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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279

279. 부처님 법은 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나 열반적정涅槃寂靜이나 모두가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논리적論理的인 체계體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도 역시 자력, 자기 힘만 가지고서 아, 내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니까 이걸로 해서 내가 꼭 성불이 되겠다, 이렇게 의지를 갖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우주는 항시 우주의 힘이 지금 부처님의 힘이 넘치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힘이란 말이나 부처님 힘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란 것은 이것은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생명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우주생명이 이 우주에는 끝도 갓도 없이 넘쳐있기 때문에 그냥 무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목적의식目的意識이 뚜렷이 있습니다.

 

무슨 목적인가. 모든 중생을 다 그 본래 성품자리, 우주의 본래성품이 바로 불성인데 모든 존재를 다 똑같이 불성자리에 돌아오도록 하는 거란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란 것은 우리 불교의 그 4겁설四劫說이라, 우주가 이루어지고 또 중생이 살고 또 우주가 파괴가 되고 또 드디어는 공으로 돌아가고 또 다시 이루어지고. 모두 그런 것이 불교의 사겁설 아닙니까마는 그와 같이 항시 우리 이 우주란 것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도 모두 부처님 품안으로 갔다가 다시 거기에서 또 중생계가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다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경에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니까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본래부처인데 부처가 안될 수가 있습니까. 다만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노력을 우리가 온전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빨리 될 것이고 노력을 안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주가 파괴할 때까지는 우리가 윤회輪廻를 해야지요. 천상으로 갔다가 또는 지옥으로 갔다가. 그런 한 천상이나 지옥같은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유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지금 중생계 인간계도 항시 그대로 머물러있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참 변화무쌍한 것인데 우리 인간계가 변화무쌍하듯이 지옥계나 천상계도 역시 변화무쌍합니다. 변화무쌍한 대로는 분명히 지금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잘 지으면 그때는 틀림없이 천당 갈 수가 있는 것이고 업을 못 짓고 그야말로 탐욕많은 중생은 아귀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여러 가지 우리 중생들의 생활상황에 따라서 그런 차별이 있다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본래로, 바로 진여불성이 이것이 우리 생명의 본 고향자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모든 중생을 그런 불성자리로 이끌어야 된다는 불성자리로 다가서게 하는 그런 힘이 원래 있단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힘이 인력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힘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의 이것이 본원本願입니다. 우리가 그 사홍서원四弘誓願 할 때 모든 중생이 다 성불이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무량의 그런 부처님 법문을 배우고, 그런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서원은 이것은 우리 개인의 참다운 서원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서원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목적의 서원, 이것이 이른바 사홍서원입니다.

 

따라서 그런 서원이 원래 우주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절로 그런 서원을 지금 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기운을. 그래서 타력기운은 없는 것을 우리가 끄집어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주에는 모든 중생을 다 성불로 이끌어가는 그런 기운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기운에 우리가 편승을 좀 해야되겠지요. 그런 편승하는 기운이 이른바 타력공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한다든가 또는 우리가 화두를 참구해서 의심을 한다든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원래 우주에 있는 그런 기운에 편승해서 우리가 부처가 지금 되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고 빠른 것은 우리가 얼마만치 정진精進하는가에 매여있지 않겠습니까. 헌데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방법가운데서 보통 4가지 방법을 말해 있어요. 우리 공부하는 방법을. 한 가지 방법은 어떤 것인고 하면 상좌삼매常坐三昧라. 삼매라.

 

삼매란 것은 아까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오로지 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입니다. 인도의 말로는 삼마지三摩地란 것인데, 우리 마음을 아무렇게나 통일이 아니라 참다운 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인데, 한 가지는 상좌삼매라, 항상 상常자 앉을 좌坐 말입니다. 항시 앉아서 하는 그런 삼매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우리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한다든가 우리가 선방에서 한다든가 그런 법은 상좌삼매에 해당합니다.

 

또 한 가지는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상常자, 행할 행行자, 항시 갔다왔다 갔다왔다하면서 삼매에 드는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다보면 또 혼침이 많은 사람은 앉아서 그냥 꾸벅꾸벅 졸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 어느 구간을 딱 정해가지고서 가사 탑을 돈다든가 또는 집을 돈다든가 또는 어느 무슨 나무 밑을 우리가 산책한다든가 그렇게 갔다왔다하면서 하는 공부가 상행삼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라. 아니 비非자, 행할 행行자, 아니 비非자 앉을 좌坐자. 그러니까 반쯤 정도는 앉기도 하고 또는 서기도 하고 그와 같이 그때그때 우리가 교차해서 즉 말하자면 편리하게 자기 능력따라서 우리가 한단 말입니다. 또는 한 가지는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라. 그 우리가 하는 그런 공부하는 방식가운데서 앉는 것과 서는 것을 그때는 반반씩 한단 말입니다. 반틈 정도는 그냥 우리 앉아서 하고 또는 반틈은 갔다 왔다 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4가지 방식을 보통은 우리 공부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하고 있어요. 한번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좌삼매라. 항상 앉아서 하는 보통 선방에서 하듯이 앉아서 하는 그런 법이 상좌삼매고, 또 한 가지는 상행삼매라, 우리가 걸음으로 해서 혼침 많은 사람들은 상행삼매를 또 많이 합니다. 상행삼매도 좋고. 또 반좌반행이라, 어떻게 붙이나 하여튼 반 정도는 앉고 반 정도는 서고. 적당히 이와 같이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해가면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비행비좌라. 앉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그때는 아무런 그때는 결재라든가 한계가 없이 그때그때 편의 따라서 가사 5분동안 좀 걸음 걸었다가 또 다시 한 20분 동안 앉아서 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하는 공부가 이것이 비행비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공부할 때는 자기 건강이라든가 또는 자기 취향이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혼침이 많다든가 적다든가 그런 것을 헤아려서 적당히 조절해서 하시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