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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24

 

 

우리가 참선參禪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結制하고 여름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朝夕으로 좌선坐禪도 하지 않습니까. 이 참선參禪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히 두면은 앙금이 차차 가라앉고서 나중에는 맑아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지금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과거 전생前生에 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또 업을 많이 짓고 그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混濁해 있습니다. 혼탁해 있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고 하면 이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생각을 금방 깰 수가 있습니까. 상당히 인격자人格者 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면 욕심慾心을 부리고 자기중심自己中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라는 나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은데 죽지 않고 영원히 있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만 당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분명히 나가 없습니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라 하는 각 원소로 해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분별하고 감상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되었단 말입니다.

 

사대 오온을 떠나면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와 같이 돼가지고서 그대로 가만있으면 좋은데 고대고대 순간순간 변화變化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은 결국은 항상恒常이 없단 말입니다. 일초의 몇 천분지일千分之一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를 못하니까 어제 나 또는 오늘 나 또는 몇 십년 뒤의 나가 똑 같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그 무상無常한 것은 시간적時間的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空間的으로 볼 때는 공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한데, 그리스 철인 가운데 그 유명한 헤라크레이토스Heraclitus도 만법류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하루나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1초의 몇 천분지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 그걸 가리켜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까. 시간적時間的으로 봐서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공간적空間的으로 봐서 그때는 공이란 말입니다.

 

그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2500년 전에 정밀情密하게 우주宇宙의 실상實相을 말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存在論입니다.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말씀한 것입니다. 현대 실존주의철학實存主義哲學이나 생철학 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 말하려고 그 어려운 논리論理를 구사構思하지만은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그런 자리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聖者가 못되니까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 사변적思辨的인 이론적理論的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서 우리가 실상자체實相自體가 되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 같이 불성佛性하고 자기가 하나가 돼버리는 그런 데에 우리가 이르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데에 이르지 못하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가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드나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 삼매에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서 허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에 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오로지 실상경계實相境界에다 멈춰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업장業障이 가벼우면 하루 이틀 앉아도 퍼떡 다 깨달아 버리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업을 지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 어록語錄에도 이런 법문法門이 있어요. 따라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다. 또는 자성自性이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비약적飛躍的으로 느낄 수는 있지요. 비약적으로 느끼는 것을 가리켜서 일단 돈오頓悟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리는 그러나 사비돈제事非頓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 같이 그때그때 지어내려온 업장業障은 빨리 다 녹아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사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는 그렇구나 해도 그 우리 몸으로 그 찐득하니 붙어있는 업장은 좀처럼 안 녹아집니다. 우리가 불경佛經을 보고서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우리 행동行動으로 옳길 때는 또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비돈제事非頓除, 이 현상적인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문득 끊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점차로 계행戒行도 지키고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래저래 하여튼 이렇게 우리가 닦음으로 해서 차근차근 차제에 따라서 없어진단 말입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빨리 없어지겠지요. 단박에도 되겠지요. 그러나 보통 차원에서는 단박에 될 수가 없으니까 아, 이 삼동三冬 내내 참선도 하고, 지금 결제結制에 들어가는 장한 스님들도 계시고 여러 재가불자在家佛子님들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 같이 그 우리 업장이 그냥 단박에 다 깰 수는 없는 것이고, 단박에 다 깨면 좋고, 또 자기 선근善根 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그 비장悲壯, 적과 싸워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 분들은 다 성자聖者가 됩니다.

 

그러나 그렁저렁 먹을 것에 관심이 있다든가 또는 텔레비전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둔다든가, 저 같은 사람은 저 미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을 누가 설치를 해주어도 제 스스로는 안 보았습니다. 그 볼 필요가 없어요. 그것이,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신문도 안 보고 잡지도 안 보고 합니다. 그 보통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봐도 그것이 별것이 아니어요.

 

대통령이 누가 되나, 본래면목을 보려고 애를 쓰고 본래면목을 다 깨달은 분들이 정치도 원칙은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앞서 플라톤 말마따나 철인이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철학을 해야 됩니다. 그 자기 본래 생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이끌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남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은 가량 학교선생님들도 그래요. 그 바람직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참다운 바람직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결국은 성인聖人이 아닙니까.

 

성인聖人이 참다운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그 자기 스스로도 바람직한 사람이 되어야 바람직한 사람을 또 만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분야로 보나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어떤 면으로 보나 정당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急先務고 최선의 일입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그 음식을 잘 만들어 가지고 맛있게 해드리고 그런 것도 하나의 좋은 것은 되겠지만 그런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인간다운 인간 자기 본래면목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란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80이나 사니까. , 그때그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그 몇 칠이나 혼수상태가 되어가지고 의식도 회복도 못한 그런 때도 있었고, 그럴 때 죽었더라도 한탄할 것이 없지요. 다행이도 공부를 좀 더하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인연들이 찾아주고 해서 인연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럽니다만, 사실 우리 인간人間이라는 것이 가장 급선무急先務가 자기 존재存在를 아는 거란 말입니다. 존재 실상實相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가상假相밖에 모르니까 말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가장 정확히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반에서 요한한테 세례를 받은 뒤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면서 시련試鍊을 극복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련을 극복할 때 자기라는 아견我見 아집我執을 다 떠나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자가 되었지요.

 

마호메트Muhammad도 히라산 동굴에서 3년동안 명상瞑想을 했습니다. 3년동안 명상할 때 번뇌가 녹아져서 그래서 알라의 계시를 받고 위대한 성자가 되었지요. 다만 그 시대 상황 따라서 그때그때 적당히 방편方便을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후래인後來人들이 잘못전해서 조금 이상한 대문大文들이 있으나 적어도 세계적인 성자들은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 ~ BC 399나 아까 말씀드린 봐 같이 우리 본래면목자리 생명의 그 근본자리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를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부처님은 구경각究竟覺이라, 구경각은 무엇인고 하면 조금도 흠절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깨달아서 아는 분이 구경각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구경각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다른 성인들도 위대하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구경각까지는 못 가신 성인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런 것은 저쪽 사람들은 좀 다르겠지요. 어떻든 간에 성자는 그와 같이 자기 본래면목을 깨달은 사람들이고 또 성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그 사유활동思惟活動을 할 수 있는 정신능력精神能力이 있는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누구나 다 깨닫기 위한 그러한 우리 수행修行을 마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이것이 최급선무最急先務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한 달이고 또는 몇 달이고 참선參禪을 하고 또는 몇 년이고 참선을 하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공부를 어거지로 방법方法을 잘 모르고 잘 못하면 참선하는 것이 하나의 고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탄順坦하게 여법如法이 부처님께서나 선지식善知識들이 말씀하신대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그 공부하는 환희심歡喜心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선參禪을 잘해서 그 참선가운데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정당한 그러한 환희로운 경계境界를 맛본 사람들은 그만 둘라야 둘 수가 없어요. 그와 같이 매력魅力이 있고 그와 같이 인간의 의의意義를 느끼는 그런 경계는 다른 데서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고 또는 명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실은 우리가 참선 할 때나 기도를 모실 때 느끼는 행복감幸福感에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 재가불자님이나 우리 출가 불자님들도 가령 어떤 경우에 한 일주일이나 기도祈禱모시고 그렇게 만나로 온신분도 있어요. 만나보면 한 일주일만 기도 모시고 와도 그 얼굴이 그렇게 색이 맑고 눈이 맑고 그래요. 인간人間이라는 것은 그 잡스러운 생각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 같이 가장 독스러운 것이 우리 아견我見입니다. 자기라는 결국은 아상我相이란 말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벌써 눈도 흐리고 얼굴도 흐리단 말입니다. 허나 기도 모실 때 그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그렇게 독실하게 지내 놓으면 그 얼굴도 맑아지고 눈도 맑디맑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오랫동안 지속持續을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내 자신을 찾는 일이란 말입니다. 내 자신이 무엇인가? 내 참다운 자신이 참다운 자기가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 같이 자성自性이고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을 우리가 그대로 증득證得을 해버려야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우리가 증득을 못하면 또 번뇌의 노예奴隸가 되어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삼계三界 내에서 뱅뱅 지옥地獄으로 갔다 어디로 갔다 하지요.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할 때는 그럴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러나 만나서 그 탄탄대로坦坦大路로 행복幸福과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引導하는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