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사상. 10. 문답식.
"소나여, 어찌 생각하느냐? 색(물질)은 불변하는 것이겠느냐, 변화
하는 것이겠느냐?"
"대덕이시여,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는 내 것이
다. 이는 나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相應部經典] 22:49 輪屢那. 漢譯同本, [雜阿含經] 1:30 輪屢那)
상응부경전 륜루나 한역동본 잡아함경 륜루나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갔다. 그런 몇 가지 보
기를 앞에서도 든 바가 있거니와, 나는 이 문제와 관련시켜 붓다에 대
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생각한다. 왜냐 하면 이런 문답에는 지혜의
스승으로 붓다의 면목이 참으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점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는 것 같
다. 예수는 별로 문답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아 놓아 "저것이냐 이것이냐."의 선택을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의 문답 같은 것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런 때에
도 예수는 역시 의연한 자세로 자기의 소신 그대로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에 비하여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을 설법 방식으로 썼을 뿐 아니
라, 그 문답도 대개의 경우는 꽤 긴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하겠
다. 그런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하여 스스로 어떤 결론
에 이르게 하곤 하였다. 앞에 나왔던 문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바차라는 외도가 열반에 관해 빗나간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불을 비
유로들어 문답을 거듭하는 중에 어느 덧 열반의 개념에까지 이끌어 들
였던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맹렬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목적을
실현하지 못해서 비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거
문고를 비유로 들어 문답을 시작했다.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뜯었다는
그 비구는 거문고와 관계되는 일에 대해 붓다가 묻는 것에 대답해 가다
가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中道)의 이념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
이다. 그런 문답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볼 때, 여러가지면에
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흔히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그런 칭호는 그대로 붓다에
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신념을
생기게 하고, 또 실천을 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이었
던 까닭에 소크라테스처럼 붓다도 그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자주
문답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 문답에 대해 우리는 몇가지 실례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약간 특수한 문답을 보기로 들어 놓았다. 이 장
(章)의 첫머리에 소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문답의 상대는 앞서 거문고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소
나이거니와, 붓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
다. [상응부 경전]이나 한역의 [잡아함경]을 조사해 보면, 몇십 회에
걸쳐 같은 양식의 문답이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서 되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는 같은 문답 양식을 자주 제자들에게 적용시켰는데,
그럼으로써 일종의 '교리 문답'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 문답식은 얼른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
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붓다는 어떤 때에는 설법에 곁들여 그 자리
에 있는 비구에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이제부
터 좌선하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려는 비구에게 그런 질문을 하여 대
답을 하게 한 일도 있다. 그 제재(題材)는 때로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이기도 했다. 즉 색(물질, 육체). 수(감각), 상(표상),
해(의지), 식(의식)에 관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육처(감각 기관)
를 다루기도 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그 대상에 관한 문
제였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이를테면 네 눈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
한 것이냐고 물었으며, 또 네 눈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
냐고 따졌던 것이다. 또 앞에 인용한 문답같이 네 색(육체)은 영원이냐
무상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붓다의 질문에 대해 경이 전하는 한에
서는 어느 비구나 다 거기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당
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물음에는 누구라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사고 방식은 붓
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것을 고쳐 생각
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주장한 '삼법인(三法印)'또
는 '사법인'이다. 법인(dharma-uddana)이란 바른 법의 표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불교가 그 밖의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섭송
(攝頌), 즉 짧은 운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역에 의해 표
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 제행 무상(諸行無常)
2) 제법 무아(諸法無我)
3) 열반 적정(涅槃寂靜)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다. 여기에 다시
4) 일체 개고(一切皆苦)
를 추가해서 사법인이라고 일컫는 수도 있다. 후세에서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설명하는 경우, 흔히 이 삼법인이나 사
법인을 들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터이며, 그렇게 유명해진 만큼 이 삼법
인 또는 사법인으로 나타난 불교 파악은 아주 요령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제행 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
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바, 그것을 단적
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 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법 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
하는 것은 제 1 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제행 무상'의 존
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
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 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 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
다. 그래서 일체 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
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
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의 문답
에서 사용되었던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과 앞에서 설명한 사제의 체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의 체계란 붓다가
그 가르침의 뼈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주 제자들에게 역설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사실이 또 그러해서 이것
을 알고 이것만 실천한다면, 붓다의 제자로서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할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밖의 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번거롭
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제법은 어
디까지나 실천의 체계이므로, 적어도 그 표면에는 붓다의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나타나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그 체계의 밑바닥에
깔려있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사
상의 체계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되는바, 그것이
무상 - 고 - 무아의 사상 계열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제 1 항목은 존제에 대한 해석이요, 제 2 항목은 인생을 해석한
결론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인간 해석에 대한 붓다의 주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세 불교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삼법
인 또는 사법인의 주장은 이런 붓다의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라
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을 상대로 문답한 이 내용
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 것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문답에 또 하나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붓다가 이런
문답식을 자주 응용 문제의 형태로 비구들에게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를테면 어느 경([상응부 경전] 22:151 아)은 이런 문답을 전해주
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집착함으로 말미암
아, 무엇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내가 있다는 생각)은 일어나겠느
냐?"
현명한 독자는 곧 이해하실 줄 믿거니와, 이 질문은 무상 - 고 - 무
아의 문답식을 거꾸로 하여 대답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저 문
답식에서는 거침 없이 대답하던 비구들도 이 응용 문제에는 반드시 그
렇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비슷한 질문의 보기가 몇 가지 나
와 있으나, 거기서도 그들은 대답이 막혀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
였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우리 법의 근본이시며, 우리 법의 안목이
십니다. 원컨대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설하시옵소서."
이것이 답변에 막힌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청할 때에 말하는 유형화
된 표현이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청에 따라 해답을 설해 주었다.
"비구들아, 색(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색에 집착함으로 말미
암아, 색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나느니라. 또 수(감각)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표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행(의지)이 있음
으로 말미암아, 식(의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집착하고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난다고 알아야 되느니라."
이렇게 설한 붓다는 다시 한 번 그 문답식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묻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겠느냐,
무상 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무상하나이다."
이리해서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답식이 반복되어 갔다. 이 문답식
이 되면 제자들은 막히는 일이 없이 아주 잘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문답식을 평소에 배워 익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런 문
답식 교육은 이 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외고 있어서, 붓다가 물을 때에는 언제나 "이
는 고(苦)이다." , "이는 고의 발생이다." , "이는 고의 멸진이다." ,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문답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한 학자가 없는 듯하다.
주의해서 잘 읽어 보면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진면목은 이런 곳
에 도리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듯하다.
"아함경이야기"의 다음 이야기는 <<착한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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