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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산당 금타 대화상/금타(金陀) 대화상

[스크랩] 벽산금타 -- 불교신문

벽산금타

 
 
 
참선 수행과 교학은 물론 현대 물리학과 수학, 천문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벽산금타(碧山金陀, 1898~1948)스님. 지난 2003년 11월 입적한 청화(淸華)스님의 은사인 금타스님은 불성을 찾는 공부와 우주의 질서및 진리를 아는 일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금타스님의 수행 일화를 비문과 <벽산선요(碧山禪要> <금강심론(金剛心論)> 등을 참고하고, 강릉 성원사 회주 주경스님과 서울 광륜사 주지 광전스님의 도움으로 정리했다.
 
 
 
“잘못 보면 망상 되고, 바로 보면 참 깨달음 된다”
  
 
  불교우주관 제시, 한글 보완 관음문자 ‘창제’
 
  참선수행은 물론 현대 물리학에도 깊은 조예
 
 
○…구한말에 태어나 외세의 침입을 목도한 ‘청년 김영대’는 독립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절감했다. 스물두살 되던 해인 1919년 무장(茂長) 고창(高敞)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왜경(倭警)의 마수를 피해 산사(山寺)로 피신해야만 했다. 몸을 의탁한 고창 문수사는, 고모가 크게 시주한 인연이 있는 도량이다. 일본 경찰의 단속이 미치지 못하는 절에서 ‘청년 김영대’는 자연스럽게 불경(佛經)을 읽게 됐다. 이때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며 불교의 진수를 맛보았다. 며칠 밤을 새워 <금강경>을 읽으며 세속에서 느끼지 못한 환희심을 갖게 됐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했다. 당시 문수사 주지스님과 상의한 후 최종 결심을 하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장성 백양사로 갔다. 그곳에서 만암(曼庵)스님을 친견하고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사진>금타스님 진영. 1930년대 중반이지만 지금과 같은 복식의 승복을 수했다.
 
○…당대 선지식 만암스님 회상으로 출가하여 정진한지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참선 수행과 교학 연찬을 병행하며 부처님의 진리를 공부하고 익히는데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 1936년 10월27일 인시(寅時, 오전3-5시)에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의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후 스님은 정각에 머물지 않고, 더욱 깊이 정진하며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1936년 동안거에 들어 정진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신이(神異)한 일이 발생했다 선정에 든 금타스님의 눈앞에 홍안백발(紅顔白髮)을 하고 긴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나타나 전금색(傳金色)의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두루마리에는 ‘陀(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스님은 만암스님에게 수계 받을 당시 법명인 상눌(尙訥) 대신 금타(金陀)를 사용했다.
 
○…금타스님은 주로 백양산과 내장산에 있는 산사에 주석하며 정진했다. 백양사 운문암에서 씨앗을 뿌리는 울력을 할 때 였다. 한 사람이 운문암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쓰러졌다. 밭에서 일하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대중이 달려가 살펴보니 입술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짚신을 삼는 ‘신방’으로 그 사람을 옮긴 후 금타스님에게 사실을 전했다. 그를 살펴본 금타스님은 “신장이 한 일”이라면서 신장단(神將壇)으로 옮겨 “미혹한 중생의 소행을 허물치 말라”고 고(告) 했다. 그러자 정신을 잃고 숨마저 고르지 못했던 그 남자의 숨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는 약초를 캐러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깨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개고기를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운문암에 당도했는데, 누가 갑자기 머리를 때리는 것 같이 정신이 아찔했다. 그 뒤로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운문암 스님들이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저를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며 금타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참회한 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만해사상연구회가 펴낸 <한용운 사상연구> 2집에는 금타스님 관련 내용이 기록돼 있다. 만해스님이 일제에 반대해 북향으로 지은 심우장(尋牛莊)의 토지를 금타스님이 보시했다는 내용이다. ‘심우장 견문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 … 자주 방문하는 김벽산 스님이 자기가 초당(草堂, 억새나 짚 같은 것으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을 지으려고 송림중(松林中)에 52평을 매수(買受)해 둔 것이 있었으나 번의(飜意)하고 선생에게 드리겠으니 몇간(間)을 지어 보시라고 진언(進言)하므로 … ” 여기에 등장하는 김벽산스님이 바로 금타스님이다. 금타스님이 만해스님에게 드린 자리에 심우장이 건립되는데, 건축비용은 적음(寂音)스님과 지인들이 충당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면 금타스님이 만해스님을 위해 토지를 내놓을 만큼 교유가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타스님이 출가 후에도 조선의 독립에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일화다.
 
○…일제강점기 금타스님은 여느 스님과 달리 ‘특이한 승복’을 입었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매우 유별난 승복이었다. 많은 승려들이 일본식 승복을 입었던 시절이다. 1936년 오도할 당시 선정에 들어 육조 혜능대사의 법을 부촉하고 의발을 전수 받은 금타스님은 “발우와 의복을 전수 받을 때의 장삼(長衫)은 순천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장삼과 흡사했다”고 밝힌바 있다. 1962년 정화불사 당시 제정된 ‘종단의 승복’이 금타스님이 입던 것과 사실상 똑 같았다. 1962년은 금타스님이 입적한지 15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로, 금타스님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돋보인다.
 
<사진>동서문자를 종합하여 한글을 보완한 관음문자를 만든 후 한글학회에 보낸 금타스님 친필 서한.
 
○…금타스님 제자인 청화스님은 생전에 법문을 하면서 은사에 대해 이렇게 밝힌바 있다. 청화스님은 “(은사스님이) 출가한 뒤 강원과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26세경에 과학이나 수학 같은 신학문을 공부하여 현대사회를 제도한다는 포부를 지니셨다”면서 “내장사 벽련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읊은 오도송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또한 “오도(悟道)후 벽련암에서 운문암으로 주석처를 옮긴 은사스님은 개성이 출중하고 소신이 확실했으며, 스승인 만암스님과 법(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청화스님은 “금타스님께서 부처님 정법을 여법하게 수행하고 여실하게 증득(證得)하여 부처님 법의 정수를 시기상응(時機相應)하게 기록으로 정리하였다는 사실에 우리 후학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운문암에서 주석할 때 금타스님은 참선 위주로 정진했다. 아침공양은 죽으로 간단히 하고, 점심공양을 든 후에는 철저하게 오후불식으로 일관했다. 1948년 겨울. 몸이 불편한 금타스님은 대중이 탁발을 나간 사이에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금타스님의 법구는 백양사 청류암 근처의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사리는 수습하지 않았다. 다비를 모실 당시 사흘동안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어록
 
“일미(一微)를 오견(誤見)하면 망상(妄想)이 되고, 정견(正見)하면 진각(眞覺)이 된다.”
 
“개별적 화신(化身)이 바로 본신(本身)의 불(佛)임을 망각하고, 전도망상(顚倒妄想)하여 미혹인(迷惑人)이 되고 스스로 범부(凡夫)라 이름하나 일대인(一大人)에게는 성범(聖凡)이 없다.”
 
“미혹인(迷惑人)은 대일심체(大日心體)가 질의적(質疑的) 그림자에 가리워, 진지(眞智)의 증명(證明)이 없이 망견(妄見)을 세워서 진리(眞理)라고 생각하며, 주객(主客)이 전도(顚倒)한 사실(事實)마저 부인(否認)한다.”
 
“정견(正見) 있는 인사(人士)는 채찍을 들고 일어서라. 그리고 성인들이 인정한바 장구한 세월을 두고, 뼈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된 정신문명을 등장시켜라”
 
 
 
■ 오도송
 
荷團稜尖是眞實(하단능첨시진실)
 
風吹雨打非幻境(풍치우타비환경)
 
絮蝶飛處生蓮華(서접비처생연화)
 
錐端鏡面放金光(추단경면방금광)
 
 
“연꽃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진실이며 /
 
바람 불고 비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가 아니다 /
 
버들 꽃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
 
송곳 끝과 거울 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는구나.”
 
 
 
■ 행장
 
1898년 윤 3월 29일(음력)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 부친 김병룡(金炳龍) 선생과 모친 밀양 박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김해. 속명은 김영대(金寧大), 자(字)는 성일(性日).
 
벽련암·운문암서 정진
 
곡성 성륜사 부도 모셔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마쳤으며, 1919년 3.1 시위 참여후 몸을 피한 고창 문수사에서 우연히 <금강경>을 본 것이 불연을 맺는 동기가 됐다. <금강경>의 진리를 맛본 후 장성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상눌(尙訥). 출가사문이 된 후 교학과 참선을 두루 공부했다. 특히 18년간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했다. 부단히 정진하던 1936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수행에 들었다. 당시 <금강경>과 <원각경>을 독경하며 용맹 정진한 금타스님은 같은 해 11월17일 인시(寅時)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금타(金陀)란 법명을 스스로 지었다.
 
이후 부안 내소사 월명암에서 지낸 한차례 안거를 제외하고는 10여 년간 내장사 벽련선원(碧蓮禪院)과 백양사 운문선원(雲門禪院)에서 정진했다. 1941년 발행한 <비밀심계(秘密心契)>에는 스님의 주석처가 경성 선학원의 조선불교중앙선원으로 되어 있다.
 
1942년 6월에는 벽련암에서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란 책을 저술했다. 1944년에는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를 성취하고,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와 도결(圖訣)을 작성했다. 수능엄삼매도결을 대.중.소로 재편하여 ‘일인전(一人傳)에 일인도(一人度)’라 이름 짓고 대중에게 전했다.
 
스님은 평생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금타스님은 1948년 1월24일 정오 백양사 운문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51세. 법납 30세. 백양사 청류암 옆 다비장에서 다비를 엄수했다. 금타스님의 부도와 비는 제자인 청화스님이 지난 2000년 곡성 성륜사에 모셨다.
금타스님의 제자는 법련(法蓮).법능(法能).청화(淸華) 스님 등이 있다.
 
 
[불교신문 2568호/ 10월24일자]
2009-10-21 오전 11:00:22 / 송고
 
 

출처 :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글쓴이 : 경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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