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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2000년 2월 28일 금타 대화상 열반재일 법문


 

2000년2월28일 금타대화상 열반재일법문.pdf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반갑습니다. 마치 3040년 오랜 세월을 두고 못 만나고 있다가 그렇게 오랜 세월 끝에 비로소 만나는 그러한 반가움과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비단 금생뿐만이 아니라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서 과거 여러 생에도 만나고 또 만나고 했을 것이고 또는 미래에도 역시 앞으로 두고두고 윤회하는 동안 같이 만나고 사귀고 서로 친밀히 공부하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당에는 똑같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로 가서 영생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극락세계는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가상적인 가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실존하는 실지로 존재하는 우리의 참다운 고향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도 제가불자나 출가불자나 간에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극락세계를 단순히 우리의 그런 하나의 희망적인 이상적인 세계로 생각은 하고 있지 실지로 존재하는 우리 고향이라는 것은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극락세계가 우리 인간의 가시적인 눈으로 해서 볼 수 없는 세계일뿐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우리네 근래 큰스님들이 그런 이른바 정토법문 나무아미타불이나 극락세계나 그런 법문에 대해서 조금 인색했다 말입니다. 참선해서 활연대오 해서 성불한다 그런 말씀은 많이 하시는데 정작 우리 인간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당에 우리가 영원히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고향은 어디인가? 이런 법문은 별로 많이 안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한테는 굉장히 긴박하고도 소중한 문제가 나무아미타불과 극락세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가장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200부 이상 되는 그런 경전에서 극락세계하고 나무아미타불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재경소찬다제미타在經所讚多諸彌陀라 재경소찬다제미타在經所讚多諸彌陀라 그 많은 경전 가운데서 찬탄을 제일 많이 하신 것이 역시 극락세계와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그러나 너무 쉽다보니까 사람들이 좀 어렵고 깐깐하고 그래야 깊이 있는 그런 고등법문이고 이렇게 평이平易하고 쉬운 법문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 우리 중생들을 이끌기 위한 하나의 방편법문이겠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이라 하는 것은 100% 믿어야 신앙이 되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본다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믿지 않고서 신앙이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를 표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어느 신앙이든지 간에 신앙 그러면은 우리 마음이 거기에 온전히 의지가 돼있고 또는 환희심과 갈앙심과 그런 그리움이 충만 되어 있어야 참다운 신앙이 되고 우리 힘이 된다 말입니다.

 

우리인생이 대체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문제는 항시 실존적으로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 제대로 해답을 못 내리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부여附與의 본래적인 뜻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극락세계에서 와서 도로 극락세계로 지금 돌아간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하나의 극락세계에서 와서 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업보로 해서 우리가 윤회고輪廻苦를 받습니다. 다행히 사람 같은 그런 선근을 심어서 사람도 됐지마는 조금 잘못 살면 그때는 또 짐승으로 우리가 쭉 전락된다 말입니다. 이런 것도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도 역시 지금 현재 개나 소나 돼지인 것이지 과거 전생에 소급해 올라가면 똑같이 더러는 사람도 됐고, 더러는 천상도 됐고, 더 올라가서 그 먼(?)까지 올라가면 내내야 극락세계의 하나의 정중이라 말입니다.

 

우리는 청정이란 맑을 정자 무리 중자 정중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는 아직 정중당이 없을 란가 모르겠지마는 그 전에 태안사에는 정중당이 있었습니다. 정중당, 정중은 무엇인가 하면 극락세계에서 와서 도로 극락세계로 돌아가는 본 고향으로 가는 그런 대중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극락세계 가는 법은 어떤 것인가. 이 법을 가리켜서 정업 그래요 정업. 청정할 맑을 정, 업 업자 정업 그럽니다. 정업이라. 따라서 우리가 극락세계로 가기위해서는 정업을 닦아야한다 말입니다 정업을. 정업을 닦아야지 그러지 않고서 중생업이나 삿된 업을 닦으면 그때는 삿된 업대로 해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육도 윤회라 윤회고를 면치를 못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윤회 그러면 이것도 역시 일반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뭐 어떻게 윤회가 될 것인가? 이것도 하나의 방편법문이 아닌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고서 틀림없이 개 같은 마음을 가지면 개 되는 것이고, 소 같은 마음을 가지면 소가 되는 것이고, 또 십선업을 닦아서 열 가지 선근을 닦으면 틀림없이 천상 갑니다. 천상가고, 사람으로 태어나면 대통령이나 왕자나 또는 큰 재벌이 된다 말입니다. 다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이런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은 금타 대화상의 열반재입니다. 금타 대화상이 살아계시면 올해 102살입니다. 따라서 장수하시는 분 같으면 지금까지도 살아계실 수가 있습니다. 이 금타 대화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로의 그런 분이 아니라 훨썩 더 위대한 분입니다. 저는 제 은사스님이요 법사 스님이어서 위대하다고 제가 과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반 법이 그 양반이 일반 중생한테 끼친 법이 위대하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왜 위대한가! 가장 궁극적인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이 불교 아닙니까. 우리가 아전인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는 어느 철학보다도 어느 종교보다도 어느 과학보다도 보다 더 심오하고 광범위한 그런 진리가 거기에 다 원만히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에 있어서는 그런 법을 제대로 다 알기가 어렵다 말입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일반사람들은 상대유한적인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따지는 것인데 우리 모든 존재라는 것은 눈에 안 보이게 불가시적인 미시적인 경계가 많이 있다 말입니다. 또는 형이상학이라 형체가 아닌 그 근원적인 또 법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근원적인 본체론적으로 우리가 이제 볼 수 없는 우주의 그 본질 문제 그런 문제가 들어있고, 아까 말씀마따나 현미경을 놓고서 비로소 가정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우주의 즉 말하자면 에너지문제 그런 문제도 있다 말입니다.

 

그런 문제 저런 문제를 우리 중생들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금타 대화상께서는 이 불법, 부처님의 그런 진리에 비추어서 현대 과학도 다 그 속에다 집어넣어 가지고서 다 그래가지고서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있는 그런 범위 내에서 우리한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수행 할 때는 어떠한 법이 가장 수승하고 가장 깊고 또는 하기 좋은가. 또는 현대 그 과학은 어떻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가. 또는 현대 우주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의문을 그 짤막한 법문 가운데 지금 나와 있는 책은 금강심론, 금강심론은 원고만 남긴 것을 우리가 이제 금강심론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한 책을 만들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다 들어있는데, 사람들은 책 한 권속에 뭣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다른 스님들은 한 몇 십 권도 하고, 또는 석영무스님 같은 분은 100권도 넘지 않는가. 그렇게 양적으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도 보통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금타 대화상님께서 금강심론에 수록된 한 권의 내용만 말씀하셨지마는 그 가운데는 꼭 현대인들이 필요한 철학적인 문제 또는 종교적인 문제 또는 다른 종교 여러 가지 그런 종교가 많이 있지마는 그런 종교와의 관계성 이런 문제가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과학만능시대이기 때문에 우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왔는가? 또는 우리 눈으로 보이는 이 물질하고 우리 정신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것을 꼭 알아야 할 때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가에서 큰스님들이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한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과거는 그런 과학이 없으니까 별로 많이 안했다 하더라도 현재는 과학만능시대기 때문에 과학만능시대에

있어서 적어도 과학에 대해서 아주 확실한 근거가 되는 말씀을 해야 될 것인데 아무도 하는 분이 없단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님께서 비로소 현대 과학에 대해서 확실한 말씀을 하셨고, 또는 이 우주가 어떠한 것인가 대체로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겨나서 언제 소멸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현재 과학도가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가설을 많이 내놨습니다. 이런 문제도 금타 대화상님께서는 불교의 그 도리 수치, 불교라는 그런 진리 수치를 가지고서 명확히 말씀했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워서 잘 보려고도 않습니다. 어려워서 보려고 않는 것은 보려고 않는 사람 잘못인 것이고 하나의 그야말로 참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업적을 다 내 놓으셨다 말입니다.

 

지금 아까 보리방편문을 여러분들이 같이 외셨습니다. 보리방편문도 금타 대화상께서 우리의 수행방편으로 우리 중생의 성불하는 지름길로 내 놓으셨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금타 대화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정통조사, 정통조사라는 것은 보통 말하기를 그 중국의 육조스님까지 서른 세분 33조사 그럽니다. 서른 세분을 정통조사라고 합니다. 한데 육조 혜능스님도 보리방편문과 똑같은, 내용은 똑같은 말씀을 그 양반이 법상에 올라가서 맨 처음 하신 법문이 보리방편문 내용과 같은 법문이라 말입니다.

 

몇 말씀으로 말씀을 드리면 보리방편문 내용은 이것은 일체 삼신 자성불이라. 우리 불교는 불성이나 불심을 떠나서 불교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심은 우리 부처마음이라 말입니다. 불성은 우주의 본성이니까 내내야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라고 얘기 할 때는 부처 불자 마음 심자 불심 그러는 것이고, 우주의 본성이라고 우리가 얘기 할 때는 그때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 그런다 말입니다. 한데 불교는 그와 같이 우주의 본성인 동시에 우리 마음의 그런 본 성품인 불심 불성을 깨달아서 성불하는 가르침이라 말입니다. 아무리 어렵게 얘기 하고 별 말씀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그 본뜻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한테 원래 갖추고 있고 또는 우주 만유의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이 돼있는 불심 불성을 깨달아서 우리가 성불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보리방편문은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말씀했다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금타 대화상만 말씀했으면 우리가 그럴 수 있겠구나, 훌륭한 법문 이겠구나 그렇게만 생각할란가 모르겠지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육조 스님께서 부처님의 정통을 계승하고 계승하고 이어오고 이어서 그 33조사 끄트머리 육조스님께서도 똑같은 법문 했다 말입니다. 저는 그걸 보고 제가 굉장히 경탄을 했습니다. 육조스님께서도 그 법문의 맨 처음 허두에 여러분들이 이 혜능, 혜능스님이 육조스님인데 이 혜능의 입을 따라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세 번씩 해라. 또 그 다음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세 번씩 해라. 또 그 다음에는 천백억화신불을 세 번씩 해라. 이렇게 해서 그대들로 하여금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 스스로의 스스로의 불성을 깨닫게 하리라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리고 달마스님 때부터 쭉 이렇게 내려오면서 2조 혜가스님, 3조 승찬스님, 4조 도신스님, 5조 홍인스님 모두 이렇게 내려오면서 하신 법문이 약간 표현만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지 결국은 똑같이 우리 마음이 바로, 바로 우리 마음의 본래 본래면목 본 성품이 바로 부처고 바로 불심이고 일체 존재의 근본자리 근본성품이 바로 불성이다 이런 말씀을 한 것인데 우리가 본래, 본래 불성이고 본래 불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당에는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가 돼야한다 말입니다. 부처가 안 되고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성품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종당에는 꼭 부처가 돼야 되고 또는 부처가 됨과 동시에 또 극락세계에 꼭 우리 가야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 간다는 말과 부처가 된다는 말은 절대로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말이 아닙니다.

 

불심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 머무는 처소가 이른바 극락세계라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는 극락세계하면 꼭 무슨 외딴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는 사실 극락세계에서 와서 극락세계로 가는 하나의 지금 나그네길입니다. 얼마나 헤맬 것인가. 나그네길 에서 어떻게 공부해야 쓸것인가. 우리 고향자리 극락세계를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사실은 생사대사라 가장 중요한 문제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감투를 쓰고 돈을 많이 벌고 또는 명예를 얻고 이런 것도 우리 인간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지마는 이런 것은 이것은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의 본래면목자리 불성을 깨닫고서 극락세계에 가는 길 즉 성불하는 길이라 말입니다. 성불하는 이것이 대사고 다른 것은 다 자자란 조그마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일 때문에 우리가 우리 생명을 낭비 하다보면 윤회고를 사람으로 잘못 살아서 개로 소로 돼지로 조금 잘살아서 천상으로 우리가 이른바 윤회한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성불한다고 하면 그것은 출가한 스님네나 할 것이지 우리 재가 불자들이야 어림이나 있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도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불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절대로 어려운 길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본래 불심이 있는 것이고 불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때 되도 우리가 다 부처가 됩니다. 다만 게으름 부리면 더디 되고 금생에 부지런히 공부하면 빨리 되고 그 차이 뿐인 것이지 모두가 부처가 되고 만다 말입니다. 되고 말바에는 역시 기왕이면은 고생 덜하고 윤회고를 덜하고서 빨리 되는 것이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는 인생의 하나의 정다운 정도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정도正道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방법으로 공부할 것인가 그런데 있어서는 각기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도인들마다 약간 차이 있게 말했다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모든 수행법 극락세계 가는 길 우리가 성불하는 길이 그런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이치에 잘 닿고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의 대승 소승을 총 망라해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범위도 넓고 그런 가르침이 이것이 보리방편문이라 말입니다. 여러분들 기독교를 좀 공부하신 분들은 그냥 아시고 공부를 별로 깊이 안 했다 하더라도 듣고서 아실 것입니다마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라, 삼위일체는 이른바 성신 또는 성자 또는 성령 아닙니까.

 

이것이 똑같이 모두가 다 같은 신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성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성신의 그대로 아주 성령한 기운을 받아서 성자가 되고 말입니다. 또는 신의 즉 말하자면 참다운 그런 참다운 영 이것이 성령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지만 세 가지가 본래로 하나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도 삼신일불이라 이른바 부처한테 들어있는 법신, 보신, 화신이라 아까 제가 보리방편문 얘길 했으나 보리방편문은 역시 법신, 보신, 화신 이 삼신이 본래로 하나라는 뜻인 것이고 본래로 하나를 다 한 번에 얘기 할 때는 한 번에 우리가 이름을 부를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이라 합니다.

 

그래서 법신 부처님이나 보신 부처님이나 화신 부처님이나 이 세 부처님이 원래로 하나의 부천데 하나의 부처를 다 몰아서 한 번에 얘기 하면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아미타불의 아자는 화신에 해당하고 화신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 모두가 화신입니다. 보신이라는 것은 그 부처님 또는 불성에 들어있는 한도 끝도 없는 한량없는 공덕 성품 이것이 보신이라 말입니다. 법신은 보신 화신을 다 갖춘 참다운 진리 자체 참다운 우주의 그런 원리 자체, 생명의 원리 자체가 법신불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이 셋이 절대로 셋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님인데 다만 추상적으로 우리 인간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전체를 몰아서 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인 것이고, 또는 뜻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때는 이치로 해서는 그야말로 법신불인 것이고, 또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그런 공덕으로 해서는 보신불인 것이고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은 화신불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이른바 삼위일체하고 불교의 삼신일불도 물론 불교의 삼신일불이 훨썩 더 심오한 뜻이라고 우리가 볼 수가 있지마는 기독교의 삼신일불도 우리가 좋게 해석해주면 역시 불교의 삼신일불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아무튼 성자라는 것은 공자가 됐든 노자가 됐든 성자라는 것은 우주의 본체를 통달한 분이 성자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가 됐든 누가 됐든 마호메트가 됐든 간에 그 분들을 우리가 성자라고 칭송할 때는 우리 불교의 성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진리를 다 통달한 분이라 안 볼 수가 없습니다. 또는 현대는 그렇게 지금 봐야 할 때입니다.

 

그 종교 때문에 종교가 다르다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참 비참한 싸움이 많았습니까.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 원정 때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도와 200년 동안 싸웠단 말입니다. 200년 동안 싸워서 수 백 만 사람이 죽고 했습니다. 200년 동안에 종교라는 것이 모두가 다 자비와 사랑과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런 종교 때문에 종교가 다르다는 차이 때문에 그와 같이 도리어 인간이 인간한테 폐를 끼친다 말입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특히 현대라는 것은 우리가 좋던 싫던 간에 서로 피차 나라 나라끼리 민족끼리 우리가 상종을 아니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이럴 때 있어서는 정말로 종교의 차이 때문에 서로 불화스럽게 되고 싸우게 되고 그래버리면 세상은 그야말로 참 싸움바다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를 우리가 충분히 얘기하자는 것인데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금타 대화상께서는 다 모든 성인은 같은 마음인지라 조금 더 더 깨닫고 덜 깨닫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성자의 마음은 모두가 하나의 진리를 통달한 그런 분인지라 다 모두가 같이 숭배해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종교사회에서 그런 면으로 이제 우리가 보던지 또는 우리가 지금 과학만능시대에 있어서 이 모든 존재의 근원과 또는 과학의 기본 근원이 돼있는 이른바 현대 그 에너지론, 에너지론에 있어서도 어느 누군가는 확실한 해답을 내려야 할 때가 됐다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에너지론을 가지고서 일체 과학을 다 이래저래 상호작용으로 해서 또는 결합작용을 해가지고서 이뤄내는 것인데 근원을 모르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데 어느 누군가가 그 근원을 꼭 밝혀야 할 땐데 이것도 역시 금타 대화상님께서 밝혀주셨습니다. 에너지의 가장 근본은 이것은 우리 정신과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원래로 하나다. 하난데 그 자리는 이것은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는 하나의 우주의 순수한 이른바 본바탕 생명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그 술어를 금타 대화상님 표현대로 하면 바로 금진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금진이라는 말은 금타 대화상께서 처음으로 낸 것이 아니라 원래 불교가 있던 것입니다. 있던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체계를 못 세웠는데 금타 대화상께서는 깨달아가지고서 원래 불교 도리가 있는 그런 이름하고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쓰고 있는 그런 이름하고를 개입해가지고서 똑같은 것은 똑같다고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마따나 지금 우주의 근원적인 그런 에너지 자체가 불교로 말하면 금진이라 말입니다. 그 금진이 어떻게 운동하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한다고 말씀했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현대 지금 물리학하고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현대 물리학은 그 에너지가 본래로 어떠한 것인가 에너지의 근본이 뭣인가를 모르는데 금타 대화상께서 밝혀놓으신 가르침에 따르면은 그 에너지 자체가 에너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도 불심의 불성의 하나의 작용이라 말입니다. 불성의 하나의 상호작용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이 과학시대에 있어서 금타 대화상같이 현대 과학과 또는 종교와 또는 불교와의 관계를 밝힌 분도 지금 처음입니다. 저는 제가 이제 확신을 가지고 느끼는 것이 금타 대화상 같은 그런 성인들은 400500년 만에 한 번씩 나올 듯 말 듯 한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백년 오백년 만에 한 번씩 나올 듯 말 듯 한 대 천재인 동시에 저는 성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 양반 자기 은사니까 돋보고 그렇게 말하겠지그럴 란가 모르겠지마는 저는 돋보거나 자기 은사라고 해서 제가 정도 이상으로 과찬하고 그런 성질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 학도의 처지에서 비판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근데 아까 말씀마따나 사백년 오백년 만에 한 번씩 나올 듯 말 듯 한 대 천재인 동시에 대 도인이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금타 대화상입니다. 오늘은 지금 그 어른의 제삿날입니다.

 

미국으로 가나 어디로 가나 그 양반 가르침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시기 상응한 적절한 가르침이라 말입니다. 벌써 수행론에 있어서 우리 성불의 지름길을 그대로 논리적이고 또는 그야말로 궁극적으로 아주 깊은 도를 말씀하셨고, 또는 현실적으로 이 유물과학시대에 있어서 물질이라는 것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물질이 무엇인가 그런 문제는 지금 현대 누구나 굉장히 관심을 두고 있는 문제 아닙니까. 물질의 근원에 관해서 이것은 다만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의 근본은 바로 그 정신이다. 바로 불심이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금타 대화상께서 우주론, 우주론은 또 얼마나 어려운 문제입니까. 천문학자가 공부해도 그것은 그때그때 가정 가정이라 말입니다. 확실한 말씀을 다 못 했습니다. 칸트나 라프라스나 또는 그야말로 아인슈타인이나 그런 분들도 우주론에 관해서 확실한 해답을 못 내렸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런 것도 현대 과학은 결론을 못 내렸습니다. 알 턱이 없지요. 왜 알 턱이 없는가 하면 과학이라는 것은 이것은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문제를 비로소 가정적으로 아는 것이지 시간을 떠나고 공간을 초월한 그런 분야는 과학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문제나 근본 본체적인 문제는 과학은 다룰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것은 도인의 깨달은 도인의 번뇌를 다 없애버린 청정한 도인의 안목에서 만이 그런 문제는 안다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적인 명확한 해답도 금타 대화상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 우주가 언제 생겨났으며 또는 몇 백 억년 뒤에 우주가 다 소멸될 것인가. 이런 문제도 현대 과학에서 어렴풋이 말씀한 것을 체계 있게 다 말씀했다 말입니다. 세상에서 달마스님 같은 분도 달마스님이 중국에 왔을 때 그 달마스님을 죽이려고 독살하려고 여섯 번이나 달마스님한테 독을 드렸어요, 독을. 독을 마시게 했다 말입니다. 그러나 신통자재한 대 도인인지라 다섯 번째는 그 독을 받지 않았습니다. 먹었어도 그것이 독이 안 된다 말입니다. 신통을 부리기 때문에 그러나 여섯 번째는 이제 내가 갈 때가 되었구나!” 그래서 독을 자시고 가셨다 말입니다. 위대한 도인도 그 시대 사람들이 굉장히 몰라줍니다. 우리는 우리시대에 난 그런 도인들을 좀 깊이깊이 음미를 해야 됩니다.

 

우리 한국은 신라 때 원효대사, 의상대사, 고려 때 대각국사, 보조국사, 또는 태고선사, 나옹대사, 이조 때 서산대사 이렇게 많은 도인들이 계시는데, 현대에 나온 도인으로 해서 저 같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공정된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원효스님이나 서산스님이나 또는 보조스님이나 그런 스님과 비교해서 절대로 손색이 없는 분이 금타 대화상이라 말입니다. 두고두고, 두고두고 우리 인류문화에 있어서 더욱 더 찬탄하고 배우고 그럴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꼭 우리 인간세상에서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그런 문제를 다 말씀했다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종교가 서로 같지 않다고 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많이 했는데 그런 종교의 본질은 다 하나의 진리라 이런 쪽으로 말씀한 분이 금타 대화상이기 때문에, 종교전쟁이나 종교분쟁도 벌써 막을 수 있는 법문이 거기에 다 포함돼 있다 말입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에서 그렇게 의문되어하는 알려고 애쓰고 몸부림쳐도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를 도인의 안목에서 다 밝혔다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이 성불 하려면 어떠한 법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한테는 본래 불성이 있고 또는 불심이 있어놔서 우리가 누구나가 성불합니다.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가 성불 않고서 베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몇 만생, 몇 만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난다 하더라도 끝에 가서는 꼭 성불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쉽게 성불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쉽게 성불하는 법이 이른바 불교법인데, 불교법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는데 금타 대화상께서 밝힌 것은 금타 대화상 개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정통조사가 똑같이 그와 같이 바른 법을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존중이 되는 것이고 더욱 더 신뢰가 되는 것이지요. 한 분만 말씀했으면 아, 저 양반이 훌륭한 말씀을 했구나! 그렇게 말아버리지만 이 분이나 저 분이나 정통조사 정통으로 부처님 법을 펴는 그런 어른들이 그 많은 분들이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가 어떻게 안 믿을 것입니까.

 

우리 불자님들 그 보리방편문은 성불의 지름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공부를 하시고 그때그때 깊이 생각을 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정말로 하여튼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라는 그런 도리를 여실하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여실하게. 우리가 본래 부처니까 본래 부처라는 도리를 여실하게 말씀을 해야 되겠지요. 또는 그것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 법문인 삼위일체 하고도 같이 연결이 된다 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기독교와 불교와 서로 피차 교섭을 하고 서로 피차 정말로 진리를 놓고서 화해도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삼신일불 법문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법문하고 같이 대비하면서 공부하면 굉장히 편리합니다. 우리가 남과 대화하려면 상대편도 좀 알아야지 상대편은 전혀 모르고서 자기 것만 가지고 내세우면 그 대화가 되겠습니까. 지금은 꼭 기독교와 불교와 서로 화해 할 때란 말입니다. 그러나 화해 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금타 대화상께서 벌써 마련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도 역시 위대한 성자라, 공자도 위대한 성자라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불교인들로 해서는 처음으로 말씀했다 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그냥 예수 뭐 그거 다 외도다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 그와 같이 폄하하고 배격을 해버렸지만 유독히 금타 대화상만은 아까 말씀마따나 다른 종교의 할애비 되시는 분들 다른 종교의 교조 그분들을 다 똑같이 한결같이 성자의 지위에 올려놓고서 관용적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불교인들이 너무나 눈에 보이는 것만 주로하고 또 유물주의 물질주의에 너무나 우리 마음이 집착이 돼있습니다. 집착이 돼 있어놔서 우리가 집착을 풀어버리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우리 몸도 정말로 바로 보면 허망무상하다 말입니다. 다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가령 나란 존재가 무엇인가 하면 따지고 본다고 생각 할 때 다 허무하다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허무한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어려운 말씀은 제가 안하려고 생각합니다마는 지금 있는 것은 모두가 순간순간, 순간순간 다 무상하다 말입니다. 순간순간 무상하다는 그것은 무엇인가하면 어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일정한 고유한 것이 존재 할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순간순간 지나가고 만다 말입니다. 1초의 몇 천분의 일도 못되는 그런 순간 찰나도 역시 우리 몸뚱이나 다른 모든 물질이나 그런 것이 존재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벌써 그야말로 다 그것이 하나의 공이라 말입니다 불교말로.

 

불교말로 제법 공이라, 여러 가지 공이란 그런 법문을 우리가 듣지 않습니까. 한데 그런 공이란 것은 다만 우리한테 거기에 여러 가지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 하는 공이 아니라 사실로 공이라 말입니다. 어째 사실로 공일 것인가?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은 인연생의 모든 것은 그때그때 순간 찰나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너라고 할 것도 없고 또는 그것이 고유한 뭐라고 할 것도 없다 말입니다. 모두가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깊이 보면 볼수록 다 무상하고 다 공인 것이고 허무하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지금 잘못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이라는 것은 슬프다 뭐 어떤 안스럽다던가 그런 정도의 무상이아니라 그 항상 있는 것이 조금도 없다 말입니다.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것이나 일정한 공간을 점유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그야말로 참 산골짜기에 메아리요 모두 다 그런 것입니다. 정말로 뜬구름 같고 그림자 같고 또는 산골짜기 메아리 같다 말입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의 모습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러니까 그와 같이 여실히 봐야 할 것인데 우리는 이 상식적인 이른바 거시적인 그런 범위 내에서 우리 인간의 업장으로 보이는 그것만 우리가 사실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다 허무한 것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바로 보면 오온이 개공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그런 것은 모두가 이것은 원래 다 공인 것이다. 빈 것이다 말입니다.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니까 결국은 빈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한 것을 깊이 느끼고서 허망무상하지 않은 참다운 도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금타 대화상 열반재에 있어서 너무 장황한 말씀을 하시면 여러분들께서도 질려 하실 것이니까 이제 제 말씀을 몇 말씀으로 간략하게 줄입니다마는 아무튼 사백년 오백년 만에 한 번씩 나올 듯 말 듯 하는 그런 대 천재인 동시에 대 도인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꼭 현대인들이 지금 알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이 꼭 해결해야 될 그런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말입니다. 성불하는 가장 요긴한 법을 말씀하셨고 또는 현대 유물주의시대 물질주의시대에 있어서 물질의 근원은 대체로 무엇인가 사람들이 다 의심을 품고 있지마는 도인이 아니면 그것을 풀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말입니다. 한계가 없는 것은 못 봅니다. 그러나 성자가 되면 그때는 한계가 없는 무한의 세계를 본다 말입니다. 물질의 가장 끄트머리나 가장 미세한 것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우주의 끄트머리나 우주의 발생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불교가운데는 그전부터 그런 도리가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불성을 체험을 못하니까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것을 금타 대화상께서 다 체험을 다하시고 오랫동안 그런 삼매에 참선에 잠기셔서 도통을 하셔서 통달무애한 통달한 지혜로서 보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큰 것 작은 것을 다 꿰뚫어 보신다 말입니다.

 

그 연에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불의 지름길 이것이 보리방편문 입니다. 보리방편문을 꼭 잘 외우시길 바랍니다. 삼신일불이라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우리는 본래 부천데 부처 가운데는 법신, 보신, 화신이 다 들어있다 말입니다. 한 번 읽으면 읽은 만치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 간다 말입니다. 본래 부처가 아니면 우리가 부처가 되어가기가 어렵겠지요. 허나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안 되면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닙니다. 몇 만생 우리가 윤회한다 하더라도 꼭 종당에는 부처가 됩니다. 그러나 윤회할 때에 고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가 지옥도 분명히 갑니다. 잘못 살면

 

따라서 우리는 그런 성자들의 가르침, 고구정녕으로 우리한테 이 시대에 꼭 맞는 성불의 가르침을 해주신 분이 얼마나 고맙고 우리 대 스승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타 대화상께서 성불의 지름길로 말씀하신 보리방편문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의 삼위일체하고도 다 상통이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불교의 가장 고도한, 고도한 다른 수행법과 연관성이 모두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본래 부처의 그런 불성이 더욱 더 빛나고, 나중에는 그때는 그야말로 불성하고 하나가 딱 돼버린다 말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관조하고 반응으로 느껴야하지마는 나중에 우리가 염불을 많이 하고 그니까 보리방편문은 내내야 다 합한 것이 그때는 아미타불인데 법신, 보신, 화신을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근데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불성의 이름인 동시에 또는 극락세계의 교주이름이고 말입니다. 또는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도 본래가 다 아미타불입니다. 우리는 아미타불을 부를 때에 부처님인 아미타불이 저기 계시는데 우리가 애쓰고 부르면 가피를 주신다.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로 아미타불인데 또는 우주의 근본이 본래는 다 아미타불인데 우리가 잘못 살아서 아미타불하고 이렇게 멀리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제는 훌륭한 스승들 가르침 따라서 내가 본래 부처니까 내가 본래 아미타불인 것이니까, 아미타불은 그것은 방금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내 본래불성의 이름인 동시에 바로 극락세계의 교주라 말입니다. 또는 우주는 아미타불로해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것도 근본도리 근본생명자체는 바로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부르기 좋고 뜻도 제일 깊고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어떻게 마다할 것입니까. 우리 불자님들이 가실 곳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가상세계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 고향의 이름입니다. 꼭 우리가 극락세계로 가야됩니다. 극락세계 가기위해서는 극락세계교주인 동시에 우리 마음의 바로 이름인, 우리 마음의 대명사인 우리 불성의 이름인 아미타불 또 거기다가 이제 귀의한다는 나무를 보태면 나무아미타불이 되겠지요. 가장 하기 쉽고 공부하기 쉽고 또는 공도 제일 많고 말입니다. 그런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공부를 하셔서 꼭 우리 고향인 극락세계를 헤매지 마시고 가시기를 간절히 당부해서 마지않습니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2000년2월28일 금타대화상 열반재일법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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