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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자유게시판

[스크랩]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내 화살’ 떨어진 곳이 과녁이길 바랄 뿐!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안암동 대원암은 한영, 탄허 스님이 경전을 번역했던 곳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종림 스님은 그냥 웃을 뿐이다.

 

 

750여 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5000여만 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CD 15장에 담아낸 고려대장경 연구소. 그 수장은 종림 스님이다.


우선 고려 대장경이란 무엇인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팔만대장경과 혼돈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제일 먼저 제작한 대장경을 우리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한다. 이 대장경은 몽골 침입에 의해 불타 없어졌고 인본(印本)만 남아있다. 후에 다시 제작한 대장경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하는데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을 이르는 말이다.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사이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만든 교장총록(敎藏總錄)이 있다. 초조대장경,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과 교장총록 이 세 개를 합쳐 ‘고려대장경’이라 말한다.


세계 최초로 5만3000자에 이르는 한자를 모두 입력해 팔만대장경의 전산화를 마친 게 2000년이고, 2004년에는 팔만대장경의 옛 한자(異體字)를 현대의 한자로 바꾸는 작업을 거쳐 ‘고려대장경 2004’를 발표했다. 일본 남선사 소장 고려대장경 초조본 1800여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6년간의 각고 끝에 2009년 11월에 매듭지었다.


고려대장경 작업만 놓고 보면 이제 남은 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스님의 교장총록(敎藏總錄) 전산화 뿐이다. 해인사에서 방 한 칸 얻어 8비트 컴퓨터 한 대 놓고 시작한 이 불사는 20년이 흐르며 그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 입멸 후 4차례의 경전 결집을 잇는 대작불사다.


그런데 낯설다. 종림 스님과 20년 대작불사!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스님이 경전 불사하는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왜 따지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단 한 번이라도 종림 스님을 만나 대화해 본 사람이라면 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한마디로 종림 스님은 자신의 표현처럼 ‘이단아’, ‘떠돌이’, ‘나그네’ 경향이 짙은 인물이다.


일례로, 선원에서 나오자마자 운수단(雲水檀)이란 이름 붙인 봉고차에 코펠과 버너를 싣고 전국 산하를 1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출가 직후 강원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스스로 문을 나선 인물이다. 그나마 선방에서 약 7년 동안 머물렀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사실, 선방 생활 중에도 ‘수좌’로 불리지 않았다. 전통 선법과는 다소 다른 포메이션의 수행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좌가 갖춰야 할 전통적 개념의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스님이었다. 대흥사 선원장을 맡았지만 당시 수좌회의에서는 선원장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지만 말이다.


꿈이나 신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래서일까? ‘종림’이라는 법명 옆에는 ‘수좌’, ‘선사’, ‘강주’, ‘화상’이라는 별칭이 붙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는 도반도 없지만 불러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살려 했던 종림 스님이 어떻게 한 자리를 20년 동안 지키고 있었는지, 그 힘은 어디서 솟았는지가 궁금했다. 종단적 관심도 없는 불사인 점을 감안하면 벌써 10여 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터인데, 단순히 책임감 때문일까?


실마리 하나라도 잡아보려 종림 스님을 만나기 전, 그의 저서 ‘종림 잡설 망량의 노래’라는 책을 펼쳤다. 실마리는커녕 궁금증만 커졌다. 스님이 고백한 일언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어도, 신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안암동 대원암으로 향했다. 한영, 탄허 스님이 경전을 번역했던 산사에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이채롭다. 출가 동기부터 여쭤볼 참이다. 스님의 기질로 보아서는 대 원력이 서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출가동기? 없어요. (세속에서는)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느꼈기에 산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입산 첫 느낌은 이 동네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것이었지요.”


원력과 동기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유는 있을 것이다. 어떤 ‘동네’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반문해 온다. ‘자아의 늪에서 허우적 거려본 적 있느냐?’고.


출가 전 종림 스님은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다. 수업은 빠지기 일쑤였고, 도서관만이 그에게 유일한 휴식처였고, 놀이터였다. 빽빽이 들어 선 책장 사이를 산책하며 책 한 권 뽑아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독파해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상계’를 정기 구독해 볼 정도였으니 그의 손에 들려진 ‘문사철’ 서적은 보는 즉시 그의 심중으로 파고들었을 터.


유토피아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중국의 무릉도원, 그리스의 헤스페리데스 동산, 이스라엘의 에덴 동산 등을 거닐어 보았다. 그리스 본디 뜻대로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었다. 이데올로기? 마르크스, 만하임, 소렐, 카시러, 하버마스까지 만나 보았지만 ‘자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쾌락, 고행, 염세주의와 범신론, 유신론까지 들여다보며 ‘초탈’에 천착해 보아도, 융과 프롬을 중심으로 한 심리학과 그 밖의 현상학을 쫓아가 보아도 ‘자아’는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지금의 ‘나’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태어나서 누군가의 가위질에 의해 만들어진 기형의 조형물에 지나지 않는다 보았다.


“그런데 왜 고통은 내가 당하고, 책임져야 하는가. 반면, 그래도 내가 ‘나’일수 밖에 없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일까? 의식일까? 모든 것 다 제하고 그래도 남아 떨어지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지난번까지는 당신의 뜻이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나 말고는 누구도 내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저 동네(불교)에는 뭔가 있을까? 여기보다는 조금은 나을까? 그래서 중이 된 것 뿐입니다.”


출가 결심을 가족에게 알렸을 때 별다른 반대도, 반응도 없었다고 한다. 으레 ‘그럴 것’이란 표정이 반응이라면 반응이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직후 강원에 들어섰다.


전통강원 교육은 그에게 성이 차지 않았다. 급기야 A4 용지 100쪽에 이르는 ‘강원 개혁’서를 해인사 측에 전했다. 도서관, 사교사집 이외의 외전, 전문 강사 초빙 교육 등을 요구했다. 당시로써는 일대 혁신을 도모한 행보였다.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다. 사단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강원 개혁만이 아니라 행정 등의 해인사 자체 개혁까지도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두 파로 나뉘어졌다. 개혁의 선을 강원에 한정시키자는 측과 해인사 전체로 확대시키자는 두 파가 양립됐다. 종림 스님은 후자 즉 ‘해인사 확대’측에 섰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스님은 해인사를 나와 상원사 선방으로 향했다. 실패로 끝난 이 행보는 그러나 중앙승가대 설립의 단초로 이어진다. 훗날, 조계종 개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대승불교승가회의 ‘맏형’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도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스님의 안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방에서도 그를 반기지는 않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시엔 ‘선방 입방 블랙리스트가’가 있었다고 한다. ‘절대 불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학 졸업자, 강원 졸업자, 학생회장 출신이 여기에 해당됐다.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강원에서 2년 동안 공부한 것 외에도 개혁 일선의 ‘주동자’였으니 다소 꺼렸던 것이리라.


종림 스님은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단, ‘무’, ‘마삼근’ 등의 공안을 든 건 아니었다. ‘자신’과 관계된 그 무엇인가를 사유했고, 화두 삼았으며, 집중했고 반복해 갔다. 7년쯤 이르렀을까?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를 글로 옮기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게 있다.


“이제 ‘종림’이를 아무데나 둬도 되겠다고 확신했습니다.” ‘종림’을 에덴동산에 올려놓을 필요도, 이데올로기 한 가운데 서 있게 할 필요도, 도피의 길 언저리에 가 있게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엄청난 심적 변화요 확신이다. 그를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짓눌렀던 ‘존재’, ‘자아’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이후의 행보는 거칠 게 없었다.


해인사로 돌아 와 산사 소식을 전했던 ‘해인’지 편집장을 맡으며 편집권을 얻어 내 독자적이고도 창의적인 잡지를 창출했다. 도서관장을 맡자 1만5천권의 장서가 컴퓨터로 분류되고 대장경 목록이 만들어졌다.


의문 있다면 스스로 답 찾아라

 

▲‘종림잡설 망량의 노래’(호미)를 꼭 한 번 펼쳐보기 바란다. 종림 스님의 철학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시절 스님은 책 한권을 접한다.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 뇌 과학의 고전이라 불린 이 책을 통해 종림 스님은 컴퓨터를 통한 일대 혁명이 전 세계에 일어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8비트 컴퓨터 한 대로 해인사 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돌입했다. 언제 닿을지도 모를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긴 것이다.


“동국대와 함께 ‘통합대장경’불사도 추진 중입니다. 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한문 등으로 기록된 한글, 일본어 대장경은 물론 영역불전까지 망라되는 겁니다.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지리산 화엄사에 1만여 파편 조각으로 남아 있는 신라 화엄석경도 통합대장경에 포함될 예정이니 가히 21세기 디지털 결집이라 할 수 있지요.”


종림 스님은 교장총록 전산화 작업과 함께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구상 중에 있다. 인공지능 시스템을 접목시키는 것이다. 키워드 ‘연기’ 하나만 치면 고려대장경 내 연기 관련 내용은 물론 외전 즉, 사회과학적, 문학적 ‘연기’도 함께 뜨는 것이다. 물론 전문팀을 구성해 이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니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고려대장경 전산화와 통합대장경 불사가 새로운 불교문화 지평을 열어줄 것임은 분명하다. 화석화 된 대장경이 아니라, 이 시대에 다시 살아 숨쉬는, 아니 지금의 문명이 더해진 생명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 불사에 대한 가치는 알고도 남음이 있으나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종림 스님은 이 전산화 불사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기에 20여년을 매달려온 것일까.


“자아의 벽을 깨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하는 일입니다.” 아지랑이다. 뭔가 보일듯하지만 확연하지 않다. “대장경은 최고의 지식문화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와 설화, 시대상, 사전 등이 모두 포함돼 있는 당대의 ‘포털사이트’입니다. ‘문화콘텐츠의 보물창고’라고도 할 만하지요. 무엇을 찾는가. 무엇을 조합해 내는가. 갈무리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는 자신의 몫입니다.”


길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관심이 있다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 ‘포털’로 들어 와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인식, 사유, 사상의 변화까지도 스스로 도모하고 갈무리 해 보라는 주문이다. ‘자아의 벽을 깨는 수단’이 되기를 바랐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부처님 말씀을 중심으로 연기, 중도, 무아, 공을 직접 확인해 가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나름대로의 의문이 일 것이고, 나름대로의 갈무리가 있을 것이다. 종림 스님도 그러하다. 스님의 사유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불변의 실재나 법칙 따위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꿈이 우리의 삶을 뒤틀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해석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 이런 것이 큰 장애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을 엉터리로 살게 만드는 가장 큰 빌미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천국으로 이끌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제 직관과 논리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어도, 신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우리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자기 속의 부처님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하느님의 얼굴이 악마의 얼굴로, 자기 속의 부처님이 환상으로 바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비추어 보는 힘과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고려대장경과 통합대장경이 그 안목을 넓히는데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자신을 비추는 건 자신만의 몫이다. 종림 스님은 “이 시대에 벌어지는 현상을 불교적으로 해석해 내고 싶다”고 했다. 이 한마디를 통해 직감할 수 있는 건,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이 완료되면 종림 스님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땅 위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종림의 혜안’으로 이 세상을 그려 낼 것이다.


“나의 가장 멋있는 모습은 고원의 벌판에서 괭이 들고 땅 파다가 석양을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뜻이리라. 종림 스님은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정조준 할 사람이 아니다. 스님의 고백했듯이 ‘화살 떨어진 곳이 과녁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화살 떨어진 곳이 과녁임을 확신하고 있다. 벌써 고려대장경 전산화 불사가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멋진 삶이다. 이 시대 지성인들이 스님에게 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자아’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출가
선방 수행 7년 만에 ‘존재’ 해결
8비트 컴퓨터 한 대로 전산화 시작
연구소장 10년 만에 대장경 CD로
자신 비추어 보는 힘 키우고
세계 바로 보는 안목 넓혀야
괭이 들고 땅 파다 석양 보는 모습
내가 그리는 가장 멋진 그림!

 

법보신문 제1132호 / 2012-02-08

출처 : 불력회
글쓴이 : 德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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