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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8. 마음

제1부 아름다운 인연

 

 청화큰스님 남기신 말씀

마음 - 부처가 사는 나라



   此世他世間   이 세상 저 세상

   去來不相關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報恩恨細澗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차 례


  서문|생과 사를 뛰어넘은 대자유의 삶을 좇아ㆍ6

  청화큰스님 행장ㆍ227



   아름다운 인연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ㆍ13

  참다운 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ㆍ26

  부처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보살의 계율ㆍ46

  내 안에 무량광명無量光明을 켭시다ㆍ73

  하나라는 도리를 떠나지 않아야ㆍ92



  본래의 자리, 본래의 성품으로


  가장 쉽고 확실하고 보장받은 성불의 길, 염불ㆍ111

  무엇이 바른 명상법인가ㆍ132

  계율만큼 합리적인 도덕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ㆍ155

  중도실상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다 포함된 자리입니다ㆍ163

  우리 몸에 가장 완전한 보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일ㆍ173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성불의 고향으로 인도하는 금륜金輪의 수레바퀴ㆍ185

  부처님 오신 날, 자비와 지혜로 아롱진 등불을 켜들라ㆍ189

  오늘을 살아가는 최상의 바른 지혜ㆍ195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ㆍ199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ㆍ205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ㆍ209

  나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ㆍ217

  마음의 세계ㆍ223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 생과 사를 뛰어넘은 대자유의 삶을 좇아 ▒



청화 큰스님이 열반에 드신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생과 사가 모두 무상한 것인 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스님의 열반 앞에서 우리 제자와 문도들은 참으로 크나큰 슬픔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오늘까지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열반을 당하여 장맛비 같은 눈물을 뿌리던 아난과 같이, 우리는 평소 큰스님에게 받은 자비에 대한 감사와 아쉬움을 세세토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우선 급한 대로 이 작은 책을 묶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새삼 음미하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청화 큰스님은 일찍이 백양사 운문암 금타화상의 문하로 출가한 이래, 반백년이 넘게 오로지 수행과 교화에만 헌신해 오신 종문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출가 이전부터 사재를 헌납하여 학교를 세우시더니, 출가 후에는 눈 푸른 납자로서 염불선을 주창하시어 선문의 종장으로 이 땅에 부처님의 법을 구현하신 출격장부이자 대선지식이셨습니다. 평생을 제방선원에서 일종식으로 일관하시며 오로지 생과 사를 뛰어넘는 자유를 위하여 혼신을 바치셨습니다.



특히 20여 년 전부터는 동리산 태안사에서 감로의 문을 열고 사부대중을 제접하시니, 이로부터 사마외도(邪魔外道)는 입이 막히고, 미륜중생(迷倫衆生)은 비로소 눈을 열게 되었습니다. 실로 큰스님의 법상 아래서 번뇌의 불을 끄고 업장을 닦아낸 자의 수가 동리산의 참나무보다도 많았거니와, 큰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뵈올 때마다 저희 제자들뿐만 아니라 산천의 초목들도 머리를 숙였습니다. 큰스님께서 보여주신 크나큰 법력과 가르침으로 인해 불일(佛日)은 참으로 그 빛을 더했다고 할 것입니다.



큰스님의 많은 가르침과 무거운 말씀 가운데, 사부대중이 가장 쉽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을 우선 간추려 책으로 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바른 공부는 부처님 공부밖에 없다던 큰스님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기면서, 큰스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더불어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불기 2548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곡성 성륜사에서 주지 도일 합장



 

제Ⅰ부 : 아름다운 인연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같이 그렇게 다생겁래로 이른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닦아 오신 성자는 아무런 고통 없이 평생 잘 지내신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 같으신 분도 당신 평생에 열 번이나 곤란한 경우를 겪으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을 가장 시달리게 한 사람이 자기 친종제 제바달다(提婆達多) 아닙니까? 제바달다는 종제이면서도 심지어 부처님의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한 아주 표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가 다 부처님 스스로 받은 업(業)의 보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업이라는 것이 굉장히 지독한 것입니다. 겪어보면 업을 짓고서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업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몇 십 년이 아니라 몇 겁, 몇 천 겁의 세월이 흘러가도 한번 지어놓은 업은 소멸이 안 됩니다.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지은 삼업의 굴레

  그 업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우리 뜻으로 짓는단 말입니다.

  가령 남을 한번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저 사람 참 고약하다, 차라리 어디 가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 생각을 찰나 동안만 해도 그것이 소멸이 안 됩니다. 그 생각 하나로 자기의 온 세포가 오염돼 버립니다.

  또한 우리 생명은 나뿐만 아니라 우주와 더불어서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저 다른 나라에 있는 돌멩이 하나나 여기 있는 나뭇가지 하나나 모두가 다 같은 인연 가운데에서 생겨나고 변화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화엄계에서 말하는 중중무진입니다. 얽히고설키고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인연 가운데 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도 제바달다한테 당한 만큼 부처님 역시 과거 전생에 제바달다를 못살게 굴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누구나 부처님 공부 가운데는 참선하는 공부가 그야말로 가장 높은 공부고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므로 기왕이면 참선을 좀 했으면 쓰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형편상 선방에도 갈 수 없고 또 그때그때 절을 찾아가 재가불자님들과 더불어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니까, 참선은 도저히 안 되겠구나, 이렇게 체념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참선은 사실 천하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것은 천하에 쉽고 좋지 못한 것은 천하에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만을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다 근원적이고 실존적입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렇습니다.



  -참선염불은 업 덩어리를 녹이는 가장 빠른 길

  우리가 기왕 불법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출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속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를 다 씻어버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도리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영원한 도리를 알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출가자 아닙니까? 따라서 비록 출가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세간에 대한 집착을 못 떠나면 그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출가(身出家)ㆍ심출가(心出家)라, 몸으로 출가하고 마음으로 출가해야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출가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느끼고 진리는 분명히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명백합니다.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 있으면 그때는 진리가 아니고, 아견이 없어야 진리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현상 아닙니까? 이런 것은 다 인연생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나 내 관념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하나의 상인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이는 대상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꿈이나 허깨비와 같단 말입니다. 꿈이 실제 있습니까? 허깨비가 실제 있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그러면 어째서 바로 보지를 못하는가, 업장 때문에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금 업장덩어리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업숙체(業熟體)라, 업덩이에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참선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얽히고설킨 업덩어리를 녹이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은 무엇 때문에 지키는 것인가,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하면 업덩어리가 녹지 않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말라

  우리 불자님들은 결연히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우리한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불(成佛)이라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을 꼭 그대로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닦으므로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또 선정에 들어가야 참다운 깨달음을 얻는단 말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한 공식과 같습니다. 정확한 수학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인 모든 것을 다 달관해서 체계화시킨 그런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우주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 말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시대를 초월하고 모든 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우주의 모든 문제를 다 포괄합니다. 기독교 진리나 유교 진리, 또는 현대 물리학 같은 것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으로 볼 때에는 안 풀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간에 주인공 자리, 우리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공 자리는 내내야 마음자리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니까요. 그러나 남을 미워하고 남을 좋아하고 욕심을 내고 진심(瞋心)을 내고 나는 김아무개다, 나는 누구 남편이다, 나는 누구 아내다....... 이런 것은 참다운 자기면목, 본래면목 자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문제,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이란 것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지우주가 모두 다 일미평등한 불성뿐이다

  현대물리학도 증명하다시피 모든 존재는 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로 합해져 있습니다. 세상만사 눈에 보이는 것을 분석해 놓고 보면 다 원자(原子)가 되지 않습니까. 원자는 소립자로 구성되고, 또 소립자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알 수 없는 우주정기로 꽉 차 있단 말입니다. 그 알 수 없는 우주정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물리학이 모르는 분야입니다. 왜 모르는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이라는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어야 축적이 되는 것인데, 시간과 공간을 떠나 있으니 물리학은 알 수가 없지요. 알 수가 없지만 신묘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눈방울이나 물방울이나 공기나, 원자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가 다 근원자리에서는 하나의 신비로운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성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릅니다.

  나는 여기에 있고,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저 멀리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것은 오직 그 진여불성뿐입니다.

  육식(六識)이 있고, 그 밑에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잠재의식이 있고, 그보다 깊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는데, 그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생명체인데 그 자리가 이른바 불성입니다.

  그 근원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분들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자기 스스로 근본자리하고 하나가 되어야 성자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몇 년 또는 몇 개월 동안 애쓰고 공부하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냥 보통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업장이 가벼운 분은 빨리 되고, 업장이 무거운 분은 더디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 근본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꼭 붙습니다. 가령 하루 참선하면 하루 참선한 만큼 마음도 몸도 맑아지고 우리 건강도 더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참선을 하지 못하면, 이른바 상을 여의지 않거나 근본을 여의고서 하는 공부는 그렇게 안 된단 말입니다. 근본을 여의고 하는 공부는 몸도 안 풀리고 마음도 안 풀리고 참선공부에 따르는 법열(法悅)이나 행복감도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참선을 할 때는 꼭 그 근본자리, 본래면목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우선 중요한 것은 '천지우주가 모두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뿐이다' '진여불성뿐이다'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육조단경』에 보면 불성ㆍ자성에 관한 말씀이 일백 군데가 넘습니다. 불성ㆍ자성에 대해서 얼마나 역설을 하셨기에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따라서 불성자리, 자성자리, 본래면목 자리,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해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화두를 참구(參究)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참구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선 이치로 '천지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다'라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의 구분이 없습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나와 남의 자리를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그 진여불성 외에 다른 것은 없는 자리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근원을 못 본 채 가상적인 상만 봐서 그럽니다. 『금강경』을 보나 『반야심경』을 보나 모두 제법공(諸法空)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원래 물질이란 것은 있지를 않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말을 가장 명백하니 말씀한 분이 부처님 아닙니까?

  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보다도 훨씬 먼저 태어나신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분들도 역시 실존이 무엇인가, 우주가 무엇인가, 로고스가 무엇인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시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다락방에서 안경알을 닦으며 자기 생계를 유지해 가면서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분의 체계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범신론(汎神論)입니다.

  우선 불자님들, 철학을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신론과 범신론의 차이는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범신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은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부처님 사상은 특히 철저합니다.

  기독교신학에서는 이 범신론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브루노라는 분은 16세기의 위대한 천주교 수사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이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에서 주장했던 것, 즉 일신론과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식의 이론을 반대했습니다. 저는 하도 비참해서 연대를 외우고 있어요. 1600년 2월에 그분은 불태워져 죽었습니다.

  부처님 사상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입니다. 다행히 기독교인 중에서도 이단시당하거나 심판을 받으면서도 범신론을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나 19세기 슐라이어마허 같은 분들은 기독교인인데도 당당히 범신론을 주장하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모든 원리가 둘이고 셋이면 우리 마음이 안정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로 통일되어야 우리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안정이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 존재가 신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가르침은 차근차근 우주를 통일해 갈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에 마음을 두면 모든 행동이 다 참선이 된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경계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이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그때그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별의별 경계가 다 나옵니다. 그러나 경계라 하는 것은 사실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모양을 하는 경계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관세음보살과 같은 경계도 나올 수가 있고, 또 광명(光明)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비교적 더 좋고 나쁜 것은 있겠지요. 그러나 좋고 나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가 나오든지 간에 제아무리 재미스럽고 환희스러운, 그야말로 광명 찬란한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면 되레 악화됩니다. 그래서 집착은 하지 말고 근원적인 생명의 본래자리, 한도 끝도 없는 진여불성의 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무량광불 자리고 진여불성 자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가 원만하고 충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문수보살이고, 또 전체로 보면 아미타불인데, 모두가 다 우리 불성공덕입니다.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아서 그와 같이 여러 갈래로 이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본래의 자리는 똑같이 우주의 근본자리, 일미 평등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일미 평등한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해야 우리가 근본을 안 떠나게 되고,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똑같은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단순히 복을 비는 자세에 얽매인 채 상에 걸리면 그때는 참다운 염불이 되지 못합니다. 같은 염불도 염불참선이라,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떠나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기독교를 오랫동안 믿은 분들은 진여불성 자리를 하느님이라 생각하고 '오 주여' 하면서 공부해도 되지요. 그것 역시 하나의 참선이 됩니다. 꼭 불교적인 이름만 붙여야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본래고향 자리,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면 그때는 화두를 드나 화두를 안 드나,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나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아무런 벽이 없습니다.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와서 거기로 갑니다. 업을 많이 지으면 더디 가고, 윤회전생을 많이 하겠지요. 우리 업이라는 것은 수백 겁 지나도 우리가 보상해야 합니다. 그 업 가운데서 먹는 것과 이성간에 사귀는 것, 그것을 꼭 떼어야 업이 녹아서 윤회를 하지 않고 해탈로 갑니다.

  우리 선배들 가운데 그런 깊은 삼매에 못 들어서, 알기는 제법 알지만 함부로 행동한 분들이 없지 않아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오(解悟)는 조금 쉽게 이룰 수 있지요. 그러나 증오(證悟)는 깊은 삼매에 들어야 가능합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가운데 "가령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 하늘꽃 감동하고 돌멩이 끄덕여도,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로다[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漚]"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선정의 물이 없는 바싹 마른 지혜[乾慧], 곧 허망한 분별지혜로는 생사의 업을 못 녹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분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분이나 생각 생각에 부처님 자리, 자기 본래면목 자리, 영원한 마음의 고향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최선의 길인 부처님 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


                     [- 불기 2547년 2월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