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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출처: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칸티빨로 스님 지음

조 효 종 옮김


인과와 도덕적 책임


나나야까라 지음

강대자행 옮김


◈차    례◈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7

인과와 도덕적 책임  35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칸티빨로 스님 지음

조 효 종 옮김


 A 'New Age'?

Relating Religions


Khantipalo Bhikkhu


(BODHI LEAVES NO. B.8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요즘에 와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개는 젊은이들인 것 같고, 기성세대들은 별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쨌든 ‘새 시대‘가 정말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여부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그동안 충분하리만큼 많은 얘기를 해왔고, 이 문제를 주제로 한 저술 역시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새 시대’에 붙이는 이름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는 ‘아카리우스 별자리 시대’ *1 란 이름도 자주 들먹여지고 있습니다. 그럼 ‘새 시대’의 특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새 시대’를 설명해 주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사람들이 다 같이 화합하여 살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점과 정신적 노력을 새롭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청은 거듭 강조되어 왔고,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되어선 안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과연 어느 정도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낙관주의자로서 이상주의적 경향이 다소 짙은 편인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그렇다, 현 상태는 낙관적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낙관주의자는 서구형 사회에서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정신 수련원들과 그리고 일부 동양국가에서 증대하고 있는 명상과 기도에 대한 관심을 실례로 들 것입니다.사실 요즘은 온갖 종류의 공동체와 집단, 사업기구 및 재단들이 생겨나 인종차별 폐지와 정신적 향상 및 인류의 화합을 목표로 광범하게 건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날로 번성해져 가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비관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새 시대’의 징후도, 정신적인 성장의 징표도 별로 띄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금세기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끔찍한 대전(大戰)과 그보다 더 가공스러울 삼차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지적할 것입니다. 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뒤틀린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벌였던, 저 전무후무한 죄악상을 들 것입니다. 덧붙여 물질주의가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심지어는 불교국에서마저도!) 꾸준히 잠식하고 있으며,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추구에 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낼 것입니다. 이처럼 비관론자가 할 말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불교인들은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건 어떤 세계일까요? 불교인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든 간에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법에 비추어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에, 문제의 어느 한쪽 면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낙관론자들이 동서양에 걸쳐 갖가지 고무적인 조짐을 열거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말할 때도 바로 이런(중도적) 자세에서 일단 수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인들은 몇몇 나라에서 그것도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일시 정신적 향상을 성취시키는 요인을 보았다 해서 그것을 곧바로 이 세계 전체의 변혁요인으로는 착각하지 않는 분별력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듣는 ‘새 시대’의 얘기가 거의 모두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들 나라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네 부모들 세대의 천박한 물질주의에서 등을 돌려, 좀더 깊은 만족감을 가져다 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인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는 ‘새 시대’의 얘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의식주가 족하지 못하면 ‘새 시대’의 출현 같은 것이 별로 실감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새 시대’ 관은 전통적 힌두교 신앙과도 맞지가 않습니다. 힌두교에선 현재를 ‘깔리 유가’ 즉 ‘철의 시대’라 부르는 바, 이는 타락한 말세를 의미하며, 이 세상이 변혁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불교인의 새 시대관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불교인들 역시 낙관적인 친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물질적으로 진보한 사회에서조차도, 실제로 인생에 대해 좀더 정신적인 접근을 추구해 보고자 열심인 사람은, 전 인구 중 얼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자기네 사회의 뿌리깊은 기존 규범을 변경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렇듯 불교인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서 낙관론자들과 의견을 달리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자들과 똑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비관론자들이 “인간은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절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징표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어두운 측면만 보려듭니다.


‘그렇지만 허다한 나라들이 종교를 박해까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종교활동을 달가와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또 그런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 하고 비관론자들이 말할 경우 불교인들은, 이 지상의 광범한 지역에서 종교적인 숭고한 목표가 비웃음을 사고 있으며, 그 목표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야 할 경우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그런 사례로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그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은 사태가 캄보디아(지금은 크메르 공화국이라 부르지만)에서 실제 발생했으니까요. 그런 비극의 땅에는 어떤 ‘새 시대’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으며, 오로지 날로 격렬해지는 비통과 증오만이 미래의 분쟁의 소지로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불교인들의 눈에는, 이 세계 일각에서, 즉 몇몇 나라 그것도 그 사회의 일부에서만 ‘새 시대’의 조짐이 보여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의 조짐을 가지고 전 인류가 평화와 풍요를 구가하는 새 시대가 출연하고 있다고 거창하게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래서 불교인은 이 새 시대의 출현방식을 현실론자적 태도로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장 통속적인 사고방식 중에, 지금 태양계가 우주 안에서 어떤 새로운 점성학상의 구획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구획안에서는 소위 ‘영혼의 진동’이 보다 용이하게 감득 계발되어질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 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뭔가 헛점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 보아도 곧 드러납니다.


즉 서양, 인도,  티베트 탄트라 등 각기 상이한 점성술 체계에서, 제각기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계산한 나머지 새 시대의 도래시기가 다르게 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맥빠지는 일이지요. 거기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굳이 ‘새 시대’를 공간과 시간의 요소에 달렸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 우주 어디엔가에 하나의 ‘대 계획’이 마련돼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계획은 어떤 창조주의 작업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교인은 도대체 그런 계획이나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상정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도무지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를 더이상 다루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다음의 글을 참조해도 좋겠습니다. ***


그럼 ‘새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출현하게 될까요? 오늘날 ‘새 시대’는 자기네가 예상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서, 그리고 오로지 자기네들에 의해서만이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동양에서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유물론적 견해에서 나온 것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미래의 경이적 세계로 틀림없이 이끌어준다는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론들이란 대개 너무 미래에 빠져들어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안고 있는 위험성은 바로 그 자신들의 완고한 편협성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네 이념만이 이 세계를 새로운 문화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좁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헌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네만이 ‘새 시대’를 여는 유일한 열쇠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마저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그 철학들을 신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신봉자들은, ‘새 시대’를 강매하는 다른 세일즈맨들은 일체 외면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지도자만을 양떼처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이천 오 백 년 전에 부처님이 지적하셨던 대로, 견해 및 견해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갈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새 시대’는 이런 조직체들에 의해 도래할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온다면, 정복이나 폭력, 또는 혁명에 의해서 올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게 해서 오는 세상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시대’보다 과연 무엇이 낫겠습니까?


불교인의 새 시대관


이 문제에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훗날의 논사(論師) *2 들 말씀과는 신중하게 구별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일반적 성향과 수명이 큰 폭으로 변하는 방대한 시간의 주기를 언급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장수하고 근심 걱정이 적었던 시절,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진리수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던 그런 시절에 관해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도리어 깨달음을 향한 공부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수를 누리다 보면 불교 진리의 가장 핵심인 무상(無常)의 진리 *3 를 깨닫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열반 *4 에 드신 후 약 천 년 뒤에 스리랑카에서 논장을 펴낸 논사들은, 그 당시에 이미 극히 암담한 미래를 전망한 일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오백 년을 단위로 하여 점차적으로 퇴조해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는 기껏해야 열반에 대한 최초의 통찰, 즉 예류향과 예류과 밖에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나마 앞으로는 사람들의 근기가 너무 둔해진 탓으로 이만한 정도의 증과(證果)조차도 얻기가 어렵게 될 시대가 올 것이라 합니다.


중국, 티베트 및 일본 등지의 일부 대승불교적 전통에 의하면, 그 전망은 더 한층 암울해져 현대를 아예 ‘말법시대’ *5 로 규정하고, 이 시대에는 어떤 향상도 불가능해서 오로지 미래불인 미륵불의 시대에 다시 태어나도록 염원하거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의 논서 해석에 의하면 현 불법의 수명은 오 천 년인데, 그 절반 시점까지는 계속 정법이 쇠미해지다가 그 시점을 넘기면서부터는 다시 힘차게 일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기(佛紀)로 헤아려 이천 오 백 년하고도 조금 더 지났으니까(집필 년인 1977년이 남방전통으로는 불기 2521년이 됨) 오 천 년 존속설의 절반 시점을 약간 넘긴 때가 됩니다. 사실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여러 모로 희망적인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정수행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고조되고 있는가 하면 불법을 더욱 근본적인 각도에서 수행해 보고자 하는 열의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같은 불교중흥이 일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공산주의 침략과 혁명 그리고 서구문명의 물질주의 풍조가, 전통적인 불교 신봉국가들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 불교세의 위축현상이 겹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불교전반의 중흥기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누구도 단정지울 수 없는 문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논사들과 일부 대승불교 전통에서 오백 년 단위로 불교가 쇠미해 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불법의 수행이 마치 시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조정되고, 시간은 마치 인간의 행위마저 지배하는 세계외적 우주법칙인 듯한 관념을 불교의 교리 속으로 끌어들인 셈이 됩니다. 이런 이론은 부처님 생존 당시에, 시간이 최고원리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부처님께서 직접 논파함으로써 이미 그 잘못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분명 사람들을 숙명론으로 몰고 갑니다. 이를테면 그런 유형의 힌두교도라면 스스로 현상타개의 노력을 포기한 채 “지금은 깔리 유가의 시대인 걸. 내가 어찌 한단 말인가?” 하면서 현실회피의 구실을 삼으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이 오 천 년 간 지속되며, 일정 단계까지는 쇠미해 질 것”이라고 하셨다는 해석을 접할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논사들의 입장일 뿐이지 결코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님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 태국이나 미얀마와 같은 불교국가들에서 깨치신 분들이 여전히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들 논사들이 분명히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산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는, 수행이 시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며, 노력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의 시간이나 장소가 정진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만 기다리고 앉았다가는 설령 그런 시간과 장소를 만난다 해도 자신의 업장을 이겨내는 정진력이 없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유효적절하게 살리지 못하고 허송하게 되기 쉽상일 것입니다.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길뿐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나오셨을 때 사람들이 탁월한 스승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애써서 좋은 결실을 맺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정진의 성과는 결코 시간에 좌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과연 무엇이 부처님 법을 쇠미하게 만들며 무엇이 정법을 오래 지탱해 주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다음 사항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戒) 정(定) 혜(慧)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 세 가지 공부[三學]가 널리 행해진다면 바로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되지만, 이 삼학이 쇠미할 경우엔, 믿고 의지하는 가르침이 무엇이든 간에 새 시대의 도래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처님을 다년간 시봉한 아난 존자가 바로 이 문제를 질문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정념을 수행하면 부처님 열반 후에도 정법은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념을 닦지 않으면 그땐 정법이 쇠미해지고 말 것이다.”


정념 또는 정지(正知) *6 는 어떤 법(Dhamma)이든 법을 공부하고자 할 경우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오계(五戒)를 잘 지켜 원만한 인품을 닦아보고 싶은 경우에도 정념은 반드시 견지돼야 합니다. 그리고 오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선정공부를 일상화하고 싶을 경우엔 정념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그럼 정념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 속에서 정념이란 자신의 몸을,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는 일체의 행동을, 물론 말도 마찬가지로, 항상 염(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행동과 말을 염할 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정념은 마음으로부터 건전한 자질을 이끌어내어, 지혜에 비추어 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또 자신이나 남에게 더 많은 고통과 갈등을 초래할 뿐인 행위들을 잘 가려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그런 행위를 그만두도록 만드는 것도 정념의 역할입니다.


정념의 범위는 몸으로 짓는 행동과 말로 짓는 행동에 국한하지 않고 마음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이 머리를 들 때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이들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헤어날 길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단계에는 ‘내 마음’을 염하는 ‘내’가 거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익어가면 오로지 ‘정념’만이 거기 있게 되고 따라서 ‘나’나 ‘내 마음’의 잔재는 모두 사라져 버린 채 오직 깊은 평화와 꿰뚫어 보는 통찰만 남습니다. 이야말로 선정인의 목표인 고요[止]와 통찰[觀]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法]야 말로 선정이란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지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갈등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모든 사람들이 절실히 갈구하여 마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정념수행과 ‘새 시대’의 도래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정념은 바로 ‘새 시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시대’란 결코 우주에 있는 별자리의 움직임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상상하는 그 어떤 위계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훨씬 더 상상의 산물인 창조주에 의해 도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심을 걷어낸 맑은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계가 인간의 삼독심으로 물들어갈 수록, 가공할 권력투쟁의 새 시대라면 모를까, 참다운 의미의 ‘새 시대’가 동터올 가능성은 그만큼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새 시대’를 오게끔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탐욕과 사리사욕이 없는 ‘새 시대’, 성냄과 증오가 사라진 ‘새 시대’ 그러한 시대의 출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시대입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만이 곧 ‘새 시대’를 이 땅 위에 오게 할 수 있는 바른 길인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오계(五戒, 산 것을 죽이지 않고, 주어진 것이 아니면 가지지 않고, 사음(邪淫)하지 않고, 거짓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혼란시키는 일체의 취하게 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대로 일상생활 가운데 정념수행을 하여서 마음을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끌어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매일같이 한두 번이라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선정수행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 법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의문점을 자꾸 묻는 가운데 법에 대해 지적 흥미를 갖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불법은 모두가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바로 이 삶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간이 나는 대로 훌륭한 지도로 수행의 난관을 극복하게끔 도와줄 수 있는 조용한 도량으로 1~2주쯤 선정을 닦으러 가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 ‘새 시대’가 밝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우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지혜의 빛과 광명이 동틀 것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새 시대’를 위해 그보다 더 알맞는 터전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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