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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1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1

 

현대는 이른바 물질 만능시대, 또는 정보 홍수시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 마음은 사실 컴퓨터나 텔레비전 등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불안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니까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같은, 물질이고 뭣이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그 물질이란 것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불교에서 볼때는 간단하게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입니다. 여기서 물질이 공이라고 그러면 소중한 금쪽같은 몸뚱이가 굉장히 허망하지요? 그러므로 다만 공이 아니라 공의 실상은 그야말로 만공덕을 갖춘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존재의 성품자리입니다. 섭섭하게도 우리 중생들은 성품자리를 볼 수가 없어요. 어째서 볼 수가 없는 것인가? 번뇌에 가리어서 보지를 못합니다. 번뇌란 것이 무엇입니까? 내내야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 치심(痴心) 그런 것이 번뇌 아닙니까?

 

자기를 한번 반조해 봅시다. 나한테는 과연 탐심이 없는 것인가, 또는 기분 좋지 않을 때 불룩거리는 진심을 안낼 수가 있는 것인가, 또는 내가 과연 모든 존재의 성상, 존재의 성품, 존재의 현상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중생이고 번뇌에 칭칭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번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연 따라서 우리가 없을 짓고,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 업을 더 많이 지어서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더 많이 지으면 지옥도 갈 수가 있겠지요. 또 십선업을 닦아서 참선도 좀하고 기도도 모시고 하면 그때는 천상에 분명히 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 가운데 들어갑니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삼계 가운데 들어갑니다. 삼계는 자기가 지은 업따라서 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런 데가 아닙니까? 욕계색계무색계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서 재주도 꽤 있고 재산도 꽤 있고 명예도 높은데 이런 인간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구나,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참 무던한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는 행복스런 생활을 영원히 누렸으면 좋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심장이 한번 멈춰버리면 그때는 주검 아닙니까? 인간이 별로 좋은 데는 아닐망정, 그 좋은 데도 아닌 인간도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 늙고 죽고 다 허망부실하단 말입니다. 좀 오래 살고 늦게 산다하더라도 결국은 다 가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를 구성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화장하면 재만 남을 것이고 매장하면 땅 속에서 썩을 것이고, 그러한 물질이라는 것은 종당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정신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덜 배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신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래야 줄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설마 죽을까봐 여러 가지로 불안해 하면서 조심하고 영양을 섭취하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영양을 많이 섭취한다고 장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가만 그대로 두어도 우리 생명은 죽지가 않아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뚱이만 그때그때 인연이 다해서 사라졌다 또 업따라서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 우리 정신 자체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 아닙니까? 나지도 죽지도 않고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우리 정신은 존재합니다. 비단 개별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다 그런 생명체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실질적인 생명자체는 영원히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우주가 모두 다 생명인 불성으로, 자성으로 충만해 있다는 그런 소식이 바로 반야의 참다운 소식입니다.

 

반야바라밀이란 것은 반야가 있어야 도피안(倒彼岸)이라, 이 중생계의 고해를 건너서 영생해탈의 그런 경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나 성인도 모두가 다 반야를 의지해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반야는 어떠한 것입니까? 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도리가 반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모두가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뿐인데 어떻게 해서 우주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렇게 의심을 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느끼는대로 공기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모든 곳이 지금 공기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공기는 내내야 산소수소탄소질소모두 그런 것으로 구성되지 않습니까? 물론 희박하고 더 농후하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란 것은 이 공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기는 또 각 원자로 해서 그대로 거기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가 공기로 충만해 있듯이 모든 존재의 참다운 생명, 참다운 성품인 불성 자성도 역시 그 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아까 제가 플라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데아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주에 언제나 충만해 있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생로병사를 초월해서 영원히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입니다. 플라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대한 철인들은 다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플라톤보다도 훨씬 먼저 난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그분도 일자(一者)만 존재한다,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결국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란 것은 존재 자체, 존재의 실상 자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실상을 모릅니다. 우리 중생은 기껏해야 가상만 압니다. 허망상만 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꼭 진리에 그대로 맞게 합리적으로 말씀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중생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습니다. 물거품 같고 또는 풀 끝의 이슬같고 또는 거울에 비친 허상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양이 사실로 있지 않아도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꼭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같이 우리 중생이 나요 너요 또는 좋다 궂다 하는 모두는 다 그런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은 허상으로 알면 좋은데 허상을 허상으로 모르는 것이 중생의 아견(我見)이에요. 우리 불자님들, 아견을 꼭 깊이 외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집(我執)입니다. 자기라는 개아에 대해서 집착을 못 떠난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중생은 자기라는 아집을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또는 법집(法執)에서도 못떠나고 있습니다. 대상적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도 다 똑같이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도 사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주관객관이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는 구분되어서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하고 여름에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으로 좌선도 하지 않습니까? 참선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흐린 물을 가만히 두면 시간이 가면서 앙금이 차차 가라앉아 나중에는 그냥 맑아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한 과거 전생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짓다 보니까 흐려질대로 흐려졌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해 있습니다. 혼탁해 있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가 하면 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라는 생각을 그냥 금방 뗄 수가 있습니까? 상당히 인격자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고 보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 당해서만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가 분명히 없습니다.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 지수화풍 사대라 하는 그런 원소로 해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감상하는 부스러기가 모여서 마음이 됐습니다. 사대오온을 떠나면 그때는 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그와같이 돼가지고서, 그것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은 항상이 없단 말입니다. 일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하니까 어제의 ’, 오늘의 ’, 또는 몇십 년 뒤의 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도 공()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고 변화무쌍합니다. 그리스 철인 가운데서 유명한 헤라클레이코스도 만법(萬法)이 유전(流轉)이라, 모든 것이 다 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일초동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봐서 무상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그렇게 이천오백년 이상 동안에 걸쳐 우주의 실상을 정밀하게 전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현재 실존철학이나 생철학(生哲學)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그 어떻게든 말해보려고 어려운 논리를 다 구사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한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못되니까 못합니다.

 

우리가 참선은 왜 합니까? 사변적인,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서 우리가 실상 자체가 되는, 불성하고 자기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곳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이르지 못하면 그때는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에 드나 화두 공안 삼매에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허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을 찾아 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오로지 실상경계에다 멈춰야 합니다.

 

우리 업장이 가벼우면 하루 이틀 앉아도 다 깨달아버리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은 업이 너무 많습니다. 능엄경이나 대혜(大慧)종고선사 어록에도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이즉돈오(理卽頓悟), 모든 존재의 원리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총명하기 때문에 다 분석해 놓고 보면 하나가 되고 일체존재는 근원적인 실상으로 가야 되겠구나, 이런 것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면목이 부처다, 이렇게 쉽게 비약적으로 느낄 수는 있지요. 그렇게 느끼는 것을 가리켜서 일단 돈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원리는 그러하나 사비돈제(事非頓除), 그때그때 지어내려온 업장은 빨리 다 녹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야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 그렇구나 해도 우리 몸에 붙어있는 업장은 좀처럼 안 녹아집니다. 우리가 불경을 보고서 아, 그렇구나하고 마음으로 납득하고 느낀다해도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점차로 계행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닦음으로 해서 차근차근 없어진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