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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선(禪)과 교(敎), 그리고 선병(禪病)

 선(禪)과 교(敎), 그리고 선병(禪病)


* 이 글은 어느 분이 지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내용이 충실하여 정리하여 올립니다.

                                                          미타행자합장  

 

 

선(禪)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법우님들이 선지식을 찾아서 참구하는 것 보다는 혼자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들이 많으시고 기연(機緣)으로 접했던 가져왔던 선(禪) 공부가 무르익은 분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고 답답한 마음에서 공부하는 법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봅니다.

 

 1. 선(禪)과 교(敎)


 흔히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이라고 옛 부터 말씀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말이 마음 없이 나올 수 없기에 교(敎)도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경전을 보면서 부처님의 말을 본다고 생각하면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보면서 부처님의 마음을 볼려고 할 때, 경전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러면 선(禪)과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경에 있는 부처님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9*9=81 입니다. 아함에서 화엄까지 모두 9*9=81을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부처님에게 9*9=81을 구구단표를 보여주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주판으로 계산된 결과로 보여주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계산기로 계산된 결과로 보여주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컴퓨터로 계산된 결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기에 부처님이 할 수 없이 그에 따라서 9*9=81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경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지 못한 분들이 9*9=81을 보지 못하고 구구단표, 주판, 계산기, 컴퓨터만 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 9*9=81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구구단표가 옳다, 주판으로 해야 한다, 계산기로 해야 한다, 컴퓨터로 해야 한다는 것 같고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움을 하게 되고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선(禪)입니다.

그렇지만 경전을 보면서 어떤 경전이던지 공통적으로 있는 부처님의

마음인 9*9=81을 알아내려고 하면 따로 선(禪)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경전을 보는 것도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고 견성(見性) 성불(成佛)한다고 말하는 선(禪)도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선(禪)하면서 경전(經典)보는 것은 나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수행이 몸에 배기 전에 경전을 보면, 구구단표, 주판, 계산기, 컴퓨터만 보고 이것이 부처님 마음인가 보다 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경전보는 것을 방지하지만 경전을 제대로 보면은 경전이 선공부에 도움을 줍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공부한 스님들도 경전을 보면서 글자만 보고 경전을 보았다고 말하는데 참으로 경전은 글자를 통해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만 되어 있으면 어떤 경전을 보아도 공부에 장애가 되지를 않습니다. 경전보는 자세가 안된 분이 조사어록을 읽게 되면 그 병은 부처님 경전을 잘 못 볼 때 생기는 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병에 걸리고 그 상태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3. 경전(經典)을 보는 법


 마음의 특징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흐르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경전을 보는 법을 말씀드립니다. 부처님이 근기에 맡게 설법을 하셨지만 그 근기라는 것은 높고 낮음이 아니라 설법을 듣는 자의 성향입니다. 성향은 식성과 같은 겁니다. 한국 사람이 수저를 사용하고 서양 사람이 포크를 사용해서 식사를 하는데 그것이 성향입니다. 수저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수저를 이용하여 식사하도록 하고 포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포크를 사용하여 식사하도록 배려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부처님을 직접 뵙고 설법을 듣는 것이 아니기에 그와 같은 배려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보는 법이 필요합니다. 경전을 볼 때 만일 명사에 치중하여 경전을 보게 되면 부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명사는 이미 부처님 당시에 굳어져 있던 개념어들입니다. 중생, 부처, 보살을 비롯한 이름과 각종 명사들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그 명사를 수식한 수식어와 동사 속에 숨어 있습니다. 명사는 듣는 사람의 성향을 배려한 것이라고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문맥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 부처님 말씀은 성향에 대한 배려에 많은 부분이 할당되어 있고 실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각 품의 앞뒤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품은 실제 부처님의 마음은 앞에 몇 줄에 숨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성향 배려인경우도 있습니다. 경전을 많이 보아서 경전 보는 법에 익숙해 지면 성향을 배려한 곳에서 조차도 부처님 마음의 쓰임까지도 알 수 있지만 처음에는 잘 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경전을 보면 선(禪) 공부하는데 경전은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4. 선병(禪病)의 원인은 무엇인가?


선(禪)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 선병에 걸렸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선병은 그 병을 알 수 있는 분들만 치료할 수 있지 스스로 치유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선병에 걸린 것을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제 때, 선지식에게 치료하지 않으면 그 병은 자기에게서 끝나지를 않고 다른 사람에게 까지 이것이 대단한 경지인양 말함으로써 해독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게 됩니다. 그럼 그와 같은 선병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가 하면 선에 대한 무지(無智)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선병은 예방될 수도 있고 또 걸려도 스스로 치유할 수도 있습니다. 선에 대한 무지만 없으면 됩니다. 선에 대한 무지는 선이 어떤 신비체험이라는

 

생각과 선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구하는 마음입니다.  선(禪) 수행을 할 때는 엄청난 믿음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 선수행이 아무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선병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선에서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면, 절대 자력입니다.

흔히 선 수행을 자력수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선의 병을 일으키는 가장 잘 못된 생각입니다. 자력이 아니라 절대 자력입니다. 절대 자력이란 것은 곧 비로자나 부처님을 말합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법신불입니다. 절대 자력이란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비로자나 법신불이 하는 것이 선입니다. 비로자나 법신불은 우주의 주재자입니다.

 

절대 자력이란 것은 우주의 주재자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곧 나라는 믿음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절대 자력이라고 하는 것이지 생존경쟁에 힙싸여서 싸우기에 바쁜 그 나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어떤 선병도 이겨낼 수 있읍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나라는 것은 비로자나 부처님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그대로 비로자나 부처님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은 곧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선 수행에 있어서 단계는 없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지 그 마음을 확인하는데 올라야 할 어떤 과정은 없습니다.

 

단지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할 수는 있습니다. 굳이 말하면 한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이 한 단계를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보장되지를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지루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단계를 두기도 합니다.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믿음을 갖게 하는 과정 속에서 선병은 모두 나오게 됩니다.

지루함과 조급함을 극복시키는 방법에서 생기는 경계를 수행의 징표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단계에서 선지식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지식의 도움이 없거나 아니면 수준미달의 사람과 함께 할 때, 대부분 거기에서 주저 앉아서 신비체험을 선(禪)의 궁극으로 알고 난리를 부리게 됩니다. 항간의 물의를 일으키는 도인들은 대부분 이 정도에서 멈춘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이는 거의 집중명상과 유사한 선으로 집중에서 오는 심리적 착각을 동반합니다. 몸이 빛으로 둘러 쌓였다. 귀신이 보였다. 부처님이 나타났다. 우주의 기를 받았다. 전생이 보인다. 등등의 말을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선 수행을 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로자나 부처님이라는 믿음에서는 구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병은 모두 구하는 마음에 의하여 생기고 구한다는 것은 내가 비로자나 부처님이라는 믿음이 부족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완벽한 법신불이라면 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법신불의 힘으로 선을 하기에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됩니다. 깨달음을 구한다던지 한 소식을 원한다든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병이 오게 됩니다.


5. 마음을 관(觀)하는 것, 선(禪)


흔히 불교의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각각 특색이 있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불교의 수행은 선(禪)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선이란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고 불교란 부처님의 마음을 확인하여 생사해탈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눌 수도 있고 나누기에 따라서는 100단계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단계가 곧 선입니다.

 

단계를 하나로 나누면 바로 선 수행을 하는 것이고 단계를 10단계로 나누면 9단계는 선 수행하는 준비이고 나머지 한 단계가 곧 선 수행입니다. 100단계로 나누면 99단계가 선 수행의 준비이고 한 단계가 곧 선 수행입니다. 그런데 한 단계의 선(禪)하는 분들이 1년 걸려서 부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때, 10단계의 선을 할 경우도 1년 걸린다면 좋겠는데 불법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9단계에서 10단계로 가는데 1년 걸립니다. 100단계이면 99단계에서 100단계 가는데 1년 걸립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까지는 다 부처님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 수행을 할려고 할 때는 이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선 수행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 모든 단계는 내가 곧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의 힘으로 선에 들어간다는 믿음 하나로 족한 것이 선입니다.

이 때,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 선(禪)인데 그럼 마음을 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겠습니다. 마음을 관한다는 것에 필수적인 기본은 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대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불하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깨달음을 구하는 생각도 하지 말고, 한소식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선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선은 무(無)목적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다시 강조되는 겁니다. 대상을 두지 않는 것이 무(無)목적의 목적입니다.

대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우리 마음 밖의 것이든지 아니면 마음 안의 것이든지 다 마음 밖의 대상입니다.

 

선하면서 선어록을 본다던지 아니면 선(禪)시(詩) 등에서 무언가를 찾아보려고 하면 그것이 곧 대상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서 올라오는 사념들을 바라보면 그것이 묵조선입니다. 그 사념들을 비로자나가 바라본다고 생각하고 마음껏 사념이 올라오도록 놔두는 방법입니다. 이 묵조선은 쉽지가 않아서 그것 보다는 조금 쉬운 방법이 화두를 일념으로 의심하는 간화선입니다. 사념을 그대로 버려둔다는 그 것이 어렵기에 화두로 마음을 잡아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필수적인 것은 사념은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둔다는 것이 어려우시면 사념을 더욱 왕성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시면서 화두를 더욱 간절히 의심해야 합니다. 이 때도 이 화두를 나의 절대력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의심한다고 해야 병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묵조선과 간화선의 공통점은 마음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관하는 것의 핵심은 사념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사념이 곧 우리 마음의 구체적 움직임입니다. 그것을 두고 따로 대상을 찾기에 온갖 병이 생깁니다.


6. 무언가 경계가 생길 때.


혼자 수선(修禪)을 할 때, 경계가 오면 선지식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선지식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으면 경전을 보십시요.

경전에서 부처님의 마음이 읽혀지기 시작하면 공부가 익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선지식을 찾아서 참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전을 선 수행을 통해서 일어난 경계에 의하여 모두 해석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선지식을 찾아서 참구하기가 어려운가?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비로자나의 절대 자력이라는 믿음이 없기에 선(禪)지식을 찾는 용기를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식의 도움이 없어도 굳건한 믿음 하나로 선 수행을 하신 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자서는 경계를 만나서 그것이 끝인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비로자나 절대 자력의 믿음이 있으면 선지식을 찾는데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 염불(念佛)과 선(禪)은 무엇이 다른가?


 염불과 선은 결론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둘 다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염불은 절대타력이고 선은 절대 자력입니다. 타력과 자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 하면, 타력이라는 것은 자신이 아주 못난 근기이기에 타력인 것이고 자력이라는 것은 자신이 대 우주의 주재자이기에 자력인 것입니다만 여기에 절대가 붙어 버리면 둘이 같은 것입니다.

절대가 있으면 거기에 자타가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마음가짐의 차이이나 둘 다 동일한 것은 구하지를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염불은 내 힘으로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구하지를 않고 원래 내 생명 아미타불에게 알아서 의탁하는 것이고 선(禪)은 나는 이미 우주의 주재자이기에 구하지를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아미타불과 비로자나가 둘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법에서 부처님은 오직 한 분입니다. 내가 성불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둘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이나 염불이 잘되고 있는지 않되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구하고 있는가 구하고 있지 않은가만 신경 쓰고 믿음을 더욱 강하게 내어야

합니다. 언제가 끝이 날지도 신경 쓰지 마시고 오직 마음을 충실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대상이 확대되어 무언가 온 것 같은 경계나 신통이 오면 다 구해서 오는 경계이고 이제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공부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라는 것만 알면 스스로를 점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