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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현대인을 위한 불교의 가르침(2)

죽음을 두려움 없이 대하려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또 우리가 가장 준비없이 맞는 것도 역시 죽음이다. 사실 우리는 죽음만 제외하고는 별의별 것을 다 계획하고 준비한다. 시험·결혼·사업활동·집짓기 등등. 하지만 그런 계획들이 뜻대로 현실화된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반면 죽음은 어느 때고 조만간에 반드시 온다. 죽음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사건이다. 버섯이 땅 밑에서 솟아날 때 갓 위에 흙을 조금 얹고 있어 그 돌아갈 곳을 말해주듯이, 모든 생명체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의 필연성을 항상 드리우고 있다.


『증지부』의 한 경(Ⅳ, 136)은 인상깊은 비유를 몇 가지 들어서 생명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며,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인가를 감명깊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생명을 칼날 같이 가는 풀잎 끝에 매달려 있는 이슬방울에 비유한다. 그 이슬방울은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으며, 설령 떨어지지않는다 하더라도 해가 뜨는 즉시 증발하고 말 것이다. 생명은 또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든 물거품과 같이, 또 작대기로 물 위에 그은 선과 같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려져버리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 경은 생명이 죽음을 향해 그칠 새 없이 내닫는 모습이 마치 산골 여울물이 쉬지 않고 아래로 흘러가는 형상과 같다고 지적한다.


『법구경』에서는 부서지기 쉬운 이육신을 물거품에(46게), 그리고 진흙으로 빚은 물항아리에(40게) 비유한다. 이처럼 불교 경전에서는 갖가지 비유를 들어 생명의 불확실성과 죽음의 확실성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누구라 할 것없이 죽음을 겁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법구경』, 129게). 우리가 죽음을 겁내는 것은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삶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품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백지상태나 다를 바 없으므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위에 든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공포의 밑바닥에는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 다시 말해서 삶을 다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게 되면 그때마다 그 공포의 진원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아니면 그것과 맞서 싸우면서 생명을 보존려는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과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간에 이것은 우리 몸에 그런 기력이 있을 때의 얘기다. 마지막에 가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임종의 자리에 처하여, 몸이 그 어떤 항거도 할 수 없도록 기진맥진했을 때는 어떠할까. 그런 경우 죽음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정신적 태세가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육체적 기력이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삶에 대한 갈구는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愛], 육신이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되면 달리 삶을 받을 장소를 붙들려고 정신적으로 애를 쓸[取] 것이다.


 일단 그런 장소를, 예를 들어 모태 속의 수정난자(受精卵子)를 포착하게 되면 이 새로 발견한 장소를 근거지로 해서 생명의 심적 진행과정[有]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것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 태어남[生]으로 표출된다. 이상이 연기법에서 설하는 생명의 과정이다. 즉 갈애가 조건이 되어 생성(becoming) 또는 (인격구성 요소의) 성장과정(The process of growth)이 있게 되고, 그것은 다시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

이렇게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열렬히 욕구하는 것이 곧 생존을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제2의 태어남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죽음의 과정에 대해 좀더 파고들어가 보자. 정상적 삶을 영위할 경우, 깨어있을 때 우리는 감각기능에 갖가지 감각자료들이 와서 부딪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감각자료 중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더 골라서 관심을 쏟아주고, 또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까지 하는 등 갖가지로 관심을 기울이느라 우리는 늘상 분주하다. 우리가 깨어있는 한 이와 같은 과정은 항상 지속된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사람들은 바깥으로 손을 뻗쳐 점점 더 많은 감각적 자극을 추구하고 있다. 이어폰까지 달린 휴대용 라디오, 껌, 화장품 그리고 텔레비전의 유행은 바로 이와 같은, 더 많은 감각적 자극을 구하는 현세태의 명백한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참 성품을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참 성품을 모르게 되어가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매사를 그때그때 적당한 가면을 쓴 채 처리해나가고 있다. 진짜 느낌들, 즉 질투·탐욕·증오·자만 또는 이기심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따위의 관례화된 형식적 구두치레 속에 감정을 은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억눌린 부정적 감정이 엉뚱하게 살인·도둑질·싸움질·험담질 등등의 형태로 표면화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부정적 감정이란 독사를 억누르려고만 든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하나의 전개과정이지 순간적 돌발사건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감관이 하나씩 활력을 잃어감에 따라 자극의 공급이 중단되면 억제력 역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갖가지 배역에 따라 쓰고 있던 가면들 역시 벗겨져 나간다.


마침내 우리는 완전히 발가벗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즈오·질투 등등의 독사같은 부정적 감정들이라면, 우리는 죄의식·회한·비탄에 빠져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의 기억력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그 모든 감각의 혼란과 금제(禁制)가 사라짐에 따라 아주 예민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동안 자신이 저지르거나 빠뜨린 행위를 남김없이 분명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 행위들이 도덕적으로 온당치 못할 경우 우리는 죄악감과 비탄에 잠길 것이며(『상응부』, Ⅴ, 386) 도덕적으로 온당할 경우에는 만족하고 행복해할 것이다.

『아비담마요강』에서는 죽음이 도래하면 마음의 문에 업 또는 업의 형상[業相]이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죽음의 시발점에서 실제행위나 상징화된 행위가 기억 가운데 재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표출되는 사고의 질이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죽음은 땅거미와 같이 자연스런 하나의 현상이다. 하지만 무상의 법칙을 실현하는 한 예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는 죽음이 말할 수 없이 싫긴하지만 피할 도리가 없는 이상, 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죽음이 자리잡을 때 갑자기 허를 찔리는 꼴이 되지 않으려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을 익히는 것이 좋다고 불교경전에서는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다.


죽음을 평화롭게 맞으려면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과 더불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죽음의 불가피성을 잊지 않고 상기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온당치 못한 행위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선정수행은 남과 더불어 평화로울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최상의 기법이다.


자애를 관하는 공부 주5) 는 매우 효과적인 선정수행법이다. 이 방법이 갖는 특별한 이점의 하나가 미혹되지 않은 상태로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점이다. 주6)

『증지부』의 한 경(Ⅲ, 293)에서 부처님은 평화로운 죽음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하신다.


누구나 평화로이 죽을 수 있으려면 자신의 삶을 그 목적에 맞게끔 영위하면서 적절한 태도를 길러나아가야 할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여러가지로 일을 벌리는 바쁜 생활을 좋아하면 안된다.

2) 지껄이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3) 잠자기를 좋아해선 안된다.

4) 너무 많은 친구를 사귀기를 좋아하면 안된다.

5) 너무 많은 사회적 교제를 좋아해선 안된다.

6) 공상하기를 좋아하면 안된다.

또 다른 경(『증지부』, Ⅰ, 57∼8)에서 신(身)·구(口)·의(意)를 통해서 온당찮은 나쁜 짓을 피하기만 하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하신다.


『대반열반경(장부, Ⅱ, 85∼6)』은 성질이 못된 사람은 미혹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며, 덕있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을 수 있다고 확고하게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소박하고 덕스러운 삶을 사는 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번은 마하나마란 석가족 신도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솔직한 심정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상응부』, Ⅴ, 389). 가령 길에서 사고를 만나 갑자기 죽게 되면 다음 생에서는 어디에 태어나게 될 것인지 몹시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믿음을 기르고, 계율을 닦고, 법문을 듣고, 보시를 행하고, 지혜를 키워온 사람은 그런 두려움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가령 기름이나 액체 버터가 담긴 항아리가 깊은 물 속에서 깨졌다고 치자. 그 그릇의 깨진 조각은 강바닥에 가라앉고 기름이나 액체 버터는 물 위로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행을 당할 경우 육신은 버려져서 독수리나 재칼의 먹이가 되겠지만 마음은 위로 떠올라 향상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나꿀라 아버지의 병환 얘기(『증지부』,Ⅲ,295)도 죽음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이다. 한때 나꿀라의 아버지가 몹시 앓자, 그 부인은 남편이 불안초조해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내는 남편에게 근심을 가진 채 죽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이는 부처님께서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그릇된 일이란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이르면서 위로해주기를, "당신은 당신의 사후에 가족의 생계와 애들 양육이 걱정이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실을 잣고 길쌈도 할 수 있어요.


 그것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애들도 키울 수 있어요. 당신은 내가 재혼할까봐 걱정인가요? 내가 16살에 당신에게 시집온 후 이날까지 당신에게 불성실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당신이 죽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에게 절개를 지킬 거예요. 나의 정신적 발전이 염려되는가요? 나는 정신적 발전을 위해 계속 정진할 거예요. 그러니 죽음을 어차피 맞아야 한다면 당신은 아무 염려말고 평안히 맞도록 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이것이 중병을 앓고 있던 남편에게 아내가 해준 충고였다. 그러자 남편은 침착성을 되찾게 되고 그 덕분에 건강마저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뒤에 이 이야기를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선 그 여자의 지혜와 침착함을 칭찬해주셨다.


그 밖에도 여러 경전에서 죽음에 대한 일상적 관이 가져다주는 공덕을 논하고 있다(『증지부』,Ⅳ,46∼48/『상응부』,Ⅴ, 344,408). 우리의 마음이 삶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삶의 재미에만 열중하게 되면, 우리는 온갖 잔학한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것을 방지하는 길은 죽음을 염하는 공부를 익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이 결코 영원히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만 상기해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살림살이를 점검해봐서 탐욕, 증오, 질투 따위의 사악한 부정적 감정이 발견될 때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그런 감정들을 제거하는 조치를 즉각 취해야만 한다(『증지부』,Ⅳ,320).

이상과 같이 불교 경전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일상적으로 관하는 공부가 주는 적극적 이익을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역설하고 있다. 분명 그것은 우리가 온당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확실한 중대사인 죽음을 평온한 침착성과 두려움없는 확신으로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


살아있는 동안의 인간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신비로운 객체이다. 우리는 육신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어 그것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 그리고 돈을 쓴다. 또 우리는 육신을 쾌락을 우한 도구로 여기어 쾌락의 대상을 구하는 일에 거의 전 생애를 바친다. 또 우리는 육신을 자아의 핵심부분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와 상정이 불교의 관점에서도 타당한지 논의해보는 것은 유용한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이다. 각 개인들의 육체는 외관상으로뿐만 아니라, 생화학적인 구조에 있어서도 그리고 감각기관의 감수능력, 질병에 대한 저항력, 질병에 반응하는 민감성 등등에 있어서도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유전법칙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안되는 분야로 남아있다. 불교에서는 육신과 감각기관들은 이전의 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문명의 여명기에서부터 인류는 인간성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노력해왔으며, 그 결과 다양한 과학과 종교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어떤 경에서 부처님은 이 작은 인간의 육신에서 전세계와 그것의 발생,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경험의 세계는 인간 육신 안에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육신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계의 신비를 이해한 셈이 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사실 외부세계란 우리가 감각기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겨우 알아차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감각기관과 감각자료들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한 셈이 된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가장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사문과경(장부,Ⅰ,47)』에 의하면, 이 둘의 관계는 제사선(四禪)을 얻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제사선에 이른 선정의 달인은 신체조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식을, 마치 투명한 그슬을 꿰고 있는 색실을 보듯이 볼 수 있게 되낟. 또 다른 경전에서는 서로 기대어 세워놓은 두 다발의 갈대의 비유를 통해서 몸과 마음의 상호의존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마음 속의 감정변화는 신체의 화학작용에 영향을 미치고, 신체의 화학작용상의 변동은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그 명백한 예로, 분노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들 수 있다. 분노는 샘[腺]의 분비작용을 촉발시켜서 신체의 화학작용에 현저한 변동을 가져온다. 그래서 몸이 떨리고 땀이 나고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한편으로, 예컨대 술이나 마약 등의 섭취로 인한 육체의 화학장용상의 변화는 마음에 영향을 끼쳐 각각 특유의 기분전환, 병적쾌감, 환각상태를 일으킨다.


『증지부』의 한 경전(Ⅳ, 385쪽이하)에 의하면 모든 생각은 느낌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주7)

이 말은 곧 육신이 얼마만큼 마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가를 보여준다. 불교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해탈로 나아가는 길에서 그러한 지식을 잘 활용하고 있다. 육신을 계(戒)로써 단련시켜 알맞게 건강한 생화학적 상태로 유지시킨다. 마음은 선정수행에 의해 건전한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다시금 더욱 건강한 육체의 생화학적 조성에 힘을 보태준다.

이와 같은 과정이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지속된다. 아라한과를 이르게 되면, 그동안 겪은 생화학적 변화가 원체 근본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예사로운, 그러나 정신발전과는 정반대가 되는 몇 가지 생리적 기능이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감각능력을 지닌 육신이 가장 소중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소중한 어떤 물질이 그속에 들어있기 때문은 아니다. 육신이 소중한 까닭은 바로 그 육신을 통해 인간이 우주와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신비를 파헤칠 수 있고, 삶의 의미와 죽음의 수수께끼도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황혼녘 바닷가에 서서 저 수평선 너머로 머나먼 바다를 바라볼 때, 또 쳐다보면 볼수록 무한대로 멀어져가는 저 별빛 가득한 창공을 대할 때, 우리는 우주의 광대함에 위축되고 만다. 이런 우주와 비교할 때 인간은 한낱 극미(極微)한 먼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잠재능력으로 말하자면 저 광대무변한 우주를 상상이나마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우주의 신비를 벗겨낼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비록 우주의 한 부분, 한 조각에 지나지 않고 또 자연의 우주법칙에 지배를 받긴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물질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부처님의 위치에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고의 존재이며, 감감능력을 가진 인간의 틀(육신)도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육신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눈매며, 아름다운 이, 얼굴, 머리카락, 몸매 따위를 곧잘 입에 올린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육신을 현실적 관점에서 본다. 육신은 오물주머니이며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서른두 부분에 대해 언급하는 자리에서 상세하게 그 더러운 물질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아침에 세수하기 저의 얼굴을 잠깐만이라도 주의깊게 살펴보면 곧 육신의 역겨운 본성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몸뚱이는 큰 아홉 구멍과 그 밖의 수많은 털구멍을 통해 불결한 물질을 계속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깨끗이 닦아주어야만 한다. 단 하루라도 육신이 배출구를 통해 쏟아내는 것들을 청결하게 거두어주지 않고 내버려두면 견뎌내기가 어려울텐데 하물며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고 상상해 보라.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듯 스스로나 남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만들지 않으려면, 깨끗이 거두는 데만도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만약 항상 청결히 해주지 않을 경우에는 온갖 기생충이 보금자리가 되어 공공에게 큰 폐를 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몸뚱이에 반해서 열중하는 어리석은 짓을 줄여나가 완전히 멈추게 되자면 육신의 본질과 구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된다.


우리는 일생동안 내내 이 육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 아무리 잘 먹여도 육신은 물리는 법없이 다시금 배고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배고픔이야말로 가장 고약한 질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기 전에는 육신을 먹여 살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위장은 주기적으로 조심스레 붕대를 감아줘야 되는, 입이 벌어진 상처와도 같다. 하지만 불교에 따르면, 물질적 형태의 음식물은 육신이 필요로하는 자양분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그 밖에도 세 가지 자양분이 더 필요하니 환경과의 접촉(phassa), 의지작용(manosa~ncetanaa), 식(識, vi~n~naa.na)이 그들이다.


이 네 가지의 자양분[四食] 모두가 육신을 건강하게 지속시켜 나가는데 필수적인 것들이다. 육신은 또한 더위·추위·비·해로운 세균과 외부의 위해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 갖가지의 외부적 위험요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만 한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는 육신을 큰 근심[苦]의 원천이라 부른다. 이 육신을 생존에 적합하게, 깨끗하게, 건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만도 사람들이 겪어내어야 하는 고충은 실로 큰 것이다.


다시 이 육신은 감각기관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들은 쉴새없이 쾌락을 찾고 있다. 눈은 즐거운 형상을 찾고 있으며,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코는 좋은 냄새를, 혀는 맛있는 음식을, 육신은 안락한 촉감을 찾고 있다. 우리의 일생은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데 대부분이 소비된다. 하지만 묘한 것은, 우리의 육신은 조직자체부터가 지나친 쾌락은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즐거운 쾌락일지라도 지나치면 몸에 병이 든다. 예를 들면, 아무리 입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 있다하더라도 과식을 하게 되면, 육신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성(性)의 탐닉을 성병을 유발시킨다. 그 중에도 오늘날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 에이즈(AIDS) 즉 후천성면역결핍증인데 여기에 대해선 치료방법을 아직 못찾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과 장수를 원하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처신책은 감각적 쾌락을 절도있게 향유하는 것일 것이다.


또 육신이 취하는 갖가지 자세, 가령 서거나 앉거나 걷거나 누워있는 자세를 살펴보면, 육신에게는 이들 자세가 견뎌내기 힘든 것으로서, 잠깐동안밖에는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가장 편안한 자리에 앉아있을 경우에도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몸을 뒤척이게 된다.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에서 사지를 좀더 편안한 자세에 두고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은 단명하고 고통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그래서 다시 조그마한 쾌락이라도 보태겠다고 우리는 또 몸을 뒤척여 자세를 바꾼다.


이런 식으로 쾌락의 추구가 진행되는데도 이것을 두고 우리는 생을 즐긴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숨길 수 없는 진실은 이 육신은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은 외면한 채로 속절없는 즐거움에만 한사코 매달리려 든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즐거움이 조금쯤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은 이 즐거움을 훨씬 능가한다고.


육체는 또 여러 성장 단계를 거치면서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출생부터가 산모나 아기 양쪽에 격심한 고통을 준다. 태어나면 유아는 또 주변에 있는 타인들의 손에 전적을 맡겨진다.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큰 고통을 겪게 되고 애처로운 울음소리로 그 고통을 표현한다. 다음으로는 치아가 날 때가 어린이들이 성장과정에서 겪는 고통 가운데 매우 중요한 고비일 것이다. 또 갖가지의 몸의 동작을 익히려 애쓰는 과정도 어린애로서는 톡톡히 곤욕을 치루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춘기와 청년기 역시 나름대로 성장고로 시달리는 때이다. 노년은 특히 육체적 고통이 심한 때이다. 감각기능은 쇠퇴일로여서 시력은 떨어지고, 귀는 잘 안들리고, 다른 기관들도 점점 덜 예민해진다. 여기저기 관절이 쑤시고 몸이 아픈 증상이 갈수록 만성화되고 체력도 쇠퇴한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도 노년기에 들어서는 당신의 육신이 수리를 많이 해야 겨우 지탱되는 낡아빠진 수레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선정에 들어있는 시간만이 육신이 편안을 누리는 때라고 덧붙이셨다. 노년기 육신의 실상은 이와 같은 것이다. 또한 우리는 육신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언제든지 갖가지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처럼 육신이 커다란 재앙의 원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육신을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육신에 대해 건전한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육신에 빠지거나 미워하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몸을 해칠 위험이 있는 흡연, 음주, 감관적 쾌락에의 과도한 탐닉과 같은 것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몸에 대해 친절한 자세를 익히지 못할 경우 이 몸뚱이는 우리 자신이 부과한 질병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 적당히 건강한 육신을 누리길 바랄진대 도덕적으로 건전한, 절도있는 생활습관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체를 자아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가령 우리가 `나는 키가 크다. 나는 뚱뚱하다. 나는 살결이 희다. 나는 아름답다. 또는 나는 못생겼다."라고 말할 때 사실은 육신이 이런 속성을 지녔다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대명사를 계속 쓰다보면 '나`라는 문법적 주어에 사로잡혀 영혼이니 자아니 하는 존재론적 주어가 실제로 있는 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자기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소유관계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육신은 자아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만일 육신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진실로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논하신다. 우리가 언제나 원하듯이 육신은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튼튼한 채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육신이 우리 원대로 되어주는 일은 거의 없으며, 그래서 우리의 바람과 기대에 어긋날 때마다 매양 쓰라린 꼴을 겪게 된다.


 신체는 실제로 우리에게 속한 것도 우리의 자아도, 또 우리 자아의 일부도 아니라고 부처님은 지적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신체에 대한 갈애를 버려야하며, 자신을 신체와 동일시하는 일도 그만두어야 한다. 신체에 대한 갈애를 버리면 많은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다. 우리의 습관이 되어있는 동일시(同一視) 및 소유관념을 떨쳐내려면 육신의 혐오스럽고 뜻같지 않은 실상을 우리 마음에 깊이 선명하게 아로새겨 놓아야하며 그래서 신체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한다. 그렇게 되도록, 혐오스럽고 재앙만 만들어내는 우리 신체의 실상을 거듭거듭 반복해서 관하는 것이 현실적 시각을 얻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것이 고에서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관능적 사회풍조와 현대불교 주8)


관능적 사회풍조의 원인


과학 및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폭넓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20세기에 있어 그러한 변화가 너무나 급속하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금세기가 과거의 모든 세기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사람들의 태도, 가치, 목표 그리고 이상마저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우주, 인간, 사회, 문화 및 문명의 본질과 전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기존의 확신들을 동요시키고 있으며, 서구의 유신론9有神論)적 종교전통에 대해서는 그 권위뿐 아니라 근거 자체마저 위협하고 있다.

전통과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면 도덕적 가치의 타당성 역시 의문시되고 있다. 날로 새로워지고 있는 과학지식은 전통적 신념들을 차례차례 미신 또는 신화에 불과한 것인 양 조롱하면서 현대적인 것들이 훨씬 더 우월하게 보이도록 후광을 비쳐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들의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세대 차이의 문제가 전에 없이 큰 비중을 지니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사람을 문화유산으로부터 유리된 한낱 회의론자로 만든 반면에 기술은 사람에게서 창조적 능력을 앗아갔다. 기계는 그 엄청난 생산능력으로 사람을 버튼이나 누르는 존재로 격하시켰고, 수백만 노동자를 직장 밖으로 내쫓았다. 노동자들은 근육의 힘과 창조력은 쓰지 못하고 거부당한 채 좌절감 속에 방치되고 있다. 그 결과의 하나로 각 민족정서의 승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고유 민속미술과 공예가 거의 절멸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창조성을 찬탄하고 싶은 마음에서 또 자기를 표현하려는 가련한 몸부림에서 골동품 수집가로 변신해가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현대인을 완전히 짓눌러버린 힘은 상업화와 광고라는 폭군이다. 생산이 소비를 앞지르게 되자 미처 소비되지 못한 재고들로 체화(滯貨) 현상이 빚어지게 되었고 이를 해소하는 길은 사람들을 유인해서 더 많이 소비하도고 권장하는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근검의 기풍을 소비중심의 윤리로 전환시키려는 계산된 시도가 치밀하게 수행되었다. 새로이 누리게 된 풍요한 생활수준을 유지해나가려면 소비를 증대시키는 것이 미덕이자 필요한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대중매체가 동원되었다. 구매 동기심리와 행동심리학에 대한 조사연구결과, 인간의 유혹받기 쉬운 구석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리고 광고업자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떼돈을 벌게 되었다. 그 약점이란 감각적 쾌락, 사유재산, 사회적 위세를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탐심이다. 이미 문화라는 안전장치가 끊어져나간데다 창조적 충동마저 좌절당한 현대인들은 대중매체의 매력있는 유혹에 넘어가서 방종한 생활로 곤두박질치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에 가져온 나쁜 결과


이상으로 간략하게나마 현대의 관능적 사회 풍조를 유발시킨 주요 원인들을 개관했으므로 이제 그런 풍조가 오늘날의 개인과 사회에 초래한 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병(姓病)이 만연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지난 10년간 성병이 300배나 증가됐다는 보고가 있다. 정신의학 분야가 날로 넓혀져가고 있는 것도 정신적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있다는 증거이다.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이 중요한 보건 문제로 대두되었다. 범죄율이 증가일로에 있다. 부부의 연분이 서글플 정도로 쉽게 금이 가게끔 되었고 이혼율이 놀라우리만큼 높아졌다. 유아의 요람으로서의 가정의 기능이 위협받고 있다. 어떤 사회학자들은 과히 멀지 않은 장래에 가정의 기능이 끝나버릴 것으로 내다보고있다. 가정생활의 파탄이 가져온 가장 가슴아픈 결과는 어린애들의 목숨에 끼친 영향일 것이다. 1976년 정월에 간행된 「영국 보건 경제 보고서」는 1960년대 초 이후로 영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가장 주된 피해자는 바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은 가족간의 관계가 긴장에 처한 이 시대에 부모가 저지른 유아학대의 제물로 사라져간 것이다. 10대의 마약중독과 소년범죄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문제가 되었다.

이상의 사회 현상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관능탐닉으로 인해 자멸하고 말 이 긴박한 위기에서 인류가 구출되자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再考)해보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하겠다.


불교가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불교는 지난 25세기동안 무수한 사람들은 교화시켜온 커다란 원동력이자 지도원리였다. 현재와 같은 혼돈적 상황에 대해 불교가 어떤 빛을 던져주는지, 그리고 현대적 상황에서 순응하고 또 건전한 가정과 대인관계를 이루는 데에 어떤 지혜를 제공해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에 대해, 생을 거부하는 고행적 이상주의라든가 또는 반사회적, 반정치적이라는 등등의 비판의 소리가 때때로 요란하기도 하지만 불교 교단은 비구, 비구니뿐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의 남녀 재가신도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재가자의 지성적, 계율적 훈련은 승려의 그것에 못지 않게 불교의 중요 관심사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인권이 보호되고, 인간적인 기업이라야 성공할 수 있으며, 자원이 잘 배분되고 정의가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는 그러한 사회를 창조하려는 목표에서 독자적인 사회정치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트레버 링도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는 단순한 종교나 철학만이 아니고 사실상 하나의 총체적 문화로서 사람들의 세속적 및 정신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엿한 다면적 생활철학인 것이다.


관능탐닉과 인간의 포부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포부는 부, 쾌락, 명성, 장수(長壽), 그리고 사후의 행복을 얻는 데에 모아진다(『증지부』Ⅱ,66∼68). 이런 것들을 인간적 동경의 대상이자 인간 행위의 목표라고 받아들이면서 불교는 이런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활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에 가서는 그 목표자체를 도로 무너뜨리게 될 위험성이 언제나 있다. 부와 성(性)은 쾌락을 얻는 두 가지 주요 수단이다. 이 두 가지를 신중한 태도로 대하면 여타의 세 가지 인간적 소망을 실현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오늘날의 사회적 병폐의 거개가 그 원인은 이 두 가지를 잘못 다룬 데에 있으므로 그에 대한 불교의 태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부(富)


부를 대하는 불교의 태도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기 때문에 수입에 대해서는 상향선을 설정하지 않는다. 불교가 설정하는 것은, 부는 올바른 수단으로 벌어야 하며, 올바른 방식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해치거나 속이거나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마에 흘린 땀으로 번 돈이야말로 불교가 높이 찬양하는 바이다. 부는 어디까지나 도구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부는 첫째 자녀와 부모, 딸린 식솔,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서 안락하게 살고 둘째 화재, 수재 등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고, 셋째 친척, 손님, 국가에 대한 의무와 종교적 문화적 활동을 행하고 넷째 정신적 향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데에 쓰여져야 한다. 각자의 분수에 따라서 크든 적든 간에 자신의 자산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선용하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불교에서 깊이 개탄하는 것은 과도하게 욕심스러운 탐심과 쌓아두는 습성이다. 인색은 경멸하나 검소는 미덕으로 칭찬한다. 낭비는 개탄할 습관이며 심지어는 반(反)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번은 아난다 존자가 어느 왕에게, 승려들이 받은 보시물을 어느 정도로까지 활용하는지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새로 옷을 얻으면 헌옷은 덮개로 쓴다. 헌 덮개는 좌복의 씌우개로 쓰고 헌 좌복의 씌우개는 깔개로 쓴다. 헌 깔개는 걸레로 쓰고, 낡아 너덜너덜하게 해진 걸레는 진흙에 이기어 금이 간 마루나 벽을 때우는 데 쓴다(『율장』,Ⅱ,291). 불교 승려들이 자원을 알뜰하게 쓰는 모습이 실로 이와 같았다. 이런 검소한 기풍이 재가신도들에게도 자연히 파급된다. 어떤 부유한 상인은 액체 버터 한 방울이 마루에 떨어진 것을 보고 허비를 막고자 하인을 시켜 이를 담게 했다. 이렇게 알뜰한 사람이 보시를 할 때는 어떻게나 손이 크던지 받는 사람이 놀라곤 했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알뜰한 정신은 신도들이 배워 실천한 훌륭한 예가 되겠다(『율장』,Ⅰ,271). 검소함과 관후(寬厚)함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이 두 가지 덕목은 따로따로 닦아서 함께 지녀야 할 덕목들인 것이다. 이런 소박한 덕목들을 생각하다 요새 들려오는 소식들에 접하면, 한 예로 밴스 펙커드가 내놓은 획기적으로 눈을 틔워주는 「낭비 조장자들(The Waste Makes)」을 읽으면 오늘날 과학시대의 지성인이란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과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일부 조사 연구가들의 계산에 의하면 지난 40년간 미국인이 소모한 세계자원만해도 전 인류가 지난 4,000년간 소모한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지구 자원은 결코 무한대가 아니므로, 후손을 염려하는 마음에서라도 현대인들이 생각을 바꾸어 불교의 경제적 습성을 일부라도 몸에 익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해양학이 발전되면서 미개척의 신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나 해양 역시 무한대가 아닌데 반해 인간의 탐욕은 끝도 없고 물리는 법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性)


불교는 성욕을 보편적 실재로 인정한다. 짐승세계에서는 성적 충동은 자연적으로 조절되며 따라서 짝짓고 번식하는 것도 계절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간세계에는 그런 자연적 장치가 없으며 인간들은 성생활을 자신이나 남들에게 해가 안되도록 적절하게 꾸려나가는 실험과 조정과정을 오랫동안 거쳐온 끝에 특정 금기나 관습, 규정을 만들기에 이르른 것이다. 때가 장소에 따라서 이들 관습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관습 덕분에 인류는 야만상태를 벗어나 문명화할 수 있었다. 가족도 이렇게 해서 태어난 사회제도인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일부일처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결혼제도이다. 결혼 이전에는 순결한 것이 그리고 결혼 이후에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 이상적인 몸가짐이다. 결혼생활에 성공하려면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상호신뢰[信]·도덕성[戒]·헌신[捨]·사리분별[慧]이 결혼의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는 덕목으로 강조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상호신뢰는 서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도덕성은 인격적인 힘을 뜻하며, 헌신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기쁨은 정서적 성숙을 표시하고, 사리분별은 지성적 성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질들은 두 배우자를 굳게 맺어주며 그 인연은 죽은 후에도 다음 생에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나꿀라의 부모는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자기네의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 이어지기를 소원한 이상적인 부부로 경전에 그리고 있다. 부처님은 이 소원에 대해, 위에 말한 자질들을 부부가 다같이 갖추고 있다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현대인들의 결혼을 통할 결합이 이토록 탄력성을 잃고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정서적 응집력이 관능주의 속에서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관능주의에서 많이 강조하는 것은 육욕적인 쾌감이며, 인격적 적응과 정서적 감쌈은 각기 희생과 무욕(無慾)을 요구하기 때문에 경시되었거나 무시되었다. 성은 물론 결혼에 있어 주요한 기본요건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정 생활의 전부는 분명코 아니다. 성만을 위한 성애의 탐닉은 결코 만족감을 채워줄 수 없거늘, 하물며 어찌 충족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족할 줄 모르는 갈애를 경멸하여 불교 경전에서는 허기를 채우려 뼈를 앑고있는 개에다 항용 비유한다. 그렇지만 부부간의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성관계는 충족감을 느끼는 정서적 경험이다. 성만이 유일한 관심사일 바에야 굳이 가족과 같은 제도로 발달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동물도 성적 본능을 채우지만 인간의 가족과 같은 것은 동물세계에서는 발전되지 못하였다. 가족 생활의 중요 기능은 사람에게 자기 중심적인 성질을 극복하도록 커다란 도덕적 교훈을 주는데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어머니의 태 속에서 가장 이기적인 기식자(寄食者)로서 그 생을 시작한다. 그 후 그는 여러가지 정서적 단계 즉 자기 사랑, 부부사랑, 부모로서의 사랑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게 된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봉사에 전적으로 열중하게 된다. 그의 헌신이 이와 같기 때문에 평생을 땀흘려 번 개인재산마저 흔연히 자식들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식에게 사랑하고 아낄만한 배우자를 짝지워줌으로써 정서적 자기 희생을 또 한번 치루는 것이다. 노후에는 자식을 평온한 마음으로 대견하게 바라본다. 이와 같은 정서적 성숙과 성취감은 관능탐닉을 결혼생활의 목표로 삼을 경우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명성과 장수


이 두 가지 인간적 포부가 실현되자면 앞서 말했듯이 주로 부와 쾌락을 다루는 자세가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한 가지 특별히 언급해둘 것은 술은 육욕과 더불어 모든 인간적 포부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술에는 사람의 양심이 녹아버린다는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불교에 따르면 술과 육욕은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재산을 흩어없애고, 사회적 명망에 흠을 내고 지적 재능을 가리는 것이다(『장부』,Ⅲ,182∼184).


사후의 행복


지금 같은 물질적 쾌락의 시대에는 사람들은 사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불교가 주는 교훈은 각자 자기가 뿌린 내린 것을 거둔다는 것이다. 유익하게 도덕적인 삶을 살고 만족감과 평온감, 충족감을 가지고 노년에 이른다면 후회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잘 살아온 부끄럽지 않은 인생은 불교에 의하면 무덤 너머로 행복을 가져간다. 그런 사람은 빛에서 더 밝은 빛에로 향상해간다고 한다.


관능탐닉과 지적 성숙


방종의 또 다른 주요 악영향은 지적 능력을 제약한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관능에 탐닉하면 분명한 사고를 못하게 되고 안목이 흐려지고, 쟁점이 가려지고, 지혜가 막히고, 마음의 평화가 파괴된다고 역설한다. 25세기 전에 부천님이 이런 관찰을 행한 것과는 전혀 별도로, 송과선(松科腺)에 대한 의학적 연구 결과, 성이 두뇌활동에 미치는 제약효과가 지적되고 있다.

인체에선 송과선은 뇌의 기부의 후부에 위취하여 서양 배[梨子] 모양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선은 멜라토닌이라 부르는 호르몬을 합성하는데 이 호르몬은 행태(行態)·수면·두뇌활동 그리고 사춘기·배란기·성적 성숙과 같은 성적 활동에 영향을 준다. 멜라토닌은 두뇌의 활동을 촉진시키고 있을 동안에는 성적 활동을 제약한다. 또 밝음, 어두움, 후각작용, 추위, 압박, 기타 신경계의 압력은 송과선의 기능에 영향을 준다. 빛에 노출되면 멜라토닌의 합성이 감소되고 송과체의 무게가 줄어든다. 한편 빛은 성적 성숙과 활동을 촉진한다.


이상의 의학적 정보를 불교교설과 비료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자극은 정신활동을 교란시킨다고 주장한다. 감각의 문[六根]을 잘 지키면, 즉 눈·귀·코·혀·몸에 대한 입력을 제어하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집중된 정신활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심일경성(心一境性), 다시 말해 한 점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능력은 감각기관의 제어에 크게 좌우된다. 생리학 용어로는 그와 같은 감관제어는 송과선의 멜리토닌 합성을 도와 두뇌활동을 자극하고 성적 활동을 저지한다. 이처럼 의학적 연구에 의해서도 관능에의 탐닉이 지적 성숙을 제약한단,s 불교의 관점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관능탐닉과 문화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에서는 이세상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최초의 지구 거주인들의 몸은 마음으로 만들어졌으며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은 기쁨을 먹고살았으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그들은 극히 향기로운 어떤 것을 맛보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미각을 경험하고서 즐거워하였다. 그 후 그들에게서 갈애가 생겨났으며, 그들은 이런 갈애의 태도로 계속 음식을 맛보았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몸은 점점 둔탁해져갔다. 몸에서는 광휘가 사라지고 기쁨을 양식으로 삼거나 하늘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능력도 잃게 되었다(『장부』Ⅲ, 84∼86).


지금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이 진화과정의 진부 여부가 아니라 감각적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옛날에 지니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높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잃게 되었다는 그 점이다. 『전륜성왕사주후경(『장부』Ⅲ, 60∼74)』은 사회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부가 불균등하게 배분된 결과, 가난이 만연되고 도덕적 기준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도덕적 퇴보와 더불어 육체적 아름다움과 수명도 그만큼 감소되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부도덕성이 자리잡게 되자 세 가지의 품격 손상현상 즉 변태성욕, 터무니없는 탐욕 그리고 그릇된 가치관념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가정과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공공연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난다. 도덕적 퇴보가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마침내는 사람의 명이 열 살로 줄어들고 결혼연령이 다섯 살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때까지 음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 액체 버터·버터·꿀과 같은 맛있는 음식은 없어지고 지금은 조잡한 음식으로 치는 것들이 그 시대에 가면 맛있는 대표적 음식이 된다. 일체의 도덕관념은 사라지고 언어에서도 도덕을 뜻하는 단어는 찾을 수 없게 된다.


부도덕이 사회적 공인 하에 최고의 위세를 떨칠 것이다. 혼인법도 친족관념도 없어지고, 사회는 동물세계에서처럼 극도의 난교(亂交)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인간들 사이에서는 날카로운 상호적대감이 팽배해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격렬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대규모 살육이 벌어지고 만다. 이런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난 뒤 살아남은 소수의 헐벗고 굶주린 자들은 서로 만나는 데서 위안을 찾게되고 그래서 서로를 친절한 생각으로 eogkl 시작할 것이다. 이런 심정변화와 더불어 도덕가치의 점진적인 재진화가 시작한다. 한걸음한걸음 좋은 생활을 되찾아감에 따라 육체적 아름다움도 다시 피어나고 수명도 늘어난다. 정신적 가능성도 함께 점차적으로 발전되어간다.


이상이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사회변화에 대한 견해다. 사회는 도덕적 가치의 흥쇠에 따라 일어서고 넘어진다. 요즈음에 와서 일부 사회학적 연구 결과에서도 도덕과 문화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주목할만한 일이다.

윌리엄 스티븐스는 문명사회가 성적 규제에 있어 엄격한데 반해 원시부족 사회에선 혼전 혼후를 막론하고 성적 교섭이 매우 자유롭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딘 로버트 핏치는 로마문명의 몰락을 로마인들의 성도덕의 타락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 방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공헌은 J. D. 언윈의  성과 문화  란 연구서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80개의 문명화하지 않은 부족과 6개의 잘 알려진 문화권 민족의 성행태와 문화수준 간의 관계를 현지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성의 방임과 원시성 간에 그리고 성의 규제와 문명간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이 자유로우면, 그가 동물적(zoistic, 개념작용의 정지단계) 문화라 이름 붙인 문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거기서는 사람들은 태어나고, 욕구를 충족시키고, 죽고, 시체가 처리되고 나면 잊혀진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사건들 간에 인과적 관련성을 찾아낼 줄 모른다. 예를 들어 병이 나면 마술사를 찾아갈 뿐 그 이상은 없다.


 간헐적으로 혼전 또는 혼후에 어느 정도의 성 규제가 있을 경우에는 일종의 조령숭배(祖靈崇拜)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 문화에서는 위기의 경우에만 조상을 숭배하고 아직 숭배의식을 치르는 일정한 장소도 없는 단계이다. 일부일처와 같은 엄격한 성의 규제가 있을 경우에만 일정한 숭배의 장소를 가진 이신론(理神論)적 문화가 탄생된다. 이성·창조·자기인식과 같은 인간의 능력을 동원한 결과로 나타나는 내면적 인간 에너지의 외적 표현이라는 뜻에서의 문화는 일부일처의 관습을 엄격히 시행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상호관계가 어떤 기계적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모른다. 마치 상이한 응고상태의 탄소가 어째서 어떤 것은 석탄으로 변하고 어떤 것은 다이아몬드로 변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와 같다.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성행태와 문화유형 간에 명확한 인과의 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언윈은 철저하게 조직적인 조사연구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만큼 과학적 연구 역시 불교가 견지하는 도덕과 문화간의 연관성에 관한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무방할 것이다.


관능주의와 환경


『증지부』의 한 경은(Ⅰ, 160) 사회에 변태성욕, 터무니없는 탐욕, 그릇된 가치관이 만연하면 강우량이 줄어든다고 단언하고 있다. 가뭄은 흉년을 가져오고 그 결과 사망률이 상승한다. 부도덕과 강우량 부족간의 직접관련을 설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나, 다만 『논서(論書)』들에 나오는 다섯 가지 자연법칙을 해석해보면 가능해질지 모르겠다. 우주에는 다섯 가지 자연법칙 또는 자연력이 있다. 즉 계절에 의한 결정(utuniyaama), 종자에 의한 결정(biijaniyaama), 마음에 의한 결정(cittaniyaama), 업에 의한 결정(kammaaniyaama) 그리고 법에 의한 결정(dhammaniyaama)이 그것이다.


이를 달리 해설하면 물리적 법칙, 생물학적 법칙, 심리학적 법칙, 도덕적 법칙 그리고 인과의 법칙이 된다. 앞의 네 가지 법칙은 각기 고유영역 내에서만 작용하지만 마지막의 인과법칙은 그 모든 영역에 걸쳐서 내부적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각 영역간에도 작용한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 또는 생태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들 즉 생물계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생물계는 심리에 변화를 가져오며, 심리는 도덕적 힘을 결정한다. 또한 반대 방향의 진행 역시 작용하는 바, 그때그때 기능하고 있는 성질 또는 힘에 따라 그 결과는 해로울 수도 있고 이로울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작용은 구체적으로 사례를 통해 예시하는 것이 좋을는지 모르겠다. 사치·부·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은 엄청난 수의 공장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 공장들은 대기·수질·소음 공해의 문제를 야기하며 이는 역으로 동·식물계 모두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인간활동에 기인한 대기의 여러 특성과 작용에 있어서의 잘못된 변이는 오늘날 과학단체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오염물질이나 연무(煙霧)가 인체, 작물,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하게 연구하고 있으면서 공해와 연무가 기후 형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는 불평도 있다.

방사선·운량(雲量)·안개·가시도(可視度)·대기권의 전기력장[電場]과 같은 수많은 기후상의 요인들이 공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온도와 습도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강우량에 미치는 영향 역시 가능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때가 되면 과연 공해가 기상과 기후변화에 확실하게 책임이 있는지 여부가 과학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이미 이 세계가 극심한 물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인류가 환경을 자신에 이익이 되도록 바꾸기 위해 이성과 지성, 창조력 등 인간 고유의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자신이 스스로 발휘하는 도덕적 힘이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환경에 가져와서 좋든 싫든 간에 자신의 길흉화복을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


이 논문을 끝내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어떤 우주적 도덕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불교에 의하면 세계와 인류로 하여금 존속케하는 것은 바로 이 우주적 도덕법칙 또는 도덕력이다. 업에 의해 세계는 존재하고 업에 의해 인간은 존재한다.

이 우주적 도덕력은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인간의 생각[思]은 도덕력이라고 단언하셨던 것이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는 "생각(또는 이념)이 세계를 지속하게 만든다." 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지금 주로 술과 관능탐닉에 소진하고 있는 그 본래의 고유한 힘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내면세계  의 잠재력의 발견이야말로  병든 도시 에 살면서  성의 황야 에서 길을 잃고  숨은 설득자  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털없는 원숭이  로 전락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원주


1) 수행에 의해 차례로 증득하게 되는 네 가지의 초세간적 성위(聖位).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

2) 보리수 잎·다섯 「거룩한 마음가짐」 참조.

3) 다섯 가지 덮개[五蓋] : 다섯 덮개의 빠알리어와 한문 역어는 각각 kaamacchanda: 貪慾, vyaapaada:瞋애, thiina-middha:睡眠, uddhacchakukkucca:掉擧 惡作 또는 掉悔, vicikiccha:疑心이다. 저자는 주로 드러나는 특성에 의해 세번째와 네번째 항을 영어로 indolence와 worry로 옮기고 있음. 자세한 것은 법륜 아홉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방법 , 247∼295쪽 참조. ∥원문으로∥

4) 팔계(八戒) : 본문에 열거한 오계에 참가하여, 6.오후엔 먹지 않을 것, 7 노래와 춤을 하지도 보지도 않으며, 화환으로 장식하거나 지분을 바르지 않을 것. 8.호사스런 침대를 쓰지 않을 것.


5) 자애를 관하는 법 : 법륜·여덟 「자비관」참조.

6) asmmuulho kaalam karoti.

7) Sabbe sankappavitakkaa vedanaasano sara.naa

8) 대한민국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열린 「불교와 현대세계」주제의 학술회의에 제출한 논문(1976). ∥원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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