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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놓고 염불하세(인광대사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인광(印光)대사(1861-1940)

 

중국 청나라 말엽에서 민국(民國) 초기에 걸쳐 정치사회가 혼란하고 불법의 쇠퇴가 극심할 당시 염불법문을 수행하여 중생교화와 불법포교에 헌신한 고승대덕으로 중국에서는 연종(蓮宗;정토종) 13대 조사로 추앙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라고 권하였으며, 평생 삭발한 출가 제자는 한 명도 받지 않았고 재가신자들에게 주로 서신으로 설법하였다. 평생 동안 어떠한 절의 주지도 맡은 적이 없는 인광 대사는 후학을 가르침에 귀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 대하듯 자상하고 간곡히 이르되, 경론(經論)에 바탕을 두고 가슴 속으로부터 쏟아냈는데, 그 내용은 인과법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알맹이 없이 빈 말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먼저 세상의 현명하고 착한 사람 노릇을 한 다음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받아 평범을 뛰어넘고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사람들에게 행하지도 못할 거창한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죽과 밥만 축내는 중(粥飯僧)', ‘항상 부끄러운 중이라는 별호를 즐겨 쓰기도 한 스님은 입적 후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왔다.

 

여기 실린 가언록(嘉言錄)은 대사의 서신설법을 편집한 것으로 이 글이 세상에 발행되자 말마다. 진리를 드러내고 글자마다 종지(宗旨)로 귀결되며,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들어맞으며, 선종(禪宗)과 정토(淨土)의 오묘한 법문을 떨치면서 그 사이의 쉽고 어려움을 잘 가려내어 실로 이전 사람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을 훤히 파헤쳤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인광대사(印光大師)

 

스님은 중화민국(中華民國) 이십구 년(二十九年) 약 사십 여년(四十餘年) () 스님이시다.

 

어렸을 때에 유생(儒生)들이 불교(佛敎)비방(誹謗)을 해 논 글을 보고 자기(自己)도 그것을 본 따서 불교(佛敎)를 비방(誹謗)하여 글을 써보았다. 그랬더니 우연(偶然)히 눈병이 나서 앞을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람(猥濫)되이 성인(聖人)의 교()를 비방(誹謗)하여 아마도 그 죄()로 인()하여 앞을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자신(自身)의 잘못 함을 뉘우치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참회(懺悔)를 드렸다. 그랬더니 이상(異常)하게도 눈병이 곧 낫게 되어 전()과 같이 앞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법(佛法)이 절대(絶對)로 허무(虛無)한 것이 아님을 절실(切實)히 느껴서 불법(佛法)의 진리(眞理)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경전(經典) ()하여 읽어보았다.

 

경전(經典)을 보고는 크게 발심(發心)이 되어 이십일세(二十一歲)에 출가(出家)하셔서 종남산 연화동에 도순 장로(長老)라는 수행(修行)이 장()하신 스님에게 중이 되셨다.

 

그 후 용서거사(龍舒居士)가 써 논 정토문(淨土文)을 보고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여 속()히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함에는 염불법(念佛法)에 더 지남이 없는 것임을 아시고는 그 후로 부터 항상(恒常) 염불(念佛)을 하셨다.

 

그 후 홍라산 자복사에 가시어 정토수행(淨土修行)을 하시면서 경전(經典)을 보시고는 심오(深奧)한 진리(眞理)를 깨닫게 되셨다. 그 후 다시 법우사라는 절에 가시어 육년(六年) 간을 문()을 닫고 주야불철(晝夜不輟) 염불(念佛)을 하시어 마침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크게 증득(證得)하게 되셨다.

 

그 후() 부터는 중생(衆生)들을 교화(敎化)하시길 원()을 세우시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토법문(淨土法門)을 해주시고는 염불(念佛)을 권()하시어 많은 사람들이 발심(發心)이 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교화(敎化)하시기를 수년(數年)간을 매일(每日)같이 쉬지 않고 계속(繼續)하시어 그 스님에게 발심(發心)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는 자()가 무려 이십만(二十萬)명도 넘었다.

 

그리하여 인광대사(印光大師)의 명성(名聲)은 날로 높아졌으며 그 스님을 신()하여 염불(念佛)하는 자()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 스님께서는 자기(自己) 이름이 세상(世上)에 알려지게 됨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하셨으며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도 항상(恒常) 부끄러워하며 겸손(謙遜)하셨다. 그리하여 자호(字號)참괴승(慙愧僧)’이라고 하셨다.

 

참괴승(慙愧僧)’이란 부끄러운 중이란 뜻으로 지극(至極)히 겸손(謙遜)해 쓰는 말이다. 그와 같이 제자(弟子)들이 많으시며 명성(名聲)이 높아지셨음에도 항상(恒常) 떨어진 헌옷만 입고 계시며 음식(飮食)도 좋은 것은 드시지 않으며 빨래 같은 것도 꼭 손수 빨아 입으시고 남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스님에게 상좌(上座)가 되려고 수없이 많이 찾아와도 자기(自己) 권속(眷屬)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권속(眷屬)을 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혹() 재난(災難)을 당한 자()들에게는 꼭 재물(財物)을 구()해다 주시고는 위안(慰安)을 해주셨다. 그와 같이 교화(敎化)를 해나가시다가 말년(末年)에는 영암산에 가시어 절을 크게 지어서 정토종(淨土宗) 도량(道場)을 만드셔 가지고 정토종(淨土宗)을 크게 펴시어 수많은 수행자(修行者)들이 모여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행하였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항상(恒常) 평등(平等)한 자비(慈悲)로써 부귀(富貴)빈천(貧賤) 남녀노소(男女老少)의 차별(差別)함이 없이 다 같이 친절(親切)하게 대해 주어서 스님을 따르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疲困)하고 괴로울 때에도 찾아오는 분들을 싫어하지 않고 항상(恒常) 흔연(欣然)히 맞아주셔서 손님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스님에게 법()을 배우러 찾아오는 내왕객(來往客)이 끊길 사이가 없었다. 스님의 연세(年歲)가 팔십(八十)()가 되신 어느 날 전 대중(大衆)을 모이게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 절 주인(主人)이 곧 가게 되었으니 새로 주인(主人)될 스님을 대중(大衆)들이 지금 선출(選出)하도록 하라고 각 대중에 분부(分付)를 하셨다.

 

대중(大衆)들이 인광대사(印光大師)께서 추천(推薦)하시라고 하니 묘진(妙眞)스님이란 스님을 추천(推薦)하시어 대중(大衆)들이 스님의 의견(意見)을 따라 그 스님을 새 주인(主人)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리하여 취임(就任) 날짜를 십일(十一)()로 대중(大衆)들이 정()하니 너무 늦어서 안되니 앞으로 당겨서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가 중화민국(中華民國)이십구년(二十九年) (서기(西紀) 1940()) 10() 이십팔일(二十八日) 이었다.

 

그래서 오일(五日) ()로 다시 정()하니 그래도 늦어서 안 된다고 하시여 이일(二日) ()인 십일월(十一月) 초하루 날로 취임식(就任式)날짜를 받아 그날로 새 주인(主人)을 모셨다. 십일월(十一月) 사일(四日)날이 되었다.

 

그날은 스님께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게 되면 결정(決定)코 왕생극락(往生極樂)하게 되는 것 이라고 말씀하시고는 높은 소리로 염불(念佛)을 하셨다. 그러다가 새 주인(主人)인 묘진(妙眞)스님이 들어오니 당부(當付)하시길 너는 이 절을 잘 지키도록 하되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정토수행(淨土修行)을 도량(道場)으로 해나가야지 다른 것을 행()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시고는 물을 가져오라 하여 세수(洗手)를 하시고는 앉으시더니 문득 일어나시며 부처님의 왕림(枉臨)하심이로다. 라고 말씀 하시고는 대중(大衆)들께 염불(念佛)하라고 하시고는 서(西)쪽을 향()해 단정(端正)히 앉으시어 합장(合掌)하고 염불(念佛)하시고는 열반(涅槃)에 드시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사일(四日)아침 오시(五時)경 쯤이라고 한다. 날이 밝아진 연후(然後)에 보니 스님께서는 웃는 낯으로 열반(涅槃)에 드시어 단정(端正)히 앉아 계시는데 살아계실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 이튿날 오후 삼시(三時)에 입감을 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처음과 하나도 다름없이 그대로 산사람과 같았다. 단정(端正)하게 앉아 계시는데 허리가 조금도 굽어지기도 않았으며 머리도 숙여지지 않고 아주 반듯하게 그대로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대중(大衆)이 공론(公論)하여 백일장(百日葬)으로 그 이듬해 이월(二月) 십오(十五)() 부처님 열반(涅槃)재일(齋日)날에 장례(葬禮)를 지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이월(二月) 십오(十五)()이 되었다.

 

조문객(弔問客)이 만여 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모여 염불(念佛)을 하는데 그 염불(念佛) 소리는 마치 우렛소리와 같이 천지(天地)를 진동(振動)하였다. 그리하여 상여(喪輿)를 메고 다비 처로 가는데 길가에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통곡(痛哭)하며 전송(轉送)을 해주는데 자기(自己)네 부모(父母)가 죽어 전송(轉送)함과 같이 슬퍼하였다.

 

이윽고 다비소에 이르러 모든 의식(儀式)을 마치고는 화장대(火葬臺)에 불을 붙이니 백설 같은 흰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 올라가는데 그 연기(煙氣)가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하게 빛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연기(煙氣)가 흩어지지 않고 저 멀리 서(西)쪽 하늘로 길게 뻗쳐가며 아름다운 향취(香臭)가 온 산천(山川)에 가득히 풍기었다. 그날은 날이 저물어서 습골(拾骨)을 하지 못하고 그 이튿날도 비가 와서 오후(午後) 늦게야 주지스님과 대중(大衆)들이 다비소에 가서 요기를 헤쳐 보니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사리(舍利)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와 있었다.

 

모두 거두어 보니 천여(千餘)()가 넘었다. 그런데 그 형태(形態)가 여러 가지였다. 어떤 것은 구슬처럼 둥근 것이며 혹()은 꽃송이같이 생긴 것도 있으며 혹()은 연꽃잎처럼 생긴 것이 있으며 유골(遺骨)은 백옥(白玉)같이 희면서 단단하기가 돌덩이와 같으며 또한 무겁기가 쇠덩이처럼 무겁더라는 것이며 서로 부딪쳐서 쇠 소리가 났다.

 

그리고 치아(齒牙)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온전히 다 있는데 삼십이(三十二)()가 하나도 타지 않고 백옥(白玉)같이 희면서 찬란(燦爛)한 광채(光彩)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보통 사람의 두골은 두 쪽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스님께서는 연꽃잎처럼 생긴 골편이 다섯 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통(普通) 스님들 사리(舍利)는 그저 단단할 뿐이며 혹()은 다소(多少) 광채(光彩)가 날정도(程度)라고 하는데 이 스님의 사리(舍利)는 부처님의 사리(舍利)처럼 오색(五色)광명(光明)이 아주 분명(分明)하게 나며 밤이면 더욱 찬란(燦爛)하고 밝게 빛을 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희유(稀有)하고 신기(神奇)한 일이 아닌가, 이 어찌 염불공덕(念佛功德)이 아닐 것이며, 불법(佛法)에 영험(靈驗)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한 가지 스님의 사리(舍利)에 대해서 신기(神奇)한 일이 있는데 요기에서 대중(大衆)이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전부다. 가리어 하나도 남음이 없었다. 습골(拾骨)하고 난 뒤에도 지성(至性)껏 공()을 드리면 사리(舍利)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조금도 거짓이 아닌 실지로 그와 같이 되는 틀림없는 사실(事實)인 것이다.

 

당시(當時)에 인광법사(仁光法師)를 가장 돈독(敦篤)히 신()하며 지성(至誠)껏 받들어 온 신도(信徒) 분이 한 분 있었으니 그 분은 원덕상(元德相)이라고 하는 분인데 영암사 절에서 좀 떨어져 있는 무석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분이였다.

 

이월(二月) 십오(十五)() 인광법사(仁光法師) 다비식에 참여하고는 자기(自己)가 다.니는 그 지방(地方)절에 행사(行事)가 있어 인광법사(仁光法師) 화장(火葬) 후 사리(舍利), 습골(拾骨)함을 참견(參見) 못하고 부득이(不得已)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일(二日)()인 십칠일(十七日) 날 인편(人便)에 들으니 인광법사(仁光法師)의 유해(遺骸)에서 오색(五色) 사리(舍利)가 무수(無數)하게 나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사리(舍利)를 친견(親見) 하고자 그 즉시(卽時)로 가서 보니 과연(果然) 듣은 바와 틀림이 없었다.

또한 지금도 인광법사(仁光法師) 다비처에 가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오색(五色)사리(舍利)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광법사(仁光法師)의 사리(舍利)를 얻고 져 다비처로 부랴부랴 달려가서 보니 십여(十餘)명의 신도(信徒)들이 사리(舍利)를 얻고자 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요기 안에 보니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전부(全部). 가려가고 재와 유골(遺骨) 부스러기가 약간(若干) 남아있었다.

 

그래서 자기(自己)도 예배(禮拜)를 지성(至誠)껏 드리고는 기도(祈禱)를 드렸다. 그런데 자기(自己)보다. 앞에 와서 공()을 드리던 분들이 이상(異常)하게도 모두가 사리(舍利)를 얻게 되더라는 것이다. 오직 자기(自己) 하나 만이 아직 사리(舍利)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성(精誠)을 지극(至極)히 드리고 나서는 요기 안에 재를 헤치며 사리(舍利)를 찾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異常)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재속에서 사리(舍利) 일과(一顆)가 나 왔다.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사리(舍利)가 눈이 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나 반가운지 급()히 주워서 손바닥에 놓다가 그만 놓치어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시 찾고 있으니 옆에 있던 분이 다행(多幸)히도 찾아 주었다. 그런데 또한 이상(異常)한 것은 새로 찾은 사리(舍利)를 다시 손바닥에 놓으려고 손을 펴보니 아까 잃었던 사리(舍利)가 그냥 손안에 있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이상(異常)한 것은 처음 주은 사리(舍利)는 분명(分明)히 한과() 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두 낱으로 불어 있었다.

 

하도 이상(異常)하여 자기(自己)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옆에 있는 다른 분들께 보이면서 물어보니 역시(亦是) 두 낱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일 이였다. 다시 찾은 이튿날 자기(自己)가 다니는 절로 사리(舍利)를 모시고 가서 대중(大衆)스님 들게 참배(參拜)하도록 보여드리니 그때에도 자기(自己) 집에서와 같이 오색(五色)광명(光明)이 찬란(燦爛)하게 빛나니 모든 대중(大衆)들이 모두 감격(感激)하여 무수(無數)히 예배(禮拜)를 드렸다는 것이며 그 부사의(不思議)한 일들을 전부(全部) 이야기해주니 대중(大衆)들은 더욱 더 감격(感激)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었으며 크게 발심(發心)이 되어 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력(全力)을 다하였다. 이상(以上)으로서 연종(蓮宗)십삼(十三)조사(祖師)에 대한 기록(記錄)을 마칠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