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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염불,명상음악

[스크랩]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다 그대가 지금 법을 듣는 것은, 그대의 육체가 아니라 그대의 육체를 쓸 수 있는 그것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곧 가고 머무름에 자유롭게 된다. 나의 견처(見處)에서는 꺼릴 법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성스러움을 좋아한다면 성스러움이란 성스럽다는 말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대산에서 문수를 찾지만 이는 잘못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그대들이 문수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그대들 눈앞에 작용하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아니하여 어디에서나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문수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에 차별 없는 빛은 곳곳에서 모두 참된 보현 이며,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수 있으면 이르는 곳마다 해탈이니 이것이 관음이다. 삼매법에서는 이들 셋이 서로 주인과 동반자가 되어서 일시에 나오니, 하나가 곧 셋이요 셋이 곧 하나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있어야 비로소 가르침을 잘 살핀다고 한다. 임제는 말하기를, 살아있는 부처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게 눈 앞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눈 앞에서 작용하는 이것은 바로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이며, 바로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곧 육체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라 고도 한다.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말을 의식적으로 이해 하려고 하면 대단히 불확실한 말이다. 눈 앞에서 작용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또 어디에 있는 무엇이며, 육체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도무지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임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태도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임제의 이 말은 평범한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이 말은 임제 자신이 현재 체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사실을 일상 적인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 까닭은 사람마다 겪어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禪)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의 언급은 동일한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러나 선을 체험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특수한 것을 얻어서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선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마음의 실상(實相)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실상은 동일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면 선을 체험할 수가 있다. 이제 임제가 말하는 살아 있는 부처를 한 번 시험적으로 경험해보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 없이 눈 앞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눈으로 색깔을 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는 것이며, 귀로 소리를 듣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는 것이며, 육체를 움직여 행동을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는 것이며, 머리로 생각을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색깔을 따라가면 다름이 있고, 소리를 따라가면 다름이 있고, 몸의 자세를 따라가면 다름이 있고, 생각의 내용을 따라가면 다름이 있다. 그러면 다름 없는 것은 무엇인가? 색깔이 나타나면 보고 소리가 나타나면 듣고 인연에 따라 몸을 움직 이고 생각을 하는 이것(?)이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는 것 이다. 바로 지금 당신에게 나타나고 있는 반응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 벌써 어긋나 버린다. 알겠는가? - 임제록에서 -
    출처 : 파란 물결
    글쓴이 : 靑 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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