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58.
이왕이수(易往易修)라, 이왕이수라. 쉬울 이(易)자 갈 왕(往)자 이왕(易往)이라, 또는 이수(易修)라, 쉬울 이(易)자 닦을 수(修)자, 닦기 좋고 또는 도달도 할 수가 있고 닦기 좋고 빨리 갈 수가 있고 그런 방법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이 염불(念佛)입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공부하신 분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그대로 해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이 자기가 공부 방법을 선택했으면 거기다가 자기 전념(專念)을 해서 나가면 되시겠지만 일반 재가불자님들이라든가 공부하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런 분들은 제일로 쉽고 쉬우면서도 또 닦기도 쉽고 말입니다. 또는 도달도 빨리할 수가 있고 그런 법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염불이란 것이 여러분들 깊게 생각을 하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 사실은 어느 도인들치고서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이 한분도 없습니다. 한국도 신라(新羅)때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 고려(高麗)때 와서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나옹대사(懶翁大師), 조선 때 와서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평양대사, 그런저런 위대한 선지식들이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은 없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화두(話頭)를 창도(唱導)하고 역설하는 분도 역시 꼭 곁들어서 염불법문(念佛法門)을 했습니다.
보조국사 같은 어른들도 참선공부를 해서 경절문(徑截門)이라, 경절문을 말씀했지만은 또 염불요문(念佛要門)으로 해서 고구정녕하게 염불을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또는 송(宋)나라때 위대한 선지식인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영명연수선사는 종경록(宗鏡錄) 100백 권이라, 종경록 100권이니까 상당히 구질이 많지 않습니까. 종경록 100권 가운데는 조사스님들 훌륭한 분들 가르침이 거기에 다 수록이 돼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법안종(法眼宗)이라 하는 선종(禪宗)의 삼대조사(三代祖師)입니다. 선종의, 법안종의 삼대조사이면서도 그와 같이 염불(念佛)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염불을 중요시하고 말씀을 했던가? 그것은 부처님이란 것이, 지성적으로 이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란 것은 바로 우리 생명, 우리 생명(生命)의 근원적(根源的)인 뿌리 자체입니다. 또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주(宇宙)란 것은,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논리라든가 이치로 해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분도 있을란지 모르겠지만은 사실은 우주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자연계(自然界)가 있어 가지고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소가 있고, 또는 돌멩이가 있고 하는 것이니까 저런 것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객관적인 걸로 해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은 이런 것은 현상적인 겉의 모습뿐일 것이고 그런 것도 내내야 파고 들어가면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까 제가 물질을 대강 분석해서 말씀을 했듯이 물질(物質)이란 것은 강도가 제일 높은 다이아몬드라든가, 금이나 어떠한 것도 분석(分析)해놓고 보면 내내야 전자(電子),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 적당히 결합이 돼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란 것은 사람의, 우리의 각기 개별적으로 김가, 박가, 따로 있듯이 그렇게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란 것은 하나의 원만한 생명인 것인데,
그러기에 불교(佛敎)말로 하면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현상적(現象的)으로 상만 보는 것이니까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상으로 해서 구분이 되지만은 성자(聖者)의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본단 말입니다. 근본성품을 봅니다. 성품으로 볼 것인가? 또는 겉으로 볼 것인가? 이런 차이란 말입니다. 성자들은 성품으로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겉으로 상으로 봅니다. 상(相)이란 별 상이 다 있지 않습니까.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좋다는 상,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현대학문(現代學問)이란 것도 모두가 다 상(相)으로 본단 말입니다. 특히 정보화시대 (情報化時代)라는 것은, 얼마나 정보가 많습니까? 정보 과다라,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우리가 그 정보를 다 수용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안정 될 수가 없습니다. 고도의 산업사회(産業社會)가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상당히 편리하지만은 또는 각종 몹쓸 지식도 많이 생기는 것이고, 우리가 텔리비전이나 얼핏 보고 있어 놓으면 우리 인간 생활의, 우리 인간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할 것인가? 필요 없는 것인가? 필요치 않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질없는 정보가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을 소비를 해야 자본주의(資本主義)사회가 실행이 되기 때문에 또 생산(生産)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필요가 없는 것을, 우리는 이런 저런 정보과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혼란 가운데 있어놔서 우리 스스로 굳건한 주장 밑에, 인생관(人生觀)밑에서 정리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른바 성불(成佛)이라 하는 우리 지상과제를 성취를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되는 공부 가운데도 염불 공부가 어째서 중요한가 하는 것을 제가 역설하고자 해서 말이 조금 옆으로 빗나갔습니다 만은 사실 그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가 현재 생활 하고 있어놔서 그렁저렁한 순탄한 방법으로 해서는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삼매(三昧)란 말씀은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삼매가 얼마만치 중요한가는 잘 느끼시지 못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불자가 꼭 어느 때 들어가더라도 거쳐야 됩니다. 삼매를 거치지 않고서 성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심일경성이라.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으는 경계가 이른바 삼매란 말입니다. 어떤 경로로 들어가던지 간에 꼭 삼매를 거쳐야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부처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헌데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 가지 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명상법(瞑想法)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명상법이 보다 더 부처님 사상으로 이행해 와야지 그냥 세속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가는가 하면은 일반 세속적인 명상법은 아(我)를 못 떠납니다. 아(我)를, 나라는 아를 못 떠납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그네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법공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아를 떠나야 제법공을 알겠지요. 자기라는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달는단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인데, 우리 재가(在家)불자님들이 집안에 계시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재가불자님들 처지에서 삼매에 들어갈려고 하면은 집안에서 소리 안내고 공부도 하고 소리 내고 공부도 하고 자면서 공부도 하고 또 막 일어나자마자 공부하고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할려고 할 때는 염불공부 보다 더 하기 좋은 공부가 없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은 사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이론(理論)이 아니라 지성적(知性的)인 어떠한 지식(知識)이 아니라 바로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명을, 부처님을 생명으로 우리가 그대로 믿고 간단 말입니다. 우리도 생명이고 또는 만중생들이 내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사실은 우주 생명자리를 항시 그리워하는 추구하는 흠모심이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은 갈앙(渴仰)하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우리 생명의 중심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더 강렬할 것이고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때는 별로 마음이 강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속에서도 시(詩)를 쓴다거나 또는 그야말로 감성(感性)이 더 풍부한 분들은 예술적인 재량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걸로 해서 종교심(宗敎心)도 보통은 강합니다. 위대한 시인치고서 종교심이 강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영원(永遠)의 세계(世界) 우리 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자리, 그런 자리에 대한 동경(憧憬)이 항시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일반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物質世界)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간절한 동경이나 흠모나 갈앙심(渴仰心)이 별로 많지가 않겠지만은 보다 깊이 생각하고 또는 마음이 예술적(藝術的)으로 그만치 수련(修練)이 돼서 마음이 그야말로 온유(溫柔)하고 이런 분들은 갈앙심도 더 강하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가 다 강강한 마음을 녹여야 됩니다. 우리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아주 버티고 있고 또 자기가 무슨 교만심(驕慢心)이나 있고 우쭐 하면은 그 얼굴이 얼마나 참 굳어버립니까.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다 풀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고 용납하는 관용(寬容)스러운 마음을 품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그냥 그야말로 참 봄바람같이 훈훈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부처님을 우리가 생명으로 받아들여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것이 우리가 바쁜 중에 공부를 할 때 있어서는 가장 하기 쉽고 통하기 쉽단 말입니다. 이왕이수라, 닦기 쉽고 또는 깨닫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용수보살이란 제2석가, 제2석가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른께서 했단 말입니다. 용수보살은 14대 조사입니다. 조사고,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 모든 종파(宗派)가 다 그 어른을 이른바 아주 윗 조사로 모셨단 말입니다. 선(禪)이고, 정토(淨土)고, 염불(念佛)이고, 어떠한 것이나 용수보살을 다 조사로 받드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고 또 용수보살 보다 더 앞서서 마명대사(馬鳴大師)라, 마명스님은 이분은 12번째 분이여요. 용수보살은 14번째 조사고 마명스님은 12번째 분인데 한문자로 마명을 표현하면은 말 마(馬)자 울 명(鳴)자 마명입니다, 이 마명대사가 지은 책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기신론. 일어날기(起)자 믿을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책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대승기신론은 꼭 보셔야합니다. 마명스님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숭앙(崇仰)합니다. 한데 마명대사가 대승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정돈데 그런 분들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염불(念佛)을 역설 강조했단 말입니다.
제2석가라고 할 수 있는 제14대 조사인 용수 보살도 염불을 창도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명스님, 그 마명스님도 역시 염불을 그렇게 지성으로 우리한테 권유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여러분들이 거의 다 보셔서 알으시겠습니다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염불문으로 해서는 정토삼부경이 가장 중요한 핵심(核心) 가르침입니다. 정토삼부경의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꼭 여러분들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가면은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말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것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비단 저 십만억국토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모든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는 투철한 안목(眼目)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이 자리가 바로 극락 세계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 업장 따라서 보고 못보고 또 많이 보고 적게 보고 그 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염불을 하는데 있어서는 꼭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상속해야 됩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했다말았다, 했다말았다 해서는 우리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삼매(三 昧)에 들어가야 우리 범부(凡夫)가 바꾸어져서 성자(聖者)가 될 것인데, 우리 목적은 내내야 범부가 성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자기 혁신을 해 야 됩니다. 자기 초월(超越)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심일경성이라,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행복이 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평소에 모르는 것도 알아지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자리가 바로 부처인데, 또는 부처는 만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 우리가 걸음걸음 접근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도 그와 같이 부처의 공덕(功德)이 하나 둘씩 차근차근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 행복 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원래로 행복(幸福)되기 위해서 금생(今生)에 나와서 고행(苦行)을 좀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정말로 참다웁게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금생에 우리가 이와 같이 인생고(人生苦)를 느끼면서 다행히도 부처님법 만나서 걸음걸음 지금 부처님한테 다가서고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 닦아 나가는 그것이 그야말로 참 희유(稀有)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참 희귀한 일입니다. 이런 기회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라고 그래서 꼭 명년까지 건강하게 내가 꼭 버틴다. 이럴 수 없는 문제 아닙니다. 언제 갈는지 모릅니다. 꼭 바람 앞에 등불이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자기 남편이 또는 자기 아내나 자식이 금방 어떻게 될런지 또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한테는 무슨 불행이 당장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또는 그런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자기 눈앞에서 자기 부모가 돌아가시건 형제간이나 자식이 어떻게 해서 불행을 당하건 이런 것도 사실은 불행이 아닙니다. 불행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은 본래로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몸만 바꾸는 것이고 당장에 자기 형제간이나 누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즉 그 양반 돌아가시는 것이 꼭 그 양반 위해서 손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보통은 생(生)을 한 번 옮길 때는 더 높은 차원(次元)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만나서 가시던 어떻게 가시던 간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절대로 어떻게 죽어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위해서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절대로 그것이 불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 존재가 개벽(開闢) 이후에 얼마나 많은 진화(進化)를 해 왔습니까.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죽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얼만치 우리가 발전됐습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나나 너나 누구한테 대해서나 가장 좋은 것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한테든지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서로 피차 격려해서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어가는 쪽으로 한 걸음씩 우리가 진일보(進一步)한단 말입니다. 이보다도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염불(念佛)이란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삼매(三昧)에 들기 위해서 일반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이라,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인데 일반 세속적인 명상(瞑想)같은 것은 그때그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어느 정도 머리 좋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또는 몸이 더 날씬하니 예쁘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모다 하겠지요. 하나 그런 것은 하나의 유위법(有爲法)이라, 세간적(世間的)인 중생(衆生)들이 생각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무는 것이고 이것은 해탈(解脫)의 공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와야 비로소 해탈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비록 선방(禪房)에서 재가 불자님들 이 공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인역(자기) 집에서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같이 염불공부, 염불공부는 지속을 시켜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그래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나온단 말입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무실 때도 역시 주무실 때 염불하다가 주무시고 말입니다. 주무시면 그때는 여러분들은 스스로 잠들어서 모른다 하더라도 옆에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면서도 염불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는 저 도반(道伴)들하고 같이 지낼 때도 봤습니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서 그냥 잠들어 놓으면 그 도반이 자는 가운데도 공부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잔다는 것이 굉장히 손해 아닙니까. 인생이 그야말로 짧은 것인데 자는 동안 빼버리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기 때문에 자는 동안에 우리가 손해 안 보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잘 때까지, 자리에 누워서까지, 여러분들이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못하시겠지요.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까지 공부를 하시다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들어 버리면은 잠든 가운데도 공부가 됩니다. 또는 잠든 가운데 또 엉뚱한 망상(妄想)을 했다가도 일어나자마자 그냥 마음을 추스러셔 또 염불을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어 가도록까지 하면은 나중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념이념이라, 불념이념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불면은 바람소리도 염불하고 또는 시냇물이 흘러가면 시냇물 소리도 염불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눈앞에 훤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고 또 금년 여름 공부에 어디서 공부를 하시든지 간에 꼭 우리 공부가 부처님한테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가셔서 꼭 여름동안에 본래 부처인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그렇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인 자리를 꼭 한사코 우리가 금생(今生)에 올 여름에 증명(證明)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말씀 드립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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