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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미타행자의 편지

삶과 죽음

 


공동묘지를 산책하면서 한 묘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어른 분이 4.3사태(1948년) 직전에 입도(入道:제주에 왔다는 제주식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난리 통에(4.3사태) 두 아들을 잃은 것으로 되어있고 1950년에 돌아 가시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험한 시절에 무슨 인연으로 제주도에 넘어와서 멀쩡한 아들을 둘이나 난리에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파겠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다고 그 어른께서는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50년이면 제주에 광풍(狂風)이 가시기도 전에 아마 홧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면서 묘비를 읽는 제자신도 가슴이 찡합니다.


제주 4.3사태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것으로 시작하여 무리한 진압과 항거의 반복으로 1948년 4.3일 제주전역의 무장봉기 일어났고 그 후로도 무모(無謀)한 토벌작전으로 많은 양민피해를 내면서 50년 예비검속을 거처 공식적으로 토벌작전을 끝낸 것이 1954년 9월 까지 7여년 만에 끝난 난리입니다.


당시 30만 제주 인구에 희생인원이 3만이다 5만이다 7만이다 설이 있습니다. 소수의 좌우이념대립이 다수의 민초가 희생된 것입니다 그 시절은 젊은이들이 목숨부지하기가 힘든 시절 이였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은 남자 한사람 남고 다 죽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발은 신발을 신고 한발은 벗고 머리는 풀어버리고 오물 주워 먹으면서 미치광이 노릇하다 밤중에 일본으로 밀항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일시에 많은 사망은 제주의 문화와 사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시절의 민초가 겪은 고통은 누가 알겠습니까?

역사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바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조그마한 성의 천도재를 모실 적에는 꼭 4.3사태희생영가를 망축하고 있습니다. 

공업(共業)으로 이루어진 비극(悲劇) 내일 모래가 4월3일 아 그러나 돌이켜보면 태어남도 일대사 인연이며 돌아감도 일대사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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