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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1)

안심법문安心法門

 

 

오늘 우리 여러 출가사문出家沙門들을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고 의의 깊게 생각합니다. 이번 법회는 우리들의 만남의 장으로서 가장 큰 의의를 삼겠습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안락법문安樂法門이 되겠습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자체가 인생고해人生苦海입니다. 인간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생고가 따르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백퍼센트 합리적인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설사 다른 종교나 철학도 지향점은 부처님 가르침과 유사類似하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우주 자체의 실상實相을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인생고해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법佛法은 안심법문이라 공부를 편안하게 해야 할 것인데 더러는 공부를 옹색하게 합니다. 그러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한 정견正見이 부족하고 또는 존재의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공부인에 있어서 특히 불법의 대요인 참선参禪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폐가 많이 있지마는 중요한 병폐를 들면 암증선暗證禪이라, 공부 경계에 대한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참선을 말합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또는 수행 방편은 여러 가지로 많은데 어떤 방편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내 개인은 어떤 방편으로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확실한 신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안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다 현대 사회가 오죽 복잡합니까. 한 걸음만 밖에 나가면 불법佛法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같은 불교권 내에서도 불법의 해석을 가지각색으로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근본불교根本佛教를 공부한 사람들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전개된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教 또는 조사선祖師禪 등에 대하여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근본불교만이 정통 불교인 것이지 중국이나 한국이나 이쪽은 정통 불교가 못 된다고 생각들 합니다. 그런가 하면 순 대승권인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불교인들은 스리랑카나 태국이나 버마, 라오스 등의 불교들은 아주 소승법이기 때문에 참다운 부처님의 본래면목을 밝히지 못했다고 폄하貶下를 합니다.

 

또는 대승권내에서도 각 종파가 있지 않습니까. 화엄경華嚴經을 주로 한 사람들은 화엄종을 세우고, 법화경法華經을 위주로 한 사람들은 법화종을 세우고 하지 않습니까. 또는 참선을 위주한 사람들은 다 몰아서 참선만이 다이고 다른 교종教宗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삼장三藏 십이부경十二部經이 모두가 휴지에 불과한 것이다이렇게 말씀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조사법이 훨씬 위고 여래법如來法은 아래다이렇게 빗나간 극언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혼란 무궤도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적으로도 바른 이해, 바른 반야지혜가 있지 못하면 우선 내 개인의 바른 공부도 할 수가 없고 남한테 바른 불법을 제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올바른 공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지변총世智辯聰이라, 많이 배워서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마는 올바른 정견이 아니면 바로 못나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좀 안다 하더라도 세지변총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제가 감히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만, 여러 젊은 스님네들이 참선이나 기도에 정진하다가 여러 경계에 부딪칠 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오랫동안 참선 정진한 스님께서 다만 며칠이라도 법문을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을 하였고, 또 한 가지는 여러분들에게 드린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대해서도 중요한 몇 대문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금강심론은 금타(金陀 1898~1948)스님께서 원래 원고를 남겨 놓으신 것인데 제가 간추려서 편집을 했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에는 현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꼭 참고해야 할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별것도 아니면서 정도 이상의 대접을 받는 것도 있고 또는 귀중한 보배이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르침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물이나 또는 교리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에 와서 금타 스님같이 위대한 선지식善知識이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꼭 필요한 것이 불교의 이른바 회통불교會通佛教로서 불교의 경직된 분파적인 것을 지양하고, 세계 종교의 비교, 종교학적 연구와 교섭과 화해를 통한 융합의 문제입니다. 다종교多宗教는 대체로 어떻게 교섭해야 할 것인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들을 지금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구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가운데서 다른 종교, 다른 교리, 다른 주의 주장과 서로 화해를 못할 때에는 인류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인 생활에나 공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물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Ideologie적으로 말하면 관능적官能的 유물주의唯物主義입니다. 별다른 규제가 없이 인간 생활의 풍요와 편리를 위해서 자유방만하게 사는 생활이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공산주의는 어떤 사회인가? 이것도 역시 이데올로기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유물주의입니다. 그 과학이란 부처님 가르침 같은 진리에 입각한 합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이른바 유물사관唯物史觀, 유물정신으로 이루어진 과학적 사회주의입니다. 인간의 심리 작용도 물질의 반사 현상이고, 역사의 추진력도 물질이고 생산력과 생산관계, 이런 저런 모두를 물질이 규정하고 물질이 지배한다는 것이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이론체계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편견들이 그대로 지속되어 간다면 얼마만큼 우리 인간을 괴롭히게 될 것인가? 도리에 입각하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진리에 따르지 않는 것은 결국은 파멸되고 맙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우주의 실상 그대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진리와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중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즉, 중생을 속이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불설佛說은 여법如法한 말인 여어如語, 조금도 오류가 없는 진실한 말[眞實語]이요, 진리와 다르게 말씀하지 않는 불이어不異語, 우리 중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거나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誑語라 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천지 우주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필경에는 모두가 다 우주 본연의 도리인 불법佛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체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이나 또는 중생이 사는 주겁住劫이나, 파괴가 되는 괴겁壊劫이나 또는 파괴가 다 되어 버려서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아무것도 없는 공겁空劫이나, 이런 것도 그냥 그렁저렁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우주가 파괴되어 가는 괴겁의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못 막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도리 자체이기 때문에 막을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어떤 법이든지 간에 불법을 떠난 것은 모두가 다 종말終末이 바르게 좋은 쪽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파멸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因果의 도리입니다.

 

그런 증좌證佐191710월 혁명으로 러시아 볼세비키Bolsheviki가 나왔지마는 겨우 70여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탄압하고 우리 인간 정신의 존엄을 말살시키려 했어도 결국 지속을 못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참상을 여실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가? 그저 부자는 마음대로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빈익빈貧益貧이라, 더욱 더 가난해지는 이런 무차별 불평등의 사회는 그대로 지속할 것인가? 이것도 아무리 꿰매고 수정을 가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도리, 바로 불법佛法에 따라야만 진정한 사회주의 참다운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승가僧伽생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인간의 진정한 생활 표본입니다. 승가 생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생활 아니겠습니까. 무아라 하면 불교를 믿는 분도 , 본래는 무아가 아닌데 우리가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투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무아라는 말씀을 하셨겠지!’ 이렇게 천박히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로 무아입니다. 본래로 무아일 때는 또 필연적으로 무소유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신 부처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무아가 안 되고 무소유가 안 되면 허두에서 말씀드린 이른바 안심법문, 공부를 편안하게 하고 수행을 편안하게 하고 우리 생활도 편안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반야바라밀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다운 안심법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 ?-528) 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慧能 638-713)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선 시대 이른바 순선시대純禪時代라고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6조 이후의 선지식들 법문도 물론 참고로 많이 하여야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장 권위 있는 전거典據로 의지할 것은 뭐라 해도 삽삼조사卅三祖師인 부처님부터서 6조 혜능 스님까지의 법문을 가장 중요한 권위로 의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부터서 6조 혜능 스님까지 이루어진 선사상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심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을 꼭 명심해 두어야 내가 지금 하는 공부가 정말로 내 마음도 편안한 안심법문인가이렇게 자기 스스로 점검하고 제 말씀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조사어록祖師語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안심법문의 시초법문은 혜가(慧可 487~593) 스님과 달마 스님이 거량擧揚한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무아라고 생각할 때에 달마와 나와 둘이면 무아라고 할 수가 없고 석가와 나와 둘이면 무아라 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2조 혜가와 나와 둘이면 역시 무아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혜가 스님과 달마 스님의 거량도 역시 자기 문제로 우리가 수용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자기 문제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아실법實我實法이라 하여 내가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범부소견입니다. ‘라는 실다운 것도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하는 시비분별의 법도 원래는 없습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성자는 무아무법입니다.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문제나 자기 문제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어느 누가 강도를 하고 잔인무도한 살상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 문제와 내 문제가 관련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 미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애나 서독에서 태어나는 어린애나 중국에서 죽어가는 노인네도 역시 우리하고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을 폭설 중에 찾아가서 법문을 청했지마는 달마 스님이 돌아보지도 않자 자기 팔을 베어 바치고서 신표信標로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달마 스님이 신표를 받은 다음에야 돌아보았습니다. 왜 달마 스님 같은 자비스런 분이 혜가 스님이 눈 속에서 꼬박 밤을 새우는 데도 거들떠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달마 스님이 굉장히 잔인하고 인정이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불법佛法은 그런 소소한 인정으로는 얻을 수가 없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약득획보若得獲寶인댄 방하피낭放下皮嚢이라, 만약 마니보주 같은 보배를 얻으려고 할진댄 가죽 주머니 같은 이 몸뚱이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전식득지轉識得智, 우리 분별식分別識을 굴려 뒤집어 버려야 참다운 반야 지혜, 본래면목 자리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그냥 상대적인 여느 생각으로 해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하고 세속적인 이른바 속체俗體의 범주 내에서 속물근성으로 생활하다가는 무상 대도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 같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한 분이 아 저 혜가는 그대로 가만히 두면 자기 팔을 자르겠구나!’ 이런 것을 예상을 못했겠습니까. 공부 분상에서는 팔 하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팔 하나를 자르는 그 마음 태도가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치는 것을 상징합니다. 정말로 우리들은 어떠했는가? 우선 저도 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무던히 애는 쓴다고 했지마는 그래도 역시 부끄러운 마음, 한탄하는 마음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연 내가 공부할 때에 하찮은 이 몸뚱이를 몽땅 버리는 각오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할 때는 그랬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撃非遙, 범부를 넘어서 성자가 되는 그 길이 눈 깜짝할 동안 있는 것이고 절대로 멀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재수유悟在須臾어니 하번호수何煩皓首리오, 잠깐 동안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센머리 날 때까지 수고롭게 할 것인가?

 

혜가 스님이 달마스님한테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안심법문의 기연機緣 아니겠습니까. 의 기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심법문이 확실히 자기 것이 못 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불교 또는 대승불교 또는 조사선 도리, 이런 말 때문에 구속받을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말들은 과거 선지식들께서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버리지 못한 곳이 지금 우리 한국 불교 상황입니다.

 

다행이 우리 젊은 분들은 논리학도 공부하고 또는 철학이나 물리학도 다 공부한 분들이기 때문에 시대적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문제에 있어서 진리의 근본 도리, 근간根幹은 절대로 버릴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엽枝葉적인 문제는 꼭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혜가 스님이 제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달마 스님께서 그대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은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하였습니다. 혜가 스님도 40대가 넘도록 까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런저런 도리는 이론적으로는 대부분 다 알았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의 근기를 위해서 새삼스럽게 하신 말씀도 분명히 곁들여 있습니다. “제 마음을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 간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자취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면서도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지 않습니까. 클래식 음악이 좋다 또는 재즈 음악이 좋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소리 아니겠습니까. 얼굴이 잘나고 못나고 이것은 하나의 물질적인 색이 아니겠습니까. 색과 소리에 얽매이면 참다운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금강경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활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옷을 좀 잘 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잘 먹고 너무 잘 입고 너무 많이 놀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큰 병폐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은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장차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만 겁초劫初의 인간은 맨 처음에 성겁成劫이 이루어지고 주겁住劫이 되어서 광음천光音天으로부터 중생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광음천은 욕계처럼 물질적인, 오염된 세계가 아닌 광명세계光明世界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광음천 중생들은 몸이 광명신光明身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해서 우주를 다 비춰보고 천이통天耳通을 해서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을 해서 삼천대천세계를 마음대로 내왕하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외도의 신통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통묘지神通妙智도 바로 부처님 말씀입니다. 저는 부처님 말씀을 옮길 뿐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다고 하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그런 무한의 공덕장功徳藏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성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알다말고 자기 몸으로 하는 짓이 전부고 이렇게 되면 불법이 일체종지一切種智라는 부사의 한 공덕은 여법한 말씀이 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허두 말씀이 길어지면 시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우선 안심법문, 그저 마음 편안히 하는 법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자기 문중이나 절 때문에 애쓰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일체 만유가 평등무차별의 진여법계眞如法界인데 우리 중생들의 망정妄情으로 잘못 보고 그릇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