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불법의 요체” 7장 질의 응답 회향법어
생략된 법문 복원
“정토종淨土宗의 문제”
제가 이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막 번역해가지고 어느 아는 스님한테 가져가 한 권을 드렸더니만 “스님은 정토종이오?” 이렇게 묻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웃기만 하고 말은 안 해버렸습니다만 우리는 정토종이라고 해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극락세계極樂世界 우리 이상세계가 극락세계 아닙니까? 우리 사무친 이상향 그 자리는 역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제대로 다 밝혀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상에 집착하지 않는 범위에서 꼭 보시고 참 ‘나’인 동시에 바로 우주자체인 부처님한테 보다 더 간절히 흠모추구 하는 갈앙渴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 공부를 틀림없이 비약시킵니다. 불안의식을 제거하고 비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토종으로 굳어버리는 것은 반대합니다. 꼭 자기들 식만 아니면 안 된다는, 정토종만 필요하지 다른 종은 필요 없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은 다 통해 있다 말입니다. 원통무애圓通無礙하여 법집法執을 떠나 있는 것인데, 가사 일본 진종은 염불念佛도 자기들 식으로 꼭 아미타불 이름을 불러야 된다. 다른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벌써 그마만치 마음이 좁아집니다.
불교라는 것은 마음을 여는 공부 아닙니까? 마음을 열어 놓고서 티끌 하나에도 걸릴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부처하면 다 부처인데 하필이면 아미타불만 꼭 부를 필요가 있습니까. 다만 총 대명사이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부르는 것은 좋지요 좋으나, 지금도 저한테 오는 신도님들 만나 보면 여태까지 관세음보살을 십년 정도 했는데 어느 절에 스님이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바꿔야 공덕功德이 더 많다고 해서 애쓰고 바꿨는데 자기도 모르게 십년 동안 한 관세음보살이 나온다는 것이어요. 우리는 이렇게 회통會通을 못시키고 간격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가 원래 관음보살 이름을 타고 나온 것입니까? 우주가 원래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부처란 이름도 결국 우리가 지은 것이지 부처란 이름이 타고난 것입니까? 따라서 우주가 하나의 진여불성 순수생명이라 말입니다. 그 가운데 무한공덕無限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데 그 공덕이 하나 둘 같으면 이름 하나 둘만 붙이면 되겠지만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을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방면으로 볼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중생 영혼을 그런 극락세계나 천상이나 인간이나 좋은 쪽으로 그렇게 인도할 때는 지장보살,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입니다. 약사여래藥師如來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나 모두 다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무장무애한 진여불성을 생각해야 됩니다. 벌써 보살지위 그런 자리는 무장무애입니다. 아미타불 여기 있고 지장보살 저기 있고 그래버리면 불교는 다신교多神敎가 되지요. 무장무애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진언 “옴마니반메훔”을 한다고 해도 무장무애한 진여법성자리에 마음을 두고 해야 된다 말입니다.
지금은 무슨 공부를 하던지 간에 근본적인 진여불성 본체를 안 여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염불도 실상관實相觀을 꼭 해야 된다. 부처님 상호相好를 관찰해야 된다. 또는 이름만 불러야 된다.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본체本體에다 안주를 시켜야 합니다. 본체에다 안주시키기가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어떻게 하면 안주를 시킬 것인가 아무 상이 없는 무량무변한 허공 가운데 상상을 초월한 순수생명인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한 자리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한도 끝도 없는 ‘나’라는 것도 비어있고 ‘너’라는 것도 비어있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텅텅 비어 있는데 다만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량무변한 그 세계에 진여불성 광명만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사실 그런 것이고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물리학자들이 말한바와 같이 우주는 하나의 장場 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결국은 장뿐이라 말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할 때 방사광을 내고 있는 그런 광명, 장場만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장위에 인연因緣이 있으면 거기서 돋는다 말입니다. 그 장의 순수한 상태가 진여불성자리 이른바 부처님의 광명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실상염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때는 공空·가假·중中이라, 공空이고 가假라 중도中道라 그렇게 해도 감感도 안 잡히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 라는 것이 분명히 빈 것인데, 나도 비고 모두가 비어있는 이른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텅텅 비었는데 그러나 다만 빈 것이 아니라 그 자리는 진여불성 상상을 초월한 행복과 자비와 지혜와 모든 공덕을 갖춘 광명만 황홀하게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그런 자리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실상염불實相念佛인 것이고, 화두도 그렇게 하면서 참구해야 합니다.
‘이뭣고’ 선禪, 시삼마是甚麽화두가 그런 자리에서 나왔다 말입니다. 어떤 화두나 시삼마 화두가 근거가 돼야 한다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받치고 땅을 받치고, 내내야 천지우주를 말하는 것이지요.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보통 그런 광명이 아니라 말입니다. 검기는 칠보다 검다는 건 명암을 초월한 거라 말입니다.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내가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그런 그것이 무엇인가지 공연히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는 화두가 아니라 말입니다.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분사가 뭣인가, 본래면목이 뭣인가 그런 물음에 대응해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조주趙州가 그대들 무無무無 의심해라 그렇게 말했습니까. 조주 화두가 많이 있지만 의심하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심도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의심하면 훌륭한 공부지요. 그냥 이렇게 저렇게 상대적으로 의심하면 공연히 마음만 바쁩니다. 그래서 투철하게 본체를 참구參究하는 의심을 해야 됩니다.
염불도 본체를 떠나지 않는 진여관 실상관 말입니다. 실상자리는 이렇게 저렇게 구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끝도 갓도 없는 하나의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한 자리입니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차근차근 광명이 밝아 옵니다. 검은 얼굴도 맑아 옵니다.
“호흡법呼吸法에 관해서”
호흡법은 지금 여러 가지 법이 나와서 호흡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흡법만 해라. 그러면 다 된다. ‘이것은 육조의 정통이다’ 이렇게 혜명경慧命經이 육조의 정통이라고 고집합니다만 그것은 육조가 낸 것은 아닙니다. 화양선인 이라는 분이 냈습니다.
외도와 정도의 구분은 정도는 항시 마음을 앞세웁니다. 외도는 마음을 앞세우지 않고 우리 몸뚱이나 호흡이나 테크닉을 앞세웁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우리마음 자성자리를 견지하면서 해야 됩니다. 초보 때는 이것저것 한 번에 하려면 복잡하니까 수數도 헤아리기도 하고 그래도 되겠습니다마는 종당에는 역시 관조觀照로 진여불성을 참구하는 선禪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호흡법의 대표적인 경론은 『안나반나경安那般那經』입니다. 안나는 입식入息이라 호흡을 들이마시는 인도 말로 안나, 반나는 출식出息이라 호흡을 내쉬는 것으로 반나입니다. 호흡경이나 같은 뜻이지요.
거기에는 육묘문六妙門과 십육특성이라고 있습니다. 육묘문이란 여섯 단계로 호흡을 해나간다는 말입니다. 십육특성은 분석하면 번쇄해지니까 생략하고 육묘문은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도 역설을 많이 했으니까 얼핏 상만 얘기합니다.
육묘문은 수식數息이라 수를 헤아리고 말입니다. 그 다음은 따를 수隨자 수식隨息이라, 그칠 지止자 지식止息이라, 그 다음은 볼 관觀자 관이라, 다섯 번째는 돌아올 환還자 환이라, 그 다음은 맑을 정淨자 정이라 이와 같이 수數,수隨,지止,관觀,환還,정淨 이렇게 나갑니다.
그래서 맨 처음엔 우리 산심散心 산란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우니까 호흡을 하는 것이지 누구나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 말입니다. 척 들어앉으면 참선이 잘되는 사람들은 호흡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래도 저래도 자꾸 망상이 나와 귀찮고 대처하기 어려우니까 호흡을 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호흡을 헤아리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하는 것보다 좋다 이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다만 단전丹田이라는 것은 우리 몸의 중심입니다. 건강법으로도 단전에 힘이 안찬 사람들은 마음도 심장에서 나오므로 피로가 빨리옵니다. 그리고 단전에 힘이 안차면 몸의 균형이 잘 안 잡히고 동시에 혈액순환도 잘 안 되놔서 단전에 힘을 두는 것은 굉장히 좋습니다. 단전에 힘만 차면 상기上氣도 잘 안 되는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호흡법을 초보인들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선 수를 헤아리는데 하나부터 백이고 이십이고 막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헤아리고 열에서 하나까지 다시 왔다가 또 되풀이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많이 헤아리다 잊어버리면 공연히 산란심散亂心만 일으키게 되니까 열까지만 헤아려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해지면 그때는 헤아리는 것도 귀찮아지므로 호흡가는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들이마셔지면 지금 들이마시구나 또 내쉬면 내쉬는 대로 마음만 거기에 따라갑니다. 마음이 따라가야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러다가 더 익어지면 드디어는 호흡을 가만히 멈춰봅니다. 그러면 대저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때는 몇 분 동안 쯤은 멈춰집니다. 호흡은 마음 산란과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호흡도 거칠고 또 역으로 호흡이 고요하면 우리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호흡을 정지하려면 그마만치 마음도 그에 상응돼서 고요해지고 산란심이 덜 나오지요. 이렇게 상관관계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그래서 지식止息이라 호흡을 딱 멈춰본다 말입니다. 여기 구참스님들은 다 경험 해보신 바와 같이 자기 호흡을 자기가 못 느끼게 됩니다. 내가 호흡을 쉬고 있는지 안 쉬는지 모른다 말입니다. 초심자들 옆에서는 호흡소리가 들려오지만 구참스님들 옆에서는 서로 피차 호흡소리가 잘 안 들려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다 고요해지면 관觀이라. 고요한 거기에 또 빠져버리면 무기(無氣)에 빠지게 되니까 그때는 이른바 법성자리, 화두나 염불이나 기타 자기가 하는 대로 법성자리를 참구하는 관찰도 합니다. 의심도 근본적인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의심하면 참구에 속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본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혼침惛沈에 빠지지 않겠지요. 너무 좋아서 고요해지면 혼침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켜서 관조觀照를 해야 지혜智慧로 비춰본다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끝도 갓도 없는 맑은 세계 그와 동시에 거기에 찬란하게 들어있는 영원적인 행복과 지혜와 자유와 공덕을 갖춘 그 자리를 생각해서 마음을 일으킨다 말입니다. 그것이 관觀이라.
그 다음은 대상적으로 빛을 보려하고 어디를 보려하고 그 마음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이것저것 광명이고 뭣이고 다 놔버리고 그야말로 참 청정무애淸淨無礙한, 생각을 떠나버린 그 자리에 가만 머문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관찰도 하고 참구도 하고 그런 공부가 수련돼야 오는 것이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사 공空을 생각하고 이뭣고을 생각하고 그것도 분별이 아닙니까. 그런 질문을 한 분도 있습니다. 분명히 분별은 분별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엔 이른바 리理적인 여법한 분별은 해야 됩니다. 안하면 우리가 어떻게 잡을 것입니까. 화두를 참구하나 뭘 하나 따지고 보면 분별은 분별이지요. 따라서 원리에 맞는 여법한 분별은 해야 우리 마음이 자기암시가 돼서 차근차근 본 성품과 계합契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보면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는 일상관日想觀이 있습니다. 뉘엿뉘엿 황혼으로 넘어가는 해를 상상하고 바라봅니다. 애쓰고 바라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떠오르지요. 그러나 마음이 차근차근 맑아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연이 밝아 오면서 정말로 빛나는 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상相 같지만 그런 상으로 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불성세계로 들어가게 유도를 하신 것입니다.
가사 지상관地想觀이라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땅을 어떻게 관할 것인가? 이렇게 상相이 있는 행법行法을 뭐 때문에 말씀했을 것인가? 무슨 경전이나 상징과 비유가 있어놔서 한번 보면 잘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보고서 신信이 안 납니다. 마치 동화童話 같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만 자기마음으로 진지하게 부처님 경전을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뜻을 알려고 할 때는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땅을 보는 그것도 그냥 이런 흙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땅, 실존적인 세계 광명의 땅입니다. 말하자면 그 땅은 영롱玲瓏하고 광명으로 빛나야겠지요.
따라서 지상관을 하는 그 땅은 광명으로 빛나는 영롱한 땅을 보는 것입니다. 본래가 영롱하게 빛나기 때문에 자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망상이 줄어들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다 옳다고 이해하려 해야지 쥐꼬리만한자기 지식으로 시야비야 구분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부하는 수행자는 철저히 겸허해야 됩니다. 겸허해야 우리 공부가 참회懺悔도 되고 동시에 부처님법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아만심我慢心이나 기성관념旣成觀念으로 딱 차가지고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관법觀法은 관심법觀心法의 준말입니다. 마음이나 부처나 법이나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관법인데 다만 이사관理事觀이라 법성이나 원리를 관하는 것은 이理관이고, 사事관은 서쪽에 떨어지는 해를 관 한다던가 또는 땅을 관조한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인데 부처님 법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해탈解脫로 이끌어 가는 방편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함부로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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