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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0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80

 

업이라는 것이 굉장히 지독한 것입니다. 겪어보면 업을 짓고서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업이 소멸이 안됩니다. 몇십 년이 아니라 몇 겁, 백천 겁의 세월이 흘러가도 한번 지어 논 업은 소멸이 안됩니다.

 

그 업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우리 뜻으로 짓는단 말입니다. 가령 남을 한번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저 사람 참 고약하다, 차라리 어디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 생각을 찰나 동안만 한다 해도 그것이 소멸이 안됩니다. 그 생각 하나로 자기의 온 세포가 오염이 됩니다.

 

또한 우리 생명은 나뿐만 아니라 우주와 더불어서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저 다른 나라에 있는 돌멩이 하나나, 여기 있는 나뭇가지 하나나 모두가 다 같은 인연 가운데서 생겨나고 변화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화엄계서 말하는 중중무진입니다. 얽히고 설키고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인연 가운데 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도 제바달다한테 당한만큼 부처님 스스로도 역시 과거 전생에 제바달타를 못살게 굴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누구나 부처님 공부 가운데는 참선하는 공부가 그야말로 가장 높은 공부고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므로 기왕이면 참선을 좀 했으면 쓰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형편상 선방에도 갈 수가 없고 또 그때그때 절을 찾아가 재가 불자님들과 더불어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까 참선은 도저히 안되겠구나 이렇게 체념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참선은 사실 천하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것은 천하에 쉽고 좋지 못한 것은 천하게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만을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근원적인 말씀이고 실존적인 말씀입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왕 불법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출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속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를 다 씻어버리고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도리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영원한 도리를 알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출가자 아닙니까? 따라서 비록 출가하였더라도 마음으로 세간적인 집착을 못 떠나면 그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출가(身出家) 또는 심출가(心出家), 몸으로 출가하고 마음으로 출가해야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출가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느끼고 진리는 분명히 진리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명백합니다. 나 아() , 볼 견() , 아견이 있으면 그때는 진리가 아니고, 아견이 없어야 진리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현상 아닙니까. 이런 것은 다 인연생입니다. 인연따라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나 내 관념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하나의 상인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인 모든 대상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꿈이나 허깨비와 같단 말입니다. 꿈이 사실 있습니까? 허깨비가 사실 있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그러면 어째서 바로 보지를 못하는가, 업장 때문에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금 업장 덩어리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업숙체(業熟體), 업 덩어리에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참선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얽히고 설킨 업 덩어리를 녹이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은 무엇 때문에 지키는 것인가,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하면, 업덩어리가 녹아지지 않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결연히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우리한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불이라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꼭 그대로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닦으므로 선정에 들어가고 또 선정에 들어야 참다운 깨달음을 얻는단 말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한 공식이나 같습니다. 정확한 수학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인 모든 것을 다 달관해서 체계화시킨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복잡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말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시대를 초월하고 모든 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우주의 모든 문제를 다 포괄시켰습니다. 기독교 진리나 유교 진리, 또는 현대 물리학이나 그런 모든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으로 볼 때는 안 풀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간에 주인공 자리, 우리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지 주인공 자리는 내내야 마음자리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니까요. 그러나 남을 미워하고 남을 좋아하고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나는 김 아무개다, 나는 누구 남편이다, 나는 누구 아내다, 이런 것은 참다운 자기 면목, 본래면목 자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문제,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이란 것은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증명하다시피 모든 존재는 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로 합해져 있습니다. 세상만사 눈에 보이는 것을 분석해놓고 보면 다 원자가 되지 않습니까. 원자는 소립자로 구성되고, 또 소립자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알 수 없는 우주 정기로 꽉 차 있단 말입니다. 그 알 수 없는 우주 정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물리학이 모르는 분야입니다. 왜 모르는가, 시간 공간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이란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어야 축적이 되는 것인데 시간 공간을 떠난 문제는 물리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지만 신묘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눈방울이나 물방울이나 공기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원자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가 다 근원자리에서는 하나의 신비로운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성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 부릅니다. 나는 여기에 있고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저 멀리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것은 오직 그 진여불성 뿐입니다. 육식이 있고 또 그 밑에 말나식이란 잠재의식이 있고, 말나식의 잠재의식보다 더 깊은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깊은 암마라식이 있는데 그 암마라식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생명체인데 그 자리가 이른바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근원적인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자기 스스로 근본 자리하고 하나가 돼버려야 성자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몇 년 또는 몇 개월 동안 애쓰고 공부하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냥 보통으로 해서는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업장이 가벼운 분은 빨리되고, 업장이 무거운 분은 더디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 근본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가르침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꼭 붙습니다. 가령 하루 참선하면 하루 참선한 만큼 마음도 몸도 맑아지고 우리 건강도 더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참선을 하지 못하면 이른바 상을 여의지 않거나, 근본을 여의고서 하는 공부는 그렇게 안된단 말입니다. 근본을 여의고 하는 공부는 몸도 안풀리고 마음도 안풀리고 참선 공부에 따르는 법열이나 행복감도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을 할 때는 꼭 그 근본자리, 본래면목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우선 중요한 것은 천지 우주가 모두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 뿐이다, 진여불성 뿐이다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