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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8. 마음

제2부 가장 쉽고 확실하고 보장받은 성불의 길, 염불



제Ⅱ부 : 본래의 자리, 본래의 성품으로


  ●가장 쉽고 확실하고 보장받은 성불의 길, 염불



  -가장 소중하고 급박한 것은 자성을 깨닫는 일

우리 인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인가를 아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문 중『화엄경(華嚴經)』「문수보살품(文殊菩薩品)」에 심시보장제일법(心是寶藏第一法)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른 믿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보배라는 뜻입니다. 바른 믿음이 부족하고 바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라서 바르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무지를 극복하고 바른 믿음이 되어야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르는 순수하고 거룩한 행동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혹시 "아, 나는 내 근본성품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 우리 중생들은, 근본적으로 교양이 있고 많은 수행(修行)을 했다 하더라도 인간성의 순수성과 순수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범부중생(凡夫衆生)의 통상(通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자(聖者)가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자성(自性)을 압니다. 자성,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인간성의 순수한 자리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이것이 자성입니다.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 자성이고, 우주성(宇宙性)이 자성입니다. 또 요즘 말로 표현하면 우주생명이나 우주에너지나 다 같은 말로서 자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자성은 우리 중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며 깨달은 성자의 분상에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잠시간 자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자성은 어느 때 어느 순간이고 우리를 떠나 있지 않는 것입니다.

불성이나 법성이나 자성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와 떨어져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실존적인 현재 이래로 항시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우리 자성은 금생에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세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나지 않고 죽지 않지요. 무시이래(無始以來)라, 과거에 시작함이 없어서 과거도 비롯함이 없어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미래도 끝도 없이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우리 자성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자성은 인간에게는 인간성의 본질이요 본래면목이지만, 다른 동물이나 일반 무생물에는 어떠할 것인가' 의문을 갖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인 이 자성은 사람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 나아가 모든 존재의 본질인 동시에 실상(實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소중하기는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또 가장 급박한 것이 바로 우리 자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성을 깨달으면 성자고 깨닫지 못하면 범부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성불성을 깨닫는 것은 가장 쉬운 일, 단지 소홀히 할 뿐...

자성이 이와 같이 소중하고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보통사람들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들을 합니다. 성인들은 업장이 가볍거나 소멸시킨 분들이고 다른 전생에서 많이 닦아 금생에 성인이 된 것이지, 중생들은 쉽게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간성 본래자리인 자성불성을 깨닫는 것은 사실 가장 쉬운 것입니다. 다만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잘못된 습관으로 버릇이 잘못 굳어져버린 것뿐입니다. 자성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도 우리한테서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대세지보살이나 보살님들 이름도 많고 부처님 명호(名號)도 많습니다. 그 보살님들이나 부처님 명호의 실상이 바로 우리 자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방편으로 취한 말씀이 많기 때문에, 같은 뜻인데도 그릇 따라 달리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성불(自性佛) 또는 법성(法性) 또는 실상(實相), 실재(實在), 주인공(主人公), 하나의 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뜻이 자성과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기 때문에,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 우리가 되찾고 깨달아야 할 것이 불성인 동시에 자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성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느끼고 있단 말입니다. 가깝기도 하고 또 지금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많은 도인들 가운데서 특히 조주(趙州) 스님 같은 분은 자성에 대해, 우리가 지금 추구도 하고 그때그때 공부하는 것은 "마치 소를 탄 사람이 소를 찾고 있는 격"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본성이 자성이고 불성이 자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중생들이 잘못 알아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 저 피안(彼岸)이나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서 구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은 자성이 바로 불성이고 법성이며, 그 자리는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생명 자체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바이블의「마태복음」에도 '먼저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지리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굉장히 소중한 성자의 말입니다. 밥 먹고 결혼하는 것보다 먼저 진리를 구하란 말입니다.



  -일상생활을 승화시킨 공부가 바로 자성을 구하는 공부

우리 불경(佛經)을 보아도, 자성이 내 성품이고 우주의 성품이고 도리이기 때문에 자성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제일 요긴한 일입니다. 더러는 자성을 구하는 일이 그렇게 소중하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을 물리치고서 어떻게 자성을 구할 것인가, 염려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일상생활을 무시하고서 자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화, 장엄시킨 공부가 바로 자성을 구하는 공부입니다.

불성자리는 너의 본성인 동시에 나의 본질이고 우주의 본성이고 우주의 근본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본래 생명이라는 자성자리를 사실 우리 중생들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근본성품인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에 대해서 부처님은 아주 절묘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자성불성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만 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행복으로 보나 어떤 자리보다 완벽한 것이 자성자리입니다. 곧 불성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나아간 만큼 행복도 지혜도 건강도 훨씬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 것입니다. 실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 해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몇 천 분의 일도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 내 자성, 우주의 본성에 있는 공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어...

우리 불자님들은 원자력(原子力)의 무서운 힘을 짐작하시지요? 눈에 안 보이는 원자핵(原子核)에 들어 있는 무시무시한 지혜, 즉 원자핵체(原子核體)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 같은 여러 물리학자들이 아주 소상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원자핵이라는 것은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마는 그 구조가 태양계 구조와 똑같다고 합니다. 다만 크고 작은 차이만 있는 것이지 태양을 중심으로 위성이 도는 것과,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도는 것과 이치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의 소립자(素粒子)나 경계는 하나의 방사선(放射線)이고 광량자(光量子)이고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빛이란 것은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 이상 간다 하지 않습니까.


원자폭탄의 위력을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했지요.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이 사실은 우주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자로 구성되지 않은 우주의 물질이 있습니까? 우리 몸뚱이라든가 흙이나 물이나 공기나 돌이나 모두 원자로 구성되지 않았습니까. 그럼 원자는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원자는 오직 하나의 에너지다. 우주는 오직 통일된 하나의 힘, 즉 에너지가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근원(根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모릅니다. 어째서 물리학에서는 모르는가 하면, 물질을 떠나보낸 순수한 생명의 자리, 이른바 시간과 공간을 떠나버린 자리는 증명(證明)할 수 없으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지만 한도 끝도 없는 에너지가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과감하게 상식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야...

우리 중생들은 너무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자기를 생각할 때 자기 몸뚱이를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주의 진리 그대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 상식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상식을 버려서 진리에 따라야지 상식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뚱이는 자성이 아닙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아셔야 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과거 생에 우리가 지은 업대로 금생에 받은 허상이고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 몸뚱이는 자성에 들지 못합니다.

자성이나 불성은 영원히 죽지 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생불멸하고 무시무종한 생명 자체입니다. 따라서 자성은 비단 나의 자성으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자성이나 우주의 자성이나 모두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일원적(一元的)으로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아닌 이원적ㆍ삼원적인 말들은 모두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일원적 진리를 아시게 되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마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 얼음을 넣으면 금세 녹아버리듯이 문제가 모두 녹아버려서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인 것이고 하나의 생명은 만덕(萬德)을 갖춘 자리입니다. 학문적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불성자성은 물듦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식을 많이 알고 이것저것 따지면 자성을 성취하는 데 소홀해지고 거리가 멀어집니다.



  -몸뚱이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무지무명에서 벗어나야...

석가모니부처님은 인도에 태어나셔서 2천 5백 년 전에 열반(涅槃)에 드셨다 하더라도 부처님 기운, 그 에너지는 우주에 그대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생명도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해서 조금도 이울어짐이 없고 변동이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성자들의 에너지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내 몸뚱이가 내 존재고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생각 때문에 우리의 참다운 생명이 발동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자기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제로 자기가 이 몸이 아닌 것을,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자기가 아닌 허깨비에 불과한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명심(無明心)을, 무지한 마음을 떠나야 합니다. 학문을 많이 알지 못한다 해서 무지하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그 일원적인 우주의 생명, 내 생명의 본체를 모르면 무지한 것입니다. 무명이란 말입니다. 무지무명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 되고 부부간이나 가정을 위해서도 도움이 못 됩니다.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도 어떠한 의미에서나 진리와 더불어 해야지, 진리는 진리대로 겉돌고 자기가 아는 것만 고집 부리면 그 무명 때문에 또다시 윤회(輪廻)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도 우리 사람과 절대로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잠시간 업의 차이 때문에, 전생에 지은 업의 차이 때문에 개의 명(命)을 받고 소의 명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자성불성은 언제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너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니고, 성품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의 자리인 것을 안다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소홀히 대하는 그런 이기심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다른 분들이 아닙니다. 성인들은 우주의 도리 그대로 사는 분들이고, 우주의 도리는 자성불성을 떠나지 않고 자성불성의 도리대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자성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때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자성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산소나 수소나 탄소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물질은 다 그런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것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란 말입니다.



  -자성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자성을 깨닫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인가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자성을 깨닫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누누이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 가운데에도 난행문(難行門)ㆍ이행문(易行門)이라,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쉬운 문이라 해서 옆으로 빗나간다든가 해서는 안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묘(妙)하고 긴요(緊要)하게도 가장 쉬우면서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명심하셔서 가장 쉽고도 확실한 길을 택해서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한국 불교에도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문제를 성자나 도인들이 우리한테 제시해서 문제를 느끼면 우리가 그것을 문제로 삼아서 의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가령 내 생명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품는 방법이 있습니다. 데카르트같이 회의적인 방법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에 본래가 부처라 했는데, 본래 다 자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새삼스레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 저 같은 스님 네가 속해 있는 조계종(曹溪宗)은 주로 의심하는 방법을 택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원불교(圓佛敎) 등은 의심하지 않고 자성불성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 잠자코 명상만 하는 방법을 주로 취합니다.

또 불교국가라고 자부하는 일본 사람들은 불성자성을 찾기 위해서 의심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고 의심 않고 잠자코 명상을 해서 구하기도 하며,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인 염불(念佛)을 취하는 파도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는 본래 자기의 참 이름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더불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만유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만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병아리 한 마리도 부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어떤 조그마한 것 가운데에도 만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원자 가운데에도 헤아릴 수 없는 기운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 한 그루나 흙 한 덩이나 또는 물속에 사는 어느 것 가운데에도 무량한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좀 더 쉽게 말하면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래서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진여불성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도리에 다 들어가니까 우주는 바로 진여인 동시에 진리입니다. 진여와 진리가 같은 말이며 그 자리는 바로 불성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과거 생에 업을 잘못 지어서 금생에 잘못 태어나고 소아마비가 되고 여러 가지 불행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 업으로 해서 금생에 잠시간 받는 겉모양인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예수나 다른 성자한테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 자리는 모두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 하나의 불성자리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니까, 하나의 생명자리를 못 보니까, 서로 다투기도 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분쟁과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도가 나오고 규제도 하지마는 그런 걸로는 우리 인간세상의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몇 천 년이 가도 몇 만 년이 가도 우리 인간이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전쟁도 끝나지 않고 불행도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비극은 절대로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이 내 마음이 불안하다, 머리가 아프다 할 때 이런 것들은 마음의 불안 때문에 옵니다.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 우리 몸뚱이에게 반응을 하게 합니다. 마음이 생명의 주인이고 몸뚱이는 우리 생명에 입히는 옷이나 같은 것입니다.


제일 쉬운 방법, 그 제일 쉬운 방법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방법입니다. 부처님 명호 외우는 것이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째서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인가? 그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는 본래 자기의 참 이름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이고, 부처님 자리가 바로 우리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된 버릇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버릇은 갑자기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깰 수 없는 버릇을 우리 중생이 깨는 방법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것이 제일 쉽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진리를 부르는 것

  옛날 할머니나 부모님들은 항상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셨습니다. 그것이 너무 쉬워 보이기 때문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마는 명호를 부르는 것은 바로 부처님 그 자체, 진리의 당체(當體)를 부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분들의 마음이 정화되고 또 우리 마음도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킵니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어서 내가 정화되면 우주가 정화되고 우주가 정화되면 나 스스로도 그만큼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다 우주와 더불어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자기한테 붙은 나쁜 습관을 떼고 부처님한테로 가는 제일 쉬운 방법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인데, 그 나쁜 버릇이 깊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상응해서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지속적으로 공부하면 어떤 효험이 있고 어떤 공덕이 있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은 무한의 공덕장(功德藏)이라, 공덕의 창고와 같단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능력이나 행복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가운데에도 온전히 들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느끼는 공덕이나 지혜, 공자가 느끼거나 갖고 있는 공덕이나 지혜가 우리에게도 흠절 없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계발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 자체가 불가사의하다

성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꿔가지고 빌려가지고 와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니까 이것을 가리고 있는 나쁜 버릇만 걷어내면 됩니다. 걷어내는 작업이 어렵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버릇 걷어내는 작업은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걷어내면 그만큼 우리한테 행복감이 오고 많이 걷어내면 또 그만큼 훨씬 더 풍족한 행복감이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염불해서 염불에 일념(一念)이 되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외의 다른 이름도 무방합니다. 지장보살도 무방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다 신통합니다. 다 신통한 것인데, 이른바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은 자비로운 쪽으로 우주의 인력(引力)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면 부른 만큼 우리한테 행복이 옵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지으신 부처님의 명호에는 우주의 생명이 다 담겨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면 우주생명과 같이 상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처님 이름은 이름 자체가 불가사의하단 말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염불만 한다고 하면 얼마나 큰 공덕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학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도인 말 듣고 하는 그런 큰스님들도 하루에 나무아미타불 십만송(十萬頌)도 하고 오만송(五萬頌)도 하는, 그만큼 공덕이 큰 명호입니다.


우리한테 어떤 병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병도 역시 우리의 무지와 나쁜 버릇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를 외워서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면 웬만한 병은 다 물러가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아, 내가 무던히도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는데 나한테는 단박에 공덕이 오지 않는다'고 의심할지 모르나, 그렇게 단박에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거세에 지은 업이 있단 말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업이 상쇄가 됩니다. 금생에 공부를 별로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거 업이 가벼운 분들은 보다 빨리 마음이 바꿔지겠지요.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염불을 하면 그때는 몸도 가벼워지고, 평소에 듣지 못하는 신묘(神妙)한 우주의 음(音)을 다 듣게 됩니다. 이른바 천상묘음(天上妙音)이란 말입니다. 천상 멜로디를 듣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더러는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하는 신선한 광명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의 순수한 생명은 바로 광명이요 빛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빛에 관한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새겨서 풀이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하나의 광명생명(光明生命)이란 말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중단이 없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행복을 끝도 가도 없이 본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자기 왜소나 자기비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심지어는 단두대 위에서라도, 자기가 금생에 인연 따라서 잘못되어 사형당하는 단두대 위에서라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은 금생의 이 몸은 업신(業身)이라, 업의 몸은 어차피 가는 것이고 한 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어야 되고 만난 것은 응당 헤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 자체는, 우리 본 주인공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절대로 중단이 없습니다. 영생(永生)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명이 영생한다는 신념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까지 자기 이웃의, 또는 자기를 위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드릴 수 있었던 것은 참다운 자기를 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원수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는데, 그것을 모르니 '저놈은 나쁜 놈이다' 하고 차별을 합니다. 바로 그 마음이 원수고 그 마음이 우리를 불행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는 무량광명이고, 한없이 청정한 청정광불(淸淨光佛)입니다. 또 끝도 가도 없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무변광불(無邊光佛)입니다. 그와 같이 광명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할 때도 기왕이면 본래 부처의 자리가 광명자리니까, 우주에 충만한 광명자리니까, 광명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염불하면 염불도 훨씬 더 잘되고 공덕도 좀 더 빨리 우리한테 다가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성불의 길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놓치지 마시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잊지 말고 외우십시오. 잠이란 것은 그야말로 우리 생명을 좀먹는 망상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자는 동안은 결국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급적이면 잠을 적게 주무시고 순간도 잊지 말고 명호를 외우십시오. 잠을 적게 잔다고 해도 우리 마음이, 신심이 사무치면 절대로 건강에 해롭지 않습니다.



  -우주의 생명대명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우리 불자님들, 음식을 절대로 함부로 자셔서는 안 됩니다. 음식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몸에 들어오면 어느 정도는 영양이 되고 생명을 지속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지나치면 소화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공부에도 대단한 해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마시고, 특히 할 수만 있다면 육식을 꼭 금절(禁絶)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하나라고 생각할 때 금생의 개나 소나 닭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또 과거 전생에는 그 짐승들이 우리와 똑같은 형제간 또는 친구 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도 소승계율(小乘戒律)에서는 조건부로 육식을 허용했지만, 대승경(大乘經)에서는 일체 육식을 다 금지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승은 훨씬 더 많이 먹으니까 고기 먹는 것을 용인하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마는 결코 용인한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에서는 근기가 약하니까 고기 먹는 버릇을 갑자기 끊으면 혹시 장애가 있을까 해서, 동물을 죽일 때 보지 않고 또 동물이 자기 때문에 죽지 않는 등의 몇 가지 조건을 붙여서 잠시 먹는 것을 허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대승경에서는 근기가 훨씬 더 수승(殊勝)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히 금지했습니다.『법화경』또는『화엄경』도 다 육식을 금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신수봉행(信受奉行)해야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금생에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고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살로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을, 소중한 우리 마음을 오염시켜서는 안 됩니다. 고기를 안 드시면 머리도 훨씬 맑아지고 집안일도 잘 풀립니다.


육식을 많이 하면 정말로 우리 피가 오염됩니다. 오염되면 몹쓸 병들이 많이 생기겠지요. 그러니 절대로 그런 것 드시지 말고 가장 쉽게 공부하는 법,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바로 광명명호(光明名號)라, 빛의 명호란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대명사(生命代名詞), 그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한 번 외우면 한 번 외운 만큼, 또 단 며칠만 해도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됩니다. 그러면서 익어지면 저 영원의 에너지, 영원한 생명의 광명 가운데에서, 환희심 나는 가운데에서, 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일 쉽고, 확실한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공양을 자실 때도 속으로는 염불하십시오. 소리를 안 내도 무방합니다. 소리를 내나 안 내나 다 좋습니다.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끊임없이 염불을 하셔서 꼭 금생에 성자가 되시고 부처가 되십시오. ◈ 



    [- 불기 2545년 5월 제주도 자성원, 아미타부처님 점안식 기념법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