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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1집 2.안심입명(安心立命)

 

안심입명(安心立命)


*불기 2535년(1991년) 6월2일 태안사 정기법회(매월 첫 일요일)에서 설법하신 석 청화(釋 淸華)큰스님의 법어입니다.

  

이렇게 날씨가 궂은데 먼 거리에서 고생하시고 오신 것은 다른 데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좀 얻어 봐야 되겠다는 자기 행복(幸福)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 봐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어서 오신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인간(人間) 치고서 마음이 안락(安樂)스럽고, 마음이 편안(便安)하고, 그러한 자기 안정(安定)을 도모하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幸福)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安定)되지 않으면 얻을 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도 모두가 다 안심법문(安心法門),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안심법문이 기본적인 법의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印度)에서 일부러 중국(中國)으로 오신 뜻도 역시 안심법문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에 길의 순로(順路)라든가 길목을 잘 모르면은 마음이 안정(安定)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생(人生)살이도 우리 갈 길을 훤히 알아 버리고서, 인생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 의미(意味)도 알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目的)이 무엇인가, 이런 인생의 목적의식도 알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참 살기가 편안할 것인데, 목표도 모르고, 사는 방법도 모르면은 불안하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우리 현 사회(社會)의 이러한 혼돈한 상황도 모두가 다 불안(不安)스러운 마음을 제거할 수 없으니까 그와 같이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불행(不幸)합니다.

대체로 우리 마음은 또 어떤 것이고, 물질(物質)은 또 어떤 것인가, 그렇게 우리가 생명(生命)을 바치고 그야말로 참 서로 피차 증오하고 그러한 것들이 모두가 다 우리 눈앞에 전개(展開)되는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불확실(不確實)해서, 투명(透明)스럽게 다 보이면 좋은데 무엇인지를 잘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귀다툼하고 추구(追求)해서 마지않는 권력(權力)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기 평생(平生)을 두고 의식주(衣食住) 때문에 고생하고 해맵니다만 의식주란 대체 어떤 것인가, 물질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관해서 확실한 그러한 인생관(人生觀)이 안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불안스럽고 따라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괴로울 때는, 어떤 누구나 불확실하면 괴롭겠지요. 괴로운 마음이 대체 어디에가 있는 것인가? 괴로운 마음의 정체를 우리가 알아야 쓸 것인데, 정체를 알려고 하지 않고서, 그냥 잘못 보면 잘못 본 그대로, 자기 마음으로 자작지얼(自作之孼)로 스스로 고통(苦痛)을 받고 번뇌(煩惱)를 일으킵니다.

남을 미워하고 또는 증오(憎惡)하면은, 미워하는 그 마음의 정체(正體)는 무엇인가? 이것도 한번 파악해 볼 일인데 우리가 별로 생각지 않고서 그냥 덮어놓고 미워하다가 드디어는 죽이고 죽곤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남 미워도 하고 증오(憎惡)도 하고, 또는 너무나 지나치게 좋아도 하고,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사실(事實)은 아무런 자취가 없습니다. 어떠한 마음이나 우리가 아무리 추구해 봐도 아무런 자취가 없습니다. 자취가 없다는 말은 - 바꿔서 말하면은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 되겠지요.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도 자취가 없거니, 이것도 역시 사실은 없습니다.

가사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의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몸뚱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자기 몸뚱이라는 관념(觀念), '나'라는 이 몸에 대해서 - 몸뚱이라 하는 현상적인 상(相)은 있겠습니다마는 -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는 관념(觀念),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도 역시 자취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문(法門)은 그냥 우리 마음 - 좋든, 궂든, 싫든 또는 마음이 어떻든 간에 - 모두가 자취가 없다는 것은 짐작이 되겠습니다마는, 마음이 모양이 없으니까 자취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판단(判斷)하고 있는, 우리가 인식(認識)하고 있는 대상(對象)은 무엇인가. 대상은 우리 범부(凡夫)가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대상까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법문(法門)입니다.

그러한데서 우리 불교(佛敎)가 어렵다고 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기 주관적(主觀的)인 관념이 형태(形態)인 마음은 형체(形體)가 아닌 것이니까 무(無)라 하고, 공(空)이라 하면 납득이 되겠습니다마는,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된 이 대상 자체(自體)가 비어있다는 이것은 납득(納得)이 안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납득을 해야 만이 비로소 인생(人生)의 고난(苦難)을 해결할 수가 있고, 불안의식(不安意識)을 제거(除去)할 수가 있습니다. 대상(對象)도 모두가 공(空)이다 하는 이것을 몰라서는 아무리 불교(佛敎)를 많이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생고(人生苦)를 우리 번뇌를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번뇌(煩惱)를 떠날래야 떠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인생의 모든 제반문제(諸般問題)를 해결할래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前生)에 설산(雪山)에 들어 가셔서 그렇게 애쓰고 구도(求道)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이제 부처님의 법(法)도 없고 하는 때라 놔서 어떻게 무얼 구할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선근(善根)이 깊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업장(業障)이 무겁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만족을 해버리는 그런 천박(淺薄)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나, 인간성(人間性)의 깊이가 있어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그만큼 깊이가 더 있다고 봐야지요.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인간성이 얕아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거기에서 그냥 그대로 머물러 버립니다마는 깊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구합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이런 것도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本來) 부처라 하는 그런 기묘(奇妙)한, 그런 불성(佛性)이라 하는 기묘한 성품(性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으면, 부처님 성품(性品), 불성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마는, 알 턱이 없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실존적(實存的)인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따라서 영향(影響)을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교(佛敎)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추구(追求)하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돈을 많이 얻어 보아도 그것으로 만족을 못 채우고 말입니다. 또한 젊을 때는 이성(異性)을 추구해서 이성만 충족(充足)되면 되겠지 하지만 그것도 충족해 보아도 만족(滿足)을 못 채운단 말입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 보던지 간에 현상적(現象的)인 것을 제아무리 많이 가져본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근원적(根源的)인 불안의식(不安意識)은 절대로 해소(解消)를 못시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原來) 갖추어져 가지고 있어서, 불성까지 가벼려야지 그 뿌리까지 못 가면은 항시 불안(不安)스럽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는, 그러니까 우리가 불성까지 미쳐 못 가면은 불성을 깨닫는 경지(境地)에 못 들어가면 윤회(輪廻)라고 하는 빙빙 도는 그러한 인생고(人生苦)를 면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상호를 보면은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베풀 시(施)자, 도장 인(印)자, 일반 중생(衆生)한테 - 일반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하나의 형상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손을 들어서 이렇게 보인단 말입니다. 왼손이나 오른손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는 오른손을 듭니다.

중생들한테 '모든 것은 내가 다 안심(安心)을 시켜 줄 테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런 두려움을 공포심(恐怖心)이라든가,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형상이란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 본들 별것이 아니겠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정말로 자광삼매(慈光三昧)라. 자비스러운 광명(光明)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비치는 그런 부처님이 이렇게 손을 드신다고 하면은 정말로 모든 중생(衆生)의 고난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살해(殺害)하고자 해서 코끼리에게 독주(毒酒)를 먹여가지고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다가 그런 영악스러운 코끼리를 풀어 놓았단 말입니다. 아, 독주를 먹여놓았으니, 어떻게 할지를 모르면서 울부짖으면서 부처님에게 돌진해 가겠지요.

그 때 부처님께서 그 때 하신 형상, 그 때 하신 이른바 믿음, 이것이 무외심, 무외시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손을 턱 드시니 그렇게 영악스럽고 그 영맹스러운 코끼리가 마치 순(順)한 양(羊)같이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리고서 눈물을 철철 흘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그만 비유(比喩)나 상징적(象徵的)인 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힘은 그와 같은 힘이 있습니다.

레이저 광선이 저 산을 뚫고, 그야말로 철벽을 뚫고 저쪽까지 다 비치는 것을 보십시오.

부처님의 신통묘지(神通妙智)가 그런 힘이 없겠습니까.

우리 중생의 눈에는 지금 안보이지마는 물리학(物理學)적으로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라는 것은 전자장(電磁場), 전자기(電磁氣) 광파(光波)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자가 다 증명한 말씀 아닙니까. 어느 공간(空間)이나 어느 별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波動), 전자기 광파가 충만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도 또는 너라는 존재도 말입니다. 산천초목(山川草木) 모두가 다 전자기 광명, 전자기 파동,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다만 싸이클(Cycle), 진동(振動)의 차이(差異) 때문에 각 원소(元素)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存在)는 - 그렇게 소중한 내 몸이나 미워하는 사람의 몸이나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나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으로 지금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전자기 파동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전자기 파동을 볼 수 있는 그런 현미경(顯微鏡)을 놓고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가 다 지금 전자기 파동만 꾸물꾸물 진동하고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는 화장(華藏)세계라! 광명이 찬란한 부처님의 광명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전자기 파동 뿐 아니라 - 전자기 파동 차원(次元)에서는 아직 그것이 형상이 있으니까. 공간성(空間性)이 있으니까 물질(物質)이라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보다 더 생명적(生命的)인 전자기 파동을 일으킨 본체(本體)를, 생명을 보신단 말입니다. 생명을 바로 보십니다.

전자기 파동도 그것이 보내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純粹) 생명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파동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진동하고 움직이니까 파동(波動)이라고 하겠지요.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우리 중생(衆生)이 볼 수 있는 것. 현미경으로 보든 육안(肉眼)으로 보든 볼 수 있는 존재(存在)는 이것은 하나의 파동 치는 무상(無常)한 존재(存在)에 불과합니다.

고유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무상합니다. 다 무상 뿐 이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무상, 내 관념도 무상, 관념도 내내야 금생(今生)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내 마음 되었으니까.

그런 마음이 순간 동안도 가만있지 않단 말입니다. 마치 그것을 비유하기를 그 경망(輕妄)하는 원숭이 - 우리 마음이 동요부단(動搖不斷) 해가지고서, 우리 범부(凡夫) 마음은 다 요시랑 저시랑 합니다. 그런 원숭이에 비유한단 말입니다.

그런 마음 가지고 우리가 행복을 구하겠습니까. 그런 마음 가지고 우리가 안심(安心)을 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수험생은 수험생대로 해서 그 시험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앞서 있고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거의 협박 비슷하게 졸라대고, 그런 상황 밑에서 우리 마음이 안심(安心)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는 건 모두가 다 이렇습니다.

한 당파(黨派)나, 무엇이나 조직(組織)이 있어 놓으면 이른바 집단(集團) 이기심(利己心)이라. 이런 것 때문에 자기 본마음과는......

우리 범부 마음은 하찮은 양심에 불과합니다마는 하찮은 양심마저도 한 조직(組織)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 상황이 '나'라는 상황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상황 판단을 잘 해야 씁니다. 그래야 인제 인생의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쓴단 말입니다. 편안한 마음을 못가지면 그마만치 불안스럽고 자기 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공부를 하든 또는 사업을 하던 간에 우리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결제해서 공부하고 있는 공부가 참선공부 아닙니까. 참선공부는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잘 몰라서 참선은 굉장히 고도(高度)한 공부이니까 아주 어렵겠지 합니다마는, 그러나 참선 공부가 제일 쉽고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면 그것이 안락스럽고 인제 그마만치 행복이 직결되겠지요.

 

어째서 참선공부가 안락스러운 것인가?

참선공부라는 것은 앎으로 해서는 즉, 말하자면 인식(認識)이나 이해(理解)로 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대체 무엇인가, 내가 소중하게 아끼는 내 몸뚱이가 무엇인가, 자기 몸뚱이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 몸뚱이를 죽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 잘 먹이기 위해서 별 짓 다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몸뚱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자기 몸뚱이 살리기 위해서 남의 몸뚱이를 죽인다거나, 또는 엉뚱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한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렇게 저렇게 치유방법이 많이 나옵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또 그런대로 해서 적당한 방편이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일반 종교는 종교인(宗敎人)대로 해서 여러 가지로 그런 사회적(社會的)인 병폐(病弊)의 치유방법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대사회는 그렇게 미봉책(彌縫策)인 방법으로 치료(治療)가 될 수 있는 그런 병(病)이 아닙니다.

가장 무거운 병보고, 고황(膏肓)에 난 병은 백약도 무효라, 고황은 이 명치 끝 안(內)에 있는 병이란 말입니다. 속에 난 그야말로 치명상, 치명적인 병, 이것은 백약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은 그런 백약이 소용없는 중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인가? 그 병은 이른바 무명병(無明病)이라! 무명이라는 병 말입니다. 진리(眞理)를 모르는 어두운 병입니다. 무지(無知)한 병이란 말입니다. 무지는 무엇보고 무지라 하는 것인가?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 모른단 말입니다.

내 생명(生命)이 대체로 무엇인가, 내 생명을 모르고 내 관념(觀念)의 형태(形態)가 무엇이며 그 근본(根本)이 무엇인가, 내가 소중히 아끼는 내 몸뚱이가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무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무명(無明)! 무명의 제거에 있습니다. 12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이나,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모두가 다 무지를 제거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고, 식(識)이 있고 모다 쭉쭉...., 결국은 인간이 번뇌(煩惱)가 거기에 이어져서 연결되어 갑니다. 무명 때문에 옳지 못한 행(行)이 있단 말입니다. 행이 있으면 따라서 그때는 망식(妄識)이 - 식(識)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주(宇宙)는 무엇인가, 우주 역시 우주의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야말로 지구촌(地球村)이라든가. 각 별이나 모두가 다 이것도 어떻게 해서 생겼을 것인가?

이것도 역시 무명 때문에 생깁니다. 이렇게 말하면은 과학(科學)을 좀 한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천체(天體)나, 우리 지구(地球)가 어떻게 해서 무명(無明)이란 그런 형체가 없는 것이 형체가 있는 지구를 낳았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이것은 형체가 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을 잘 몰라서 무명 때문에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안보이고, 여러분이 지금 과학적(科學的) 지식(知識)으로 해서 납득이 안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은 믿어야 씁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상(實相) 지혜(智慧)입니다. 실존(實存) 지혜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실존철학(實存哲學),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커타 그런 분들이 창조(創造)한 그 철학은 불안의식(不安意識)이라. 불안의식 때문에 한 계기(契機)가 되어 출발했습니다.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쓸 것인가? 불안을 제거하려면 인간의 실존, 우리 인생의 실존을 파악해야 됩니다.


따라서 실존 철학에서 문제로 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우리 불교에서 무명을 떼라는 그것과 사실은 똑같습니다. 다만 그네들은 깊이가 좀 부족하니까, 인제 실존은 제대로 파악은 못했습니다마는......

따라서 우리 현대적인 우리 현대 20세기 후반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그런 무거운 병, 고황에 나 있는 즉 말하자면 백약이 무효인 그런 병을 치료하자면 그냥 보통 약으로는 안 됩니다.

다 남한테 자비(慈悲)를 베풀어라. 봉사를 많이 해라. 그리고 실제 봉사(奉仕)를 많이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걸로 해서는 치유할 수 없단 말입니다. 어떤 누구나가 다 자비심은 기왕에 부리고 싶겠지요. 부리고 싶으나 자기 몸뚱이가 더 중요하고 남 몸뚱이는 따로 별도로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누구나가 자기 몸뚱이를 먼저 생각하겠지요.

말은 쉬워도 근본적인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명을 제거 못 하면은 치유할 길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을, 좋든 궂든 우리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은 누구나가 인식이 됩니다마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몸도 비어있고 대상적인 모두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식까지는 모르지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다 반야심경(般若心經) 정도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은 일체(一切) 만유(萬有)를 다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체 만유가 다 공입니다.

우리 지구 땅덩어리라든가, 또는 그 은하(銀河) 세계의 - 은하세계도 끝도 갓도 없는 것인데 - 모두 무수 백억의 그런 각 별들이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겨날 때도 역시 그것도 물질이 물질을 낳은 것이 아니라, 『원래는 물질이 아닌 것인데 다만 우리 무명심(無明心)이 동(動)해서 잘 못 보아서 현상으로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철학(哲學)도 공부를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이른바 칸트 철학은 그야말로 굉장히 천재적(天才的)인 동시(同時)에 위대한 철학 아닙니까. 칸트 철학이 위대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인식(認識)이 - 인식은 좋다, 궂다 느끼는 즉, 말하자면 마음의 관념(觀念) 작용(作用)아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식이 객관적(客觀的)인 것이 아니고 우리 인식이라는 것이 저 밖에 있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認識主)인 내 주관(主觀)을 떠나서 인식이 성립(成立)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든 인식은 우리 주관에 의존해 있다." 이것이 칸트의 이른바 인식론(認識論)의 대요란 말입니다.


이것 보고 칸트는 자기가 말하기를 어떻게 이것이 훌륭한 말이든가 자기 스스로를 감탄하기를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코페르니쿠스 이전(以前)에는 천동설(天動說)이라 -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움직인다. - 그렇게 생각하는 천문학이 아닙니까. 코페르니쿠스가 반대로 지동설(地動說)이라 -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지 태양이나 달만이 움직여서 지구를 돈다고 이렇게 안 보았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그 당시는 하나의 기독교(基督敎)의 교조와 대치가 되어서 박해(迫害)를 받았습니다마는 아무튼 그것이 하나의 정설(定說)로 되어가지고, 바른 학설(學說)로 해서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칸트 자신이 그런 지동설(地動說)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 밖에 단단한 것이 있으니 단단하다 -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 관념(觀念), 내 주관(主觀)이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인식(認識) 된다고 보았단 말입니다.

밉게 보는 것도, 미운 사람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밉게 본단 말입니다.

모든 인식(認識)은 자기(自己) 주관(主觀)에 의존(依存)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생각할 적에 '미운 놈 저놈 곧 죽이고 싶다.' 이럴 때가 더러 있겠습니다마는 이런 때도 그 대상(對象)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관념(觀念)입니다.

물론 행동이 좋지 않아서 그런 나쁜 행동(行動)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런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보시고 성자(聖者)가 보신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때는 그렇게 안봅니다. 곧 죽일 놈이라 하더라도 미울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래는 부처님인데, 본래는 부처와 똑같은 하나의 그야말로 생명(生命) 존재인데, 다만 그 잘못 생각해서 그 버릇 때문에 나쁜 행동을 나한테 보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은혜(恩惠) 가운데도, 저는 가끔 이야기 합니다마는 은승창열(隱勝暢劣)이라! 숨을 은(隱)자, 수승할 승(勝)자, 좋은 점은 숨겨놓고서, 창열이라! 나타날 창(暢)자, 용열할 열(劣)자 말입니다. 좋은 것은 -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그야말로 참 조금도 간격도 없는 그러한 진여불성을 숨겨놓고서 그냥 나쁜 상(相)만, 못된 그런 현상(現象)만 우리한테 보인 은혜란 말입니다.


똑같은 부처는 부처인데 어느 것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불법(佛法)이 성립(成立)이 못됩니다.

나도, 너도 어느 티끌 하나도 모두가 다 불법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나쁜 사람도 지금 곧 죽일 듯이 미운 사람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도 부처님 은혜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슨 은혜인가?

그 불성이라 하는 그 소중한 영원(永遠)히 변치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그러한 생명 자체는 숨겨 놓고서 우리한테 겉만, 겉의 상만 나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世上)에 감사(感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르게 판단하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상을, 실존을 우리가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감사할 뿐입니다.

누구한테 따귀를 얻어맞아도 감사하고, 그러기에 정말로 참, 겸허한 사람들은 누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말입니다. 자기 손으로나 손수건으로나 침을 닦으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그 사람이 무안할까 보아서, 까닭 없이 애매하게 침을 뱉어도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참기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닦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안(無顔)할까 보아서, 그런 것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현상만 생각할 때는 근본(根本)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 본래 성품(性品)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생각할 때는, 곧 매 깨나 들고 - 한 대 맞으면 - 두, 세대를 때리고 싶겠지요.

부처님 제자라는 것은 어째서 부처님 제자인 것인가? 그런 형상만 밉고 곱고 그런 상만 안보고서 본 성품을 본단 말입니다. 성품을 볼 때는 우리 불자(佛子)가 일반 중생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소카왕의 왕자(王子) 가운데 구나라(鳩那羅)라는 - 인도(印度)에 구나라라는 눈이 굉장히 예쁜 새가 있었습니다. 눈이 예쁘기도 하고 소리도 영롱(玲瓏)한 천하(天下) 명성(名聲)을 내는 새가 있는데 - 아소카왕의 왕자가 눈이 하도 예쁘니까 그때 구나라라고 이름을 지었단 말입니다.

장성(長成)해서 결혼까지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비(王妃) 한 사람이 마음이 못 되었던가 - 그 때 아소카왕은 왕비가 많이 있었는데 구나라의 생모(生母)는 아니었겠지요. - 구나라의 눈이 하도 예쁘니까 그냥 반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접근 하면서 음탕한 말을 자꾸만 하니까. 아, 처음에는 좋은 말로 뿌리치다가 나중에는 준열하게 뿌리쳐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왕비가 왕자에게 원심(怨心)을 품었습니다. '이놈 두고 보자' 그 때 마침 이웃나라에 반란(叛亂)이 일어났습니다.

아소카왕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 한 250년 뒤에 나신 인도를 통일한 왕 아닙니까. 그래서 저 이집트까지 부처님 법을 홍포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예수가 태어난 유태 지방도 역시 아소카왕 때 부처님 법이 그곳까지 포교(布敎)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생각해야 씁니다. 따라서 그리스교의 신약과 우리 부처님 법과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가 나오시기 전에 200년 전에 아소카왕 때 저 이집트까지 포교사를 보냈으니 그보다 가까운 유태까지도 부처님 가르침이 유포가 되었다고 보아야지요.

아소카 왕자가, 그 잘생긴 왕자가 그 반란을 평정을 시켰단 말입니다. 좋은 사람이 가면 그 사람의 모양만 보아도 마음이 순화(醇化)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도 선근(善根)이 좋은 사람이 가니까 별로 싸움도 없이 그냥 굴복해 와서 평정을 시켰단 말입니다. 그리고 떠나오려고 해도 그 반란을 일으킨 나라에서 하도 못 가게 말리니까 못 떠나오고, 그곳에서 십 여 년 동안이 흘렀단 말입니다.

그 때 그 왕비가 한 계교(計巧)를 내서 이런 때를 이용해서 복수를 해야 쓰겠구나. 아무도 모르게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략을 합니다.' 왕의 직인을 찍은 문서로 - 지금 아소카왕이 병들어 곧 죽게 되었는데, 구나라의 그 예쁜 양 쪽 눈알 안구를 먹으면 그 병이 낫는다고, 구나라의 눈알을 빼서 보내라는 교칙을 보냈단 말입니다. 그 효심(孝心)도 극진한 구나라가 정말 자기 안구를 빼가지고서 보냈단 말입니다.

사실은 아소카왕이 그랬을리는 만무하고, 그 당시에 직인(職印)은 치아(齒牙)에다 인주를 묻혀 가지고 치아를 아물려가지고 직인을 대용한단 말입니다. 아소카왕이 잠이 들었을 때 그 왕비가 몰래 그야말로 그렇게 아소카왕 치아에 인주를 물려가지고 직인을 그렇게 찍게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냈기 때문에 구나라도 결국은 고지를 듣고서 안구를 빼서 보냈단 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까 구나라는 소경이 되어버렸겠지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이런 소식, 저런 풍문으로 해서 정작 자기 아버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음탕한 짓을 하려고 한 그런 왕비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랬으나 원채 선근이 깊은 사람인지라 내가 지금 양쪽 눈알을 빼앗긴 이것은 왕비가 나빠서가 아니라 과거 무수 생 동안을 지내오면서 내가 그마만치 그이한테 나쁜 짓을 했으니까 금생에 내 업장이 내 눈알을 뺀 것이지 그 왕비가 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서 용맹정진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 육안은 어긋나 버렸지만은 천안이라. 참다운 마음의 눈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법의 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전에 아버지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자기 내외간에, 소경인지라 이제 가만히 빠져 나와서 걸식 행각을 했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어찌어찌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 부왕을 만났습니다.

그 사이도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부왕을 만났는데, 자기 아들인지라 아소카왕이 보니까 분명히 윤곽은 자기 아들인데, 아! 눈이 없으니 그 아름답던 눈이 쑥 들어가 가지고 그것이 컴컴하니 보이겠지요.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잘난 아들이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부왕이 그만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단 말입니다. 겨우 일으켜 세워서 자기 아버지를 다시 자리에 앉으시게 하신 다음에 '아버지시여, 슬퍼하지 말으십시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고, 모두가 다 나의 업(業)이 과거 전생의, 또 금생의 그런 무거운 업장이 제 눈을 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분노에 떨어서 과연 어누 누가 어떻게 해서 그대 눈을 빼앗았던고 추궁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구나라 왕자는 조금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씀을 안했습니다.

그랬지만은 아소카왕도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추궁도 하고, 또는 수소문을 해가지고서 자기 왕비가 그런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야말로 참 왕비를 극형에 처해서 죽였단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구나라 왕자도 인제 슬픔에 못 이겨서, 결국은 제 업(業)이 제 눈을 뺀 것이지 아버지가 잘못하셨구나. 그래가지고서 그냥 병석에 누워서 얼마 안가서 죽었다는 그러한 슬픈 애화(哀話)도 있습니다.

구나라 왕자가 법을 깊이 알아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어떤 누구나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던 지간에 어떻게 애매한 일을 당하든 간에 모두가 다 자기 업장(業障)이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죽이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분명히 알아야 씁니다. 자기 어버이를 원망도 하고, 스승도 원망도 하고, 또 사회도 원망도 하고 합니다마는 이런 것은 사소한 하나의 계기(契機)에 불과한 것이지 근원적인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업(業)에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야말로 참 우리 마음이 안정(安定)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것은 비유(比喩)도 무엇도 아닌 것이고, 과거(過去) 전생(前生)까지 소급(遡及)해서 올라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생(人生)이라는 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모두 인연(因緣)이 얽히고설킨 고리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하나의 것(事)이 - 이러하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거기에 다 같이 동참(同參)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이렇게 기분 사나운 사람을 딱 때린다고 생각합시다. 때린다는 손을 움직이는 그 하나의 행동(行動), 이것도 역시 천지 우주가 거기에 다 동참되어 있습니다.

지구(地球)도, 천지(天地)에 있는 모든 별들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人間)의 무명심(無明心)이 쌓이고 쌓여서, 무명심이 파동(波動)이 달(月)같이 보이고 해(太陽)같이 보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구사론(俱舍論) 같은 데나 또는 기세경(起世經), 그런 경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표현(表現)되어 있는 고 하면은 '중생(衆生)의 공업력(共業力)으로 - 한가지 공(共)자, 업 업(業)자, 힘 력(力)자 - 우리 중생의 공통(共通)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그런 모이고 모인 번뇌(煩惱)의 그림자가 즉, 말하자면 은하계(銀河系)같이 보이고, 또는 태양계(太陽系)가 성립되고 지구(地球)가 성립(成立)되고 합니다.

어려워도 이런 문제(問題)를 깊이 생각해야 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佛敎)라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뿐이라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자면은 불교는 마음 일원주의(一元主義)입니다. 인류(人類) 역사(歷史) 이후에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싸움이 무엇입니까. 유물론(唯物論) 또는 유심론(唯心論)이란 말입니다.

모두는 물질(物質) 뿐이다. 그 반대는 모두는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여러 가지의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그야말로 참, 마음인가 물질인가 하는 이런 싸움인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아! 이놈의 몸뚱이도 다 물질이 아닌가?

또 막스의 유물변증법이나 모두가 다 유물론의 기조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도 모두가 다 물질 뿐이다. 마음은 결국은 우리 육체(肉體)에 있는 뇌(惱)의 하나의 반사에 불과하다. 이런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을 진리(眞理)로 볼 수가 없습니다. 진리가 안 된 것이니까 그렇게 옹색하고 그렇게 인간이 존엄성(尊嚴性)을 무시하고 그런 지독한 타박을 했단 말입니다. 물질만 다 평등(平等)하게 하면 다 된다 합니다. 가급적이면 물질은 허망한 것이지만 마땅히 평등(平等)하게 경제적(經濟的)으로 공정한 분배(分配)를 해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서 우리 인간성(人間性)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서 풀어나가야 됩니다.

인간성(人間性) 문제만 바로 풀어버리면 다른 문제는 다 풀어집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법문(法門)에서, 약명요심(若明了心) 하면은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마음 깨달아버리면 만행이 구비라, 마음을 깨달아 버리면 만행이 거기에 다 따라간단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병(病)은 지금 보통 병이 아닙니다. 보통 감기약 정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씁니다. 근본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미봉책 같은 것은 그런데 적용되는 약(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인 치유란 불교에서는 아가타약(阿伽陀藥, 不死藥)이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란 말입니다. 만병통치약 이것은 반야(般若)의 약(藥), 반야 탕(湯), 곡차(穀茶)를 좋아 한 사람은 반야 주(酒)라고, 술 주(酒)자를 붙일 수 있겠습니다마는(웃음), 아무튼 반야의 사상(思想)을 안 가지고서는 절대로 고황에 병들어 있는, 그런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인 그런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반야의 약을 알으십니까? 반야(般若) 이것은 제법(諸法) 공(空) 도리(道理)입니다. 제법공 도리는 이것은 나요, 너요 모두가 다 비었다는 도리입니다. 미운 마음도 비어있고 말입니다. 미워하는 몸도 비어있고, 미운 대상(對象)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초기(初期) 설법(說法)은 모두가 다 무상(無常)이요, 무상(無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이요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은 다 무상(無常)인 것이고, 무상(無相)인 것이고, '나'라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나'라는 고집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불자님들은 두고두고 그때그때 천만번 되풀이해야 씁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도 그냥 얼른얼른 갔다가 소리 좋게 외우는 것이 문제(問題)가 아니라 뜻을 음미(吟味) 하면서 봐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암시(暗示)가 되어서 본래 비어 있으니까 결국은, 아! 텅 비어온단 말입니다. 이것 보고 불교의 어려운 말로 해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몸 신(身)자, 마음 심(心)자, 몸과 마음이 탈락이라, 다 떠넘겨버릴 때는 몸과 마음이 텅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불교는 그냥 이론적(理論的)으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體驗)으로 해서 실체화(實體化) 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야 아까 말씀 드린 본체(本體)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本來) 빈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이 번뇌(煩惱)미루어서 본다고 할 때는 모두가 다 물질(物質) 뿐이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물질이다. 그런 것을 우리가 비었다고 하면 납득이 안갑니다.

그러나 훤히 다 알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니까 우선 우리가 믿어야 쓰겠지요. 믿은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도 체험해야 됩니다.

어떻게 체험해야 쓸 것인가?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한 마음으로 통일시킨단 말입니다.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그래저래 이것이고 저것이고, 그런 산란스러운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흩어져서 혼탁해서 바닥이 안보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바닥을 보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본 성품(性品)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보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만히 두면은 본래 부처인지라 앙금이 가라앉을 것인데, 자꾸만 좋다, 궂다 시비(是非) 분별(分別) 하면 흩어진 마음이 안정(安定)될 수 있는 때가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수험(受驗) 공부를 하는 사람도 말입니다. 머리가 정말 좋을라면은, 그 공부 몇 시간 하고 그러면 머리가 띵하고 그럴 것입니다마는, 그런 머리도 가라앉히려면...

내 몸뚱이도 이것이 여러 종류의 원소(元素)들이 결합되어서 빙빙 돌고 있는 하나의 세포(細胞)의 유기적(有機的) 집합체(集合體)에 불과한 것이지 - 각 원소(元素)도 모두가 다 본래는 물질이 아닌 순수(純粹)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의 파동(波動), 이것이 원자(原子)가 되고, 원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하나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었는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텅텅 비어있는, 불교 말로 공겁 가운데서 우주가 생겨날 때도, 이것도 역시 일반 중생들의 그런 무명심(無明心), 진리(眞理)를 모르는 그런 무지(無知)한 마음, 무지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현상적(現象的)인 상(相)으로 보입니다.

그 상(相) 그것이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상을 냈지만은, 그 상이 그대로 고유하니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떠한 한순간도 달도, 별도, 태양도 모두가 다 한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내 몸도 역시 순간순간 변동(變動)해서 마지않습니다. 일반 중생(衆生)들은 그걸 못 보는 것이니까 내가 고유(固有)하니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고정(固定)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 아닙니까. 무상(無常)! 무상(無常)은 항상(恒常)이 없다는 무상(無常)아닙니까.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모두가 다 무상(無常)입니다. 무상을 잘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결국(結局)은 어려운 말로 하면은 어떠한 한 순간(瞬間)도 공간성(空間性)이 있지가 않은 것이 무상 아닙니까.

순간순간 변화하거니 어떻게 고유한 공간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공(空)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제법공(諸法空)이라는 도리(道理)는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도리입니다. 그냥 물질은 물리학적으로 분석(分析)하면 분석한 뒤에 에너지가 나오겠지. 이렇게 해서 공(空)이다. 이렇게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저는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사 수분(水分)은 영도(零度)에서는 냉각(冷却)이 되어서 그것이 얼음이 되겠지요. 즉 고체(固體)가 되고 말입니다. 100도 이상 가열(加熱)하면 비등(沸騰)해서 그때는 수증기(水蒸氣)가 되겠지요. 그것이 공중에 올라가서 식혀지면 구름이 되겠지요. 수분이 얼음이 되던 물이 되던 간에 수분이라는 것은 조금도 변질(變質)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달을 구성(構成)하건 태양을 구성하건 우리 몸뚱이를 구성하건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 마음이 - 마음이라 해도 이름을 붙인 것이지 본래 가지고 있었겠습니까마는 - 다만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이 없으니까 우리가 인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그것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내 몸이요, 니 몸이요, 모든 물질이란 말입니다.

그 금(金)을 비싸게 그렇게 돈을 주고 산단 말입니다. 귀걸이 하나도 좋은 것을 하려면 굉장히 값이 많이 치이겠지요. 자기 몸뚱이 귀불에다 그걸 붙이나 안 붙이나 귀는 귀 아닙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무슨 필요로 우리 생명(生命)을 낭비(浪費)하십니까. 우리가 할 것은 근본(根本)으로 가는 것 외는 모두가 다 헛짓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가 못나서 집을 나갔습니까. 그렇게 잘난 분이 집을 나오고 재산(財産)을 뿌리치고 지위(地位)를 뿌리치고 다 뿌리쳐 버렸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분입니다.

자기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무슨 필요로 출가(出家)를 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가 바르게 사는 길, 오직 그 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다만 세속에서 그런 대로 닦을 것인가, 출가해서 우리 온 힘을 다해서 100% 수행할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누구나가 행복(幸福)을 추구(追求)합니다. 행복을 추구하게끔 인간(人間)은 그렇게 인간 존재(存在)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인간(人間) 존재(存在)는 원래(原來) 모든 행복(幸福)을 갖추고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자비(慈悲)도 지혜(智慧)도 능력(能力)도 행복(幸福)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본성(本性)은 모두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에 가버려야 비로소 우리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합니다.

자비도 지혜도 행복도 능력도 다 갖추고 있는 본성(本性) 자리! 그 자리를 가기 전(前)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한테 만족(滿足)을 못 줍니다.

그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산으로 들로 헤매었지마는 그 안보인단 말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머리맡에 보니까 인제, 아, 새장 안에 그 예쁜 파랑새가 있단 말입니다.

『행복은 다른 데가 절대로 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나 나한테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닌, 형체(形體)도 없는 그 마음, 마음이 행복을 갖추고 있습니다.』

과거(過去)에 자기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이와 같이 몸뚱이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가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 생에 우리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부모(父母)하고 연(緣) 따라서 금생(今生)에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이 몸뚱이를 얼마나 쓰건 데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인제 십 여 년도 못 쓰면은 흔적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젊은 사람들의 몸도 그 몇 십 년 쓰면, 더러는 비명횡사에 간다고 생각하면 몇 년도 못 쓰고 갑니다.

그런 것 때문에 제발 좀 우리가 생각을 바로 해야 됩니다. 어차피 없어질 그 몸뚱이에는 그 행복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떻게 꾸며 놓아도 결국은 땀 한번 흘려버리면 그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진여불성 자리에 이르는 길이 인생이 태어난 이것이 근본 목적(目的)입니다.

공자(孔子)도 또는 소크라테스도 모두가 다 그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니체나 칸트나 쇼펜하우어나 모두가 그 길로 갔단 말입니다. 다만 각도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있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길로 지향(志向)을 했습니다. 자본주의나 무슨 주의나 모두가 그 길로 갈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다만 바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한 것이지 인간 자체(自體)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완전(完全)해야 쓰겠다. 모두가 평등(平等)해야 쓰겠다. 모두 자유(自由)스러워야 쓰겠다. 자유를 추구하고,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를 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허망(虛妄)하고, 우리 대상(對象)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허망무상하기 때문에 금강경(金剛經)에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풀끝에 이슬이요, 또는 번갯불이요 했습니다.

우리는 아지랑이를 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저 멀리 아지랑이가 그렇게 좋게 보이고, 꿈같은 신기루(蜃氣樓)가 인제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고생고생 달려가서 보면은 그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그 대통령 자리나, 또는 부자나 모두가 다 구해 놓고서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검소(儉素)하게 살아야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은 그만큼 죄(罪)를 덜 짓고 빚을 덜 집니다. 몸뚱이 잘 먹이기 위해서, 잘 입히기 위해서 너무나 사치하고, 과소비(過消費)하면 말입니다. 그만큼 더 죄를 많이 짓고 빚을 많이 집니다.

모든 것이 인과(因果)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 하나 보존(保存)하기 위해서 너무나 과다한 물질을 소모한다고 생각할 적에는 꼭 그에 따르는 보상(補償)을 해야 쓰는 것입니다.

한 몸뚱이에 금생에 와서 먹고, 입고, 도는 우리 갈 길 부처님 길을 가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프랑스 쟌다르크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모조리 포위당했을 때 16세의 어린 소녀(少女)로 선두에 서서 그 포위망을 뚫고서 오를레앙 성(城)을 탈환했습니다.

그런 힘이 쟌다르크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한테나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있는 힘, 예수한테 있는 힘이 우리한테도 똑 같이 있습니다.

다만 어둠에 가려서 발휘(發揮)를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거든 하물며 대학입시(大學入試) 하나 합격(合格) 못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힘은 무한(無限)의 힘입니다. 다만 우리가 무한의 힘을 자아내 못쓰고, 자꾸만 이것 생각하고, 저것을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수험생(受驗生)이나 누구나 마음을 맑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고 말입니다. 자기 집안 식구 가운데서 동생이 미웁다. 이런 것도 자취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두가 다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님 아버님이 섭섭하게 해도 그 섭섭한 것도 흔적이 없고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허망한 것이니까, 그렇게 돌려 버리고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 부처님은 마음의 근본인 것이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한의 가능(可能)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생명(生命) 자체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기억력(記憶力)이라든가 모두가 그런 것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따라서 입시(入試)라든가 어떤 것이나 다 이룰 수가 있습니다.

천재적(天才的)인 능력의 힘을 어느 누구나 다 - 천재보다도 훨씬 더 천재말입니다. - 무한한 천재가 우리한테는 누구에게나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도 공부할 때에 머리가 아프거나 그럴 때는 머리에 필요 없는 것이 많이 차 있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다 버려 버리고서 모두가 다 원래 허망(虛妄)한 것인데 우리가 괜스레 그러한 것들을 머리에 채워 놓고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결국은 텅텅 비어 있는 자취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진여불성의 자리, 부처님의 자리를 생각하는 그 공부가 이것이 안심(安心) 공부입니다.

모두가 다 이것이 자취가 없는 것이다, 꿈이다, 그림자다, 사실은 꿈이나 그림자뿐인 것인데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꿈의 자취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더라도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은 자꾸만 필요 없는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런 것, 저런 것을 안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念佛)하고 화두(話頭)를 들고 합니다.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우리가 염불(念佛) 게송(偈誦)에 다 아시는 법문(法門) 아닙니까? 생각, 생각,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은 그야말로 무념처(無念處)라, 무념지(無念地)에 이르면은 육문상방자금광이라, 자기 눈에서나 입에서나 코에서나 귀에서나 자기 몸 전체에서 그야말로 참 훤히 트여 있는, 빛나있는 우주(宇宙)와 둘이 아닌 그런 자마금색(紫磨金色)이 오색찬란한 광명(光明)이 항시 빛나는 것입니다.


그 오직 한 길, 오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반야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누구나가 꼭 행복해야 씁니다.

또 행복은 원래(原來)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무량(大無量)의 그런 보배가 우리에게 원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무량의 보배는 대체 무엇인가? 세간적(世間的)인 보배 이것은 그냥 물질(物質)인지라, 물질은 본래 자취가 없는지라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다운 보배인 우리 불성(佛性) 보배는 영생불멸(永生不滅) 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또는 화두(話頭)나 그렇게 공부를 하셔가지고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일념(一念) 공부,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지는 일념무심(一念無心) 이것은 우주(宇宙)를 움직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핵심(核心)을 움직여 버린단 말입니다. 진여불성까지 우리가 리드(lead)해 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꼭 마음이 안심(安心)되고 다시없는, 위(上)없는 행복(幸福)을 누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