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청화 큰스님 서적/1. 정토삼부경

제2장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제1절 근본불교의 교상변천

            제 2 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 1 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상변천(敎相變遷)


  1. 근본불교(根本佛敎 :原始佛敎 )


 

         ┌ 上座部--- 十二派 ┐(佛滅後 一百年頃)

     原始佛敎│                  │ 部派佛敎

         └ 大衆部-----八 派 ┘


         ┌ 說一切有部 ┐(佛滅後 四百年頃)

     上 座 部 經 量 部-- ┘ 印度內發展

         └ 分別上座部 -- 南方諸國에 發展


     大 衆 部---大乘佛敎로 發展的 解消


 대체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근본불교도 다 공부를 하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근본불교의 체계를 한번 재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근본불교는 바로 원시불교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원시불교는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구분하는데 상좌부에는 12파가 있고 대중부에는 8파가 있어서 20부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불멸(佛滅)후, 부처님께서 열반 들으신 후 약 100년경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부파로 나눠졌다고 해서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은 인천(人天)의 도사(導師)가 되셨지마는 열반에 드신 후에는 중생 근기가 하열(下劣)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견을 세워서 이와 같이 부파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도 그랬는데 하물며 현대는 더욱 더 복잡다단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때 묻지 않은 반야 지혜로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더디고 또는 종단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그런 도리를 잘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도리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헛된 일이 대부분입니다. '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문중한테나 종단에게나 국가적으로나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참다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분명히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그런 것을 명심해서 현상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참다운 지혜를 꼭 갖추어야 합니다.

사실, 저는 감탄한 것이 그리이스 종교나 철학이나 더듬어 볼 때에 그 모두가 약간의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거의 다 같은 요지입니다. 플라톤(platon427-347B.C.)의 태양과 동굴의 비유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태양은 참다운 철인들의 바른 지혜로 비유되고 동굴은 바른 지혜를 모르고서 감각적인 것에만 구속된 생각, 미망(迷妄)에 허덕임을 의미합니다. 태양 광선 같은 바른 지혜가 범부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해서 삽삼조사가 고구정녕으로 분명히 밝히셨고 또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이스 철인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5OO? B.C.)나 엠페도클레스(Empedo kles 495?-435? B.C.)나 또는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 390?-3IO? B.C.)나 모두가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다 같은 도리로, 요지는 세속적인 것을 초월해서 참다운 본체인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 도덕적 행위를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범부인 한에는 지금 동굴에 있습니다. 아닌 것을 옳다하며 감각적인 것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이며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근대 철학, 이른바 실존철학의 비조(鼻祖)라고 볼 수 있는 키에르케고르(Kie.kegaard 1813-1855)도 감각적인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이 하도 마음에 내켜서 가끔 인용합니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사실로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범부가 볼 때는 명명백백하게 있지만, 성자의 바른 반야로 볼 때는 또 역시 명명백백하게 비어 있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지 않고서 속물을 미처 못 떠날 때는 결국은 지금 동굴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소모를 하는 아집(我執)이 있고 법집(法執)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00년경에 상좌부는 다시 설일체유부(說-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로 구분되었습니다.


설일체유부는 내가 비었다는 아공(我空)은 말씀하지만, 오온(五蘊)이나 모든 법은 그대로 있다[法有]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른바 유(有)적인데 치우쳐 있고 논장(論藏)을 주로 합니다.

 경량부는 부처님 경전을 주로 하고 유(有)적인 주장을 조금 덜하고 공(空)쪽에다 역점을 두는 차이가 있는데 모두 인도 내에서 발전되었습니다.

 분별상좌부(分別上座部)는 지금의 스리랑카나 또는 태국 등 남방제국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부(大衆部)가 나올 때는 계율상 문제 해석의 차이 때문에 대중부가 나왔습니다. 어느 때나 보수와 혁신이 있듯이 그 당시 불교계에도 보수와 혁신이 있어서 보수파는 상좌부고 혁신파는 대중부 입니다. 대중부는 계율론 에서도 역시 보다 더 관용적이고 융통성 있는 해석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이 대중부는 나중에 대승불교로 발달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나아갑시다.


 2.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경론(經論)


   經典…四阿含經, 南傳으로는 五尼枸耶

    1. 長阿含經…22卷

    2. 中阿含經…60卷

    3. 雜阿含經…50卷

    4. 增-阿含經…51卷

   論部…六足論, 發智身論, 大毘婆娑論, 俱舍論

  위의 六足論이나 發智身論은 四阿含經의 敎說을 다 各各 自己 나름대로의 佛敎觀을 어떤 部分的인 面에서 또는 綜合的인 見地에서 組織하고 體系化한 것이다.


 그리고 근본불교 경론은 어떠한 것인가? 근본불교 경전은 부처님의 육성이라 할 수 있는 아함경으로서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의 4아함경 입니다. 아함경은 참선을 하시더라도, 해제 때라도, 꼭 한 번씩 정성껏 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부처님의 육성 같은 것을 사무치게 절감할 수가 있습니다.


아함경에는 '그대들이 조그마한 그릇된 행동에도 세심하게 주의해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즉 다시 말하면 철저한 계행을 지키면서,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면 그때는 초선(初禪)에 들어가고 2선, 3선, 4선에 들어가고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아(我)를 멸진하고 아라한 도를 성취한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라한 도를 말하면 소숭(小乘)이라고 너무나 쉽게 부정해 버립니다만 사실은 대승 소승 관계가 그렇게 절연(截然)히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일체유부나 경량부나 한 종파가 되었을 때는 부처님의 대승사상을 제한도 하고 그릇된 해석도 많이 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경 자체는 그렇게 큰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함경 가운데도 표현적으로 말씀을 다 안 했다 하더라도 대승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 사상 가운데 십이인연법(십(十二因緣法)ㆍ사제(四諦)ㆍ 팔정도(八正道)의 원리가 안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까?)

 논부(論部)에 있어서는 육족론(六足論)이라, 육족론은 여섯 종류의 논장입니다. 사리불(Sariputra)이 저술하고 또는 목건련(Maudgalyana),, 대가전연(Mahakatyayana), 제바설마(Devaksema), 바수밀다(Vasumitra)존자 등이 저술한 가장 기본적인 어록이지요.


사리불 존자나 또는 목건련이나 위대한 성자 아니겠습니까? 또한 부처님을 평생 모신 분인데, 소승이라고 함부로 과소평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발지신론(發智身論)은 육족론의 중요한 점을 따서 정리한 논장이고,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은 그 뒤에 결집할 때 발지론을 해석한 논장입니다.

 육족론이나 발지신론은 4아함경의 교설을 다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불교관을 어떤 부분적인 면에서 또는 종합적인 견지에서 조직하고 체계화한 것입니다.

 구사론(俱舍論)은 나중에 세친(世親)대사가 상좌부 계통의 모든 논서의 내용을 취사 절충하여 정리한 총론적인 논서입니다. 이런 것이 논부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