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도 우리 부처님 법은 모두를 나누어서 보지를 안는단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일체 존재를 하나의 평등平等 무차별無差別의 하나의 생명자체로 봅니다. 우리는 불법佛法 그러면 연기법緣起法이라, 불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고 하는 연기법이라, 이렇게 보통은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만 믿어버리면 그런 연기법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인연법도 소승小乘에 있어서는 이것과 저것과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인연이 다 하면 흩어진다.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라,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진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현상적인 의미에서 인연이 있다 없다하는 이렇게만 믿는 이것은 소승적 인연법 해석입니다.
대승적大乘的인 인연법의 해석은 어떤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대승적인 인연법 해석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대승적인 인연법 해석 이것은 마명보살馬鳴菩薩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마명보살은 서기 1세기경 때 분입니다. 서기 1세기경 분인데 마명보살이 내신 책 가운데서 훌륭한 책이 대승기신론이라, 이러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런 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 하면 마명스님을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용수보살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런데 대승기신론 가운데서 그 대승적인, 소승과 대승의 한계는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소승은 아까도 말씀마따나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기도 하고 또는 차원이 낮은 정도에서 보는 그런 가르침이나, 대승적인 가르침은 모두를 다 통괄을 합니다.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주 에너지 우주 생명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 대승적인 인연법은 무엇인가 하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그 불자님들 앞으로 두고두고 이런 말씀이 불교에서나 또는 다른 스님네들 설법에서나 많이 나올 것입니다. 진여연기라, 진여眞如란 말은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우주의 진리眞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고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가 쉽겠지요.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는 진리가 이치로 해서 따로 있고 또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대로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인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그 우주의 도리로 우리가 표현 할 때는 진여眞如,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우주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법도 진여연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주라는 것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여 불성만 우주에 항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영원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해서 진여불성이 항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뜻은 다 그렇습니다.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열반경涅槃經이나 다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언제나 우주에 그대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대승입니다. 아, 내가 대승이다. 아무리 큰소리 해본대자 자기 그 믿는 내용이 대승적이지 않으면 대승을 믿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 같이 그 진여불성 우주를 하나의 이치로 이야기 할 때는 논리로 이야기 할 때는 진여라고 하는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성품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그런단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연기라, 진여연기는 무엇인고 하면 진여불성이 스스로의 공덕功德 따라서 스스로의 에너지 따라서 우주 만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별이요 우리 인간이요 모두가 다 그 근본적인 근원적인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이라는 우주의 순수생명純粹生命으로 부터서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떠나서는 일체 존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생명이 일체 존재가 돼있어 놓아서 비록 태양이 되었던 진여불성에서 태양이 나오든 또는 다른 별이 나오든 또는 사람이 나오든 내내야 진여불성은 그대로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이것은 하나의 물질이라든가 시간 공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때는 생사를 초월한단 말입니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항시 우주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이 만상이라 하는 것도 역시 사람으로 진여불성이 나오든 산으로 진여불성이 나오든 진여불성 자리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도 역시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도 내 가운데는 다른 것은 없이, 무슨 심장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인제 폐가 있고 하겠지요. 그런 것은 물적으로 물질화된 그런 자리에서 우리 인간이 다 더러운 것이지 근원적인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록 나한테 심장이 있고 별것 다 있다하더라도 진여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심장도 피도 신경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쉽게 성자가 보면 다 부처로 보이고 우리 범부가 보면 그때는 범부로 보이고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도 우주 모든 존재가 진여불성으로 돼서 진여불성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가 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앞서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주의 본래 근원적인 생명입니다.
우리가 인간 존재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살지만은 다 그 무궁한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 나오신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행복 가운데도 가장 무궁한 행복, 그 행복도 시원찮은 것은 있다 없어지고 아, 행복을 추구해 봐도 다른 것이 생겨버리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때까지도 내 생명이 금생 다 할 때까지 또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무엇이고 하면 우리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될 때만 그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같은 분도 그 마음을 닦아서 하나님하고 하나가 딱 됐단 말입니다. 하나가 딱 됐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속성을 모든 공덕을 다 스스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도 부릴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활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도 그래요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공부를 바로 해서 그 자기라 하는 그 보잘것없는 자기라하는 개성만 초월하면 어느 누구나가 다 석가모니 부처님 같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윤회輪廻를 초월한다. 우리가 생사윤회를 하지 않고서 윤회를 벗어난다. 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의미인 것인가. 우리 중생이 개인적인 나요 너요 하는 개인적인, 진여불성을 떠나서 진여불성을 외면해서 오직 자기 애고 자기 이기적인 자기 생활만 하는, 그런데서 우리가 벗어나서 영원적인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될 때에만 그때는 우리가 윤회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몇 천생 몇 만생을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더 하고 싶어도 인제 할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며는 우리 마음의 본 성품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자리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아무땐가는 진여불성이 된단 말입니다. 불교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본래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응당 부처가 되는 것인데 우리가 빨리 못 되면, 우리 인생도 좋은 때는 좋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어떤 경우도 떠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생로병사를 위주로 한,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이런 것을 위주로 한 모든 인생고人生苦, 그 인생고를 우리가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인생고를 떠나서 우리가 인간의 윤회, 윤회의 그런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본래 생명자리인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내내야 우리 불교에서 말 하는 여러 가지 팔정도八正道라든가 이른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라든가 다 그런 가르침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라는 그런 그 보잘것없는 자기라는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역시 얼마만치 우리 생명존재가 진여불성하고 가까이 됐는가. 거기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본래면목자리 진여불성하고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때는 별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공양주를 지내나 무엇을 하나 어디 가서 어떠한 직책을 가졌던 간에 그의 마음이 본래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하고 가까이 있어 놓으면 그때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여불성하고 빨리 가까워 질 것인가? 그것이 인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이 그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고 애를 많이 쓰고 우리 스님네도 여름이나 겨울이나 3개월 동안 그냥 그 선방에서 화두나 염불을 들고서 부처님의 명호를 들고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럽니다.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딱 돼버려야 비로소 그 때는 성인聖人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견성오도見性悟道라, 견성見性은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진여불성을 우리가 인제 그대로 훤히 본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봐버려야 그래야 그때는 오도悟道라, 깨달을 오悟자, 길 도道자,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되는 그런 작업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고구考究히 생각해보고 또 여러 해 동안 경험도 해 보았습니다만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우리가 진여불성하고 다른 존재 같으면 모르거니와 내내야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또는 천지 우주가 우리가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제한制限된 안목眼目으로 보니까 미운사람 고운사람 산山이요 냇川이요 그러는 것이지 우리가 근원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 뿐이란 말입니다. 또 우리가 진여불성이 안되고 그대로 산다면 모르거니와 어느 땐가는 결국은 진여불성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는 인간적 존재의 의의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존재는 우리가 우주적인 뜻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되려는 하나의 이것이 수련장修鍊場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그렁저렁 향락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 고향자리로 가기위한 하나의 수행도량修行道場이란 말입니다.
우리한테 가장 행복幸福한 생각은 어떤 생각인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생각은 역시 한계限界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으나 부처님을 지향하는 부처님 생각은 한계가 없단 말입니다. 깊이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어지고 더욱더 재미도 있어지고 또는 집안 운수도 훨썩 좋아지고 말입니다. 아, 어느 사람들은 그 재미는 있을 란가 모르겠지만 집안 운수 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자리를 차근차근 충만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도 거기에 다 곁들여 옵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자기 마음 진여불성은 원래 늙음이나 젊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마음은 항시 젊단 말입니다.
인연因緣이 다해서 금생에 우리 몸뚱이가 그대로 다 한계가 되어가지고서 몸뚱이를 버리고 간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이라 하는 생명자체는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도 하고 십자가에 자기 몸도 받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어디에다 자기 몸을 버린다 하더라도, 자기 몸을 버릴 수 있는, 자기 이 육체적인 이 몸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그런 마음 자체가 벌써 우리 마음이 그만만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정성이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산도 진여불성으로 돼있고 산에 들어있는 진여불성 기운이 즉 말하자면 산신山神이란 말입니다. 또 물에 들어있는 진여불성 기운은 용왕龍王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부처님 사상 진여불성에 사무치면 다 통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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