에 따라 염법(染法)인 육도사생(六道四生)을 나투고 정연(淨緣)에 따라 사성(四聖)을 나툼.

2. 불변진여(不變眞如): 연(緣)에 따라 만차(萬差)의 제법(諸法)이 이루어지나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을 잃지 않음을 말함.

* 수연진여(隨緣眞如)는 파(波)와 여(如)하고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수(水)와 같음.

  불변(不變)의 수(水)가 파상(波相)을 일으키고 수연(隨緣)의 파(波)가 수성(水性)을 불실(不失)한다. 그래서 수연진여(隨緣眞如)이기 때문에 진여(眞如)가 곧 만법(萬法)이며 불변진여(不變眞如)이기 때문에  만법(萬法) 그대로 곧 진여(眞如)이다.

소승(小乘)은 아예 이종(二種)의 진여(眞如)를 모르고 대승(大乘)의 권교(權敎)는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아나 수연진여(隨緣眞如)를 모르며 대승실교(大乘實敎)는 두 진여(眞如)를 다 안다. 기신론(起信論)은 바로 이 도리를 밝혔다.

                        “起信論義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내가 지금 당장 교통사고를 만나고 지진을 만나서 선지피를 뚝뚝 흘리고 죽어 가는 그런 마당에도 역시 지금 내 존재가 진여불성에서 잠시간 이렇게 모양을 나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모양을 나툰 존재 이것은 사실은 실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앞서 말씀과 같이 세포로 구성된 허우대뿐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해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한 동안도 고유한 내 존재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바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한다 허더라도 결국 이대로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일초 전과 일초 후의 내 세포가 같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어리석어서 상속되는 찰나를 보지 못하고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가 엄격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초 전과 일초 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런 원리에서 부처님께서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모두가 다 비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이다.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 불교 하시는 분들은 수천번 수만번 하시겠지요. 그래도 그 물질이 공(空)이라는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이 생기면 거기에 얽매여가지고 허물을 범하고, 누구한테 뇌물(賂物)도 받고,  또 비리(非理)도 저지르곤 한단 말입니다.

물질(物質)이라는 것은 고유(固有)한 것이 아닙니다. 시시각각으로 변동해 마지않는 이것은 그야말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항상(恒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전변무상(轉變無常) 변화무쌍(變化無雙)이라. 모든 물질은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내 몸뚱이요. 그런 것이 물질이요. 그런 것이 감투요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남들이 양보해서 추대하면 감투를 써도 그때는 무방하겠지요. 감투를 써도 조금도 집착을 말고 인연이 다 되면 선선히 물러나서 용퇴를 한단 말입니다.

이래 되면 사회가 참 편할 것인데 종교인들도 무슨 감투를 써 놓으면 한 곳에만 붙어 가지고 지내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진여연기란 연기법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살기가 참 편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손해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장에 죽어 나간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어차피 죽을 자기 몸뚱이 집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나투지만 실로 온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서 사라지지만 참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진리 그대로 순수 생명 그대로인 것입니다. 오고 감이 없지 않습니까. 그림자 헛것을  잘못 보고 생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람 따라서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 바람이 자면 다시  물로 돌아가듯이 이치가 똑 같은 것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리(眞理)에서 왔다가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고향(故鄕)으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그렇게 보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두려워했습니까. 석가가 두려워했습니까.

순교(殉敎)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멋도 모르고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겠지만 보통은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그런 눈에 보이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 때문에,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감투나 사실 이것은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생명을 오염(汚染)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업감연기(業感緣起)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불교 기본적인 책을 보시면 정확히 아실 수 있습니다.

업감연기 이것은 번뇌(煩惱)라는 혹(惑)을 일으키고 거기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행동이나 말이나 뜻으로 해서 업(業)을 짓고 그래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내야 인생고도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과거 전생이나 금생이나 번뇌 때문에 행동을 바르게 못해 가지고 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 원망(怨望)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애매하게 받는다. 내가 무던히 착실하게 살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비방(誹謗)한다. 금생에 안했으면 과거 전생에 자기가 꼭 그렇게 받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적어도 이 인연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원망을 못합니다.

하물며 더 나아가서  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모두가 본래는 다 부처님이 아닌가. 일체존재가 부처님이 아닌가. 부처님한테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이 되었다가 다시 부처로 간다. 지옥으로 가고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잠시간 가는 것이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에 다 부처가 들어 있는 것이고 본래불(本來佛)인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체중생 개당작불(一切衆生 皆當作佛)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종당(終當)에는 몇 만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심(安心)하고 살아야 그래야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됩니다.


지금 기본적인 문제를 알아두시면 나중에 제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드리지 않더라도 복사되신 것을 보시면 다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남을 위해서 법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자기가 하는 것은 수월한데 듣는 것은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제가 주로 말씀을 하게 됩니다. 불교가 복잡하고 어려운 법문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인 것이고 오천 권 이상이 되는 불교경전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다 독파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참선(參禪)한다고 애쓰고 불경도 그때그때 봤으나 어떻게 그걸 다 자세히 봤겠습니까. 중점적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일반 분들은 체계 있게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맨 처음 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어렵게 생각이 되시겠구나 하고 동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法會)도 이와 같이 마련한 것입니다.

사실 경험자들이 간추려서 말씀해 드리면  도움이 되시는 분들은 상당히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20이 좀 넘어서 승려가 되었지만 이래저래 고생고생하고 한 15년 남짓 지나서 40이 되니까 비로소 좀 갈래가 잡힌단 말입니다.

여기 가서 묻기도 하고, 저기 가서 묻기도하고, 토굴에서 혼자 지내기도 하고, 고생고생 하고 난 뒤에사 조금씩 불경을 봐도 그때야 물리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4. 삼시교판(三時敎判)


삼시교판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설법을 49년 설(說)이라 합니다. 더러는 45년 설도 있으나 부처님이 30세에 깨달았다고 보면 보통 49년 설이 정설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한꺼번에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따라서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도(印度)란 나라는  지금도 9억쯤 되는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큰 나라이고 땅덩이도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는 교통이 아주 나빠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사셨지만  부처님이 금생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3분의1도 못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어디서 위대한 사람이 태어났다 하면 금방 알곤 합니다만 석가모니 같이 위대한 성인(聖人)이 인도에 태어나서 80년 동안 지냈지만  3분의1도 몰랐다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분들은 아주 극소수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아주 쉽게시리  어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애초에는 부처님께서 신중(神衆)들이나 고급 영(靈)이나 그런 중생들한테  화엄경(華嚴經)을 법문 하셨다 합니다. 화엄경 법문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그대로  아주 에누리 없이 말씀하신 고도의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는단 말입니다. 신장이나 알아듣지 우리 인간은 통 못 알아듣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차원을 낮추어서 일반 사람들한테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


*제일시교(第一時敎)...유교(有敎)...실재한 아(我)가 있다는 망집(妄執)을 깨뜰기 위하여 아(我)는 공(空)하나 사대오온(四大五蘊)등의 제법은 실유(實有)하다 함.

    <아함경(阿含經)등의 소승경(小乘經)>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그런 차원에서 중생 시각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第一時敎) 입니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아는 것은 제일시교, 좋은 일도 하고 나뿐 짓도 하고, 앞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뿐 짓하면 거기에 상응된 벌을 받고 좋은 일하면 그만큼 정화가 되고 행복이 온다. 그런 정도의 법문들은 모두가 제일시교에 해당된 법문입니다.

이것을 일을 유(有)자 유교(有敎)라 합니다. 결국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있다 하는 세계 아닙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산이 있고, 뭣이 있고 하는 세계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세계고  그리고 거기에 맞는 가르침이 유교입니다.

유교 이것은 아함경(阿含經)등 소승경이 유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보는 대로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차원의 유교 이것은 대승(大乘)이 못됩니다. 이것은 소승(小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비록 소승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 가운데는 다 대승이 갈무리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자로 해서는 표현은 안했다 하더라도 다 깨달은 우주의 만유를 제대로 온전히 통달한 부처님 차원의 말씀이기 때문에 중생이 불쌍해서  중생에 걸맞게끔  낮은 법문을 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대승 법문이 다 깔려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지 ‘소승 법문에는 대승은 전혀 없고 소승뿐이다.’ 그래 버리면 또 허물이 됩니다.

아무튼 아함경 같은 그런 경은 초기에 부처님께서  일반 대중들한테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부처님 육성 같고 동시에 우리 수행 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법문이 많이 들어 있는데 지금 와서 이쪽 대승권에서는 좀 소홀히 합니다.

불교는 대승권, 소승권이 있습니다. 대승권은 중국(中國), 한국(韓國), 일본(日本) 이런 나라가 대승권이지요. 소승권은 저쪽 「스리랑카」 또는 「네팔」이라든가 동남아 지방에 있는 불교는 대체로 소승권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승권들은  주로 아함경 같은 경을 합니다. 소승권에서 허물이 무엇인가 하면 앞서 우리가 누누이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말은 소승권에서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승권에서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보았을 때 스리랑카나 동남아에서 온 불교는 수행면에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모양은 좋게 보이지만 불교로 봐서는 소승권이기 때문에 안심법문이 못됩니다. 항시 갑갑합니다.

본래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다. 이런 소식을 그네들은 모른단 말입니다. 대승은 거기에 대해서  가장 근원적인 본체를 딱 들어낸단 말입니다. 본래적인 형이상학 그런 것이 완전히 대승권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 거기에 치우쳐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도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행동이라든가, 계율이나 그런 것을 대승권에서는 함부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술이나 고기나 그런 것도 먹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함부로 말입니다.

‘본래 때묻지 않은 것이고 본래가 부처인데 그것이 뭐 허물이 될 것인가?’ 어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먹기는 먹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합리화시켜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소승경에서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고기 먹는 것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고기를 먹어서 이른바  단백질은 좀 많아지고 스태미나는 나아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걸로 해서 우리 세포는 더욱 오염되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닭이나 그런 축생들은 사람보다는 진화가 훨씬 덜된 동물들 아닙니까. 불교 말로 하면 업장이 훨씬 더 무거운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세포가 내 몸 세포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좋을 턱이 없습니다.

다행히도 현대 병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 밝히고 있습니다. 이른바 문명병인 당뇨병, 고혈압, 심장병들이 훨씬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성자가 하신 말씀은 지금 인류 과학자들이 미처 다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信仰人) 들은 일단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를 내다봅니다.

과거를 환히 내다보는 이른바 숙명통(宿命通), 또는 미래를 내다보는 천안통(天眼通)을 하십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천안통은 미래 세상을 다 알고 동시에 이 현세를 모두 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또 남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일체 세간의 음성(音聲)을 다 듣는 것이고, 가령 개가 멍멍 짖으면 저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서 짖는가? 그걸 다 안단 말입니다.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라. 신여의통 이것은 쉽게 말하면 축지법(縮地法)이란 말입니다. 순간 동안에 마음을 먹으면 천리만리 가 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모양을 바꿔서 중생한테 다른 모습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중생이 불쌍하면 중생한테 극락세계의 훤한 빛나는 모양을 그대로 다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 수대로 빵을 기적적으로 만들어 내 놓곤 하신 것이 모두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자의 경계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한 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들이 물질세계만 가지고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본체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종교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입니다.

물질을 떠난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성자들은 훤히 보고 느끼지만, 우리가 불성(佛性)이 보입니까. 여래(如來)가 보입니까.

불교를 믿는 분들도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려고 합니다. 우선 중생제도(衆生濟度)하려면 무슨 빌딩 많이 짓고, 물질적으로 혜택을 많이 주고, 물론 그런 봉사 사업도 필요는 합니다. 필요하나 그것이 더 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제하는 일이 더 급선무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하는 것이지 물질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사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종교인 점은 우리 정신구제(精神救濟)에 있습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힘이 닿으면 유치원도 짓고, 뭣도 하고 다 좋겠지요.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설사 유치원도 못 짓고, 노인당도 못 짓는다 하더라도 정신구제하는 일이 제일 급하고 큰일 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의 한계를 우리가 알아두어야 그래야 자기 점검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19950121-순선안심탁마법회-삼보사-청화대선사설법

*19950121-자훈 박병섭, 법인성, 동선스님-촬영

*19980905-마음의고향16집으로 발간-광무 정환담,

                        본정 김영동, 주안 한동일

*20050519-DVD동영상작업-본정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