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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금타대화상 열반재일 법문

 

* 2003년 02월 24일 금타대화상 열반재일 법문입니다.  



진리의 당체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그 인과도 다 초월해 있습니다. 시간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닌데 지나간 것은 과(過)라고 하고 미처 오지 못한 그러한 시간은 미래라고 우리가 인간들이 편의에 따라서 정해 놓은 것입니다. 또 일체존재라는 것도 우리 인간들이 그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지를 못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나다, 너다 그렇게 구분을 세우는 겁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일체존재는 사실은 꿈이나 허깨비나 그림자같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 중생들이 업식으로서 내가 있고 니가 있고 하는 것이지 깨닫는 그 분상에서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고 니가 있고 하는 것도 이도 모두가 다 허망한 허상입니다. 대체로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 라는 존재는 이것은 4대5온의 가(假) 화합이라, 그 물질적 존재인 지수화풍 4대와 또는 정신적 존재인 우리가 감가하고 또는 상상하고 또는 의욕하고 분별시비하고 그러한 정신적 존재 이런 것이 잠시간 우리 업식으로 해서 합해져 있다 말입니다. 그 실상적인 실존(實存)의 세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 일체존재의 실상이 뭣인가, 실존이 뭣인가 이것은 그 존재론적으로 존재의 실상을 묻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은 우리 중생의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는 해답이 안 나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존재 자체에 까지 들어가야 그래야 참다운 실상 세계의 이른바 중도(中道)실상(實相)의 바른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이 편안하고 그야말로 불안의식이 없어야 그래야  바른 신앙이 되지 않습니까. 신앙의 발생자체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한 마음은 어떡해야 없앨 것인가 그런 데서 기독교나 유태교나 이슬람교 같은 여러 가지 종교와 철학체계가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가르침을 통합을 하고 포괄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만법의 실상은 바로 진여(眞如)불성(佛性)입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은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 했다고 하면 당연히 그때는 종말도 있어야 되겠지요. 그 우주를 창조하고 종말이  있고 우주를 창조 했다고 생각할 때는 창조한 하나님과 또는 창조를 당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나 자연계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과 이 자연계라는 것은 이분법이라 둘로 나누어진다 말입니다.


이른바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이원론이라  으로 나누어지면 그때는 삼원론이 되겠지요. 또 보다 더 많이 나누어지면 그때는 이른바 다원론이라 철학적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불안의식이 이렇게 나누어지고 쪼개어지면 인간의 불안의식을 해소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하나의 생명도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 또는 우주 에너지로 둘로 나눠 보질 않습니다. 그 달마대사 하면 우리 불자님들이 모르는 분 없이 다 아시질 않습니까?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의 핵심도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이입사행이란 법문이 있어요. 두 ‘이(二).자, 들 ’입(入)‘자. 이입사행은 뭣인고 하면 그 먼저 원리로 해서 “천지우주가 오직 그 하나의 진리뿐이다. 하나의 도리다.” 이런 것을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이른바 다스릴 ’리(理)‘자 원리란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그렇게 그 ‘이입’이라  이치로 해서 먼저 문득 깨닫고 그 다음 행입(行入)이라는 이치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문득 깨달을 수도 있지만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히 단박 깨달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업장을 녹이는 그런 수행이 따라야 되겠지요. 이것이 이른바 참 행입이라 이러한 어려운 법문을 구체적으로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허나 다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이치로 만유의 실상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인식론적으로 먼저 바른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어느 철학이나 무슨 종교나 우선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 말입니다.


바른 인식이란 건 뭣인가. 모두가 다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이 그때그때 괴롭고 또 여러 가지 우리 생활에 있어서 모순이 야기된 원인은 뭣일까요? 생명의 바탕이 원래 하나니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우리 중생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하나의 생명인 것을 여실(如實)하게 증오(證悟)라 증명을 해서 아는 분들이 이른바 성인(聖人)입니다.


근데 여실하게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중생의 마음도 역시 본래 마음은 우주를 충분히 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충분히 알 수 있는 힘을 원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전문술어로 말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합니다.


다만 업(業)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그만치 어두워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실하게 사실 그대로 우주를 보질 못 한다 말입니다. (업이라 것은 이것은 금생에 우리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으로 짓는 것이나 또는 과거세에 지은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이것은 업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내 몸뚱이, 내 존재라는 것은 이것은 원래 무아(無我)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원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가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불교는 무아를 말씀하고 다른 종교는 무아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가 따라 간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그 대목을 이해하시기가 좀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까 내 식구도 있고 내 사랑하는 그런 자식도 있고 내 명예도 있고 할 것인데 나라는 것이 없다고 그러면 너무나 허무하지 않는가. 그 가짜 나는 없어도 진짜 나는 있습니다. 진짜 나와 가짜 나는 뭣인가? 가짜 나는 우리 중생이 나라고 고집하는 그런 나는 이것은 가짜 ‘나’입니다. 진짜 나는 뭣인가? 진짜 나는 천지우주의 실상인 그 진여불성과 나와 둘이 아닌 그 깨달음을 얻는 그 자리가 진짜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은 진짜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고집한다 말입니다. 그 나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짜 ‘나’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인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허망하고 아무리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우선은 그렇게 납득이 안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했다 말입니다. 가짜 ‘나’는 그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러한 것이 잠시간 그 업으로 해서 합해진 것이 이 몸뚱이 하나의 육체고, 내 마음이라 한 것도 그때그때 우리가 감수하고 감각적으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상상하고 분별하고 느끼는 그런 것이 나라고 지금 우리가 고집한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짜 나를 우리가 못 떠나는 한 우리는 금생뿐만 아니라 다생겁래로 금생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내생에 가서 또 그대로 태어나고 소 같이 살았으면 내생에 가서 틀림없이 소가 되는 것이고 또 십선을 닦아서 보다 더 잘 살았으면 그때는 천상도 올라가고 사람만치 밖에는 못 살았으면 다시 사람으로 인도환생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인과라는 것은 그것은 호리불차(毫釐不差)라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대로 다 받습니다.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하니 소작업불망(所作業不亡)이라 그 백 천 겁 한 겁도 무량세월인데 백천 겁은 아- 그 백배 천배나 되니 더욱 무량세월 아닙니까? 그 백 천 겁 무량세월 동안 우리가 다시 태어나고 그 생사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소작업불망이라! 우리가 한번 지은 업은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그러한 대성자도 과거전생에 지으신 업은 다 받으셨습니다. 자기 종제한테 그렇게 시달림을 당하고 말입니다. 또 부처님도 더러는 남의 비방을 듣고 부처님도 탁발 나가서 동냥 나가서 밥 한 숟갈도 못 얻어서 하루 종일 탈탈 굶기도 하시고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전생에 부처님께서 업을 지으신 과봅니다.  그러거든 하물며 우리가 과보를 안 받겠습니까?


좋은 남편 만나는 것도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 것이고 훌륭한 자식들을 만나는 것도 다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금생에 우리가 할 일은 염염(念念)상시(常時) 참회(懺悔)라 항시 참회해야 한다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십선업(十善業)만 닦았어도 천상 가서 우리 인생고는 받질 않을 것인데 그 인간정도 밖에는 못 살았으니까 아- 사람 몸 받아 왔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은 우리 의지에 따라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금생에 우리가 그 과거세에 지은 업으로 해서, 과보로 해서 인생고를 한도 끝도 없이 지독한 고(苦)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따라서 우리 의지에 따라서 우리가 바로 도업(道業)을 지으면 됩니다. 선업(善業)을 지으면 됩니다. 도업이라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님뿐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다 진여(眞如)불성(佛性)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도업(道業)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나 남을 위해서 착하게 사는 것이 선업 아닙니까. 선업 지으면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열 가지 선업 지으면 그때는 틀림없이 천상 태어납니다. 그러한 그 백 천 겁 동안을 우리가 흘러간다 하더라도 한번 진 업은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우리가 꼭 다 받아야 됩니다. 따라서 지금 고생을 받는 것은 지금 현세 인생고를 받는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세상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우리 마음도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도 분명히 있는데 우리가 지금 보질 못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안 계시면 천지우주의 그 근원적인 생명, 형이상학적이고, 영생불멸한, 불생불멸한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가 불교를 믿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부처님하고 하나가 된 분들, 부처님하고 온전히 한 하나가 된 분들은 다 부처님하고 하나가 돼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계신다 말입니다.


이른바 해탈(解脫)해 계십니다. 그런 해탈의 경계, 깨달음의 경계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생에 불멸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생명 자체라 말입니다. 그 자리가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분명히 지금 내가 존재하니까 내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없으면 그때는 내가 우선 존재 할 수 없으니까요. 그와 똑같이 부처님도 우주생명의 그 근원자리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을 떠나서 영원히 존재하는 그 자리, 그 부처님 자리는 분명히 영생불변의 자립니다. 영원의 자립니다. 우리 모든 존재가 거기서 와서 다시 거기로 거의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도 마찬가집니다.


텅 빈, 공 자리 공겁(空劫)에서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공 가운데에 있는 모든 에너지의 작용, 플러스, 마이너스, 그 음과 양의 작용으로 해서 다시 우주가 형성됩니다. 그때가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성겁(成劫)이라 우주가 이루어지고 또 오랜 세월을 겪으면 우주의 모든 생물이 존재하는 살 ‘주(住)’자 주겁(住劫)이 됩니다. 그러고 또 역시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때는 그 작용으로 해서 그 세계에 들어있는 역시 마이너스, 플러스, 음양의 작용으로 해서 우주가 파괴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는 또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또 텅텅 빈 공겁이 됩니다. 공겁이 되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역시 영원한 생명체는 항시 존재한다 말입니다. 단지 자기가 지은 그 업 따라서 얼마만치 순수한가, 얼마만치 오염되어 있는가, 그런 차이뿐인 것이지 우리가 지은 업 따라서 모든 존재는 그와 같이 윤회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모양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의 우주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업을 다 녹여 버리면 그때는 우리 스스로 부처가 돼서 영원한 영생불멸한 우주에너지와 우리가 하나가 된다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열반이고 해탈이고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우리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천상존재나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가 다 그 자리에서 와서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바꿔서 말하면 부처의 자리에 와서 다시 또 부처가 우리가 돼 갑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조금도 에누리나 그런 가감이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한 것이고 그러나 방편법문과 방편을 떠나 버린 이른바 실상법문 실제법문과의 차이는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고 하면 우리 마음이 지금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마음일망정 우리 마음은 그대로 바로 부처님 마음하고 상통이 된다 말입니다. 상통을 넘어서 바로 하나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란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내 마음이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크다 작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고 모양이 없는 것은 오염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깨끗하다, 더럽다 그렇게 우리가 차별해서 말할 수가 있을망정 모양이 없는 것은 더럽다, 깨끗하다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우리 마음은 원래 청정한것인데 (이것을 자성청정심이라 하지요.) 우리 중생들이 자기마음을 여실하게 보질 못 하니까 내 마음이 때가 묻었다, 내 마음은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렇게 우리가 자기를 비하(卑下)시킨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내 마음은 때가 묻었으니까 오랜 세월동안 내가 닦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방편공부고, 내 마음은 본래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로 자성청정이라 본래로 청정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방편공부가 아니라 그대로 불교전문말로 하면은 그때는 돈오(頓悟)공부라 문득 단박 깨닫는 공부라 말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모든 마음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나는 업을 많이 지어서 금생에 고생도 많이 하고, 내 마음은 때가 많이 끼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나는 별로 업을 안 지었다고 자부심 가지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마음의 범부심의 헤아림인 것이고 그렇게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여기 계시는 분들 다 마음마다 자성(自性)청정심(淸淨心)이라 청정한 마음입니다. 석가모니 같은 그런 마음인 것이고 공자나 예수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양이 없거니 오염이 될래야 될 수도 없고 오염을 시킬래야 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자성청정심이라 이렇게 느끼는 것은 이것은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돈오공붑니다. 부처와 나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관무량수경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시방여래는 법계신이라 모든 부처님은 이 온 법계를 몸으로 한다 말입니다.  이 세계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온 세계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 삼천대천세계가 모두가 다 부처님 몸 덩어립니다. 모두가 진여불성 덩어립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스스로 마음을 얽어매서 보지를 못 헌다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김 아무개라고 해도 김 아무개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요. 스스로 그때그때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서 너는  누구다. 너는 내 아내다, 너는 내 남편이다 뭐 그렇게 모다 다 사람이 잠정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본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다 똑같이 부처님이라 말입니다. 부처님자리는 절대로 변화가 없습니다. 우주는 부처님자리는 항시 지속이 됩니다. 내가 죽든 말든 또는 이 지구가 파괴가 되든 말든 부처님자리는 그대로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항시 그대로 부처님자리는 청정하고 또는 자비롭고 지혜롭고 또는 만능을 다 갖추고서 항시 흘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역시 그와 같이 근본자리 근본자리를 여기고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빨라져요. 우리가 상대적인 그런 문제로 이럴까 저럴까 이것인가 저것인가 그렇게 해서는 우리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불안합니다.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한다는 그런 것이라든가 상대적인 문제는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 현상적인 것은 다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다 허망하다 말입니다. 누구한테 내가 얻어맞으나 또는 금생에 살다가 더러 과거세 업으로 해서 누구한테 내가 지금 칼을 맞고서 내 목숨이 금방 끊어지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 말입니다. 실지로 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내 생명자체는 절대로 훼손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에 우리가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우리가 하나 말입니다. 또는 다른 주력을 하나 우리 마음자리를 절대적인 그 자리 조금도 변통이 없는 자리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오염될래야 될 것도 없고 항시 청정하고 항시 만 공덕을 갖춘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둬야 우리 공부가 그래야 신속히 되고 우리마음의 불안의식도 해소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가르침은 절대로 우리들이 시달리게 하고 또는 공부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기운이 그런 소모가 되고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내가 부처가 아니다 그래야 우리가 손해를 보고 또는 마음도 괴롭고 그런 것이지 본래 부처가 부처라고 믿을 때는 우리 몸 조건이나 모든 마음 조건이 제일 좋은 상태입니다.


지금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많이 계시는 그런 분이 참 많을 것입니다. 사바세계라는 것은 고생바다라 놔서 뭐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 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그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이고 이 현상적인 존재는 다 그래요. 인연 따라서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 금강경보아도 다 모두가 그런 도리가 아닙니까.


모든 상(相)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님을,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즉견(卽見)여래(如來)라 바로 부처를 본다 말입니다.


우리가 상 때문에 부처를  못 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성자는 항시 그 본 성품에 입각해 삽니다. 본 성품자리는 절대로 생사가 없고 또는 변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불자님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도 역시 그 본래의 자리 본래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그 자리를 참구하는 의미에서 화두를 들어야지 덮어놓고서 이것이 뭣인가, 저것이 뭣인가 그걸로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확실히 믿고서 그 본분자리, 자기의 본래 근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공부해야 한다 말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한다하더라도 그 생명의 실상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해야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기왕이면 염불을, 염불참선을 다 하시고 싶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러 불자님들께서 먼 길서 오셔서 이 법회에 참여하신 일을 생각하면은 2시간, 3시간도 오랫동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이가 무던히 먹어서 제가 말을 할 때는 모르는데 말을 하고 나면 숨이 좀 가빠요. 따라서 제가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빨리 안 죽어야 여러분들 앞에 앞으로도 자주 나올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금생에 빚이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금생에 빚을 졌으니 금생에 다 갚고 가야 할 것인데 갚고 가기 위해서는 법회라도 앞으로 두고두고  많이 나와야 그래야  갚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많이 안 드립니다. 에너지를 아끼느라고요.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공부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마음 편하고 몸도 편하고 집안도 편하고 누구한테나 제일 좋은 제일 좋은 공붑니다.


남편한테나 아내한테나 아들한테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가사 높은 그런 지위나 그런 벼슬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처님자리, 생명의 실상자리, 부처님자리다가 마음 두고서 정치를 하고 또는 남을 가르치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근본적인 철학이 있는 그러한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본질을 무시하고 우리 근원을 무시하는 것은 부처님자리, 하나님자리를 무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인간의 참다운 구제가 못 됩니다. 어떤 사회사업을 하든지 꼭 우리 마음자리는 근원자리, 거기에다 마음을 두고서 하시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