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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224

224.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說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변동할 수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고 하면 이 나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우선 분석적으로 봅시다. 지금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 현대말로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장 따라서 잠시간 이 모양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잠시간 모양같이 보이면서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가화합이라. 지수화풍 사대와 거기에 우리 업장이 달라붙어서 이것이 내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나라는 실체란 말입니다. 아무리 아껴봐도 나라는 것은 결국은 갈 때는 소식도 없이 지 멋대로 가버립니다. 어느 순간도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나라는 집합체는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니까 순간순간 변화무상한 것은 변화해서 마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 덩어리나, 또 뒤에 다시 신진대사해서 구성된 세포 덩어리나, 똑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느 때나 언제나 우리 잘 때나 어느 때나 그 신진대사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면 그때는 금생의 목숨은 그만 아닙니까. 이렇게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우리 중생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참말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이 살 필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는가. 참말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심리心裏를 파고들어가서 우리가 찾아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보다 더 잠재적인 깊은 마음을 아뢰아식이라고 그래요.

 

아뢰아식이라. 또 아뢰아식은 그러면 근본이 무엇인가 그렇게 들어가서 보면 그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장 이것은 부처님이란 뜻 아닙니까.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보면 지금 현재에서 이 제한된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 종당에는 부처님이 거기에 꽉 들어있는 거기에 도달하고 만단 말입니다. 여래장은 바로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진여眞如라고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말도 하고, 또는 법계法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는 말도 하고, 또는 실제實際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파고들어가서 파고 들어가면 종당에는 아무것도 없어지는 허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진여불성 이것은 우주의 참생명입니다. 우주의 참생명이 진여불성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지만 진여불성은 바로 여래如來 부처 또는 법성法性 법계法界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그래서 이 진여불성은 그때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이 근본 성질입니다. 우리가 가령 참선參禪을 한다하더라도 그냥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참선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염불念佛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은 우리가 애쓰고 부처님을 외면 우리한테 가피加被를 주시겠지, 이러면 참다운 염불이 되시겠습니까. 우주의 실체가 우주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인지라. 우리가 염불을 하든 화두공안을 참구하든 또는 잠자코 명상을 하든, 우리 마음자리가 항시 진여불성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야 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가 진여불성인데, 진여불성을 떠나서 아주 의심한다고 그래서 참선이 되겠어요. 참선이란 것은 우리 본래면목을 찾는 것인데 말입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말이나 본래면목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래면목을 안 떠나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우리가 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아미타불의 가피가 나한테 와서 나한테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주겠지, 이것은 방편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다운 염불은 아미타불이 바로 내 본래면목이고, 우주가 아미타불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왼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 그렇게 되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불자님들은 기왕이면 단순한 염불뿐만 아니라 염불참선을 하시고 싶겠지요. 염불참선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본래면목자리, 우리 생명의 당체, 생명의 본질자리인 진여불성자리, 불성자리를 놓치지 않고 하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한다하더라도 덮어놓고 무슨 문제를 의심만 죽자고 한다고 해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면목자리, 본래 진여불성자리.... 일체존재의 근본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그 자리에다 항시 마음을 두고 우리가 화두를 의심하고 그래야 이제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묵조선黙照禪에서 명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을 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생명의 실상인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간경看經인 동시에 참선이고 모두가 그 가운데 다 포섭이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은 우리가 철학적으로 범신론, 범신론 사상으로 우리가 투철하게 이른바 우리 사색을 그쪽으로 우리가 포괄을 다 시켜야 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돼 가면 그때는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사실은 원래 진리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안인지라 모두가 똑같은 진리 하나의 그야말로 참 아름다운 진리의 전당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지금 제일 두려운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념적인 대립, 이념적인 대립이 제일 무서운 것인데, 이념적인 대립은 사실은 대립할 건더기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로 해서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대립을 하는 것이지 본래 진리의 자리는 대립이 없습니다. 본래가 다 하나고 또 위대한 선각자들은 다 그런 도리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3세기 때 나온 이집트 태생의 로마의 철학자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는 아주 모범적인 분이고, 서양철학의 어떠한 위대한 신학자들은 대체로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섭렵하고 연구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 우리 불교가운데는 그런 저런 모든 교설이 다 들어있고, 그보다도 플로티노스가 말한 일자一者보다도 훨썩 더 근원적인 즉 말하자면 본래 불성자리, 본래 불성자리는 이것은 꼭 불교만의 불성이 아니라, 불교에서 보면 불성佛性이고 기독교에서 보면 그때는 신성神聖이고 말입니다. 이슬람교에서 보면 그때는 알라의 그런 하나의 근원적인 생명체가 되겠지요.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사상적으로 조금도 마음에 갈등이 없이 부처님의 결정설을 공부하셔서 우리 마음이 항시 인심입명安心立命과 평화스러운 기분으로 행복스럽게 공부해 나아가시도록 하십시다.


* 도량 근처에 핀 꽃 아카시아 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