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부처님은 지금 어디가 계시는 것인가. 불자님들 부처님은 정말로 바이블(성경)에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길, 우주의 정의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참다운 청정적광淸淨寂光, 광명인 것입니다. 태양광선과 같은 그런 오염된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 비물질적인 참다운 광명이 부처님의 광명입니다. 그런 광명은 우리 몸에도 가득 차있고 우주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물질이라 하는 것은 청정적광 위에서 그때그때 업 따라서 결합되고 또는 움직이고 하는 진동하는 그런 것이 우리 눈에 물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고도한 이론 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모두가 그야말로 하나의 이론에 그쳐버리는 공염불空念佛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당장에 지금부터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 길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지름길인 것인가.
저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근본불교도 저 나름대로 토굴에서 몇 년 동안이나 머리도 썩혀보고, 또 달마부터서 6조까지도 그 문헌을 다 탐구해 봤습니다. 달마부터 6조까지 그분들 끼리 내려오는 그 이른바 Identity 즉, 요지要旨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서 이제 마음으로 굉장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인제 제가 미국 들어가서 3년 결사를 하기 전에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제대로 해답을 못 내렸습니다 만은 그래도 3년이 지난 다음에는 제 공부를 인제 잘은 못했으나 참 저는 투미하고 정진력이 부족해서 마치 회양목선茴楊木禪이라. 참선에도 회양목선이란 것이 있습니다. 회양목은 아주 더디게 크는 나무입니다. 3년 크다가 공달이 드는 해는 축소가 됩니다. 그러다 다시 자라므로 얼마나 모질게 큼니까. 그와 똑 같이 참선에 별로 진전이 없는 참선보고서 이제 회양목 참선이라 합니다.
저는 그런저런 근기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있는데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참선 공부하는 문제, 어떻게 하는 것이 달마 때부터서 6조혜능까지, 그것이 바로 부처님 때부터서 삽삼조사卅三祖師가 공부 해 놓은 핵심이 되겠지요.
역시 달마 이전까지는 교학적으로 너무나 번쇄하게 중국에 유포가 됐기 때문에 그렇게 번쇄한, 가령 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그 오직 번쇄합니까. 마치 기독교의 중세 스콜라철학Scholasticism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런 번쇄철학 그렇게 되면 정다운 길 마음 깨닫는 것은 뒤로 미루고 교리를 배우다가 판나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이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스님 까지는 그런 찌꺼기를 다 걸려버리고서 오직 마음 닦는 순수한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달마스님의 안심법문安心法門, 심경송心經頌, 파상론破相論,觀心論, 혈맥론血脈論 등, 또는 승찬僧燦스님의 이른바 신심명信心銘, 그리고 4조도신道信스님의 어록이 제일 많습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아주 귀중한 법문입니다. 그 법문은 돈황敦煌에서 비로소 발견 됐기 때문에 20세기 초두에는 없었습니다. 20세기 중엽부터서 비로소 유포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달마대사의 주요한 줄거리를 그대로 계승했지만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과 입능가경入楞伽經을 주로 참고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5조홍인弘忍스님도 역시 그런 투로 계승했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 역시 부촉품咐囑品에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단경은 사실은 문제가 많습니다. 후래인後來人들이 깎고 보태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6조스님께서 그 대범사大梵寺 법단에 올라가셔서 보살계菩薩戒를 설하신 법문은 6조스님이 직접했다고 지금 불교학자들이 다 정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보살계菩薩戒를 지키고,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이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歸依란 말입니다.
이렇게 6조스님께서 그대들이 나를 따라서 이렇게 세 번씩 외우라. 이렇게 말씀 했단 말입니다. 그런 대문은 그야말로 금구직설金口直說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구는 쇠 금金자, 입 구口자, 성자의 청정한 입에서 나온 말씀을 금구라 합니다.
금구직설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보면 사실 제일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또 한편 중국 불교사를 보아도 6조혜능까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닦는 법이었습니다. 화엄경이면 화엄 그대로 닦는 것 말입니다. 화엄, 법화, 열반 사상 그대로 닦으면 바로 선이 됩니다.
지금도 중국의 송나라 때 이루어진 화두話頭 일변도의 선법 때문에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은 조금도 없습니다. 또 당나라 때도 없습니다. 송나라 대혜大慧스님 대에 와서 비로소 화두 아니면 선이 아니다. 그런 것이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있었든 것이지,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도 없단 말입니다.
야훼Yahweh가 우리마음 밖에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나 언제 어디에나 야훼는 계신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의 몸이 언제 어디에나 계시듯이, 예수님 말씀도 다 그런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Augustinus,354~430,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같은 중세 기독교 유수 신학자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현대에 와서, 인도 칸디kandi의 말마따나 ‘나는 예수Jesus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찬Christian은 싫어한다.’ 왜야하면 크리스찬들이 예수를 닮지 아니하므로 싫어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부처님을 얼마나 지금 닮고 있습니까. 젊은 불자님들도 꾀 많이 여기 모여 계십니다. 정말로 계행 청정하십시오. 계행이 청정해야 그래야 삼매가 되어 갑니다. 삼매에 못 들면 연목구어緣木求魚라. 고기를 구하는데 산중에 들어가서 구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삼매가 발득發得이 아니 됩니다. 삼매가 발득이 안되면 우리 마음도 몸도 바꿔지지 않습니다. 우리 생리生理가 바꿔지고 우리 마음이 바꿔져야 그래야 도道를 통通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라는 것은 다시 일반적인 술어로 하면 명상冥想 아닙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ākyamuni BC 563?~BC 483? 6년 고행,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9년 면벽,
예수Jesus Christ, BC 4?~AD 30 같은 천재도 요단강 강하에서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선근이 좋은 사람인지라 금식기도 할 때에 마음을 통했겠지요. 마호메트Muhammad/Mahomet,570?~632도 히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 명상에 들어 그때 역시 영원적인 영원상을 음미를 했겠지요.
우리는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이고, 우리 마음 가운데는 행복幸福도 자비慈悲도 지혜智慧도 능력能力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무량공덕심無量功德心입니다. 석가모니만 삼명육통을 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의 다라표 수좌는 16세에 아라한阿羅漢Arhan과를 성취해서 삼명육통을 다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 스스로 안 통하려고 애쓴단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통해있는 부처인데도 우리 스스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석가모니 같은 그러한 슬기와 자비가 똑 같이 원만구족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그걸 지금 막고 있습니다. 행복 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절로 행복의 길은 틔어있는 데도 우리 중생들이 그 길을 딱 틀어막고 있습니다. 둔주역풍遁走?逆風이라, 마치 미련한 중이 바람 거슬러서 길을 가듯이 우리는 지금 바람을 거슬러서 가는 범선帆船이나 새나 마찬가지입니다. 계행戒行 지키는 것은 그렇게 거슬러가는 것을 바른 쪽으로 회향回向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거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한 법인가. 앞서 말씀드린 4조도신스님께서 문수반야경, 입능가경을 인용해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 법계는 오직 부처님 하나의 실상實相 뿐 이단 말입니다. 법계에는 딴것이 없습니다. 법계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실상 뿐인지라, 이것이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味라. 염념상속念念相續 법계일상法界一相 부처님 생각을 놓치지 아니하면 바로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저는 아함경阿含經도 다 떠들어 봐서 짐작을 합니다만 그 아함경에도 역시 41군데나 우리를 그렇게 편달하고 우리를 영원 쪽으로 다스리는 그런 법문으로 일관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명상하는 법이 말입니다.
우리가 통하려면 틀림없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하더라도 사선정四禪定 멸진정滅盡定을 거처야 됩니다. 우리 몸둥이나 마음을, 범부신凡夫身을 성자의 청정신淸淨身으로 이른바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삼매가 사선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외도들도 사선정은 합니다. 멸진정은 사선정을 통과해서 우리 아상我相을 온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만이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서 우리 선정이 제대로 되어야 아我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주宇宙가 무아無我요 대아大我요 진아眞我요, 우주가 나가 되고 그야말로 내가 우주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를 하나의 생명 자체로 보는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단경의 부촉품에 가서, 부촉품은 경론의 결론 같은 품입니다. 6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려면’ 그냥 좀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 생리生理와 심리心理가 바꿔져서 증명證明한다는 말입니다. 불성을 증명하는 그 자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고 하면은 ‘그대들이 먼저 마땅히 빽빽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일상삼매 이것은 모두가 진여불성 일원뿐이란 말입니다. 일행삼매는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일상삼매라는 그 경계를 일체 모두가 진여불성 뿐이라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생각 생각에 상속相續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란 말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단경에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단경 부촉품에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부처의) 일체종지(모든 공덕을 갖춘 지혜)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그러면 마치 종자가 대지에 묻혀서 적당한 온도와 습기가 갖추어 지면 차근차근 싹이 터서 나무가 무성하고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원래 부처인지라,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업장이 녹아서 그때는 우리의 진성眞性, 맑은 반야의 지혜는 점점 증장 되어가서 종당에는 해탈을 한다. 이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이걸로 해서 단경이 끝을 맺었습니다.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절대로 둘로 생각을 마르십시오. 부처님 법문은 아무리 쉬운 법문을 하더라도 꼭 대승법문이 끝에 가서 딱 맺듯이 되어 있습니다. 다만 후래인들이 정리할 때에, 4번이나 정리가 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글이 없어서 말로만 전수하기 때문에 제자 분들이 알아듣는 것은 그대로 전수가 되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그때는 수록에 빠뜨리고 그러겠지요. 그래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 법문은 소승법에도 대승이 다 들어 있고 대승법에도 소승의 점차로 올라가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가운데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고, 돈오점수 가운데도 돈오돈수가 있습니다. 원래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돈수만 있고 점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는 돈수라는 말도 나올 수가 없지요. 선善이 있으면 악惡이 있듯이 우리 상대법相對法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있으면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있고 돈오점수가 있으면 돈오돈수가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논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내가 생명이듯이 나를 위시한 모든 생명의 근본 순수생명 자리인지라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부처라는 것은 각覺이라, 이른바 생명生命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佛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 가운데 내가있고 네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그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한테 있는 생명 남한테 있는 생명 똑 같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잘 모르니까 무자無字 화두話頭가 생기고, ‘개도 불성이 있다’ 개도 불성이 있다 하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개의 머리나 심장 어디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또 개가 불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봐도 불성이 안보 이니까 말입니다. 없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불성이 있다고 할 때는 어디 몸 한쪽 귀퉁이 뇌나 심장에나 그런데 가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혼신 그대로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무량무변의 우주 가운데는 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순수 에너지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귤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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