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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수행의 예비단계

수행의 예비단계


The Preparatory Path

John D. Ireland


존 디 아이어랜드 지음

박 태 원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Bodhi Leaves No.37. 1968)


수행의 예비단계


공덕과 선정 수행


불교는 본질적으로 수행도(修行道)이며, 다소 막연한 명칭이지만, 명상이라 불리는 것이 그 중심 수행방법이다. 명상은 대체로 타 종교에서 의식(儀式)이 점하는 지위에 해당되며, 기도가 점하는 지위와는 완전히 부합된다. 사실 불교는 명상, 좀 더 정확하게는 마음 및 마음의 정신적 제 기능(諸 機能)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을 개발하는 일, 즉 봐와나(bhāvanā 수행, 참구)에 최대의 역점을 둔다.

(이하 명상이란 용어 대신에 선정 또는 선정수행이란 전통적 불교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역자)  


불교의 실천적 면모는 불교 수행길의 체계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불교의 오랜 역사를 통해, 부처님의 실제 가르침에서 시작해서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교학 체계를 통해 불교의 정신적 수행도정은 한 걸음 한 걸음 주의깊게 면밀히 짜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짜임새가 불필요하게 복잡한 것으로 잘못 보이기 쉽다. 우리가 무지한 탓으로 그 긴요성을 잘 못 느낀 나머지 여러 단계들을 빼어버리고 지름길을 찾아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체적 실례로, 부처님께서 마련하신 계율을 등한히 여길 뿐 아니라 관용, 참을성, 친절, 남을 돕는 정신 등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마저 배양하려 하지 않는 현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계율과 덕목들은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를 제거해 주고 또 정신적 향상의 최종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환경 속에서, 도덕적으로든 다른 어느 모로든 ‘좋은' 일을 실천해 나가면 ‘공덕(puñña)'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이 공덕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동안 많이 남용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가령 사람들이 선한 행위는 저축되었다가 차후 그에 알맞게 좋은 결과로 보상된다는 식으로, 공덕을 일종의 천상의 저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의 도덕적 인과율[業] 이론을 잘못 받아들인 사례이며, 공덕의 진정한 의미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밖에 안 된다.


깨달음이라는 목표의 실현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ā)을 계발하기 위해 특수 선정훈련을 닦는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훈련은 조건지어지지 않는 상태, 즉 열반을 실현시키는 조건 중 일부인 것은 확실하나 결코 그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 관련된 요인은 그 밖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 모든 조건들이 쌓이고 쌓여서 익었을 때 비로소 열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익음' 또는 ‘정신적 성숙'의 상태 역시 공덕 즉 뿐냐(puñña)가 쌓여져야만 가능하다. 그것도 금생에 쌓은 것만이 아니라, 수많은 전생에 걸쳐 쌓아온 것이라야 된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이 얘기는 부처님의 설법에서도 가끔 언급된다. 과거부터 충분히 공덕을 쌓았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 오자마자 바로 깨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렇지를 못하다고 해야겠지만.


자기 훈련이나 자기 희생 같은 칭찬할 만한 행위의 실천에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아'의 희박성, 즉 이기성의 부재다. 이것은 모든 불교 수행길의 열쇠다. 불교 수행 길의 정상에 다다른 사람들의 주된 특징은 감정적이든 본능적이든 자신을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완전히 깨달았고 따라서 무아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덕과 자아희석'을 충분히 이룩한 사람들은 스승이신 부처님께 대한 믿음을 일으키거나, 자기 집착에서 생기는 의심이나 주저함을 없애는 데 있어, 또 자발적으로 전심전력하여 행동하거나 생각하고 그래서 가르쳐 주는 대로 빨리 깨닫는 점에 있어, 별 어려움을 모르고 쉽게 해낸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지성을 가려 어둡게 만들며 갈등과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악(惡: pāpa, 칭찬받을 행위와 정반대되는 행위)에서 생기는 탐욕, 증오, 그리고 미망 같은 좋지 못한 감정들이다. 이들이 정신적 향상을 막는 주된 장애물이다.


귀의


불도를 닦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가운데 ‘귀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조금 깊이 규명하여 ‘귀의'가 뜻하는 의미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귀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이며, 우리가 어떤 다른 것들을 계발해 보아도 결국은 은연중에 이 귀의 과정에 모두 포함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의의 대상은 부처님․법․승가 이 셋이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약 2500년 전에 사셨던 고따마(Gotama)가 붓다, 즉 깨달으신 분이었다는 것, 그가 가르치신 교의가 법이라는 것, 그분 주위에 모였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승가라고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실제로 귀중한 세 귀의처라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면이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밝히기 위해 좀 더 깊숙이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고따마 부처님은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아니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귀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우리 자신 내면에 깨달음을 실현하는 본성 내지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 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며 귀의 대상으로서의 승가는 아리야2)의 자리에 이른 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선 이 삼보가 어떻게 귀의처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귀의처란 위험이나 걱정거리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피난처 내지 보호처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의 이 세 귀의처는 생과 사의 되풀이, 즉 윤회 속에서 방황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귀의처를 찾아 나서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정신적, 물질적 세계의 성격을 파악해야만 한다.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첫째인 고(苦)의 진리만이라도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주 행복하여 인생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 ‘거북함'(dukkha의 문자 그대로의 뜻) 즉 깊숙이 요동치는 불만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물론 귀의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 귀의처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단 한 길, 고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는 길 뿐이다. 그 해방은 고로부터의 최종적 피난처인 열반에 이름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물론 궁극의 피난처는 열반이라야 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정신적 향상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도(道)와 과(果)의 최종적 실현에 대한 확신과 보장을 얻게 될 때 이 ‘귀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전문용어로 ‘흐름에 들어선다[豫流 sotāpatti]'라고 부른다.


팔정도 수행은 서서히 삼매-관(三昧-觀 samādhi- vipassanā)의 정확한 수행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 삼매는 고요하고 한결같이 기복이 없는, 균형 잡히고 통합된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 마음은 전일(全一)한 마음 즉 지적, 정서적, 의지적 등 모든 면에서 최고도로 기능하면서 구경의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지 목표뿐인 통일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볼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 ‘분명히 보는' 대로 즉 관(觀)하는 대로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행동하게 한다.


귀의가 온전하게 되면 삼보가 최고 유일의 안전한 귀의처임을 아는 확실한 지혜와 흔들림 없는 깊은 신심이 생겨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예류과를 얻기 전에도 사유를 통해서 이런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의 환상적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과 미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유로 얻은 견해로는 그 힘을 감당 못하고 항상 미망에 다시 빠져 헤매어 왔던 것이다.

이제 순수한 이론보다 실제적인 고찰로 되돌아가자. 귀의 절차는 어떻게 밟게 되는가?


출발에 즈음해서 이 귀의가 결코 경솔히 행할 일이 아니며, 어쩌면 인생의 전 행로를 바꾸게 될지도 모르는 중대한 조치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정해야 할 사려 깊은 자각적 행위라야 한다.


전통적인 귀의 절차는, 비구스님께 존경심을 품고 나아가 귀의할 것을 요청한다. 보통은 스님께 세 번 청한 다음, 스님이 부르는 대로 귀의문을 세 번 따라 외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 행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거듭 명심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귀의함으로써 오계3) 또는 팔계4)를 받아 지닌 재가신도로서 계율을 준수할 책임을 지게 된다.


귀의문을 되풀이 낭송하는 방식 말고도『중부』에 대한 주석서에 보면 네 가지 귀의 방식5)이 또 있다. 1) 경의(敬意) 표시에 의한 방법으로, 2) 제자신분의 수지(受持)에 의해, 3) 지도이념의 수지로써, 4) 자기 포기를 통하여, 등이 그것이다.


경의 표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해 존경과 경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부처님과 그의 대리인(비구승단) 앞에 두 손을 합장하고 엎드려 절하는 것[五體投地]과 공경과 봉헌을 바치는 행위[공양(供養)]6) 등이 포함된다. 또한 법문을 겸손한 태도로 경청하는 것 등이 있다.

제자신분의 수지(受持)는 불․법․승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이들을 자기 스승으로 모시는 것을 뜻한다.


지도 이념의 수지는 불․법․승을 자신의 유일한 참된 안내자, 모범, 귀의처로 섬기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삼보 말고는 어떤 것에도 안내받기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미신이나 행운, 주문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기 포기가 있다. 자신의 희망, 야심, 심지어 생명까지 모든 것을 완전히 불․법․승 앞에 내버리는 것이다. 세속적 사물로부터 등을 돌리고 깨달음과 해탈로 이끄는 길을 밟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귀의에는 또 다른 면모가 있음을 주목해야겠다. 아마 이 때문에 귀의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겠지만, 귀의함으로써 사람들은 인격적 편향성과 결함을 시정하게 되고, 정신적 성숙을 가져오게 되며, 자신감과 대담성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나아가기에 더 적합하게 되고 길을 이탈하거나 중도에 포기할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

이와 같은 신심이랄까, 안전보장이랄까가 기초가 되고 그에 수반하여 지혜가 확실해 지지 않으면 중도에 일탈,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겠다.


수행의 예비단계


앞에서는 불법에 대한 믿음의 근본조건으로서, 또 입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예비적 과업으로서 ‘귀의'가 갖는 이론적 및 실질적 면모를 어느 정도 서술했다.


중국 선종의 대가인 대주 혜해(大珠 慧海) 스님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에 앞서 반드시 그 사람이 신심(信心)이 진실하여 퇴전함이 없이 그것을 수행할 자질을 갖추었는지 확인해야 한다.……”7)


여기서 ‘그것'은 선종에서 깨침을 얻는 데 필요한 심오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 진실한 신심이란 개념은 불교의 어떤 종파에서나 진리이며 대단히 기본적인 요소이다. 비슷한 생각이 불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인 『숫따 니빠따』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부처님은 브라흐만인 도따까에게 “나는 이 세상에서 의심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없다.(1064 게송)”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신심은 보통 단독으로 있지 않고 몇 가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있는데 이 요소들을 다룬 전통적 ‘명세서’가 불교경전에는 대단히 많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五根]인데 여기서 ‘신심’은 첫 머리를 차지한다. 이 체계에서 신심은 ‘지혜’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룬다. 왜냐 하면 지혜가 없이는 신심은 단지 맹목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며, 신심 없는 지혜는 지적 궤변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의 다른 세 요소 중 ‘정(定)’ 혹은 삼매(三昧)는 깊이를 부여해 주고, ‘정진(精進)’은 활성화시키며, ‘정념(正念)’은 다른 네 요소의 발전을 조정하여 균형을 유지시킨다.8)


이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 말고도 더 일반적인 명세서가 『우다나』9)의「메기야경」(4, Ⅰ)에 나온다. 거기에도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경의 표현대로 하면 “해탈하기에는 미성숙한 마음을 성숙시킨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정확히 걸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필요한 정신적 성숙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퇴전하거나 길을 잘못 들지 않고 법을 닦아나갈 수 있게끔 자질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이 정신적 성숙이며, 또한 어리석은 범부와 현자를 구분짓는 것도 이 성숙이다.


그 다섯 요소[담마(dhammā)10)]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신적인 벗[善友 또는 善知識]

 2. 계율훈련

 3. 수행에 집중된 대화

 4. 분발하는 노력

 5. 지혜


아마도 좋은 정신적 벗이야말로 수행의 참된 기반일 것이다. 각자가 계발한 모든 선한 자질은 궁극적으로 벗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과 모범의 양쪽을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벗으로부터이며, 모든 중생들의 비할 바 없는 벗은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고 그 가르침과 실제 삶을 통해 보여준 지혜와 자비는 또한 바람직한 정신적 벗의 전형을 구현하고 있다.


다시 비근하게는, 우리에게 법과 그 실천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반 사람인 스승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벗이다. 우리는 그가 행하는 본보기에 고무되어 발심 귀의하게 되고 계율을 닦게 되며, 또 자신의 정신적 가능성을 열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메기야경」에서 부처님은, 당신께서 제정하신 도덕적 교훈은 정확하게 준수해야 되며, 사소하게라도 이를 어기게 될 경우에 따르는 위험을 잘 살펴야 한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계신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계율의 정신은 그만두고 오로지 글자에만 얽매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정신과 형식은 겸비되어야 하며, 만일 어느 한쪽이 빠져 버리면 나머지 한쪽으로는 백해무익할 뿐이다. 계율을 적절하게 닦으면 밝은 양심 또는 무회한(無懷恨)11)이 생기는데 이것은 더 앞으로 향상하기 위한 길을 닦는 데 필수적인 단계이다. 자기가 한 일 또는 빠뜨린 일에 대해 회한, 근심 그리고 후회하는 것은 특히 선정수행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된다. 자책감에 방해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정신적 성숙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대화만 할 것을 들고 있다. 이것은 도덕적 규율(계율) 선정수행 등등에 관한 얘기를 가리키며 보잘 것 없는 잡담이나 세속적 화제에 빠져 들지 말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같은 뜻을 가진 친구와 어울리고 정신적 포부에 공명하지 않는 사람은 피하는 수밖에 없다.


끈질긴 노력 없이는, 설사 세속적인 일일망정,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룩해 낼 수 없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물며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할 깨달음의 성취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랴!


지금껏 거론한 모든 것들을 올바로 이루려면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예비적인 단계에서는 보다 높은 지혜의 성취, 즉 실상(實相)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는 초월적 경지는 고려의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다. 다만 실제적인 모습들, 즉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 정신적 발전과정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쓸데없고 해로운 것은 거부하는 등등의 평범한 상식에 속하는 측면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아 자신이 취해야 할 최선의 길을 판단하기 위해서이고, 또 자신의 모든 결함을 올바르게 점검하기 위해서이며, 자신의 궁극 목표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극복되어야만 할 장애들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하는 견해를 계발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누구라도 언젠가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들 실수를 통해, 그리고 실수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우리 지혜의 기능은 증장된다.


이상의 준비작업이 완료되면, 어느 때인가는 수행이 쉽고 자연스러워지며 장애가 줄어드는 때가 올 것이다. 『상응부』(35상응, 230경)에서 부처님이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듯, 갠지스 강 위를 흐르는 통나무는 아무런 방해만 없으면 결국 넓은 바다에 도착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정신적 벗의 도움과 우리 자신의 이해력과 지혜의 능숙한 안내를 받는다면 끝내는 열반의 대해(大海)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카렐 베르네르(1926~ )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1968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 다음해부터 덜함대학교에서 인도철학을 강의하였고 현재 런던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책으로는 보리수잎 10『업에서 헤어나는 길』(The Law of Karma and Mindfulness, BL No.61. BPS)과 보리수잎 41『동․서양의 윤회관』(The doctrine of rebirth in eastern and western thought, BL No.100. BPS)이 있다.


존 디 아이어랜드(1932~1998)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열 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자가 되어 빠알리어 공부를 하였다. 1960년대부터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하는 연간물에 기고하면서 불법 전파에 일생을 바쳤다. 『상응부 제1권』(Wheel No. 107/109, 1981, BPS),『가려 엮은 숫따 니빠따』(1983, BPS), 『초기 불자 시인 방기싸 장로』(Wheel No. 417/418, 1997, BPS) 등 여러 권의 불서를 영역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저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감흥어와 여시어경』(1997, BPS)의 합본이라 할 수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책으로는 보리수잎 47『부처님의 실용적 가르침』(The Buddha's practical teaching, BL. No.25. BPS)이 있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삼독심(三毒心) : 우리의 선근을 해치는 불선(不善)의 근본(akusala-mūla). 고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세 번뇌.

  ․탐(貪, lobha): 탐욕, 애착, 갈애, 갈망. 영역은 보통 lust,                  greed.

  ․진(瞋, dosa): 진에(瞋恚), 분노, 성냄. 영역은 hatred, anger.

  ․치(癡, moha): 치암(癡暗), 우둔, 암우, 우치, 어리석음, 미망,               무지. 영역은 delusion.

2)  아리야(Ariya puggala) : 고귀한 사람. 승가에 대한 공식적 서술에는 다음 문장이 들어 있다. “여덟 등급의 (고귀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네 유형의 인물들…”(사쌍팔배)* 이 말은 각기 도(道, magga : 향하는 도중에 있는)와 과(果, phala : 성취해낸)의 단계에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불환과․아라한향․아라한과의 여덟 성취 단계에 있는 성자들) 이 여덟 부류가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며, 범부(凡夫) 승가(puthujjana saṅgha)와는 구별된다.


    (범부 : 승려나 재가자로 아직 열 가지 족쇄를 하나도 못 푼 채 그 모두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말함)


    * [역주] 사쌍팔배(四雙八輩) : 경에는 사쌍팔배의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공식적 문장을 쓰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 승가는 좋은 길에 들어섰고 … 곧은 길에 들어섰고 … 참된 길에 들어섰고 … 적절한 길에 들어섰다.” 이로 미루어 삼보의 승가는 원래는 법다이 정진하는 수행승을 가리키는 정도의 뜻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쌍팔배와 범부 승가를 구분하는 사상은 다소 후기에 생긴 경향이 아닌가 싶다. 하긴 부처님의 직접적 지도하에 법다이 수행한다면 예류과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그런 구분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3)  [역주]  오계(五戒): 모든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기본계율.

      ① 어떤 산 생명도 죽이지 않는 것.

      ② 도적질 하지 않는 것.

      ③ 비합법적인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

      ④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⑤ 취하게 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

4)  [역주]  팔계(八戒): 보름과 초하룻날, 그리고 매달 첫 순과 마지막 순에 많은 재가 신자들이 지키고 있는 계율. ①~⑤는 오계와 같다.

      ⑥ 점심 이후에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 것[午後不食].

      ⑦ 가무, 음곡, 화환, 향수, 화장품, 장신구 등을 멀리함.

      ⑧ 호화로운 잠자리에서 자지 않는 것.

5)  이 네가지는 냐나뽀니까 스님의 『The threefold refuge(삼귀의)』(BPS, 1965)에서 요약하였음.

6)  [역주] 공양(供養, pūjā) : 이 말에는 공경(honor, respect)과 봉헌(devotion) 두 뜻이 다 들어감.

7)  존 블로펠드가 영역한 『The Zen Teaching of Hui Hai(혜해의 선 가르침)』(1962) 77~78쪽에서 인용.

   [역주] 大珠 慧海,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42. 중생자도(衆生自度)품 참조.

8)  [역주]  보리수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주해 참조.

9)  [역주]  우다나(Udāna) : 남전경의 5부 니까야[經] 중 다섯 번째, 소부경에 들어있는 경. 자설경(自說經) 또는 감흥어(感興語)라 번역함.

10) [역주]  담마(dhamma) : 보리수잎 둘 『마음 길들이기』 주해 참조.

11)  [역주] 무회한(無懷恨) : 회한이 없어짐. 청정한 계행을 닦는 데서 오는 곧고 밝은 마음상태로 잘못이나 실수를 뉘우쳐 격렬하게 자책하는 번뇌심이 사라지고 이를 한낱 법으로 냉정히 관하는 마음상태. 이는 무참(無慙) 무괴(無愧)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무참 무괴는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경우에 둔감 또는 마비로 인해 이를 느끼지 않는 마음. 이 두 법은 언제나 해로울 뿐이므로 아비담마 체계에서는 유독 이 두 법을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으로 분류함. 여기서 참(慙)은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괴(愧)는 남에게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