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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1. 아함경 이야기

1. 그사람. 6. 전도(傳道)

 

    1. 그사람.  6. 전도(傳道)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

  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

  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 가르침)을 설하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

  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약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

  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아,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세나니가마(將

  軍村)로 가리라."


       ([相應部經典] 5:5 係蹄(2). 漢譯同本, [雜阿含經] 39:16 繩索)

        (상응부경전)    (계제)   (한역동본) (잡아함경)      (승삭)

    

  여기에 든 일절은 이른바 붓다의  '전도 선언' 이라고 불리는 대문이

다.  그것은 붓다가 아직 미가다야(鹿野苑)에 머물고 있었을 무렵의 일

이었다. 붓다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은 끝에 출가하여 제

자가 된 사람의 수효가 불어나서 60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붓다는

그들을 전도하러 떠나 보냄으로써  이 새로운 진리를 널리 세상에 펴고

자 결심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을 모아 놓고 타이른 말씀이 이것이

었다.

  이 '저도 선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째 부분은 전도

의 정신을 말씀한 대목이다.   거기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나는 앞에서 재래 불교도들의 상

식을 뒤엎고,  붓다가 출가한 동기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

히려 그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

론 붓다의 출가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셈이 되었던 것이

며,   그 혜택은 멀리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이 사실이겠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하여  붓다가 출가한 동기가 중생 구제에 있었다

고 한다는 것은 결과를 가져다가 동기로 삼는 것이어서, 붓다의 출가의

진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아함부의 경전들이 이

점에 대해 얼마나 신중한 표현을 취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출가에 대해서나 수행에 대해서나,  그리고 정각(正覺)이라

든지 최초의 설법에 대해서까지도 중생 제도와 결부시키는것 같은 표현

은 전혀 쓰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이 전도의 선언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오고, 또 "세상

을 불쌍히 여기고,   이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인천이란 인간계와 천상계의 사람들이라는 정도의

뜻이니,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과 함께 중생(衆生),  즉 모든 생물을 가

리킨다.

  생각건대 붓다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

하기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었다. 그러나 일단 확신을 가지고 전도를 떠

나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 나타난 전도의 정신은 일체의 제한을 넘어서

모든 생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붓다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

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는 하지 않았다.  오직 모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

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가라고 타일렀다. 그것은 참으로 붓다다

운 전도의 선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장 구체적으

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대목의 마지막 말씀 즉 "둘이 한길을 가지

말라."는 구절이다.

  내가 이 구절에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선

언'때문이다. 그는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 : 6)


고 말했던 것이다. 또 다른 복음에는


    열 두 제자를 불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마가복음 6 : 7)

    

라고 나와 있다.  나는 이것을 그것에 비교하여 하나를 높다 하고 다른

것을 못하다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 둘을 비교함으로써 그 하나

만 읽어 가지고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던 뜻이 명확한 형태로 눈앞에 떠

오름을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예수는 그때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公會)에 넘겨 주겠고, 저희

  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그러기에 전도하러 떠나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

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도 가르쳐야 했다. 거기에는 도저히 혼자

서는 갈 수 없는 길이 있었다.  "둘씩 둘씩 보내시며"라는 표현에는 그

럴 만한 까닭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겠다.

  그리고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둘이서 한 길을 가지 말라."는 붓다

의 말씀의 뜻도 스스로 명백해진다.  여기에는 박해의 예상이란 조금도

없었음이 확실하다.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가는 것이

니까. 또 사람들이 그들을 공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도 생각

되어 있지 않다. 오직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이 법은 설

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전도의 정신은 붓다의 전 생애를 일관하

여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또 수천 년에 걸친 불교의 역사를 통해 지속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불교는 오랜 세월

에 걸쳐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전파 되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 전

도는 평화와 환영 속에 수행 되었고, 불교의 이름 밑에 피를 흘린 역사

는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두가 교조 붓다의 정신

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붓다의  '전도 선언'에서 둘째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설법

의 이상적인 양상이 제시된 대목이다.  거기에는 먼저 "처음도 좋고 중

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간략히 '초중종(初中終)의 선(善)'이라고 불렀다.   또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의문 구족(義文具足)'이

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수행"을 설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떠나 보내면서 한 말

에 비길 때 흥미 진진한 바가 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이를 고치

  며, 죽은 이를 살리며, 문등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라."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임무였다. 또 공회에 넘겨졌을 때는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 무슨 말할 것을 주

  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고 했다.   기독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신령에 충만하여 신령의 말을

매개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는 조리가 정연한 아리따운 변

설을 요구하였다. 여기에서도 나는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뜻은 없으나, 두 성인의 설법에 대한 요구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

는 점에 깊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버쳐(Butcher)의 저서 [그리스 정신의 여러양상

(Some Aspects of the Greek Genius)]이 그리스 인의 웅변에 대해 언급

한 대목을 되새기게 된다. 그들이 토론을 좋아하고 웅변을 사랑 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또 그 웅변이 그들의 합리적인 정신과 예

술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도 자주 이야기되어 왔다. 버처는 그

런 사실들을 자세히 서술함과 아울러, 다시 그 청중과 변사에 대해서도

아주 구체적인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그 청중들은 마치 음악에라도 홀린 듯이  그 아름다운 말에 도취하

  였으나,  한편으로는 그 매력 때문에 속는 일이 없기 위해 신중히 경

  계함을 잊지 않았다. 허점을 찔러 오는 논법에서 자기를 지키고,  궤

  변을 간파하려고 했다. 이같이 엄격한 청중에 대하여 변사는 십분 경

  의를 표하지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특히 연설의 끝에 가서 으레

  있기 마련인 저 흥분 없는 고요한 어조에 의해 표시되었다.   그것은

  근대인이라면 냉철함이라고 받아 들일지도 모르는, 겉으로 보기에 점

  차 나직해 가는 어조였거니와,  그 흥분 없는 고요함이야말로 웅변이

  청중의 이성에 대해서 표시하는 일종의 경의임에 틀림없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향해, 그는 마지막 호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본고장인 그리스 인으로서 참

으로 어울리는 웅변의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붓다가 생각한 이상적인 설법의 양상도 역시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의 입장을 취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노호하고 절규하는 예언

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또 신령에 충만하여 권위있는 듯

이 말하는 종교가의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격렬한 말을 내뱉아 청중

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연설 태도와도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인의 웅변이 흥분 없는 고요한 어조로 끝나는 것을 특징으로 한

다면, 여기에서도 또한 처음과 중간과 결말을 일관하여 잘 설해질 것이

요구되었고, 또 이론과 내용의 구비와 이성을 가지고 고요히 이성을 향

해 호소할 것이 요청되었다. 거기에는 붓다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성격

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전도 선언'의 셋째 부분은 어떤 것인가?  그것

은 붓다가 금후의 예정을 말씀한 대목이다.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그곳은 붓다가 진리를 깨달은 보리수 근처의 마을이다.   우루베라로

부터 바라나시까지 왔던 붓다는 이번에는 다시 우루베라를 향해 돌아가

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 곳은 붓다로서는 가장 추억이 많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이 새로운 가르침의 씨가 아직

한 알도 뿌려지지 않았다. 먼저 그 마을로 돌아가자. 이렇게 생각 했을

붓다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