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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49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11

                 <제 49 호>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11

(Pure Zen Peace of Mind Cultivate Dharma Meeting)

1995년1월22일 삼보사  (三 寶 寺 : Sam Bo Sa) 


19. 삼종사선(三種邪禪)


 우리는 지금 가장 큰 일을 위해 모였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 즉 가장 큰 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을 당한다던지 기타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 일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세간적(世間的)인 큰 일인 것이고 정작 큰 일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해탈의 문제, 비단 지금 금생뿐이 아니라 영생 불멸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고 이른바 업보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뱅뱅도는 그런 지겨운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일이야말로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것은 그 대사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사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 개(開)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悟)자, 들 입(入)자입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 문제는 또 무엇인가? 하는 가르침을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아의 상실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로 보면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증명(證明)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겠지만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 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여실하게 개시오입이라,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번 시간에 말씀했던 참선(參禪)입니다. “선(禪)” 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참선을 해야 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은 할 수 없다하더라도  한 번이라도 안 다음에는 꼭 참선을 해야합니다.

참선, 그러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들을 보통 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가 결코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 것인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도 제일 편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跏趺坐)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안주부동(安住不動)해서 가장동요가 없는 자세란 말입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지도론에도 보면 “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극(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極)” 이라, 가부좌 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도 잘 안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도 건전하고 건강도 그에 따라서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밋트를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밋트 그것도 역시 심심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추의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2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 그 분 말씀에 “마왕견지 기심수포(魔王見之 其心愁怖)”라, 마왕들이 이 모습만 봐도 두려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자세 가운데 망상도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을 하고, 바른 관념을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색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권위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우선 가부좌한 모습 자체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고,

우리 마음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마는 우리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제법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고 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

설사 자기 인연 따라서 가부좌 하는 모습을 못취한다 하더라도 사업도 해야 되고 장사도 해야 되고 우리가 고객도 만나야 되고 그런 처지에 있는 그런 가운데서는 참선은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참선은 어느 때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육조단경에 보면은 “내 법은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는다.” 성자의 법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본체를 떠나서 자기 배운 대로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이, 갑은 갑대로 느끼고 을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겠지요.

배운대로 느낀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충돌하고 노동자나 사용자도 역시 자기 배운대로 느낀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한 것이 본체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해서 귀결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귀일일심원(歸一一心圓이라,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디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 되고 있어요. 저번에 고베의 대지진 때 신문을 보니까 그 고난 중에도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보다 앞서 구출 될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만은 그 사람들은 불교가 몸에 배여 있어서 남이 보나 안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라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광명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아버리면 곧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하나님이라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이 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은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교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 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의 지도 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각기 성자들도 다 동향성은 비슷한 말씀은 했으나 그래도 적어도 체계적으로 통일원리를 말씀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이끌어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은  우리 불교밖에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참선은 그러한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것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바로 따라가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軌道)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살기가 참 편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니까.

우주의 도리란 무엇인가? 바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생명입니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에 따르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신 방편법문도 있지만 방편법문도 종국적으로는 본체로 돌아가는 법문입니다.

그러나 참선만큼은 바로 직설(直說)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부처다,

따라서 모든 여러 가지 사설을 다 배제하고서 그냥 바로 직통으로 우주의 진리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그래서 여러방법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외도인들이 하는 그것은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듯 하지만 그들은 인과도 믿지 않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하는 정도로 하나의 유위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은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돼야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것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 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는 것이 생활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근본도리에만 따라 살면 남하고도 틀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고 또는 국가간이나 민족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앞서 말씀과 같이 일체 존재는 뿌리가 하나고 또 현상적으로 달리 모양을 냈다 하더라도 달리 나와 있는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의 현상적인 고유한 것도 없고 다만 현상적인 전변 무상한 것에 불과하고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굳건히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그냥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좌역선(坐亦禪)이고 횡역선(橫亦禪)이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아니해서 그럽니다.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젼 같은 것에 정신을 팔고 잠이들면 잠 잘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 몇 시간을 자도 몸만 피곤하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요, 일체존재의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이 든다고 생각 할 때는 잠자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으로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 들에서 논에 물꼬를 낼 때에 물꼬를 내는대로 물이 흘러 가듯이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자는 그 순간에 마음의 코스를 부처님한테로 고정 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 면에서 다 편안하고 잠잘 때도 편합니다.

 이 참선 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에서(중국, 일본, 한국 등)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법입니다. 저 다른 나라에서 하는 법도 부처님 법은 법이지만 그것은 동남아 불교나 소승불교 ‘본래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런 식으로 그네들은 말을 않습니다. 공부해서 꾸벅꾸벅 올라가는 식으로 말 합니다. 그게 나뿐 것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이 시원스럽지는 않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말은 석가모니만 이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리워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가장 동양권에서 발달된 대승선법이란 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사(邪)자, 고요할 선(禪)자입니다. 참선을 해 가는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이런 것도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참선은 선방에서 앉아서 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던지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가 있을 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뭣꼬’ 화두만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체자리에  생명의 실상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부르나 ‘이뭣꼬’를 하나 ‘옴마니 반메훔’을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着)하지 않고 조사에도 착(着)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이요, 어두울 암자 증명할 증자 암증선이고,

그리고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들야(野)자, 여우호(狐)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소리 치면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스님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옥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은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 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 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길도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지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法力)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 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 불자들도 하루 다섯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뱃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원력(願力)을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바구라존자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 승려가 된 뒤에 한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번도 앓아 누운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하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끼만 먹고도 무병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광파(光波)도 초속이 30만km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무한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데도 우리 중생은 자꾸만 의심을 합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만치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은 “그렇구나, 그렇구나”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 속에서도 문득 풀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一久月深)으로 생각하면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한 때 꿈을 꾸었는데, 도륜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스런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 때 당시는 삼십대도 미처 못된 나이라 분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空)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난해한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백억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백억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해 있는 것이고 꼭 자기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잡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3가지 삿된 선 암증선, 공부도 않고서 엉뚱하니 자기 경계을 높이 평가하고 모르면 좋은 것도 굳다고 하겠지요.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어떤 때는 정당한 상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을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도 경계를 해야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되면 자기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한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그것은 잘못된 스승이 이끌면 그리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지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증명(證明)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20.  선(禪)의 삼종병(三種病)


  ○ 선(禪)의 삼종병(三種病) :

                    미도주작(未到走作),

                    이도주착(已到住着),

                    투탈무의(透脫無依)

  

 선(禪)의 삼종병(三種病)이라, 선에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미처 이루지 못하고 너무나 성급하게 이럴까 저럴까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다해서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루 빨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분심(奮心)은 좋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는 별로 않고 기분만 앞서서 빨리 도인 행세하고 싶고 남 앞에 나서고 싶어서 서둘러서 가는 것을 미도주작이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만 가뿝니다.

 참선할 때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도 조용해 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중요한 상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또 호흡이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도 초기에는 중생을 제도 할 때에 부정관(不淨觀)이라, 우리 몸뚱아리는 모두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죽으면 썩어서 문드러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것뿐이다, 우리가 죄업을 짓는 원인은 대체로 자기 몸뚱이를 금쪽같이 아끼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이렇게 부정하고 더러운 몸뚱이를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이 모다 더러운 것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입나다.

 그런 관법(觀法)이 있고 또 한가지는 호흡관(呼吸觀)이 있습니다. 호흡수를 헤아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렇게 해가면서 참선을 하는 것인데 호흡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의 요가수트라 같은 것은 주로 호흡법을 수행으로 하는 방법인데, 결국 참선하는 자세를 올곧게 만드는 행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은 마음이 산란스러워 참선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참선하기 전에 얼마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호흡을 고르게 할려면은 되도록 숨을 느리게 쉬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서 될 수록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쉬어야 합니다. 또는 유식(留息)이라해서 호흡을 오래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호흡이 저 아래 단전까지 쑥 들어가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호흡도 점점 느려져서 차근차근 참선이 익어지면 그 때는 자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흡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 호흡이 끊어질 정도로 숨결의 고요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지식(止息)이라, 지식(止息)이 되어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호흡은 우리 마음의 상황 따라서 그것에 상응된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자기 인연 따라서 해야 되지만 잘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몇 분 동안을 자기 호흡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추수리는 것이 하나의 방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해야 합니다.

 다음이 이도주착(已到住着)이라, 공부가 무던히 되어서 재미가 붙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아는 것도 그 전보다 훨씬 명석해지고 그 만족감에 이만하면 되었다싶어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도인의 경지가 아닌데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지면 그만 그 자리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합니다.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투탈무의(透脫無依)라, 투탈무의는 아무 것에도 의지 할 바 없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고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너무나 공(空)사상에 젖어서 모두가 다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다 우주라는 것은 본래가 다 공인 것이거니 이와 같이 공으로만 치우치고 다른 것에는 조금도 의지를 두지 않는 것이 투탈무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가지 참선병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19950122-순선안심탁마법회-삼보사-청화대선사설법

*19950122-자훈 박병섭, 법인성, 동선스님-촬영

*19980905-마음의고향19집에 편집발간-광무 정환담,

                          본정 김영동, 주안 한동일

*20050519-DVD동영상작업-본정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