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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382

 

 

참선參禪하는 과정도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직접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몸소 행하시고 49년 설법하신 후 열반涅槃드실 때 또 당신이 몸소 우리한테 보여 주신, 그리고 근본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서 몇 10번 역설한 법문이 다시 말하자면 참선하는 그 근본선 이것이 아홉 가지 9차체정九次第定으로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선근四善根입니다. 즉 말하자면 가행위는 시원해지고 또 이렇게 심월心月이 나오고, 심월이 컸다 작았다 하고, 찬란스러운 심일心日이 나오고, 이와같이 4선근을 거쳐서 다음에 들어가는 삼매가 견성오도인데 선정의 차원으로 하면 그때는 초선정初禪定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야 이제 견성오도를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복됩니다만 아무튼 초선정初禪定이라. 이때는 우리의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져버립니다.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지고 이제 세밀한 분별만 남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 2선정二禪定이라, 여기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세밀한 분별까지 다 끊어집니다. 거치러운 것도 미세한 것도 다 끊어지고 오직 하나의 마음자리만 지킵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다르고, 몸 따라서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사실은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같아집니다.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 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을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 가다가 3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이 밑에는 같은 광명신이지만 몸도 광명이 되어서 광명이 그때는 하나의 광도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허나 3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4선정四禪定이라. 이때에 가면 마음이 조금도 동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식이라! 하나의 마음이 우주에 충만해 보이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인 것입니다. 식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무소유처無所有處입니다. 그때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구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無碍인지라 혼연일체渾然一體인지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입니다. 그때는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또 없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아주 미세해서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주 맑은 생각만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이제 멸진정滅盡定이라. 멸할 멸, 다할 진. 이때는 그야말로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 여기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만 올라 갈수록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져서 저 위에 가서는 번뇌가 다 녹아서 완전히 그때는 우리 범부라 하는, 즉 말하자면 이생위離生位, 너와 나의 차이 또 사물과 나와의 차이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이제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그때는 완전히 통일이 딱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여기 있는 참다운 정각正覺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께서 여러 가지 불경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만 경따라서 이렇게 참선하는 방법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에도 보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 돈오는 문득 깨닫는 것이고,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이것은 앞서도 얘기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 갈래, 만 갈래 구분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의 진리로 딱 통일이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천지우주가 그 하나의 진리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명은 아직 멀었지만은 우선은 돈오라 합니다. 돈오를 지금 말씀드리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보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논쟁도 심합니다만, 우선 역사적으로 보면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한 것은 체와 용, 과 상이 둘이 아니요,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

 

천지우주의 모두를 하나의 진리眞理로 하나의 체계體系로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오頓悟입니다. 점수漸修는 그와 같이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론적理論的으로 된 것이지 사실은 아직 체험體驗을 못했으므로, 체험하기 위해서 점차로 올라가는 이것이 점수漸修입니다. 점점 점, 닦을 수자 점수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할 것인가? 마음자리를 고요히 묵조黙照하는 방법과 관찰을 주로 하는 관조觀照를 주로 하는 관법觀法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도 참선參禪하는 방법이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화두話頭로 해서 어느 문제, 화두라는 것은 하나의 문제의식 아닙니까. 어느 문제를 딱 주어서 그 문제를 애쓰고 푼단 말입니다. 의심하고 풀어감으로 해서 산란한 마음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것도 내내야 따지고 보면 하나가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화두를 잘 못 의심하면 그 하나의 불성 마음자리를 놓쳐버리고 상대적인 문제만 의심을 하면 공부가 안되지요. 괜히 꿍꿍 알다가 자칫 잘못하면 기만 올라옵니다.

 

그래서 반드시 화두를 들 때는 하나의 진리 본래 본 분사 본래면목 그 자리를 우리가 안 놓쳐야 만이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그 하나의 진리 본 분사 그 자리에다 마음을 딱 집중 시켜서 의심을 하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녹아갑니다. 그렇게 관찰 참구參究하는 선법禪法도 있고, 그런 선법은 우리 조계종曹溪宗 혹은 임제종臨濟宗에서 주로 합니다. 조계종은 내내야 임제종의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또 원불교圓佛敎나 일본 조동종曺洞宗은 묵조선黙照禪이라. 그때는 모두가 본래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천지우주가 부처인줄을 알았으면 그 자리를 우리가 지키고서 묵조하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탁마琢磨가 되서 즉, 탁수를 가만두면 앙금이 가라앉고서 맑아져 바닥이 보이듯이 묵조하면 부처가 될 것인데 의심을 하면 괜시리 마음만 헛트러뜨려 더욱 귀찮지 않겠는가. 더욱 마음을 산란시키지 않겠는가. 그래서 잠자코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 묵조선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되어 가겠지요.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 중국의 송나라 때도 문제를 들고 의심하는 화두 선법도 있었고 그와 대립적으로 묵조하는 선법도 같이 있었습니다. 보통 자기 할애비나 자기 문중에서 하는 선법이 더 좋아 보이고, 다른 분들이 하는 것은 배격을 합니다. 행법이라는 것이 다 성불의 법인지라 자기가 어떤 행법을 취하면 거기에서 재미를 봅니다.

 

가사 화두도 하다보면 마음이 모아지고 마음이 개운해지고 공부가 되어 가면 재미가 붙겠지요. 재미가 붙으면 자기 하는 공부만 재미가 붙고 다른 방법은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폄하기가 쉽습니다. 사실은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법문들은 모두 성불하는 법이기 때문에 애쓰고 하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문呪文을 하나 염불念佛을 하나 다 되는 것인데 자기가 하나만 해놓으면 그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이제 한 종파宗派가 생기지요.

 

일본 조동종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묵조라, 잠자코 무념무상 하는 종파입니다. 조동종은 묵조만 하는데 굉장히 큽니다. 한 종파이지만 불교대학佛敎大學이 몇 개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종파는 기왕이면 화두를 하되 그렇게 우리 생활과 비근한 문제가 아닌 엉뚱한 것을 가지고서 또 옛날에 그때그때 쏘아버린 말로해서 화두를 할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화두로 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부처님 명호를 화두로 하는 종파가 있습니다. 이것보고 염불()선이라 그럽니다.

 

한국도 서산西山, 사명四溟, 진묵震黙, 태고太古, 나옹懶翁, 연기緣起대사 등 그런 분들도 염불을 화두보다 더 많이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튼 정평 있는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정평 있는 위대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단 말입니다.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이고, 천지우주가 다 불성이거니 부처님 법이 모두가 다 성불하는 법이거니 어떻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천지 우주에는 하나의 법도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습니다. 다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안도 없고 밖에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참선하는 법이,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본래의 자리, 본래 본체 자리에다 딱 머물게 하면 참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외워두십시오.

 

그 굉장히 참선 하면 꼭...., 지금 저는 어디가나 얘기 합니다만 참선은 저 저 고도한 사람들이 하고 염불은 저 밑에 사람들이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괜히 상대적인 문제, 그런 문제만 따지고 있으면 선이 못되지요. 본체를 떠나 버리면 무슨 놈의 선이 되겠습니까.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요, 선가귀감이나 여러 경전에서 말하듯이 진리를 갖추고 있는 그런 본체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 마음이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선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자 화두를 들든, 이뭣고 화두를 들든 본래면목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그때는 선이 될 수가 없지요. 6조스님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고로 정통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칠 수가 없습니다. 한편만 보는 그런 독선적인 안목 때문에 꼭 자기 방식이 옳다고 그럽니다. 전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치우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서산대사도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 참선에 대한 귀감도 내놓고, 또 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 도교에 대한 것,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유교儒敎에 대한 귀감도 내 놓았습니다.

 

어떠한 도인들이나 그 시대의 종교나 철학을 다 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종교사를 한 번 보십시오. 모두 그 당시의 철학이고 종교고 다 합해서 하나의 체계로 묶을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폭이 좁은 사람들은 꼭 자기가 하는 것만을 고집 합니다. 지금 현대란 사회는 모두를 하나로 통합할 때입니다.

 

우리 생명의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마음의 고향 길은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證明한 길입니다. 이렇게 이 길을 지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바랍니다. 재가 불자님이라 하시더라도 밥을 자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사업을 하실 적에도 종업원이나 점원을 부처님같이 대해 보십시오. 얼마나 따르고 일을 잘하는가 말입니다.

 

6.25사변 때 사람들이 마구 죽이고 또 죽고 할 때도 그 무시무시한 때 저는 애쓰고 부처같이 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상스럽게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난리를 넘는 가장 슬기로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을 다 부처같이 보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와 덕망德望이 난리를 이기는 가장 큰 보배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스승,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 도리, 우주와 인생의 도리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꼭 마음을 주인공으로 해서, 지금 병자病者를 어디 가서 문병이나 간호를 한다 하더라도 그를 부처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정성스럽게 봐지는 것이고, 또 우리 식의 파장波長이 부처같이 볼 때 가장 우수한 가장 강력한 파장이 되는 것입니다.

 

! 부처님! 하는 그 때 우리 몸과 마음은 굉장히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부처같이 간절히 보는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상대편의 마음도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모두가 부처님을 지향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것은 지상명령입니다. 지상명령인 성불을 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