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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5. 참선(參禪)의 장애(障碍) <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견혹(見惑)과 사혹(思惑)



이러한 열 가지 번뇌 가운데서, 탐심, 진심, 치심, 아만심, 의심의 다섯가지 번뇌를 오둔사(五鈍使)라, 다섯 가지 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이것은 끊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공부를 애쓰고 해서, 갓 도인(道人)이 된다 하더라도, 이 다섯 가지 번뇌는 다는 못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 아만심이나 의심 이런 번뇌의 거치러운 것은 끊어버린다 하더라도, 그 뿌리, 번뇌의 종자는 잘못 끊어버립니다. 우리가 도통(道通)한 뒤에도 오랫동안 닦아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렇게 빨리 몰록해서 못 끊어버리고 둔하게 끊으니까 오둔사(五鈍使)라 이름합니다.


따라서 사혹(思惑)이라, 생각 생각에 생각을 많이 하고 관념도 하고 또는 염불도 많이 하고 화두도 많이 들고 이와 같이 해서 오랫동안 끊어야 하기 때문에 사혹이라는 말도 합니다.


또는 수혹(修惑)이라, 닦고 닦아서 끊으니까 수혹이라고도 이름합니다.


또는 사혹(事惑)이라, 현상계의 모든 것이 그런 번뇌에 걸려 따르는 수가 많으니까 사혹이란 말도 씁니다.


이같이 제가 여러 말씀을 괜히 드리는 것 같습니다마는, 혹시 이것저것 이런 술어가 나오면 서로 혼동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번뇌는 떼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오둔사(五鈍使)라,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거쳐서 둔하게 끊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요 또는 사혹(思惑)이라, 생각을 오래 해서 많은 생각 끝에 비로소 끊어진다는 말 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런 것은 빨리 끊어집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우리 본성 품인 불성(佛性), 법성(法性)을 볼 때에, 그냥 순간에 다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견도(見道)는 우리 본 성품 즉, 진리를 보고서 깨닫는다는 말이고 수도(修道)는 견도한 뒤에 성불까지 가는 과정에서 닦는 것을 수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적으로 수도라 하면 곧장 닦아도 수도라고 합니다마는 엄밀히 개념을 구분해 보면, 견성(見性)한 뒤에 닦는 공부가 수도입니다.


그런데, 오둔사(五鈍使)는 번뇌를 끊기가 하도 어려우니까 견도(見道) 할 때, 즉 말하자면 우리가 도통할 때, 그 당시나 또는 성불하기까지 사뭇 애쓰고 끊어야 하지만 그러나 뒤에 든, 내 몸이라는 신견, 또는 내 몸이 항상 있다든가 끊어졌다든가 하는 변견, 또는 인과를 믿지 않는 삿된 견해, 견취견, 계금취견, 이런 것은 이치에 관한 번뇌이기 때문에, 소위 이론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견도위(見道位)에서 돈단(頓斷)이라, 견성오도(見性悟道)할 때 문득 다 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빨리 끊을 수 있다고 해서 오리사(五利使)라 합니다. 그야말로 아주 빨리, 별로 힘 안 들고 끊는다고 해서 리사(利使)라는 말을 쓰지요. 그러나 이것은 견성한 사람에 한해서인 것이지 일반 사람들이야 어려운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아무튼, 빨리 끊는다고 해서 오리사(五利使)라, 또는 돈단(頓斷)이라, 이런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섯 가지, 이것은 이론적인 견해에 따른 번뇌니까 견혹(見惑)이라는 말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와 같은 근본번뇌만은 외워 두고서 그때그때 자기 스스로 행동할 때나 생각할 때에 '이것이 무슨 번뇌구나' 하고 구분하면서 번뇌를 떼어야 하겠습니다.


간추리면,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마음 치심(痴心)은 삼독심(三毒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연시키면, 탐심, 진심, 치심, 아만심(我慢心), 의심(疑心), 또는 자기 몸에 대해서 내가 있다 하는 고집(我見), 또는 내 소유물에 대한 고집(我所見)인 신견(身見), 그 다음에는 내 몸뚱이가 금생과 내생에 있다는 고집(常見)이나 내 몸뚱이가 금생만 있고 끊어져 버린다는 고집(斷見)인 변견(邊見), 그 다음에는 인과를 부정하는 고집인 사견(邪見), 그 다음에는 별로 신통치 않은 견해를 좋다고 고집하는 견취견(見取見), 그 다음에는 해탈이나 또는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아닌데도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것을 지키는 고집인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런 것이 근본번뇌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생활하는 가운데 거의 태반이 이와 같은 번뇌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 완성을 부인하고 또는 영생의 행복을 부인한다면 이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기어코 영생한다 기어코 무한의 행복을 맛본다 기어코 최상의 인격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싫으나 좋으나 이 열 가지 번뇌는 항시 기억해 가면서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