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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호. 해탈의 첫걸음

【 광륜 2호 2002년 여름 】


해탈의 첫걸음



 불자님들께서 오시느라고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자님들께서 여태까지 정성껏 배워오신 바와 같이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참다운 자기(자성自性)와 우주만유의 실상(實相)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오로지 진여불성을 밝히는데 모든 수행정진(修行精進)의 구경(究竟)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참배하고 있는 앞에 모신 탱화부처님은 우리 참마음 곧 진여불성의 무한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룩한 화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범부중생의 때묻은 번뇌망상의 마음은 사실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순수하고 원만한 참 마음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산이나 물이나 모든 존재들도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그대로는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실상(實相)은 아니며 인연따라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허망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마야(Maya)의 허상일 뿐입니다.

 이와같이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我執)이나 모든 대상들이 우리가 느끼는대로 실존한다고 집착하는 법집(法執)은 한결같이 가상(假相)에 불과하지만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실상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실존(實存)하는 우주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여불성을 시간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한 가장 보편적이요 궁극적인 생명의 실상이란 의미에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고 하는데 다른 종교나 철학에 있어서도 각기 다른 표현으로 진여불성을 참구(參究)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창조주(創造主)나, 플라톤(Platon 227~347 B.C.)의 선(善)의 이데아(Idea)나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7?)의 유일절대자(唯一絶對者)나,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범신론적 절대자(汎神論的 絶對者)등은 모두가 다 일체존재의 근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각기 종교철학에 따른 다양한 탐구방법 또한 예외없이 인간의 번뇌망상을 정화하고 본래 청정한 생명의 실상을 깨우치는 수련(修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범부중생들이 유구한 과거로부터 익혀온 번뇌업장(業障)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업(三業: 身 ․ 口 ․ 意)을 맑히는 도덕율(道德律)을 지켜야만 합니다.

 대승율장(大乘律藏)인 범망경(梵網經)에도 계율(戒律)을 지켜야 깊은 선정(禪定)에 들 수 있고 선정에 들어야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고로 성자들의 가르침은 유교(儒敎)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나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등의 십계명등도 다 나름대로의 계율과 금욕(禁慾)을 말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유물주의(唯物主義)의 방만한 풍조에 휘몰리고 있는 우리들이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일상생활을 결연히 다잡고 성불해탈의 대도(大道)를 다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최소한의 금욕과 계율을 지키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능엄경(稜嚴經)에도 게으르고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 참선하고자 함은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하여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비록 몇 만생(萬生)을 윤회전생(輪廻轉生)하여 삶을 되풀이 할지라도 우리는 결정코 성불하지 않을 수 없는 축복된 불자(佛子)입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본래로 만덕(萬德)을 갖춘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머물러 사는 우주 법계(法界) 또한 동일한 진여불성으로 장엄된 극락세계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