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모신 부처님은 아미타 부처님이십니다. 관세음보살님은 그 특징이 뭣인가 하면 이마에 가서,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그러한 모습이 관세음보살님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 이렇게 손을 드시는 이것을 가리켜서 인계라고 합니다. 인계는 하나의 표징인데 이렇게 드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무외시인이라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그 중생들한테 “그대는 관세음보살 나를 의지하면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 하는 그런 그 온전히 중생을 오로지 감싸고 중생을 보호하는 그런 하나의 표징인 이렇게 손을 드는 것이고, 또 한쪽 손을 아래로 해서 밖으로 향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여원인이라 여원인이라는 것은 줄 여與자 하고 원은 원할 원願자 말입니다. 그 중생 그대들이 나한테 바라는 것은 모두를 다 주겠노라 하는 이것은 하나의 인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불상을 보실 때에는 그렇게 의미 있게 보시며는 더욱 더 의의가 깊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드는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무외시인이라 중생의 두려움을 공포심을 다 제거해서 아늑한 부처님의 품안에 안는 그러한 하나의 표징인 것이고, 이렇게 손을 아래로 내려서 밖으로 내미는 것은 중생한테 모두를 다 아낌없이 어느 때든지 조금도 주저 없이 생명까지도 주겠다하는 그런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그렇게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법화경 품수가 28품이 있습니다. 스물여덟 품이 있는데 그 가운데 25품이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여러분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아시지요. 관음경이 즉 말하자면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관음경을 보면은 모두를 다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바라면 아들을 태어나게 해주고 딸을 바라면 딸을 태어나게 해주고 재산을 바라면 재산을 주고 하여튼 그, 얼핏 생각할 때는 너무나 속스럽게 중생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그걸 달라는 대로 주시면 부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모두를 우리 중생이 바라는 것을 주신다는 그런 보장을 하신다 말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그것이 좀 속스런 것도 같지마는 또는 그 부처님의 그 대자대비, 모든 하나부터 백까지 중생들을 위한다는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그런 깊은 자비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할 따름입니다. 제 말씀을 들으시고 나중에 관음경을 한 번 더 보십시오. 하여튼 이것저것 우리 뜻을 다 들어주신다는 거로 해서 관음경 뜻이 원만히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본뜻은 인생고를 없애기 위해서 믿지 않습니까. 중생이 고생 세계이기 때문에 그 인생고를 떠난다는 데 불교의 대 강령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 세상은 그 고생뿐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뭐 더러는 재미도 상당히 있고 뭣이 또 성취가 되면 그런 것도 재미가 지고, 또 가족을 구성하면은 내외분 사는 것이나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재미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을 하실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이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런 것도 모두가 다 고생이라 말입니다. 잠시간 안락스럽고 행복스러운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고생이라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안락스럽다는 그것이 고유한 그런 고정적인 안락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산다는 것 자체가 생로병사 아닙니까. 노병사라 우리가 태어날 때도 사실은 그 어머님께서 얼마나 고생고생하고 우리가 태어납니까. 생명을 걸고서 자식을 분만하신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낳을 때부터 고생스럽고 또는 낳기 전에 어머님 뱃속에서 태아가 얼마나 또 고생을 많이 합니까. 인간으로 어머님 태에 안 태어났으면 그런 고생이 없을 것인데 태 안에서 그 갑갑한데서 참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 않겠습니까. 낳을 때 고생이라 또 낳아 놓으면 그때그때 낳자마자 죽어간다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숨이란 것은 그야말로 소수어라, 적을 소少자 물 수水자
적은 물에 담긴 물에서 사는 곧 나날이 죽어가는, 물에서 사는 물고기와 똑 같은 우리 목숨이란 말입니다. 하루 살면 하루 산 만치 우리가 죽어 안 갑니까. 죽음이란 것은 결국 노소부정 아닙니까. 늙다고 해서 빨리 죽는 것도 아니고 젊다고 해서 꼭 나중에 죽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길이나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아까 말씀마따나 소수어少水魚라, 적은 물에 담긴 물고기나 같다 말입니다. 또는 도소양이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라 말입니다. 걸음걸음 죽음길이라 말입니다. 우리 인생길도 걸음걸음 지금 죽음길입니다. 아무리 잘 살려해도 결국은 죽어간다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 할 때에 우리 중생들은 허망한 것에 팔려서 그런 것을 깊이 못 느끼나 생각하면 생각해 볼수록 결국 그야말로 참 아! 인생이란 것이 허망한 그런 무상한 길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는 고생뿐이라 사실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속아서 안락스럽다, 행복스럽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 본질적으로는 사바세계는 인생고뿐인 것이지 안락은 없습니다. 재미스러운 것도 모두가 다 고苦가 근원돼서 순간 찰나 우리가 착각해서 안락스럽게 보일뿐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도 인생고를 떠나는데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제법문 같은 것도 온전히 인생고를 떠나는 그런 법문입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되겠지요.
오늘은 결제 날입니다. 이 결제라는 것이 공부한 사람들은 정말로 하여튼 피가 약동하고 말입니다. 보람 있고 또는 자기 신명을 내걸고서 공부 할 수 있는 감격스러운 그런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적어도 이 결제하고 그런 때는 자기 생활을 그야말로 참 재검토하고 매서운 그런 참회를 해야 됩니다. 내가 과연 내 인생을 최선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최선으로 산다는 것은 성자의 길 따라서 성자란 인생을 가장 바로 산 그런 표본적인 분들 아닙니까. 석가나 예수나 다 그렇습니다. 성자의 길이라는 것은 조금도 허투루 살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성자의 길을 표준으로 하고서 자기 생활을 우리가 재검토하고 반성해야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허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엉뚱하게 허방에 빠져버릴 수가 있다 말입니다.
허방의 한 가지는 암중, 암중선이라 암중 공부라 그 암중모색한다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선이란 것은 우리 본래,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깨닫는 것이 참나가 뭣인가 하는 참나를 깨치는 것이 참선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것도 방법이 있는 것인데 방법이 없이 그냥 덮어놓고서 공부한다 말입니다. 참선하는 방법도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그 선지식들이 무슨 문제의식을, 문제의식이 즉 말하자면 화둔데 화두를 주면 화두에다가 자기 온전히 혼신의 힘을 다해서 화두를 의심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도 있고 또 한 가지 방법은 그 묵조선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 따르면 본래가 부천데 새삼스럽게 의심할 것이 뭣이 있는가?
본래 부처니까 믿고서 가면 그만인데 새삼스럽게 의심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의심할 것이 뭐 있는가? 해서 잠자코 마음을 비추어보는 묵조선, 잠자는 묵黙자 비추다 묵조선黙照禪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자성선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말입니다. 우리 본성 그대로, 그대로 믿고 그대로 찾고 나가면 된다는 그것이 자성선自性禪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 세 가지 방법을 잘 기억을 해두십시오. 아까 말씀마따자 그 선지식들이나 선배들이 우리한테 어느 문제를 주면 문제에다 의심을 품고서 그야말로 자기 온 정력을 다해서 의심을 풀어가는 화두 공안선이라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그 의심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 들어보면 본래 부처라 그러는데 그 자리를 100% 믿고 나가서 정진하면 그만인 것이지 의심을 품을 필요가 뭐있는가 이런 것이 이른바 잠자는 묵黙자 비추어볼 조照 잠자코 자기의 본래마음을 비추어 본다 말입니다. 그것이 묵조선이고 또 한 가지는 자성선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이 자성이란 말씀을 여러분들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성이란 말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 그런가 하면 자성이란 것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이라 자성은 우리 본성 아닙니까. 자성이 우리 본성인데 우리 중생들은 지금 자기 본성을 잘 모릅니다. 내 본성은 내 마음이지 않는가 이렇게만 어렴풋이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성이 내 마음이면 내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내 마음은 깊이는 과연 얼마나 깊고 또 내 마음의 넓이는 얼마나 넓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좀 막연해지지 않습니까. 그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면 모르겠지마는 보이지도 않다 말입니다. 또 마음 깊이도 그 부방한 사람 옹졸한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좁습니까. 또 마음이 깊은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묵직하니 그 사람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도록 까지 마음 깊은 사람도 있다 말입니다.
한데 마음이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사람이 즉 말하자면 성인이라 말입니다. 이 마음은 그야말로 참 아주 신비로운 이 세상에서 신비롭고 불가사의하다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것도 많이 있지마는 가장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어찌 헤아릴 수 없다 말입니다. 자기 마음도 금방 남 좋아 했다가, 또 조건이 바꿔지면 금방 싫어했다가, 내외간도 같이 만날 때는 서로 당연히 좋아했으니까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또 무슨 여건이 생겨가지고 싫어지면 그때는 내외간도 헤어지고 더러는 죽이기도 한다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사람 마음이 참 그야말로 요물스럽다 말입니다. 참 요물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참 불여의하고 또는 복잡하고 불행하고 또 그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마는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요망스러운 결국은 마음 짓이라 말입니다. 마음 짓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의 마음이 얇아서 그래요. 마음이 얇으니까 마음 깊이를 좀 알면 모르겠지만 얇으니까 얇은 그대로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뭣이 그야말로 좋고, 얇은 마음에서는 꼭 자기 몸뚱이가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시야가 짧으니까 우선 가까운 지 몸뚱이만 자기라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나 과거 전생에는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과거는 이와 같은 몸이 있지를 않다 말입니다. 그 소박한 사람들은 과거도 똑같이 이런 몸이 있고 죽은 다음에 내생 가서도 이와 같은 몸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 이것은 금생에 받은 이 몸뚱이는 과거 전생에 업 따라서 금생에만 지금 받은 것입니다. 금생에만 받은 것이지 어디에도 똑같은 것이 없어요, 그것이. 내생 가더라도 금생에 지은 업이 과거 전생에 지은 업과 똑같아 가지고서 똑같은 몸을 받겠습니까. 내생가면 또 다른 몸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제할 때는 그런 거 저런 것을 깊게 좀 생각을 하셔야 되요. 사실 ‘나’라는 이것이 무엇일 것인가.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을 것인가. 마음 잘못 쓰면 아까도 말씀마따나 별스런 참 아주 요망스럽고 또는 사회적으로 불신풍조,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것을 야기를 시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 모르는 사람들은 범부여요. 범부고 사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 조금 과거 전생에 자기가 지은 바가 있어서 군수도 되고 도지사도 해먹고, 대통령도 해먹고 할란가 모르겠지마는 자기가 지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영혼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간의 참다운 진리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가치가 없어요, 그것이. 여러분들 무슨 선거가 있으면 여러 가지로 해서 경험을 많이 해보지 않으십니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헐뜯고 욕하고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꾸며서 중상모략하고 말입니다. 그런 추잡한 짓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것을. 그래가지고서 대통령되고 뭐되고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참사람이 돼야 됩니다. 참사람은 성인이라 말입니다. 참사람 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십시오. 참사람 되는 것이 인간의 가장 바른 코스라 말입니다. 참사람이 안 되면 그대로 말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고 해도 역시 꼭 참사람이 되고야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 마음의 근원자리, 마음의 근원자리는 바로 참사람 자리라 말입니다. 마음 근원자리는 바로 성자의 마음자리입니다. 우리가 잘못 배우고 잘못 버릇 붙여서 금생에 이상하게 돼서 마음을 그렇게 좁고 옹졸하고 얕게 쓰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의 깊이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 깊이가 한도 끝도 없어요. 물질 같은 것은 모양이 있어 가지고서 깊다 얕다 하겠지만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어놔서 깊이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의 깊이입니다. 그 마음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마음은 아까 명상시간 때 입정 시간 때 여러분들이 들으신바와 같이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바로 허공입니다. 한도 끝도 없다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고 휑하니 크기만 크고 내용이 부실하기만 하면 별 것도 아니겠지요. 그 한도 끝도 없는 영원의 생명 그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이요, 하나님이요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이 저 어디 가서 별도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한도 끝도 없는 생명자리가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라 말입니다. 요한 복음서를 보나 마태 복음서를 보나 다 그렇게 하나님을 말씀해 있어요.
우리 중생들이 잘 못 알아먹으니까 중생들보고 그대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러면 중생들이 알아먹겠습니까. 못 알아먹을 테니까 이제 그래저래 방편을 써서 그런 것이지 그분들의 본뜻은 아까 말씀마따나 그 한도 끝도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참다운 부처님이요, 참다운 하느님자리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또는 경을 보고 그렇게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이뭣고 또 무 무 할 것이 아니라 그 도인들이나 부처님의 본뜻은 그 마음자리 그대로 바로 깨달으란 것입니다.
달마스님도 그러고 육조 혜능스님도 그러고 다 그래요. 그니까 달마스님께서도 불입문자라 달마스님 때 불입문자라, 달마스님께서 문자를 절대로 배우지 마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문자의 뜻에 글의 뜻에 집착을 말고서 바로 근본 그 마음자리를 깨달으란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이 리입행입이라. 리입행입이란 말씀이 달마스님 법문의 요체입니다. 후대에는 여러 가지 고증을 밟아서 그전에는 달마스님이 뭣을 냈다 뭣을 냈다 그런 것이 많이 나왔어요. 그러나 후세에 사가들이 그것을 고증을 밟아 가지고서 다른 것은 달마스님한테 가탁해서 그렇게 붙인 것이고, 달마스님 참다운 것은 리입행입이라 이것만 달마스님이 참다웁게 말씀한 것이다. 이래서 리입행입이 있는 것인데, 리입은 뭣인가 하면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이치로 해서 먼저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덮어놓고 우리 보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문자는 다 덮어놓고서 참선만하고 벽만 바라보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치로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4조 도신스님도 그래요. 도신스님도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여실하게 반야바라밀을 공부하고 들어가라고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그야말로 참 어디까지나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서구 지방의 기독교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기독교 여러 가지 신학자들 가운데도 이론과 실천, 이론과 실천과에 대해서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가. 실천에 중점을 둘 것인가 이론에 중점을 둘 것인가 말입니다. 또는 철학과 종교라 철학과 종교. 여러분들이 어렵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철학이란 것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도리를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 철학이 되지 않겠습니까. 종교는 그 자리를 우리가 생명으로 바로 믿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역점을 더 둔 신학자도 있고 또는 철학에다 역점을 더 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화를 줘야 한다 말입니다. 이론적인 면은 철학 실천적인 면은 종교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그러면 이론적으론 불성은 자성이다, 또는 불성이다, 도다, 뭐다 여러 가지로 그렇게 말씀이 되겠지요. 그러나 자성이다 불성이다 또는 진여다 이런 것은 이제 이론인데 거기에 그쳐버리면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 말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 그것은 생명을 하나의 표현하는 그런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그것이 생생한 생명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아닙니까.
아무리 우리가 교학을 많이 배워서 정말 교학적으로 해서 불교학자가 되고 뭣이 된다 하더라도 그 순수한마음으로 불교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이제 참다운 공부가 되고 성인이 되고 한다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냥 이론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은 결국은 그야말로 참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내 마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은 쉽겠지요. 그러나 이론적으로 해서는 그것이 별로 참 맛이 없다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자성미타라 내 생생한 생명의 본체가 생명이 바로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우리가 간절히 믿고서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우리가 부처가 돼간다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가 보통 내 마음이라는 것은 좁지마는 마음의 바탕은 마음의 근원은 내내야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 말입니다. 마음의 넓이도 천지우주를 그 속에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자님들 잘 생각하십시오. 모양이 없다는 것도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모양이 있어 놓으면 그것이 한계가 있게 안 되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속에 딱 얽매여 있다 말입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그러나 모양이 없다는 것은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지를 않습니다. 한도 끝도 없다 말입니다.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또는 넓이도 한도 끝도 없고 이른바 허공과 더불어서 같다 말입니다. 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 마음이나 다 그래요 모두가 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 내 마음은 좁지마는 본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은 욕도 잘하고 더러 나쁜 짓 많이 하고 그러니까 본래대로 저사람 마음은 좁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똑 같습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마음은 똑 같습니다. 모양이 없어놔서 그때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모양이 있으면 비교가 되겠지마는 모양이 없는 것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물질이 아닌데.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내가 내 마음이 있어 살아 있듯이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본질이라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깊고 넓고 한도 끝도 없는 그러면서도 만덕을 갖춘 그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그 부처님 팔만사천법문이 그렇게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셨지마는 모두가 다 마음자리를 풀이한 것이어요. 마음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공덕이 많은 것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떠나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말씀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문 가운데도 그냥 직통으로 다른 것은 그냥, 방편 가설은 그냥 쉬어 놓고서 그냥 마음만 오로지 공부해서 깨닫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생각하실 때는 ‘스님네는 복이 많아서 한 철이고 두 철이고 참선 공부를 하겠지만 우리 같은 재가 불자님들은 그렇게 안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오. 또 스님네들 가운데서도 ‘내가 사회봉사도 하고 내가 사회에 진 빚도 많은데, 부모님한테 진 빚도 많고 모두가 다 일반 사람들한테 진 빚이 많은데 선방에 들어앉아 공부나 하면 봉사나 그런 것도 전혀 못하니까 빚만 더욱 더 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절대로 말으십시오.
어째 그런가 하면 가령 선방에서 우리가 공부한다 합시다. 선방에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선방 밖에 있는 저 사람이나 선방 안에 있는 나나 마음자리는 다 똑같다 말입니다. 똑같습니다. 한마음입니다. 더 더 확실히 말씀을 하면 우주 전체가 순수한 하나의 마음이라 말입니다. 화엄경 도리나 법화경 도리다 다 그런 도리입니다. 우주 전체가 모두가 다 한마음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불교 말로 해서 일체유심조라. 그 우주 전체가 모두 다 한마음 덩어리라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마음 아닌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사실은 유심론입니다.
물질이 분명히 있는데 명명백백히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모두가 다 마음뿐인가. 영가 현각대사가 한 말씀이 있어요.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라 꿈속에서 보니까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다 있지마는 각후공공무대천이라 깨달은 뒤에 보니까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天이라 천지우주가 다 비어있다 말입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그 물질이란 찌꺼기가 사실은 본래로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심심미묘합니다. 우리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라는 것은 우리 소박한 상식으로는 다 알 수가 없어요. 눈에 안 보이는 그런 생명자체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그런 존재를 다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일부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눈에 보이는 존재는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 되는 것이지 사실은 없다 말입니다. 왜 없는 것인가? 항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착각 될 뿐이라 말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그렇게 이른바 제법이 공입니다. 다 공이란 말입니다.
공부할 때에 몸이 찌뿌듯하고 몸이 거북하고 몸에 무게가 생기고 그런 때는 이 몸뚱이 본래로 다 비어있다, 본래로 다 비어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 50킬로 60킬로 무게 나가는 그 몸뚱이가 왜 비어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렇게도 의심을 품으시겠지요. 이 업장 많은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60킬로 또는 70킬로 하는 중력을 느끼지마는 도를 통한 신통을 할 수 있는 분들은 그렇게 느끼지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착각으로 해서 그런 무게를 느끼는 것이지, 성자들은 이른바 여러분들 삼명육통이란 말씀을 가끔 들으시지 않습니까. 삼명육통은 자기 몸도 자기 맘대로 하는 신통이 들어있다 말입니다. 정말로 몸이 이것이 꽝꽝한 물질이어서 어떻게 다르게 변동할 수도 없고 또는 무게가 50킬로 60킬로가 되면 하늘로 떠서 올라가겠습니까. 실지로는 이런 것이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신통하는 분들은 본래 없는 자리를 체험하니까 신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욕심만 떠나 버리면 그냥 발이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신통도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 나쁜 버릇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버릇, 또는 진심을 어리석음을 내는 버릇, 그런 버릇 때문에 우리가 무게를 느끼고 꼭 한계 내에서 딱하게 구속당해 산다 말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더라도 암중모색, 덮어놓고 그냥 그렇게 애쓰고 화두를 덮어놓고 의심하면 그때는 얼마 안 가면 그냥 상기가 됩니다. 기가 올라가놓으면 잘 못 고쳐요. 화두를 놔버려야지 안 놓으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두를 드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에 화두를 통해서 그 의심이 없는 자리를 빨리 우리가 느껴야 되요. 이른바 화두를 빨리 타파해야 됩니다. 화두라는 것은 백날 그냥 의심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빨리 타파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자성자리, 우리 불성자리를 빨리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달마스님이나 육조 혜능스님이나 또 마조 도일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그런 쟁쟁한 조사에 있어서는 화두라는 것이 없어요. 저 뒤에 송나라 때 사람들 근기가 약하니까 임시로 결국은 진여불성 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화두가 생겨나온 것이지 그게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마따나 그 청정무비한 본래 진여불성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그 진여불성이 뭣인가 그 근원을 의심해야지, 상대적인 문제 상을 가지고서 시야비야 의심하면 한도 끝도 없이 마음만 괴롭고 그냥 상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저런 도리를 모르고서 닦는 것이 이른바 암중선 이어요. 암중모색 하는 것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문자선이라 경을 좀 많이 배워서 알기는 제법 안다 말입니다. 근데 아는 것을 백날 따져 봐도 우리 자성 우리 불성이 맑아지지 않습니다. 갈등만 생기지 말입니다. 그 니체 철학 또는 스피노자 철학, 칸트 철학, 헤겔 철학 그런 철학도 얼마나 많습니까. 위대한 이름 있는 한 철학자의 한 체계만 다 터득을 하는데 몇 십 년 걸립니다. 또 알아본댔자 그걸로 해서 인생문제 해결이 안돼요.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뭣인가? 인생과 우주의 근원이 뭣인가? 이런 것은 도저히 그 가운데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팔만장경을 그야말로 참 통달해버린다 하더라도 그거로만 해서 우리공부가 참선이 깊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문자만 배우고 문자로만 따지는 그것이 이른바 문자선 그래요. 참다운 선법이 그도 아니지요. 아까 암중모색하는 암중선 마냥으로.
또 한 가지는 야호선이라, 야호라는 것은 여우입니다. 여우란 놈은 꾀가 많다하지 않습니까. 안 보고도 봤다하고 또는 어느 만치 공부가 안 되어갖고도 공부를 내가 했다고 그러고. 자기 스스로 어느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경계에 이르렀다, 그런 즉 말하자면 미증을 증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하고 또는 미오迷悟를 오悟로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그런 식의 즉 말하자면 거짓 참선이 야호선입니다. 들 야野자 여우 호狐자 여우란 놈이 꾀가 있어가지고 거짓부리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암중모색하는 그것과 또는 문자로만 따지는 문자선과 또는 미처 증명을 못하고 증명했다 하는 못 깨닫고 깨달았다하는 세 가지가 참선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병폐입니다.
그래서 여러 불자님들께서는 선방에서 공부하는 분들도 사회봉사를 내가 못 하고 빚만 지고 있지 않는가. 부모님한테나 일반 사회인들한테나 공연히 빚만 지고 빚만 누적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으로 자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제가 마음이라는 것은 한계가 없이 하나의 마음이라 말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마음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마음이 모양이 있고 이것이 물질 같으면 한계가 있겠지요, 너 마음 내 마음 다르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물질이 아니라는 것은 비교할 수 가 없는 거 아닙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가 안 됩니다. 모양이 있어야 비교가 되는 것이지. 따라서 네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우리 스스로 업을 좀 더 짓고 덜 짓고 해서 우리가 구분하는 것이지 마음 자체는 구분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또는 우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또는 해나 달이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모양이 산이고 모양이 물인 것이지 그런 것의 순수 에너지 순수한 생명은 똑같이 마음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일체유심조 아닙니까. 불교는 유심론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라는 생각을 항시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뿐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 마음, 개는 개 마음, 산은 산 마음, 해는 해 마음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산이 있으면 산 마음은 산신이고, 물이 있으면 물 마음은 용왕이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주가 오직 끝도 갓도 없이 광대한 마음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과 내 마음과, 내 마음을 적다고 말고 그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석가모니 마음과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아서 한도 끝도 없는 우주 마음을 그대로 깨달아서 간직하신 분이고, 우리 중생들은 깨닫지 못 해서 꼭 내 마음도 내 몸뚱이 좁은 내 몸뚱이 뇌나 심장이나 어디 가서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마음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라 놔서 우주 마음 내 마음 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우주가 오직 마음뿐이라 말입니다.
우주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선방에 앉아서 마음을 닦아도 바로 우주를 닦는 것입니다. 우주를 정화시킨다 말입니다. 또는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나는 선방에 앉을 복도 못 되고 내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직업도 가져야 되고 그러니까 나는 참선을 못 하겠구나’ 이렇게 또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마음공부라는 것은 어느 때 어디에서나 다 할 수 가 있다 말입니다. 선방에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본바탕을 떠나서 덮어놓고서 의심만 한다던가, 그와 같이 암중모색만 한다던가 또는 문자로만 따져서 배운 것만 이렇게 저렇게 풀이하고 따지고 있다던가 그러면은 선방에서 공부하는 가치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상기병만 돼가지고 평생 머리가 뜨거워서 고생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속가에 여러분들이 계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옆에 사람이나 내 마음이나 부처님 아닌가! 사실은 다 부처님인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변질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겉에 허상이 못나게 보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구성한 요소는 다 마음입니다. 우리 몸뚱이라는 것이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원소로 안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다 그런 걸로 돼있다 말입니다. 그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전자 ,양성자, 그런 것이 원자가 됐다 말입니다.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현대 과학이 측정을 못해요.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상황에 따라서 마이너스 플러스해서 전자 양자 정하는 것이지 그 정밀한 것을 측정을 못합니다. 현대 과학을 배우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 미세한데 가서는 현대 과학도 정밀하게 측정을 못합니다. 정확한 위치도 정확한 운동 상황도 측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전자고 양자고 그런 것은 하나의 통계적으로 또는 확률적으로 어떻게 진동하니까 마이너스 플러스, 마이너스 전결되면 그때는 전자고, 플러스 전결되면 양자고 그러는 것이지 고유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에서는 미세한데 이르러서는 어떻게 측정을 못합니다. 단지 그 우주 에너지 하나의 진동일 뿐이다. 이렇게만 안다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 에너지는 무엇인가 현대 과학으로서는 알 턱이 없습니다. 왜 알 턱이 없는가 하면 그 에너지의 실상, 에너지의 본래 생명은 물질이 아니라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현대과학이 자연과학이 어떻게 측정하겠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물질만을 현대 과학은 측정을 합니다. 물질이 아니면 측정을 못합니다. 그러니 백날 애써 봐도 더 이상은 못 들어간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의 정체, 물질의 정체는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모두 마음뿐이라 말입니다. 생명뿐입니다. 우주는 바로 생명뿐입니다.
우주가 생명뿐이라는 것이 내내야 부처님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이 저 높은 하늘에 가 계신다. 애쓰고 내가 부르면 타협적으로 내가 부른 만치는 공덕이 되겠지’ 공덕이 되지요 공덕이 되나 그 공덕은 적은 공덕입니다. 큰 공덕은 못됩니다. 큰 공덕은 어떤 공덕이 돼야 큰 공덕이 될 것인가? 아미타불과 나와 둘이 아니라 말입니다. 둘이 아닌 것인데 우리가 그 관계를 잘 모르니까 둘이라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우주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마음자리인데 우리 스스로가 국한을 세우고 한계를 세우는 것이지 본래의 자리에서는 다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이른바 실상관입니다.
실상관이라 이른바 실상염불이라 말입니다. 염불도 우주 생긴 대로 우주의 본래모습 생긴 대로 염불해야 그래야 실상염불입니다. 실상염불하면 그때는 염불선이 되어 버려요. 기왕이면 우리가 염불 하더라도 염불과 참선이 하나가 되는 염불 하시고 싶으시겠지요. 염불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 우주 생긴 그대로 인정하고서 공부하면 그것이 실상염불이 됩니다. 그러면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우리가 가령 기독교를 믿어서 ‘내가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와 같은 선이 세상에 상당히 유행하고 있는데 참선도 좀 했으면 되겠다.’ 이렇게 마음먹는 사람은 그렇게도 할 수 가 있습니다. 오! 주여 하나님 하면서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오! 주여 하면서도 역시 참선을 합니다. 우주의 실상을 그대로 관조를 하니까 말입니다.
사실은 그리스의 옛날부터 위대한 성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에다 우리 마음의 초점을 맞추었어요. 플라톤 이데아라던가 또는 플로티노스의 소위 일자라던가 일자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자리 아닙니까. 위대한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또는 칸트의 물 자체라던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이다 저것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현상적으로 헤아리는 것이지 참다운 존재 자체가 아니라 말입니다. 존재 자체라는 것은 우리 중생은 보지를 못합니다. 시각이 짧아서 말입니다. 성자가 돼야 비로소 참다운 존재의 실상을 훤히 느낀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공부하시기 위해서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선방에서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어디서 언제 공부를 하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의 자리, 본래 생명자리를 안 놓치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참선 공부입니다. 선방에 있다하더라도 본래의 자리를 놓쳐버리면 그것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못 된다 말입니다. 어느 처소, 어느 모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주인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선방에서 내가 내 공부만 하면서 빚을 진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 왜 그런가 하면 우주가 하나의 마음인지라 토굴속에서 혼자 공부한다하더라도 마음 닦고 있으면 그때는 우주를 정화시킨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우주를 정화시키는데 어떻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재가 불자님들이 집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 마음자리, 보는 것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아까 보리방편문에 내외생멸상의 무수중생의 무상제행을 미타의 일대 행상으로 사유관찰할지니라.
이것이나 저것이나 물이 흘러가는 것이나 바람 부는 것이나 모두가 다 아미타불의 즉 말하자면 하나의 행동모습이라 말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님 모습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그것이 훌륭한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느 처소, 어느 상황에서 공부해야만이 공부가 잘 된다 그것은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깊은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불자님들 비록 집안에서 계신다고 하더라도 깊은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역시 고요한 처소에서 오로지 일주일이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또는 나아가서 할 수 있으면 3개월 동안이나 그렇게 한 번씩 해보셔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마음공덕을 제대로 이른바 득력이라 힘을 얻어서 깨달아서 체험할 수 있다 말입니다. 세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너무나 장애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삼매는 못 듭니다. 삼매는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든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이 하나의 처소에 딱 모아져서 흔들리지 않아야 삼매라 말입니다. 그렇게 들어가야 참다운 불성, 진여불성을 스스로 깨달아버린다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한테 들어있는 무량공덕 상주부동하고 영생불멸하고 또는 만덕을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스스로 수행에 쓴다 말입니다. 삼명육통 같은 것도 마찬가지여요. 지금 이 세상에 여러 가지로 신통묘기를 부릴 수 있는 그런 도인들이 별로 안 보이는 것이 뭣인가 하면 깊은 삼매에 잘 못 든다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소란스럽고 또는 근기가 약해서
오랫동안 잘 참아야 할 것인데, 지금부터 150년 전에 가신 인도의 라마 크리슈티나 그 분은 아깝게도 쉰둘에 가셨습니다. 그 양반은 12년 동안 세상을 떠나서 그냥 산에 가서 오로지 그야말로 참 삼매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참다운 성품 아까 말씀드린 불성, 자성, 우주의 참다운 성품과 하나가 딱 돼버렸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통도 하고 우주를 훤히 내다보는 천안통이 생기고 한다 말입니다. 그 분은 학문은 전혀 안 배운 분입니다. 학문은 전혀 안 배운 분이나 비파카난다로 자기 제자가 학문의 체계를 다 세웠어요.
그 이 뿐만 아니라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삼매에 들어야 신통묘기를 부릴 수 있는 그 법성, 우주의 참다운 불성과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같이 참선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3개월 동안 한다고 하면 한 1주일 동안만은 용맹정진이라 밤낮으로 안자고 안 눕고 공부를 하는 기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가끔은 더러 그런 기회를 만드셔야 되요. 그저 부처님 가르침 믿고 마음 편하게 모두가 부처니까 좋지 않는가. 그도 좋지요 그러나 그걸로 해서는 힘을 얻지를 못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안 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아무 때 되도 부처가 되어야 돼요. 기왕 될 바에는 금생에 최선을 다해서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마무리해서, 여러분들 먼 길 가시려면 너무 늦으면 곤란스럽고, 저도 서울이나 한 번씩 갔다 오면 티를 냅니다. 먼데서 오시는 생각을 하면 저도 참 마음으로 굉장히 미안하고 답답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많은 말씀을 않겠습니다마는 그 부처님 공부하실 때에 꼭 일상삼매라 일상삼매라는 것을 기억을 해두십시오. 일상삼매는 한 일一자 서로 상相자 모두가 다 하나의 실상이라 말입니다.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실상이라 말입니다. 그게 일상삼매다. 어느 도인들이나 그것에 대한 철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주의 실상을 안 놓치고서 우주가 참말로 우리 중생이 보듯이 천차만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하나의 실상이기 때문에 실상에다 마음을 두고서 마음이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고, 그 다음엔 일행삼매라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행삼매라.
일행삼매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간단이 없이 사이가 없이 그대로 지속 시킨다 말입니다.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란 말씀이 여섯 군데나 있어요. 육조단경 그 마지막 부촉품, 부촉품이란 것은 결론 같은 경 아닙니까. 부촉품에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 부처님의 종종무량의 법을 통달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준할 지니라.”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제가 여태까지 말씀 드린 것도 모두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역설하고자 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뿐만 아니라 4조 도신스님, 달마스님도 마찬가지고 다 그렇습니다마는 구체적으로 일일이 제가 다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릴 수는 없으나 아무튼 어느 도인들이나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는 마명스님이나 용수보살이나 또는 달마대사나 모두가 법문의 요지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는 다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라 말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 마음을 잠시간 둬도 그냥 다르게 생각하면 흩어지겠지요. 그런 마음을 끊임이 없이 지속시킨다는 이른바 염념상속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을 시킨다 말입니다. 그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꼭 명심하셔서 참선 선방에서 공부하시든지 또는 세속에 계시든지 될수록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많이 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주무실 때도 그렇게 하시고 주무시면 주무시는 그 동안에 공부가 돼갑니다. 주무시는 그 동안에 공부가 잘 안 되면 막 일어나자마자 눈뜨자마자 다시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아차 하고 챙겨야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날그날 우리 생명자체가 금생에 있는 동안에 꼭 한사코 그렇게 하시면 정말로 빨리는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임종 때는 틀림없이 훤히 확철대오를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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