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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삼법인(三法印)

삼법인(三法印)


― 빠알리 경전에 나오는 말씀들 ―


1. 무상(無常, anicca)

무엇이건 생긴 것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다.

   (『중부』 56경)


비구들이여, 물질성[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력[行], 의식[識]은 영구적이고 영속하고 영원하고 불변성이어서 그 어느 것도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것은 없다.

그리고서는 세존께서는 조그만 쇠똥덩이를 집어 들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만큼만이라도 영구적이고 영속하며 영원하고 불변성이어서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개체를 요만큼만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괴로움의 완전한 근절을 위해서 이처럼 이 청정한 생활[梵行]을 거론하는 일이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응부』 22상응, 96경)


여기 한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에서의 생성과 소멸을 다음과 같이 관하고 있다. 즉 “이러한 것이 물질성[色]이고, 이러한 것이 물질성의 발생원인이고, 이러한 것이 그것의 사라짐이다.” (나머지 네 가지 집착의 무더기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고 관한다.) 이러한 정(定)15)을 닦으면 번뇌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장부』 33경)


비구들이여, 형성된 모든 것들[諸行]은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모든 것들은 영속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모든 것들은 진정한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형성된 일체의 것들에 대해 싫증을 내어 그의 욕망이 사라지고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증지부』 7법수, 62경)


자, 비구들이여, 느낌, 지각 그리고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일어남을 알고, 그것들이 지속되고 있으면 그 지속됨을 알고, 사라지면 그 사라짐을 안다. 이러한 정(定)을 닦으면 마음챙김[正念]16)과 분명한 알아차림[正知]17)에 이르게 된다.

(『장부』 33경)


자,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마음을 챙기어[正念]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을 분명히 알아차리며[正知]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제어를 하며 머물고 있는데, 만일 즐거운 느낌이 마음 속에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내 (마음)속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연유가 있기 때문이요, 자생한 것이 아니다. 무엇에 연유한 것인가. 바로 이 몸뚱이18)이다. 그런데 이 몸뚱이는 진실로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어떤 조건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으로 생겨난 이 몸에 기인하여 일어난 이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는가.’ 자,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부지런히 열심히 자기를 잘 제어하며 정념․정지하고 있을 때 만일 이와 같이 몸과 즐거운 느낌을 놓고 무상관(無常觀, aniccā), 괴관(壞觀, vayā), 이욕관(離慾觀, virāgā), 멸관(滅觀, nirodhā), 사리관(捨離觀, paṭinissaggā)을 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비구에게서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갈망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그가 즐겁지 못한 느낌을 관하고 있을 때에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겁지 못한 느낌에 대해 저항19)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관하고 있을 때에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지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20)이 사라진다.

(『상응부』 36상응, 7경)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본래부터 무상한 눈(그 외 다른 감각기관)을 그것이 과연 무상한 것임을 알 때 그는 바른 견해[正見]를 갖춘 것이다.

(『상응부』 35상응, 155경)


비구들이여, 의식[識]은 두 가지에 의존하여 생겨난다.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눈과 눈에 보이는 대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에 의존하여 눈의 의식[眼識]이 생긴다. 그런데 눈은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으로 되어간다. 눈에 보이는 대상도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이 되어간다. 이처럼 잠시 지나가는 유동적인 이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이 되어간다.


‘눈의 의식’도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으로 되어간다. ‘눈의 의식’이 생기게 되는 원인과 조건인 눈과 눈에 보이는 대상이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이 되어가는데 이렇듯 무상한 조건에 연유하여 생겨난 ‘눈의 의식’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이들 세 무상한 것들이 마주치고 합치고 만나는 것을 접촉[觸]이라 부르는데, 눈의 접촉[眼觸]도 역시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으로 되어간다. 무상한 조건에 의지하여 생겨난 ‘눈의 접촉’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은 촉에 의해 접해졌다는 뜻이고 이와 같은 사정은 우리가 어떤 것을 가려내고 그것을 지각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촉에 의해 접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위 느낌이니 가려냄이니 지각이니 하는) 이들 덧없고 찰나에 그치는 법들 역시 무상하고, 변하며, 다른 것으로 되어간다. 그리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개념, 이 짝지어진 것들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상응부』 35상응, 93경)


비구들이여, 거듭거듭 무상에 대한 인식[無常想]을 닦아 이로써 마음을 가득 채운 채 머물고 있는 비구는 이득, 존경, 명성으로부터 물러서고, 거부하고, 돌아서게 되며 결코 그쪽으로 뻗지 않느니, 마치 불 위에 던져진 닭의 날개깃이나 힘줄조각이 오므라들고, 거부하고, 돌아서게 되며 결코 뻗치지 않는 것과 같다.

(『증지부』 7법수, 46경)


‘내가 있다’라는 아만(我慢)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는 무상상을 닦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상상을 닦는 사람에게 무아상이 확고하게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만이 근절될 때 무아상이 세워지고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의 열반이다.

(『감흥어』 4품, 1경)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도 공덕이 크지만, 확고한 신심으로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五戒)를 지닌 공덕은 더욱 크며 (……) 이것도 공덕이 크지만, 미약한 대로 자비의 향기를 한줄기라도 더 피우려 노력하는 공덕은 더 크다. 이것도 공덕이 크지만, 손가락을 한번 퉁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무상상을 닦는 공덕은 보다 더 크다. 

(『증지부』 4법수, 20경)


백 년을 살면서도 생과 멸을 보지 못하느니

단 하루를 살아도 생과 멸을 보는 삶이 낫다.

(『법구경』 113게)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다음의 여섯 가지 이로움이 보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알진대, 형성된 모든 것들[諸行]에 대해서도 거기에 일일이 무상으로 인식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 형성된 모든 것들[諸行]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둘째, 나의 마음이 어떤 세계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셋째, 나의 마음이 모든 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넷째, 나의 마음이 열반을 향해 기울게 될 것이다.

다섯째, 나를 (윤회세계에) 묶어놓고 있는 모든 족쇄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섯째, 가장 높은 사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증지부』 6법수, 102경)


목숨과 몸뚱이

거기다가 괴로움과 즐거움

이 네가지[法]가 뭉치는 건

겨우 한 심찰나(心刹那)21).

그러나 그 찰나도 휙 지나가네.

팔만사천 겁이나 산다는 신들마저

똑같은 상태로는 머물지 못하네.

단 두 심찰나도.

산 자든 죽은 자든 그들의 오온은

한결같이 모두

한번 흩어지면

똑같이는 다시 모이지 않네.

사람은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것이지만

‘한번 의식이 흩어지면 이 세상은 죽은 것이네’

라는 것은 더 할 수 없이 옳은 말이네.

사라진 일도 쌓이지 않고

미래의 일도 축적되지 않는다네.

생겨난 모든 것들은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잠시도 가누어지지 않는다네.

죽어서 사라진 오온이나

생명 있는 자의 오온이나

한번 흩어지면 다시 회복되지 않는 것은

똑 같다네.

저들은 어디서 오는 것도

흩어져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네.

‘마치 하늘의 번개처럼

번쩍 나타났다 사라질 뿐.’

(『청정도론』 20장)


깊숙이 한적한 곳에 들어가

고요한 마음이 된 비구는,

올바른 법[眞理]을 관(觀)하며

이 세상의 것 아닌 기쁨을 누린다.

그가 (다섯) 집착 무더기의

생과 멸을 바로 관할 때

그는 불사(不死)의 경지를 보게 되며

그의 마음은 기쁨과 열락을 누린다.

(『법구경』 373~374게)


형성된 것들은 모두 덧없다.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이 그들의 법

생겼나하면 벌써 사라진다.

생멸을 멈추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장부』 16경)


2. 고 - 불만족성[苦, dukkha]

나는 오로지 이것만을 가르친다.

괴로움[苦],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만을.

(『중부』 22경)


괴로움은 반드시 어떤 것이 일어날 때에만 일어난다.

괴로움은 반드시 어떤 것이 소멸할 때에만 소멸한다.

(『상응부』12상응, 15경)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마음과 몸에 본유(本有)한 괴로움, 변이(變異)로 인한 괴로움, 온(蘊)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아픈 느낌들은 본유의 괴로움[苦苦性, dukkha-dukkhatā]이라 부르는데 이는 괴로움이 그들의 개별적 실재이자 공통의 명칭이며, 그리고 그들의 실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변이의 괴로움[懷苦性, vipariṇāma-dukkhatā]이라 부르니, 이 느낌이 변할 때에는 아픔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무덤덤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三界)의 형성된 모든 것들[諸行]은 온에서 비롯된 괴로움[行苦性, saṅkhāra-dukkhatā]이라 부르는데 그것들은 생멸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6장)


즐거운 느낌은 지속할 동안은 달고, 변할 때는 쓰다. 괴로운 느낌은 지속할 동안은 쓰고, 변할 때는 달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지혜가 있을 때는 달고, 지혜가 없을 때는 쓰다.

(『중부』 44경)


유쾌함을 가장한 불쾌함이

사랑스러움을 가장한 혐오스러움이

행복을 가장한 괴로움이

방심하고 있는 사람을 정복해버린다.


(『감흥어』2품, 8경)


과거에도 감관적 욕망(kāma)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고 뜨겁게 불탔다. 미래에도 또한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어 뜨겁게 불타오를 것이다. 현재도 역시 이것은 괴로운 경험으로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아직도 감관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그에 대한 갈망으로 온통 넋빠져 들뜬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불에 타 망가진 그들의 감관은 그 기능이 흐려져서 괴로움인 감관적 욕망을 접하면서 오히려 기쁨인 줄 착각한다.

(『중부』 75경)


물질성을, 느낌을, 지각을, 형성력을, 의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실은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나는 말한다. 

(『상응부』 22상응, 29경)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의 생성과 지속과 현현은 곧 괴로움의 생성이며, 질병의 지속이며, 늙음과 죽음[老死]의 현현이다.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의 소멸과 정지와 종식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며, 질병의 정지며, 늙음과 죽음의 종식이다.

(『상응부』 22상응, 30경)


비구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헤아릴 수 없다. 무명에 가려진 중생들이 갈애에 속박당하여 윤회의 길을 서두르며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한 시초는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실로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그대들이 이 긴 여로를 서둘러 갈팡질팡 헤매면서, 싫은 것을 만나고 좋은 것과 떨어져서 울며불며 흘린 눈물의 양이 많겠는가, 사대양의 바닷물이 더 많겠는가.


다겁 생을 그대들은 부모와 아들, 딸, 형제자매들의 죽음으로 괴로움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통해 그대들은 진정 이 길고 긴 여로에서 사대양의 바닷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려온 것이다.

그렇듯, 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오래오래 고통을 받고, 불행을 겪고, 죽어서 묻혔다. 이제 그대들은 겪을 대로 겪었으니 형성된 모든 것들에 염오를 느낄 때가, 탐욕을 버릴 때가, 그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상응부』 15상응, 3경)


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오. 어찌 웃음이 있으리오.

세상은 끝없이 타오르고 있는데

암흑[無知]에 싸여있는 그대여.

어찌 등불을 찾지 않느뇨?

보라, 여기 이 꼭두각시를. 겉은 번드레하지만,

온갖 상처로 곪은 (오온의) 퇴적더미

병들고 망상으로 가득 찼을 뿐,

오래 가지도 견고하지도 못하네.

이 몸은 노쇠해진다.

그 속에 병은 둥지를 튼다.

썩은 육신은 마침내 산산이 흩어지니

산다는 것이 겨우 죽기 위해서란 말인가? 

(『법구경』 146~148게)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을 모르고

괴로움이 남김없이 완전히 멈추는 곳도 모르며,

괴로움을 진정시키는 길도 모르는 이들.

그들은 마음의 해탈22)도, 지혜를 통한 해탈23)도

못 이루었기에 끝을 맺지 못한다24).

그들은 실로 태어남과 늙음을 겪는다.

그러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을 알고,

괴로움이 남김없이 완전히 멈추는 곳을 알며

괴로움을 진정시키는 길을 아는 이들.

그들은 마음의 해탈과 지혜를 통한 해탈을

이루었기에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는다.

(『숫따니빠따』 724~727게)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다음의 여섯 가지 이로움이 보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알진대, 아무리 끝없이 마주쳐야 하는 행[諸行]일지라도 거기에 일일이 고(苦)로 인식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 형성된 모든 것들[諸行]을 피하려는 생각이 나에게 확고해질 것이다. 마치 살인자의 빼어든 칼을 피하듯.25)

둘째, 나의 마음은 일체 세간[三界]을 초탈할 것이다.

셋째, 열반에서 참 평화를 보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속에 잠재해 있는 모든 (나쁜) 성향들이 수그러들 것이다.

다섯째,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 낼 것이다.

여섯째, 스승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증지부』 6법수, 103경)


3. 무아(無我, anattā)


비구들이여,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을 놓아 버려라. 그것을 놓는 것이 그대에게 이익과 행복을 오래도록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면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 이것들이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이며, 이것들을 그대는 놓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을 놓는 것이 그대에게 이익과 행복을 오래도록 가져다 줄 것이다.

(『상응부』 22상응, 33경)


여러 방식으로 자아를 생각하고 있는 저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자아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중에 어느 것을 자아로 생각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무지한 범부들은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을 자아라 생각한다. 아니면 자아가 이들 무더기 중의 어느 것을 소유한다고 또는 그 무더기가 자아 속에 포함된다고, 또는 자아가 그 무더기 속에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

(『상응부』 22상응, 47경)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어떤 법[法, dhamma]을 자아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부』 115경)


많이 배워 고귀한 법을 아는 성스러운 성문26)은 선지식의 법에 숙달되어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을 자아로 보지 않는다. 또한 자아가 이들 무더기의 소유자라고도, 또 이들 무더기가 자아 속에 내재한다고도, 또는 자아가 이 무더기 속에 내재한다고도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많이 배운 성스러운 성문은 물질성(그리고 나머지 네 가지)의 결박에 속박당하지 않으며, 안팎의 어떤 결박에도 속박되지 않아 피안을 보고 피안에 이르러, 마침내 괴로움에서 해탈한다고 나는 말하노라.

(『상응부』 22상응, 117경)


비구가 계행이 청정27)하여 다섯 가지 무더기가 무상함을, 괴로움임을, 아픔임을, 종기임을, 화살임을, 병임을, 고뇌임을, 남[他]임을, 궤멸임을, 공(空)임을, 무아(無我)임을 올바로 사유하면 예류과(豫流果)를, 일래과(一來果)를, 불환과(不還果)를,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수 있다.

(『상응부』 22상응, 122경)


누구든 눈이 자신이라고 여겨서는[我慢] 안된다. 자신이 눈 안에 있다고 여겨서도 안되며, 눈 밖에 있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또 ‘눈은 나에게 속한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귀, 코, 혀, 몸 그리고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 자신을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28)과 동일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자신이 그것들 안에 내재한다거나, 밖에 존재한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그들이 나에게 속한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누구든 자신을 눈의 의식[眼識] (……) 귀의 의식[耳識] (……) 코의 의식[鼻識] (……) 혀의 의식[舌識] (……) 몸의 의식[身識] (……) 마음의 의식[意識]과 동일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자신이 의식의 안에 내재한다거나 바깥에 존재한다고 여겨서도 안되며, ‘의식이 나에게 속한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누구든 자신이 모든 것(sabbam)과 동일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자신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거나 바깥에 존재한다고 여겨서도 안되며,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고 여겨서도 안된다.


이처럼 더 이상 착각하지 않는 현명한 제자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어떤 것에도 더이상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그는 불안에 떨지 않는다. 더이상 불안에 떨지 않는 까닭에 그는 그 몸 그대로인 채 모든 아만이 떨어져나간 자리에 이르게 된다.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이제는 없다. 성스러운 삶을 살았고,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다시 이런 윤회의 상태를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깨닫는다. 

(『상응부』 35상응, 90경)


못 배운 범부는 차라리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자아로 대할지언정 마음을 자아로 대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육신은 한 해, 두 해, (……) 아니 백 년도 갈 수 있는데 ‘마음’이니 ‘생각’이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은 밤낮없이 다르게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이다. 

(『상응부』 12상응, 61경)


뜻[意]은 자아가 없다. 뜻의 발생의 원인과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다. 하물며 자아가 없는 것을 통해 생겨난 뜻이 어떻게 자아일 수 있겠는가?   

(『상응부』 35상응, 141경)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다음의 여섯 가지 이로움이 보상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알진대, 모든 것[諸法]에서 거기에 일일이 무아로 인식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 모든 세계로부터 초연해 질 것이다.

둘째, ‘나’란 견해[我慢]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셋째, ‘내 것’이라는 견해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넷째, 특출한 지혜를 골고루 갖추게 될 것이다.

다섯째, (모든 법의) 원인들을 잘 분별하게 될 것이다.

여섯째,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들을 명확히 보게 될 것이다.

(『증지부』 6법수, 104경)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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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인(法印) : 현상계 및 존재의 속성 또는 특질, 정법을 확인하는   표지.

2) 증지부(增支部, Anguttara Nikāya) : 법수에 따라 모은 경집.

3) 〔원주〕연기에 관한 참고 서적 :『연기』(피야다시 스님, The Wheel  No. 15)

4)  상응부(相應部, Saṁyutta Nikāya) : 짧은 경들을 내용별로 모은 경집.

5)  장부(長部, Dīgha Nikāya) : 비교적 장편에 속하는 경들을 모은 경집. 빠알리경은 앞서의 『증지부』, 『상응부』, 『장부』이외에 『중부』와 『소부』가 있어 5부 니까야(Nikāya)로 이루어진다. 『중부』(Majjhima Nikāya)는 중간 길이의 경들을 모은 경집. 『소부』(Khuddaka Nikāya)는 기타 15경집들로 구성되는데, 「법구경」, 「숫따니빠따」, 「감흥어」, 「여시어경」, 「장로게」, 「장로니게」, 「본생경」 등 중요한 경들이 이에 속해 있다.

6) 리스 데이비스(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영국의   언어학자이며 불교학자. 법륜·하나 『부처님, 그 분』 주해 1)

   참조.

7)  물질성 : 色. rūpa. 영어로는 corporeality(유형적 성질), materiality(물질성), form(형상), visible object(가시적 대상), body(몸) 등이 경우에 따라서 쓰이고 있다.

8)  느낌 : 受. vedanā. 영어로는 feeling, sensation 등으로 번역된다.

9)  지각 : 想. saññā. 영어로는 perception으로 많이 쓰인다.

10) 형성력 : 行. saṅkhāra. 번역에 가장 고충을 겪고 있는 낱말 중의 하나이다. formation, volitional effort, 또 특수한 경우란 뜻에서 function으로도 번역되고 있다. 복수로 쓰일 때는 formations 외에 all phenomena라는 말이나 the world of phenomena, all the things of this world 등의 말을 쓰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앞의 본문에서 formations와 dynamic processes 등의 용어를 경우에 따라 구사하고 있는데 후자는 ‘업력(kamma formations)’이란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역문에서는 단수의 경우 ‘형성력’, 복수의 경우는 ‘형성된 모든 것들’ 등의 용어를 썼다.

11) 오취온 : 오온이 범부와 유학(有學)에게는 집착의 대상이 되므로 오취온이라 부르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일체 집착을 여읜 사람에게는 단지 연기․생멸하는 법으로 보일 뿐 집착의 대상이 아니되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른다.

12) 이 기본요소를 사대(四大)라 한다. 이는 물질성을 구성하는 고체[地]·액체[水]·열기[火]·기체[風]의 네 성질을 말한다.



13) 〔원주〕무아에 관한 참고 서적 : 『베단타와 불교』(글라스넵 지음, The Wheel No. 2),  『무아와 열반』(냐냐뽀니까 스님 지음, The Wheel No. 11)

13) 유신론(有神論) : 변화․생멸하는 세계를 초월한 인격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

14) 범신론(汎神論) : 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입장.

16)〔원주〕 ‘아나따’의 사용상의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의 세가지 주요한 법문』의 「라카나 경」(냐나몰리 스님 번역 The Wheel No. 17) 참조.

15) 정(定, samādhi) : 영어로는 absorption 등이 쓰이다가 concentra-

    tion으로 통일되고 있다. 삼매, 집중, 선정 등으로 옮기고 있다.

16) 마음챙김[念, sati] : 영어로는 mindfulness로 통일되어 가고 있다. 우리말에서는 아직 자리잡은 낱말이 없다.

17) 충분한 알아차림(sampajaññā) : 한문에서는 正知, 正智, 正心 등으로 옮기고 있으며 영어로는 full awareness, self possession, attention 등 구구하다

18) 여기서 몸은 육처 가운데 안․이․비․설․신, 오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 저항(paṭigha) : 법륜․열둘 『염수경』 주30) 참조.

20) 무지하려는 잠재성향[無明使, avijjā-anusaya] : 무지한 채로 있거나 더 무지해지려는 무의식적 성향.

21) 심찰나 : 인식 과정에 작용하는 미세한 기능이 소요하는 시간. 대단히 짧은 시간으로 번개섬광의 10억분의 1보다도 짧은 시간.  보리수잎․여섯 『불교의 명상』 주14) 참조.

22) 마음의 해탈 : 심해탈(ceto-vimutti). 고요한 마음[止]을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

23) 지혜를 통한 해탈 : 혜해탈(慧解脫)(paññā-vimutti). 통찰지[觀]를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

24) 끝맺다 : 생사윤회를 끝맺다. 즉 해탈하다.

25) 원문은 ‘제행에서 열반상을 확립할 것이다. 마치 도부수의 빼어든 칼을 보고 거기에서 열반상을 세우듯이’로 되어 있다.

26) 성문(聲聞) :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27) 계행의 청정 : 계율을 올바로 지키며 생활하고 정진하는 것.

28) 법(法) :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개념 내지 상태. 행보다 더 넓은 뜻으로 일체 유위와 무위의 세계를 다 포용하는 말.


(사) 고요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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