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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6. 정통선의 향훈

1.참선의 바른길 <수행(修行)의 단계(段階)>

 


● 수행(修行)의 단계(段階)


수행의 단계로는 어려운 것도 많이 있습니다만 제일 간명(簡明)한 것이 사도(四道)입니다.

맨 처음에는 가행도(加行道)라,

우리는 지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고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의 별명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평소에 하던 공부를, 우리 수행을 더욱더 가속도로 증장시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은 원래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가행도(加行道)는 평소에 하는 공부에다 조금 더 우리 힘을 가해서 정진력을 더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행정진을 하게 되는 셈 이지요.


가행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행도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간도(無間道)가 옵니다. 가행도를 잘못 하면 무간도가 안 오겠지요.


무간도(無間道)는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부처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사이 없이 쭉 이어간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분명히 딴 생각은 전혀 안 나오는 무간도가 옵니다. 오직 부처님 생각으로, 천지우주가 하나로 딱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내 몸도 비고 천지가 비었다는 공관(空觀)을 억지로 안 해도 자기 몸은 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간도가 되면 자기 몸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이 터럭 하나의 무게도 없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직 가행도를 애쓰고 나감으로써 그런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간도를 거치면 필연적으로 우리 본 자성(本自性)이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그때는 해탈도(解脫道)라, 불성을 견증(見證)하는 것입니다. 찬란스러운 내 본생명의 고장, 내 마음의 고향, 내 생명의 본 주인공을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해탈도(解脫道)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벌써 업장을 다 벗어버리고 좋다, 궂다, 사랑한다, 밉다하는 것을 다 떠나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합니다. 불성을 보고 도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경지(究竟地) 성불(成佛)은 못됩니다. 비록 우리가 불성을 봤다 하더라도 아직은 습관성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성 곧 번뇌의 뿌리, 그것을 뽑으려면 또 승진도(勝進道)라, 해탈도에 입각해서 더욱 더 정진을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보임수행(保任修行)을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을 본 것을 잘 지키면서 또,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니까 잘 닦고 닦으면 그때는 드디어 번뇌의 종자가 다, 뿌리가 뽑혀서 완전무결한 성불인 대각(大覺)의 자리가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행도, 무간도, 해탈도, 승진도 이것이 사도(四道)입니다.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상삼매 일행삼매라, 천지우주가 하나의 부처덩어리인 것이요 천지우주는 실은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간격이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이 공부하다가 자꾸만 되풀이해야 합니다. 우주는 간격이 없는, 틈이 없는 하나의 부처뿐입니다. 단지 중생이 잘못 봐서 간격을 세우고 구분을 세우고 차별을 세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佛性)이라, 하나의 맛이고 평등한 불성뿐이라는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일미평등의 불성 곧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인 불성임을 잘못 보는 것이 무명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실상(實相)자리, 실상묘유(實相妙有)자리, 우리 마음의 고향자리, 영원의 자기 주인공자리, 이 자리를 지켜서 일행삼매로서 가행정진을 해가지고서, 다시 다른 생각이 끼일 수 없도록 까지 무간도(無間道)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간도에 들어가야 정말로 행복을 느낍니다. 무간도만 들어가면 마치 저 열반(涅槃)에서 불어오는 맑은 청풍(淸風)이 자기를 엄습하는 그런 상쾌함과 표현할 수 없는 희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락지(喜樂地)요 또는 환희지(歡喜地)입니다.


무간도를 거쳐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 행복은 더 가증(加增)됩니다. 무간도만 들어가면 그때는 이제 순교(殉敎)나 생사(生死)에 대해서 자재(自在)로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