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아까 말씀마따나 바로 그 정통성, 정통성(正統性)을 그냥 철학적(哲學的)으로나 학문적(學問的)으로 말로만 배우신 것이 아니라, 투철한 실참실구(實參實究)라, 투철한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험을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렁저렁 공부 할 때는 아닙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부처님의 가피도 얻지를 못 하고 우리한테 큰 보은을 우리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윤리도덕(倫理道德)이 기반이 되어야 됩니다. 이른바 계율(戒律)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위에 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얻을래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윤리도덕을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지조(志操)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소리해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금타 대화상의 위대한 점은 바로 불교의 정통성을 재차 천명(闡明)하신 그런 분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느 대목이 그와 같이 정통성을 천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궁금들 하시겠지요.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그 분은 학문적으로 많이 닦으신 분은 아닙니다. 오로지 마음 깨달아서 마음의 불성(佛性)자리를 깨달아서 위대한 성자(聖者)가 됐던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 생명의 우리생명의 근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생명(宇宙生命)의 근본(根本)자리인 불성(佛性) 이것은 학문적(學問的)으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의 번뇌(煩惱)를 소멸 시켜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에는 불성 외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리는 원리도 역시 정통성 이른바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 바른 견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한 것이고 또 어느 도인이나 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분들 따라서 제가 원만무결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분들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리 몸도 모두가 다 우리 몸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는 산천초목(山川草木)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한 말로 말 하면은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우주는 오로지 한결같은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인 불성(佛性)뿐입니다. 불성을 깨달으면 성자(聖者)인 것이고 불성을 깨닫지 못 하면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성을 얼마만치 깨닫고 있습니까. 우주는 오직 불성뿐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우주는 하나님뿐입니다. 먼저 불성을 구하라, 먼저 부처를 구하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도 부처지만은 참다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계시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자체 생명의 본당, 본질 자체가 바로 참다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조금도 이우러짐이 없습니다.
설사 불성이 우리한테 있다 하더라도 불성하고 내가 이익을 좀 보는 것하고 내 사업하고 내가 성공하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어느 면으로 보나 불성은 모든 것을 원만하게 정당한 일이라고 하면은 모든 것을 다 원만하게 성취시킬 수 있는 무한(無限)의 가능성입니다.
자비(慈悲)로운 쪽으로 보나 행복(幸福)스러운 쪽으로 보나 또는 어떠한 능력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무한의 가능성 무한의 행복 이러한 것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어떠한 경우에 운수가 불길해서 인연(因緣)이 다 화합이 안돼서 무슨 일에 큰 실패를 했다 합시다. 또는 몸이 아팠다고 합시다. 어떠한 불우한 그런 사태가 우리 주변에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우리를 시련 시키는 우리를 성불(成佛)로 몰아가는 하나의 초월(超越)의 계기란 말입니다.
또는 어떠한 것도 우리가 무한의 가능성인 무한의 행복자체인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어떠한 경우도 참다운 손해는 없습니다. 불성 이 자리는 죽지 않고 낳지 않고 영생불멸 (永生不滅)한 자립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생불멸한 것이 이것이 우리생명 자체입니다.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 자체입니다.
어느 종교(宗敎)나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은 영원의 생명자리를 밝히려고 애썼단 말입니다. 세계에는 지금 4000종 이상의 나라말이 있다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한국말이 있듯이 세계에는 4000종 이상의 말이 있다 합니다.
사람이면은 사람 사는 곳에는 그 사람들 동아리끼리 최고의 전제가 뭣인가? 영원(永遠)의 생명이 무었인가? 이런 것을 구하는 종교가 있단 말입니다. 종교가 좀 미숙하고 더 성숙한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민족(民族)이나 다 그 나름대로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자기들 딴으로 해서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높은 것 절대적인 것 이런 하나의 신비로운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本來)로 불성존재(佛性存在)라, 본래로 하나인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던지 간에 영원을 구하는 조금도 흠절이 없는 행복(幸福)을 구하는 마음은 누구나가 있습니다. 그 사람 정도에 따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그렇게 될라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정당한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만나야 한단 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가장 정당한 것이 좋기는 할테지마는 그것은 너무나 어렵지 않은 것인가.
금타(金陀)대화상 법문도 부처님의 정통(正統) 가르침을 펴고 계셨지만은 그 가르침이 너무 어려우니까 조금 쉬운 방편적(方便的)인 가르침이 좋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은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을 마십시오. 제일 쉬운 것입니다. 왜 쉬운 것인가? 말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이나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우리 생각 가운데 가장 바른 생각이 무슨 생각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마음의 주인공(主人公)자리 우주(宇宙)의 본래자리, 우리마음의 주인공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은 똑 같습니다. 우리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또는 우주생명인 부처, 법신부처님자리는 모양이 있습니까. 그도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생명자리나 우리마음자리 나 똑 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떠나 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다 외이지 않습니까. 또는 ‘옴마니반메훔’ 주문(呪文)도 외이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화두도 들고 합니다. 뭣 땜에 하는 것인가?
그것도 역시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의 본래자리 우리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우주의 참 생명인 실상(實相)자리를 보고자 해서 그런 것입니다. 금생에 너무나 짧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그런 걸 다 할 것인가? 그러나 금생에 할 일이 많지마는 그런 일 가운데서 가장 급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생명의 본바탕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의식개혁(意識改革)을 해야 된다. 우리 마음을 바꿔야 된다. 참다운 자아를 참나인 진아(眞我)를 또는 대아(大我)를 구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세속인들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나가 뭣 인가? 참다운 자기 주체의식(主體意識)이 무엇인가? 이렇게 따질 때는 철학(哲學)도 조금하고 뭘 좀 아셔도 대답을 잘 못 한단 말입니다. 철학을 했다 하더라도 철학도 여러 갈래가 있지 않습니까.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주체의식, 참다운 자기본래면목은 역시 성자(聖者)의 가르침이 아니면 제대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마음의 모든 번뇌(煩惱) 때를 다 없애서 우리마음이 본래(本來)의 상태로 되는 분이 성잔데 성자의 가르침이 돼야 비로소 우리마음의 실상 (實相)을 안단 말입니다. 그 일은 제일 급한 일이고 또 우리가 미리 겁내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수행 방법도 많이 있고 또는 가을인지라 우리가 명상(瞑想)을 깊이 해야 할 때 아닙니까.
명상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LA나 그런데 가 살아보면 정말로 참 잘난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또 무슨 법 무슨 법 한도 끝도 없이 여러 가지 명상법도 있고 별법이 다 있습니다. 무슨 기를 어떻게 다스린다는 법도 있고 별것 다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그 사람들이 대체로 참다운 마음을 깨달은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다 모르니까 확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걸로 해서는 그분들이 마음을 깨닫는 성자(聖者)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 할 때는 상대적(相對的)인 것밖에는 안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나 예수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그런 분들은 상대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다만 하나의 제도가 생기고 종파(宗派)가 생겨놓으면 그 종파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 무리가 생기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많이 거기에 붙어서 그런 것이지 가르침 자체는 무슨 성자나 적어도 성자라고 하면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공부 할 때는 꼭 성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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