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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1. 아함경 이야기

2. 그 사상. 1. 눈 있는 이는 보라

    2. 그 사상.  1. 눈 있는 이는 보라


    "위대하셔라 대덕(大德 ; 지혜와 덕망이 높은 중.  본래 봇다를 일

  컫던 말이나, 후세에서는 일반 승려의 존칭으로 쓰였다.)이시여,  위

  대하셔라 대덕이시여. 이를테면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르치심과 같이,   또는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이처럼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을 세우시어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저는 이제 세존에 대해 귀의 하옵나이다.   또 그 법(가르침)과 승

  가(僧伽 ; 불교의 교단. 의역하면 '중(衆))에 대해 귀의 하옵나이다.

  원컨대 오늘날로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께 귀의 하

  옵는 신자로서 저를 받아들여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相鷹部經典] 42:6 西地人. 漢譯同本, [中阿含經] 17 伽彌尼經)

        상응부경전       사지인  한역동본   중아함경     가미니경

     

  이런 대문이 아함부 경전의 도처에서 보인다.    그것은 대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귀의하게 된 사람들이  이른바  우파사카(優婆塞, upa-

saka ; 재가 신자인 남자.)로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것은 언

제나 거의 같은 형식이므로, 어느 시기부터인가 귀의하는 신앙 고백 형

태가 유형화되었던 것 같다.   그것을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것을 통해

붓다의 사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설법의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최초의 설법만 제외하고는  45년에 걸친 붓다의

설법은 모두가 대기 설법이었다고 한다.  문제와 사람과 장소와 때에따

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가르쳤던 까닭이다.

  어떤 때는 제자들과 함께 갠지스 강의 기슭에 서서 소떼를 이끌고 물

을 건너가는 목동을 가리키면서, 현실의 이쪽 언덕(此岸)으로부터 이상

의 저쪽 언덕(彼岸)에 이르기 위한 방법에 대해 말씀한 적도 있다. '차

안, 피안'의 개념은 이렇게 하여 성립하였던 것이다.

  또 하루는 물건을 훔쳐 도망친 여자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나,

  

    "도망친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일은  어느 쪽이

  더 소중하냐?"

  

고 말을 건 적도 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들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붓다의 가르침을 받드는 비구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이끌고 가야시

사(象頭山)에 올라간 붓다는 일망 무제하게 펼쳐진 세상의 풍경을 가리

키면서,


    "보라, 모든 것은 타고 있다."

    

고 설했다.  그들은 불을 예배하는 이른바 사화 외도(事火外道)에서 불

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타고 있다."고 말씀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꺼야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가 있었다.  '불이 꺼진 상태' 즉 열반이 영원한 평화의 경지를 가리

키는 불교 용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루는 브라만(婆蘿門)  한 명이 나타나서 갖은 욕설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침착하게 말했다.


    "브라만이여, 그대가 내주는 음식을 손님이 안 먹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것은 물론 주인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욕설

또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임기 웅변!  자유 자재!  붓다의 대기 설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붓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그것들을 일관하는 뚜

렷한 성격이 있었다. 입신자들의 고백문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처럼 생각된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은  전도(顚倒)한 것을 바로잡

는다는 뜻이다.   '전도'란 어떤 판단을 할 때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오해하는 일이다. 작은 것을 크다고 하는 것도 그것이다. 추한 것을 아

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그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불변, 영원한 듯이 아

는 태도도 그것이다.

  후세의 불교인들은  '사전도'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상(常), 낙(樂),

정(淨), 아(我)의 전도를 말한다. 첫째 상(常)전도는 이 무상한 세상이

나 사람을 영원한 듯이 생각하는 일이며, 둘째 낙(樂)전도는 이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고 여기는 일이다.  셋째 정(淨)전도는 이부정한 것을 깨

끗하다고 잘못 아는 일이며,   넷째 아(我)전도는 이 무아인 존재를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이런 착각을 없애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에는 이런뜻

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불교의 진리관을 표

현한 말이다. 어떤 경에서 붓다는 이런 비유를 설한 적이 있다.


    "여기 통 안에 물이 있다 하자.  그 물이 불에 데워져 부글부글 끓

  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든지 한다면,  그 통 안의 물은 사물의 모습을 여실히 비칠

  수 있겠는가?"


  물론 비칠 수 없다고 대답하여야 한다.   여기서 붓다는 만약 우리의

마음이 탐욕이나 노여움으로 뒤덮여 있을 경우에는 여실히 대상을 지견

(知見)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을 유도해 갔다.

  이렇게 '여실 지견'을 방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복(覆)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 제거되고 맑은 마음으로 객관을 대할 때,  일체의 존재는 그

진상을 드러낸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다.  그렇다면 "덮인 것을 나

타내심과 같이"라는 말은  이런 여실 지견으로 이끌고 가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이"라는 말은 현대식으로 표현

한다면 합리주의를 주장한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나 합리주의라는

말 자체가 매우 애매한 점이 있다.   논리에 맞으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인가,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을 가지고 합리라고 보는 것인가?  붓다

가 취한 태도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최초의 설법에서도

이런 붓다의 태도는 이미 나타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하나는

두 가지 극단, 즉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한 말 속에 나온 "무익하

다"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그것들을 비판한 다음 중도(中道)

를 주장하면서 "적정, 증지, 등각, 열반에 이바지한다"고  말한것이 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붓다의 실용주의(Pragmatism)를 발견하는 것이

다.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한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물 속에 잠겨 있는 젖은 나무를 보고,     좋은 찬목(鑽

  木 ;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는 나무.)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불을 일

  으키리라, 빛을 내게 하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中部經典』 36 薩遮迦大經)

                                         중부경전      살차가대경

  

  젖은 나무라면 아무리 마찰시켜도 불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행을 해 보았자 그것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이것

이 고행을 포기하게 된 붓다의 합리주의적인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합리주의적인 정신이야말로  붓다의 생애를 일관했던 것임

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나는 이 장의 첫머리에 소개한 대문을  [상응부 경전] 42:6 '서지인'

이라는 제목의 경에서 인용했던 것이지만, 그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교화 태도도 전해 주고 있다.

  그것은 붓다가 나란다 마을의 파바리캄바라는 숲 속에 머물렀던 때의

일이다.  이웃 마을의 촌장인 안반다카푸타(刀師子)라는 사람이 찾아왔

다. 아마도 그는 붓다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어서, 우선 이런 것

을 물었다.


    "대덕이시여, 서쪽에서 온 브라만들은 물병을 높이 처들든지, 화환

  을 달든지, 물에 들어가 목욕하든지,  화신(火神)에게 공양을 드리든

  지 함으로써,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

  습니다만, 대덕께서도 역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도 종교에서 신비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그도 그런의식

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붓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반문

했다.


    "그러면 촌장에게 내가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생각나는 대로 대

  답해 보라. 어떤 사람이 깊은 호수에 바위를 던졌다 하자. 그때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위야, 떠올라라. 바위야 떠올라라.' 하며 기도

  했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바위는 기도의 힘으로 떠오르겠는

  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아니라고 할 수밖에는 없으리라.  여기

서 붓다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촌장이여, 이것을 그대는 이찌 생각하는가? 여기에 남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따위 온갖 나쁜 짓을 한 사람

  이 있다 치자.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여러 사람이 몰려와서 '이 사람

  이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십소서.' 하며 합장하고 기도했다면 어떻겠

  는가. 그는 그 기도에 의해 천상 세계에 태어나게 되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촌장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 사이엔지 그를 가리고 있던 낡은 의

식이 벗겨져 나가고,  그의 마음에는 한 가닥의 광명이 비쳐 왔던 모양

이다.  그래서 그는 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말을 하면서 재가 신자가

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으로 이 경은 끝나고 있다.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

이"라는 말은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

해 두어야 할 것이 남아 있다.그것을 다음 장에서 서술 해 보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