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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320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서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진여불성 이것은, 어떤 존재나 모두가다 근본 실상은 진여불성인데 거기서 부터서 모두가 나온 것인데, 거기에서 우리가 왜 나왔는가? 이것은 우주의 법칙 따라서 법이자연法爾自然 적으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면 무명심無明心이라. 우리 무명심 때문에 시초에 존재가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만 진여불성 이것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공空이 아니라, 허두에서도 언급을 했읍니다마는 진여불성 이 자리는 다만 물질이 아닌 텅 비어 있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십니다만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진여불성 자리는 상덕常德이라. 영생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순수한 생명 이것은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또는 낙덕樂德이라. 안락무구安樂無垢라. 조금도 불행이 없습니다. 변치 않고 일체 공덕을 다 갖추었건을 그 자리에 불행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는 고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안락만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덕我德이라. 나아我자, 큰 덕德자, 아덕 이것은, 우리 중생 이것은 망아妄我고 이것은 이른바 소아小我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잘 못 본 것이 이것이 나란 말입니다. 견성오도를 미처 못 한 사람들은 항시 자기라 해도 망령된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참다운 자기 우주의 진여 불성과 온전히 하나 된 자리 이런 자리에서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위시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불자님들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덕, 이것이 그냥 흐지부지한 보통 덕이 아니라, 아는 것도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일체 신통 묘지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육조 혜능慧能스님이 유식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닦아서 마음 깨달아서 마음이 온전히 본래면목 자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은 신통神通 부사의不思議해서 일체 것을 다 알 수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제한을 말으십시오.

 

그런데 하물며 나는 어디가 아프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봐도 무슨 병인지는 모르는데 아프기는 아프다. 부처님 법은 그런 아프고 조금 어디가 거북하고 이런 것을 치유할 수 없는 그런 시원찮은 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완벽한 법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금생에 내가 설사 잘못 살아서 허물을 많이 범했다 하더라도 내 불성만은 내 본성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다. 완벽하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그 즉시에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동시에 우리 잔병은 다 떨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십시요, 그 사람도 꼭 자기를 좋게 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 같이 60kg, 50kg 그런 무게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공인데 공이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대류권 내에서 우리 중생들이 업장으로 무명심에 가려서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육조 혜능 대사의 게송偈頌아닙니까.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번뇌煩惱가 있고 티끌이 있을 것인가. 우리 중생이 억울하게도 무명심 때문에 잘못 봐서 밉고 좋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대로 그 퇴폐頹廢하고 반목反目하고 분열分裂하고 이대로 사실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바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되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본래로 극락세계인 것을 본래 부처인 것을 중생들이 잘못보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고 고생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안타까워서 중생 제도濟度할려고 도인들이 교시하는 것이지 바른 차원에서는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극락세계 내일 죽어도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자기 몸 허망 무상한 본래로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가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흠절이 없습니다. 운문 스님한테 가서 어려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렇게 문법 하니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요, 시시시호시時時是好時라. 날마다 좋은 날이요, 때때로 좋은 때단 말입니다. 어려운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날마다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좋고 궂고 여러 가지 고난이 많겠지요. 그러나 진여불성자리 반야바라밀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의 견해인 반야바라밀의 경계에서는 항시 좋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