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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2 집 2.불성광명

마음의 고향 제 2 집


*불기 2536년(1992년) 2월18일 태안사 동안거 해제법회에서 설법하신 석 청화(釋 淸華)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법어입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 [1]


얼마 안가서 계절(季節)이 바뀌게 됩니다.

아직은 바람결이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봄 그리고 여름이 오고 이내 다시 가을이 오고,

하는 이것은 누가 막을래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 섭리(攝理)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참선(參禪)공부도 그와 같이 가장 쉽습니다.

보통은 참선을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려운 공부로 압니다.

그러나 참선(參禪)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 용어로 안락스러운 법문 즉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까다롭고 경(經)도 많이 외워야 하지만

참선공부는 경을 많이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선(參禪)은 어디서 빌려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보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본래 자기의 생명(生命) 자체인 마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쉽고 가장 경비(經費)도 안 드는 공부입니다.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어려운 한문(漢文) 문화권(文化圈)을 거쳐 오면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참선 공부가 어째서 쉬운가?

이는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의 보배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는 마음자리, 나한테 갖추어 있는 보배 가운데

최상(最上)의 보배 마니보주(摩尼寶珠),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거(過去)에 도인(道人)들은 자기 마음 찾는 공부를 비유(譬喩)해서

기우멱우(騎牛覓牛)라 했습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보이니까

지금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는 격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과 깨달은 도인(道人)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분들은 모든 현상(現象)의 본모습을 봅니다.

본 성품(本性品)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본 성품(性品)을 못보고 겉의 현상(現象)만 봅니다.

우리는 우선 깨달은 분과 우리 중생과의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선(參禪)이 쉽다는 이유는 어차피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본 성품(性品)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봄이 가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우리 중생들은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황(彷徨)하는 나그네가 결국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듯이 그와 똑 같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입고, 많이 쓰고, 많이 놀고

또 높은 감투까지 쓰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현상적으로 거기에 얽매어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도 역시 어느 땐가는 죽어서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본 성품(本性品)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故鄕)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꼭 진리(眞理) 그대로의 성품(性品)을 보고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진리에서 나와서 진리로 가고 - 같을 여(如)자, 올 래(來)자 -

같을 여(如)자, 그 자(字)는 바로 진여(眞如)라! 진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여래란 말은 진리에서 그대로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왔다는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진리에서 왔으니까 다시 진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생각할 때는 진리는 고정 불변한 어떤 교리(敎理)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리(眞理)는 모든 생명(生命)을 다 감싸있는 일체(一切) 존재(存在)의 근본자리입니다.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宇宙)의 본체(本體)가 바로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眞理)는 과거(過去)도 없고, 현재(現在)도 없고, 미래(未來)도 없고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科學) 만능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력(原子力)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자(原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우리는 지식(知識)으로 약간은 압니다.

물리학적(物理學的)인 차원(次元)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역시 확실한 가르침은 못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불확정(不確定)성의 원리(原理)가 있지 않습니까.

전자(電子)라는 것도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모습을 바꾼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衆生)들이 볼 수 없고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보다 더 미세한 기계를 이용해 유추할 수 있는 미시적(微視的)인 단계에서는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런 한 원자력(原子力)의 위대한 힘을 우리가 편리하게 이용해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자력 저쪽 세계(世界)는 광명(光明)의 세계(世界)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다 방사능(放射能)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을 위시해서 다른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생물학적(生物學的)인 술어로 말하면 광합성(光合成),

즉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식물도 태양광선(太陽光線)이 안 들어가서 된 것이 없습니다.

물질(物質)의 가장 미세(微細)한 저편 세계(世界)가

하나의 방사능(放射能)같은 방사(放射) 광명(光明)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합성되는 광합성(光合成)이라는 말 이전에

사실은 모두가 다 광명(光明)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參禪)을 해서 깨닫고자 합니다마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목적(目的)을 뚜렷이 설정을 해야 만이 그곳에 도달하려고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또한 거기에 걸 맞는 수행(修行)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목적의식(目的意識)이 희미하면 가고자 하는 열성도 적고 또 공부하는 방법도 거기에 계합(契合)된 걸 맞는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이 자리는 그냥 무조건 어디에 인격적(人格的)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태양광선(太陽光線)과 같은

가시적(可視的)인 광명(光明)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광명(淸淨光明)입니다.

원자(原子) 속에 들어있는 기운(氣運)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만 하더라도

굉장히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하물며 원자력(原子力)보다도 더 순수(純粹)한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광명(光明)이 부처님 광명인데 거기에는 무한(無限)의 환희광명(歡喜光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광명(光明)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신비로운 힘을 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하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였습니다.

도는 그곳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조금 모셨지만 부사의(不思議)한 힘으로 아픈 것이 그냥 나아버리는 원리(原理)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오염(汚染)된 생명(生命)이 차근차근 정화(淨化)되어서

그러한 광명세계(光名世界)로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 생명(生命)인 광명(光明) 자체는

일체(一切)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상적(現象的)으로 잘나고 못나고

또는 학문적(學問的)으로 지식(知識)이 많고 적음은

마음의 본바탕을 닦아서 가는 생명의 본질인 광명을 향해서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도 상관이 없고 또 과거에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앙굴리마라는 나중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해서 도인이 되었지마는

그전에는 바라문교(婆羅門敎) 스승을 섬겨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바라문교(婆羅門敎) 스승이 상당히 유명한 분이어서

한 500명 이상의 제자(弟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앙굴리마라가 제일 미남이고 똑똑하고

또 능력이 제일 특출해 있었습니다.

그 바라문 스승의 아내는 제법 잘나고 예쁘게 생긴 분인데

그 바라문 스승은 나이가 많으니까

그 아내는 나이 젊고 똑똑하고 미남인 앙굴리마라한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차근차근 호감(好感)이 짙어져서 애정(愛情)으로 바꿔졌습니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이 외출하여 다른 곳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동안에

이 앙굴리마라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마음이 진실(眞實)한 분이고 또 스승이 아내이기 때문에

공정한 마음을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요구를 안 들어주니까 드디어 부인은 원심(怨心)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남편이 돌아오니까

일부러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또 옷에다 자기가 할켜서 핏자국을 내놓고는 앙굴리마라가 당신이 안 계실 때 욕보이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라문 스승은 아직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도(道)를 성취한 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분기(憤氣)가 차 올랐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를 골탕을 먹이고 파멸(破滅) 시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마라에게 말하기를 '그대한테 내가 여태까지 아껴오던 신비스러운 비결인 비수(秘手)를 전수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그대가 백 명의 사람을 죽여 한 사람한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공부를 하면 공부가 결정적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매우 정직하고 단순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스승을 숭배하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듣고 차례로 사람을 죽여 나갔습니다.

그래서 99명까지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정말로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생(前生)에 선근(善根)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습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이 인연(因緣)이 도래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앞에 나섰단 말입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을 죽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해버리고 마을이나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앞에 나오시자 기운이 장사이고 용맹스러운 앙굴리마라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칼을 내려 쳤지만 팔뚝을 딱 잡혀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굴복(屈服)을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선근이 깊어서, 크게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몇 년 안가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 하더라도

현상적인 모양은 설사 사기(詐欺)를 치고 죄(罪)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 본 성품(性品)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따라서 참선(參禪)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기가 갖추고 있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므로, 참선 공부할 때는 군더더기나 복잡한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오직 마음 닦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참선(參禪)하는 공부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른 것인가.

우리가 기왕이면은 빠른 지름길로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근기(根機)가 여러 계층이라서

과거세(過去世)에 학문(學問)을 많이 하고 경(經)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금생(今生)에 경(經)을 보다가 깨닫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새벽에 계명성(啓明星), 즉 금성(金星)을 보고 깨닫듯이

당(唐)나라 때 영운대사(靈雲大師)같은 분은 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동산양개(洞山良介)스님은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무정(無情)은 인간(人間)이나 기타 동물(動物)처럼 식(識)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작정 설법이란 사람이 설법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다른 동물이 설법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무나 흙이나 돌이 설법을 하는 것이 무정설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 말을 곧이듣기가 곤란스럽겠지요.

그러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무정설법(無情說法)이 존재합니다.

부처님 경전(經典)중의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구설구청(俱說俱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어떠한 미물(微物)이나 흙이나

또는 모든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구설구청(俱說俱聽),

즉 함께 말씀도 하고 함께 듣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법사(法師)가 설법(說法)을 하고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소중한 설법(說法)은 사람도 아니고, 동물(動物)도 아닌,

나무나 흙이나 돌이나 어떤 것이나 다 같이, 설법(說法)을 하고 있는 또한 동시(同時)에 같이 듣고 있습니다.

나무도 듣고 있고 소도 듣고 있고 다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상식 범위 밖의 일이니까 우리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法) 가운데는 분명히 그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우리 중생(衆生)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現象的)인 차원(次元)에서는

동물(動物)이 있고 사람이 있고 식물(植物)이 있고 이렇게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본 성품(本性品)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생명(生命)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하면 사람이나 동물만 중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은

부처님의 근본(根本) 도리(道理)에서 볼 때는 유정무정(有情無情),

식(識)이 있는 것이나 의식(意識)이 없는 것이나

또는 유상무상(有像無像),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중생(衆生)입니다.

따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즉 모든 중생(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것이나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두두물물(頭頭物物), 천지만유(天地萬有)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있을 것인가, 머리에가 있을 것인가?

불성(佛性)은 우리 머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 또는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 전체가 그런 불성의 화신(化身)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핵심(核心)인 목심(木心)에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 전체(全體)가 불성이 화신입니다.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 부처님 법(法)이 현대적(現代的)인 의미(意味)에서는 웬만한 것은 모두가 다 밝혀져 버렸습니다.

물질(物質)이라는 것 역시 우리 중생(衆生)이 보아서 이것, 저것 하는 것이지

물리학도(物理學徒)가 생각할 때 물질은

종말(終末)에 가서는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소박한 상식(常識)으로 보면

무슨 분자(分子)이고, 또는 산소(酸素)요 수소(水素)요하지만

이런 것도 역시 어느 정도까지 대체적으로 말한 것이지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른바 미시적(微視的)인 미세한 분야까지 들어갈 때는

종당(終當)에는 텅텅 비어버리고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科學)이라 하는 것은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즉, 모양이 있는 것은 알지마는 모양이 없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 공간의 범주 내에 든 것만을 과학으로 아는 것이지

그 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도는 그 밖의 소식을 우리한테 가르치는 가르침도

모두가 그야말로 말씀들을 많이 했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납득이 가도록 해석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하늘이요, 하나님이요, 태극(太極)이요, 음양(陰陽)이요,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 소식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말들을 많이 하지마는

확실하게 우리한테 명증적(明證的)으로 가르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現代)는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世界),

이른바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의 그런 세계의 것은

불교(佛敎)가 아니더라도 밝혀져 있습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 [2]

왜 우리 현대 인간(人間)은 불안스러운가?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물질도 분석해 놓고 보면 별것도 아니고 텅텅 비어버리는데 그러면 물질 밖의 소식,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생명(生命)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가 왜 붕괴(崩壞) 됐는가?

막스주의도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科學的)인 시도(試圖)를 여러 가지 많이 했습니다.

거기도 대학(大學)도 나오고 박사(博士)도 나오는 그런 체제(體制) 가운데서

왜 그렇게 오래 못가고 붕괴가 되었는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 저쪽 소식,

아무리 물질적인 것은 이해를 잘 한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 자기 생명(生命)에 대한 소식을 모르면

사람은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을 평등(平等)하게 분배(分配)하고 또 생산(生産)을 한다 하더라도 생명(生命) 자체(自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人間)의 존엄성(尊嚴性)도 재대로 확보할 수가 없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항시 자기 스스로 불안스러운 마음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人間)은 본래(本來)가 부처이니까,

부처가 되어야 만이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물질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이른바 성품세계(性品世界)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물질이 아닌 동시에 성품세계이기 때문에 바로 생명(生命)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말이나 부처님이라는 말이나

또는 생명(生命)이라는 말이나 모두 똑같은 뜻입니다.

불교(佛敎)는 바로 생명(生命)의 종교(宗敎)입니다.

요즈음 생명(生命) 해방(解放)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다 생명(生命) 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불교(佛敎)말로 견성(見性)을 해서

생명(生命)의 성품(性品)을 딱 체험(體驗)해 버려야 비로소 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공부입니다.

따라서 참선공부의 지름길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분명히 생명(生命)자리를 느껴야 합니다.

우선 이치(理致)를 얻어야 합니다.

내 생명의 뿌리와 네 생명의 뿌리가 다른 것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요.

공간성도 있다고 생각하면 내 생명, 네 생명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물질이 아닌 이것이 자취나 모양이나 그런 흔적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 뿌리가 둘이나 셋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生命) 차원(次元)에서 보면

일체(一切)존재의 생명(生命)이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일체존재 가운데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動物)과 식물(植物)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바로 보면 생명(生命)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 공부할 때는 생명(生命)의 소재가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마음이 열립니다.

참선공부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지 않으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고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우고 또는 화두(話頭)를 들고 하더라도 참선(參禪)공부가 못됩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선(先)자, 깨달을 오(悟)자, 먼저 이치(理致)나 이해(理解)로 깨닫고 닦아야 참선(參禪)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하면 될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物質)이라 하는 것은

종당에는 텅텅 비어 버리고 생명(生命)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萬法)은 일체존재(一切存在)를 가리킵니다.

만법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은 무엇인가, 생명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종당에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하나의 생명(生命) 뿐입니다.

그 생명(生命)은 바로 빛입니다.

하찮은 생명 같으면 그 생명(生命)으로 해서 저 태양(太陽)이 나오고

은하계(銀河系)가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하겠습니까.

일체(一切)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일체(一切) 지혜(智慧)를 갖춘 빛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것저것 다 창조(創造)해 냅니다.

그래서 그 생명(生命) 자리를 여의주(如意珠)로 비교해서 말합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는 마음 구슬이 여의주(如意珠)입니다.

따라서 생명(生命)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달도 나오고 해도 나오고 모두가 다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연기법적(緣起法的)으로 나옵니다.

그 생명 자체는 완전(完全)하고 완벽(完璧)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可能性)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세계나

또는 인간(人間)세계, 천상(天上)세계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성자(聖者)세계, 보살(菩薩)세계, 부처의 세계가 생명(生命) 가운데는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苦口煗娡)으로 생명(生命)의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계는 광명정토(光明淨土), 그야말로 광명세계(光名世界)이고 무량세계(無量世界)입니다.

또한 광명장(光明藏)이고 공덕장(功德藏)입니다.

하여튼 좋은 말은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보살(菩薩)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무장애보살(無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부처님 이름도 굉장히 많습니다.

천지우주에 부처님 이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을 적은 책이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듯이

삼천 가지나 부처님 이름이 있습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그런 부처님들이

뿔뿔이 다 인격적(人格的)으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있다고 생각할 때는 벌써 불교가 아닙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고 어떠한 형체(形體)가 있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뿔뿔이 있지 않고 생명체(生命體) 내에 들어있는 무량(無量) 공덕(功德)입니다.

그러기에 무장무애(無障無楝), 조금도 장애가 없는 것이고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 세계까지 가야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

즉, 성품(性品)을 보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性品) 보도록 까지 그것이 쉬운 일인가?

단박에 되어버리는 것인가?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

즉, 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해오(解悟)가 앞서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해오 정도는 재주 있는 분들은 단박에 깨달을 수 있겠지요. 정말 따지고 보아도 별것이 아니고 물리학에서도 종당에는 다 비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남는 것은 생명뿐이 아닌가라고 유추해서 믿는 사람들은,

그냥 모두가 생명뿐이구나! 이렇게 해서 마음을 모를 수가 있겠지마는 증명(證明)을 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증명(證明)을 해야 만이 온전히 자기(自己) 생명(生命) 가운데 들어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우리가 다 쓸 수가 있는 것이고 좀 맛을 볼 것인데 증명(證明)을 못하면 아무런 맛을 못 봅니다. 팔만사천 경전(經典)을 앞으로 뒤로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는 그것을 못 느낀단 말입니다.

금생(今生)에 우리가 태어나서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 생명 가운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등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량 세월 동안에 어떠한 인간(人間)이나 모두가 다 과거(過去) 어느 생(生)엔가는 아수라 세계로 갔다가 지옥으로 갔다가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생명 가운데는 지옥에 들어가서 지은 업장(業障) 또는 아수라 세계에 가서 지은 업장 또는 개나 소나 돼지가 되어서 지은 업장 등, 많은 업장(業障)들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업장(業障)때문에 이치(理致)로 해서 조금 안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바탕인, 본 고향(故鄕) 자리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증명을 쉽게 못하니까 사흘, 한 달 또는 일 년의 별시수행(別時修行)이 필요합니다.

홍인(弘忍) 스님 같은 분들은 6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오고 공부했습니다.

과거 중국 당(唐)나라 때, 신라(新羅) 때, 고려(高麗)때는 위대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춘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때는 자기 생명의 본바탕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확철대오(廓徹大悟)했습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단박에는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 갈 길은 오직 외길뿐입니다. 우리 본래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길밖에는

참다운 안심입명(安心立命) 자리는 없습니다. 그 길을 알아야만 가정, 사회, 국가, 세계의 참다운 평화를 추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영국(英國)의 유명한 역사가(歷史家)인 토인비(Toynbee, A.J.)는 불교(佛敎)를 숭상(崇尙)했으며 현대 원자력(原子力) 시대에 있어서 인간(人間)들이 집단(集團) 자살(自殺)을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나 예수, 칸트나 플라톤, 이런 분들이 목적(目的)으로 했던 인생관(人生觀)으로 돌아가는 일 밖에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자(原子) 무기(武器)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량(大量) 살상무기(殺傷武器) 아닙니까? 우리가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평화(平和)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한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것, 공자(孔子)의 가르침이나 노자(老子)의 가르침의 핵심은 '나'와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빨리 하고 싶습니다.

용(龍)이 제 아무리 용맹스럽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구름이 없으면 승천(昇天)을 못하고, 물이 없으면 힘을 못 씁니다. 호랑이도 영악스러운 동물이지만 언덕이 있고 산이 있어야 비비는 것이지 아니면 힘을 못 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성불(成佛)하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애쓰지마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소유(所有)가 있다는 관념(觀念)이 있으면

성불(成佛)을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바른 존재(存在)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衆生)들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어야 공부가 바로 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염불(念佛)만 많이 하면 된다.

또는 화두(話頭)만 의심(疑心)하면 쉽게 깨달아 버린다 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심(一心)으로 하면 마음은 모아지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원효(元曉) 스님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씀하셨듯이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항시 부처님 공부에는 지혜(智慧)가 더불어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공(諸法空)의 지혜 즉,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지혜입니다.

현대의 불교는 생활불교(生活佛敎)이고,

생활불교를 하려면 있는 것 즉 현상적인 것을 좋게 해야 되는데,

모두 허망하다고 하면 어떻게 생활불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실존(實存) 따라서,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원적(多元的)이고 실존적(實存的)인 사람이 분명히 비었으면 비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입각해야, 공부도 되고 자기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집안, 사회(社會), 국가(國家), 세계(世界)도 편합니다.

토인비는 천재(天才)이기 때문에 불교인(佛敎人)이 아니지만 그런 바른 말을 했습니다.

예수나 석가(釋迦)나 공자(孔子) 등 성인의 인생관(人生觀)을 자기 인생관(人生觀)으로 하고, 행동(行動)을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참다운 평화(平和)와 참다운 행복(幸福)이 있습니다.

 

-. 불성광명(佛性光明) [3]


'나'라는 것은 분명히 비어 있단 말입니다.

왜 비어 있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合)해 있기 때문에 비어있는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은 무엇인가? 인과 연도 역시 비어 있습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이 아닌 생명체(生命體)가

그때그때 상(相)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본래(本來)가 물질(物質)이라면 물질이 이렇게 변(變)하고 저렇게 변해도 그대로 물질이 되겠습니다만, 물질이 아닌 것이 제아무리 상(相)을 이리저리 낸다 하더라도 물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로를 몇 천 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인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이 구름 같은 모양을 내나 개 같은 모양을 내나 결국은 다 물질이 아닙니다. 다만 진동(振動)과 운동(運動)의 차이(差異)로 해서 이 모양 저 모양, 나요 너요 하는 것이지,

본바탕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조금도 변동(變動)이 없습니다.

앙굴리마라가 99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본 성품 자리에서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또는 축생(畜生)으로 사람으로 와서,

우리 업장(業障)이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차곡차곡 축적(蓄積)되어 있다 하더라도, 본(本) 성품(性品)에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관(悲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버릇을 한 번 붙여 놓으면 떼어 내기가 어려워서 그 버릇 때문에 시간을 오랫동안 끌게 됩니다. 시간을 단축하여 빨리 떼기 위해서는, 비록 지금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금생(今生)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해서 업장(業障)이 많다 하더라도

내 머리카락 끝에서 발끝까지 부처님 성품(性品) 즉 광명(光明)과 하나가 되어서, 조금도 흠축이 없이 천지 우주의 생명 자체인 부처님의 견해(見解), 즉 부처님의 안목(眼目)인 불안(佛眼)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차별(差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 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보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무슨 욕심(慾心)을 낼 것이고 무슨 미움과 사랑

즉 애증(愛憎)을 낼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그 곳까지 꼭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물(生物)이 살 때인 주겁(住劫)인데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안 가서, 차차 파괴(破壞)가 되는 시기인 괴겁(壞劫)이 옵니다.

지금 기독교(基督敎) 종말론(終末論)에서 1992년 10월 28일날 지구가 종말 한다고 하고, 휴거라 해서 하나님이 들어 올려서 공중(空中)으로 구제(救濟)를 받는다고 합니다.

불교(佛敎)는 이러한 비과학적(非科學的)인 말은 사용 안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徹頭徹尾) 합리적(合理的)입니다.

지구(地球)나 다른 천체(天體)가 오랫동안 주겁(住劫)을 거치다 보면

차츰차츰 불가역(不可逆)의 에너지(Energy)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增長)하여 다 불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物理學)이 증명(證明)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英國)의 호킹(Stephen W.Hawking; 1942 - )박사 같은 분도

약 100억 년 정도 되면 우주(宇宙)가 점진적으로 파괴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 물질세계는

결국은 다 파괴가 되고 그 후에는 텅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 즉 그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생명(生命) 자체인 진여(眞如) 불성광명(佛性光明)으로 환원(還元)되어 버립니다. 그 때는 성불(成佛)하기 싫어도 성불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불경(佛經)을 보면 겁진소시(劫塵消時)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선정(皆當禪定)이라 했습니다.

즉 괴겁(壞劫)이 다해서 천지(天地)가 파괴(破壞)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깊은 삼매(三昧)에 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종당에는 꼭 성불(成佛)해야 합니다.

다만 성불을 빨리 못하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가르치고 아프고 죽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參禪) 공부는 제일 쉬운 안락(安樂)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불할 것이라고 하여 지금 낮잠을 자고 게으름 부리고, 또는 망상(妄想)을 한다 하더라도 성불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 간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섭리(攝理)에 편승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가만 두어도 몇 억 년 뒤에는, 우주가 다 파괴될 때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마음을 열고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성자(聖者)만이 실상(實相)을 봅니다.

성자의 청정안목(淸淨眼目)에서 보는 것만이 진실(眞實)이고 사실(事實)이며,

범부(凡夫)가 보는 것은 설사 학문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바로 온전히 실상(實相)을 못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안보이지만 성자의 가르침 따라, '너요 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가 없이, 우주가 모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본래 부처라고 느끼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화두(話頭)도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염불(念佛)도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선(參禪)공부가 되는 것이지,

아미타(阿彌陀)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또 화두(話頭)만 의심(疑心)하면 깨달아 버린다는 식으로 해서는 지름길이 못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석가모니(釋迦牟尼)나 각 성자가 말씀한 이치를 우리 마음에 딱 두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이치를 안 여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씀드리면

본체(本體)를 안 여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主人公)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고향(故鄕)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고향(故鄕) 떠난 사람들이 고향을 가고 싶을 때에 고향 소재도 모르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갈 곳은 성불의 길이므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길목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주문(呪文)입니다.

길목을 안다 하더라도 고향(故鄕) 생각을 수시로 끊임없이 해야 가는 길이 빨라집니다.

공부하면 차근차근 자기 몸도 마음도 맑아 옵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계행(戒行)을 잘 지켜서 몸 청정(淸淨)하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그 역으로 마음 청정하면 몸도 따라서 청정해 집니다.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부터 익어져서,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확 트일 때가 있습니다.

확 트일 때 가서는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이 몸이 내 것인가? 이것이 내 몸인가?' 이만큼만 되어도 자기 몸을 위해서 남을 희생(犧牲) 시킨다거나, 자기가 당선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한다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금생(今生)에 우리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정도는 못 된다 하더라도,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면 자기 몸도 마음도 쏙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불교용어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며, 그러한 때의 기분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환희충천(歡喜衝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잘 입고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행복(幸福)한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참다운 행복은 자기 몸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은 더욱더 맑아지고

또 모든 사람이 다 귀엽게 보이고 천지우주(天地宇宙)모두가 생명(生命)으로 보입니다.

이런 행복(幸福)은 어디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행복을 우리가 놓치고 안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가다가 더 밝아지면 그때는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전기(電氣)불도 원래 우주에 빛이 있으니까 이와 같이 빛이 나오는 것이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말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광명(光明) 즉 빛을 보고 몸이 가벼워지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어

착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집니다.

애매하게 자기를 비방한다 하더라도 별로 싫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타사비 왕비는 그야말로 못난 얼굴이었는데

빛을 봄으로 해서 졸지에 미인(美人)이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法)은 아름다움도 예술(藝術)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온전히 빛을 볼 때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우리한테 그것이 온단 말입니다. 공부를 해도 실지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얻은 것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런 광명(光明)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생명(生命) 자체이고, 광명(光明)이며,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우주(宇宙)에는 빈틈도 없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적광(寂光)이 충만(充滿)해 있다고 생각하면서

화두(話頭)도 의심하고 염불도 하면

이른바 도인들이 말씀하신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서

지혜와 선정이 같이 어울려져서 공부가 빠를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들 말씀에도 염염상속(念念相續) 필경위증(畢竟爲證)!

생각생각 부처님 경계,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인 부처님의 본 성품(性品)을 놓치지 않고서, 내 밖에나 안이나 충만(充滿)한 광명자리를 훤히 느끼면서,

부처님 이름이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한다면

필경위증(畢竟爲證)이라! 자기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한다면

십즉십증(十卽十證) 백즉백증(百卽百證),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 다 성불(成佛)하고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성불한다는 그 뜻입니다.

정말로 우리 생명은 위대한 것입니다.

잘나고 못나고, 못살고 부자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한테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생명을 믿고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도 하면 참 쉬운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다 편한 것입니다.

자비심(慈悲心)이 더 우러나와서 집안도 평화(平和)로워 집니다.

특히 우리 보살님들은 집안에서 정말로 자비로운 보살의 화신(化身)이 되셔야 합니다.

아무 말씀으로나 하실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비심으로 자기 남편이나 자식이 참으로 자기 자신을 따를 때까지 하셔야 합니다. 공부를 참으로 했다면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어 부드러워져서 누구하고 시비(是非)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같이 차근차근 보여지니 어떻게 시비가 되겠습니까.

공부가 깊어지면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다 드러납니다.

꼭 금생에 자기 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 자리를 가셔야 합니다.

다소 제대로 못 간다 하더라도, 몸도 마음도 잊을 정도의 아주 쾌적한 경안심(輕安心)

또는 광명(光明)이 보일 수 있는 정도까지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량(無量) 공덕(功德)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