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더운 날에는 보다 시원스러운, 마음도 시원스럽고 몸도 시원스러운 그러한 청량미(淸凉味)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 법 가운데는 마음의 번뇌(煩惱)가 없고 또는 환경도 쾌적한 그런 것을 가리켜서 그러한 곳의 가장 최선의 쾌적한 장소 이것이 청량지(淸凉地)라 말입니다. 청량지를 다른 말로 하면은 이것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다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의 번뇌도 없고 우리 주변사정도 조금도 험난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 우리가 공장에서 일을 한다거나 또는 자기 직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런 분들은 아무리 잘 생각한다 하더라도 화택고해(火宅苦海)라 하는 괴로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택고해와 청량지는 상대적인 대척(對蹠)적인 그런 말입니다. 화택고해라, 불 화(火)자 집 택(宅)자 또는 괴로울 고(苦)자 바다 해(海)자 입니다. 헌데 이렇게 더운 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계(衆生界)를 가리켜서 번뇌를 미처 못 여윈 중생계를 가리켜서 화택고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 아무리 시원스러운 처소(處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번뇌가 가시지 못 하면 우리는 화택고해에 있는 셈입니다. 화택고해의 특징은 무엇인가. 화택고해의 특징은 이것은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무거운 번뇌입니다. 번뇌는 어째서 있는 것인가, 번뇌는 사물(事物)을 바로 못 봐서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란 말입니다.
이 현상계(現象界)라든가 현상계의 근본 진리(眞理)라든가 이러한 원리(原理)라든가 이걸 바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리 사물을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바로 못 보는 이것이 바로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말입니다. 밝지 못하는 무명심입니다. 따라서 무명심이 있으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우리 번뇌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물을 바로 못 보거니, 바로만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라는 것도 사실 허망(虛妄)한 것이고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데 이걸 잘 못 보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보고 또 있는 것을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집착하는데서 그때는 탐욕심(貪慾心)도 생기고 여러 가지 진심(嗔心)이나 기타 가지가지의 번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떻게 잘못 보는 것인가? 우리 일반 중생은 사실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에서 말씀한 이른바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입니다. 모든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일반 물리학(物理學)도 우리 중생이 보는 차원(次元)에서 상식적으로 있다 하는 것을 그대로 긍정(肯定)을 못 합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있는 것 같이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이 있지 않은, 참다운 지혜(智慧)로 본다 할 때에 순 객관적(客觀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人生)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까 제 말씀마따나 일체 고해(苦海)라 하는 그런 고(苦)뿐입니다.
또는 모든 존재(存在)는 무상(無常)이라 하는 조금도 머물지 않는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는 그런 무상입니다. 순간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 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내가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무상이고 무아기 때문에 정말로 있다고 할 수가 없이 일체 존재는 그때는 공(空)입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은 고(苦)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적(科學的)인 진리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내내야 하나의 각 세포가 모여서 나라는 몸뚱이가 있단 말입니다. 나라는 마음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나라는 마음은 우리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는 마음은 벌써 지나가버려서 우리가 못 잡는 것이고 또 미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아서 못 잡고 말입니다. 현재 지금 좋다 궂다 하는 우리가 판단하는 인식(認識)하는 이 마음은 조금도 순간찰나도 머물지 않고 변해서 마지않습니다. 즉 과거(過去)라는 우리 기억은 지금 존재가 없고 말입니다. 다만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지 과거는 이미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래(未來)는 미리서 헤아리는 그 마음 가운데 미래가 있는 것이지 다가오지 않아서 미래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재(現在)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현재는 순간찰나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도 사실은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단 말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이런 시간은 우리 번뇌(煩惱)로 해서 우리 범부(凡夫)가 미망심(迷妄心)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고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거니 나라는 존재가 사실 있을 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중생은 상식적으로, 과학(科學)도 잘 모르고 또는 보다 깊은 철학(哲學)이나 그런 종교(宗敎)도 모르는 것이니까 상식적으로 그저 이런 현상적(現象的)인 모양이 보이면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슨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상식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시대입니다. 상식만 가지고 살았다가는 인간은 자기도 괴롭고 자기 가정(家庭)도 괴롭고 사회(社會)도 괴롭곤 합니다. 사회가 왜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것인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현대학문적(現代學問的)인 결과인 과학만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분명히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괴로움뿐입니다. 벌써 늙어야 쓰고 아파야 쓰고 또는 죽어야 쓰고, 헤어져야 쓰고, 시간의 차이뿐인 것이지 결국은 우리가 죽어야 쓰고 아파야 쓰고 헤어져야 쓴단 말입니다. 이것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좋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번뇌가 많습니까. 또 모든 것은 어느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머물러 있지가 않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細胞)도 역시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나는 늙지 않는다. 나는 젊다. 젊음이 어지간히도 있다 생각하고서 자기 과시를 하고 지냅니다만 젊음도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좋은 꽃이 열흘을 미처 못 가듯이 결국은 이울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젊음도 늙음도 소년도 순간순간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그와 같이 그런 변화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못 보기 때문에 나는 젊다, 나는 어리다, 나는 건강하다 이와 같이 장담하는 것입니다. 장담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상하거니 나라고 고집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내가 없고 미래에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현재는 순간순간 변화해 가거니 이놈의 몸뚱이가 어디가 상주부동(常主不同)하게 어디가 일정하게 머물러 있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순간도 자기 몸이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대부분 다 과학을 배웠으니까 짐작을 할 것입니다. 물리학을 여러분들 아십니다. 보통은 다, 나와 같은 이 몸이 과거에 절대로 있지가 않았단 말입니다. 미래에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 현재도 자기가 소중하게 아끼는 이 몸이 순간찰나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변화의 과정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恒常)이 없이 변동(變動)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이것은 무아(無我)인 것이고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상이고 무아거니 결국은 사실은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道人)들은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공인 것을 그렇게 역설(逆說)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智慧)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바로 그 모든 것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항시 외우는 반야심경(般若心經)도리가 내내야 모든 것이 비었다는 도리 아닙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은 비었다하는 그 진리를 우리가 딱 느껴야 씁니다. 그래야 적어도 부처님 법문(法門)에 우리가 귀의 했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비어있는 것인데 있다고 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때는 우리가 번뇌가 나오고 인생고가 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없거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내 몸뚱이가 사실은 텅 비었거니 어떻게 내 물건, 내 존재가 무엇이 있습니까. 내 존재가 아닌 것을 내 것이다 이러니까 결국은 거기에서 싸움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그렁저렁 할 때에 상식적으로만 살아도 무방할 때는 모르거니와 현대 산업사회(産業社會)에서 복잡다단할 때는 그렇게 상식만 가지고 못 살아갑니다. 사물을 바로 봐야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또는 공(空)이요. 이것보고 우리 불교(佛敎)에서는 사정견(四正見)이라, 네 가지 바른 견해(見解)라 합니다. 사정견이라,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들은 사정견을 분명히 외이시기 바랍니다. 네 가지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거니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거니 인생은 고(苦)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해서 가지가지 고(苦) 뿐입니다. 낙(樂)이라 하는 것은 내내야 우리 고(苦)에서 우러나오는 잠시간 하나의 거품 같은 것이지 사실은 완전한 안락(安樂)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이요. 이것이 네 가지 정견입니다. 적어도 정견을 딱 가져야 불교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 화택고해(火宅苦海)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본 다 할 때에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인 것이지 정다웁게 그때는 그야말로 참 궁극적(窮極的)인 철학적(哲學的)인 의미, 궁극적인 종교(宗敎)의 의미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空)도 역시 아직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진리(眞理)가 못 됩니다. 다만 과학적인 객관적인 진리로 봐서 고(苦)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인 것이지 정다웁게 실상지혜(實相智慧), 실상지혜로 봐서는 그것은 아직은 완전무결한 진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실상지혜(中道實相智慧)라. 이런 지혜로 봐서는 그때는 공이나 무상이나 또는 무아나 그런 것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는 뭣 인고 하면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든 법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공덕(功德)으로 충만(充滿)된 지혜란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이러한 공덕으로 충만 된 지혜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불성(佛性) 부처님 광명(光明), 모든 행복(幸福)과 지혜(智慧)라든가 자비(慈悲)라든가 일체공덕(一切功德)이 충만(充滿)한 경계(境界), 충만한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실상의 지혜 입니다.
따라서 중도실상의 지혜를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도실상의 지혜를 얻지 아니하면 인생의 화택고해를 못 면합니다. 허무(虛無)를 못 면합니다.
우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네 가지 정견, 과학적으로 봐서 객관적인 네 가지 정견,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서는 참다운 행복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무상을 느끼고, 허무를 느끼고, 잘못은 좀 안 저지른다 하더라도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 불멸(不滅)의 행복은 못 느낍니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가장 큰 뜻이 무엇인가? 가장 대사(大事)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은 조그마한 소사(小事), 작은 일만 가지고 평생 취생몽사(醉生夢死)하고 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그런 자그마한 것에 머물지 않고 대사, 일대사, 가장 큰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가장 큰일은 뭣 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일체중생의 본 실상(實相), 가상(假相)이나 허망상(虛妄相)을 떠나서 본 실상을 우리가 증명(證明)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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