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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마음의 고향

제 15 집 2.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마음의 고향 제 15 집


*1995년 5월28일 광주 금륜회에서 청화 큰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합동 영가천도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이때 큰스님께서 설하신 법어입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1]


광주가 제 태생은 아닙니다.

저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광주에서 자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광주 사범(師範)을 졸업했기 때문에 광주는 고향이나 다름없이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또 20대에 승려가 된 뒤에도 주로 광주권에서 많이 지냈습니다. 시내에서도 몇 년을 지냈고 주변에서도 지냈기 때문에 광주는 고향 같은 그러한 깊은 친밀한 인연이 있습니다.

오늘 이 금륜회 법회에서 다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감회가 한량없이 깊습니다. 대단히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몇 가지 개념적인 정리를 하지 않으면 부처님 공부를 하면서도 부처님 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정도(正道)입니다. 정도는 우주 본연(本然)의 도리에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그러한 가르침이 이른바 정도입니다. 그런 정도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성자(聖者)들은 다 한 결같이 정도를 밟으신 분들입니다.

가령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497), 소크라테스(Sokrates BC 470∼399), 플라톤(Platon BC 427∼347), 아리스토텔레서(Aristoteles BC 384∼322), 또는 공자(孔子 BC 552∼497), 노자(老子 BC 4∼5세기), 석가(釋迦 BC 560∼480), 예수(Jesus BC 4∼) 그러한 분들은 위대한 철인(哲人)인 동시에 성자이기 때문에 우주 본연의 진리에 맞추어서 그 진리를 깨닫고 진리대로 생활을 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다 정도를 걸었습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를 불자님들 가운데는 구분을 잘 못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명확히 개념적으로 구분해 두시기 위해서 그런 쪽에다 역점을 두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


외도 가운데도 부처님 법이 아닌 외도는 확실히 알 수가 있는데,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붙을 부(附)자, 불법에 붙어서 외도 짓을 한단 말입니다.

더러는 출가(出家)하기도 하고, 또는 출가를 하지 않은 재가(在家) 불자들 중에 아주 독실한 행동을 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외도의 마음을 가지고 외도 짓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합니다.

불법에 붙어서 외도 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구분하셔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서 부처님 법에 대한 차원 문제, 즉 어떠한 것이 낮은 차원이고 어떠한 것이 깊은 차원인가?

어떠한 것이 가장 확실한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방편(方便)이 아닌 진실한 가르침인가? 요즈음 같이 혼탁한 세상에는 이러한 구분을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 법에 붙어서 모양은 불교인 같이 행세를 하지만 외도 짓을 하는 이른바 사이비 불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간법(世間法)

불법은 그 깊고 옅은 차이를 통상 세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세간법(世間法) 차원이라, 세간법은 우리 중생들이 상대적(相對的)으로 보고, 느끼고 하는 범부(凡夫)들의 견해에 걸 맞는 그런 부처님 법(法)입니다.

가정(家庭)이 있으면 부모 자식이 있고, 부부가 있고, 또 주관적으로 내가 있으면 객관적으로 남이 있단 말입니다.

선(善)이 있으면 악(惡)이 있고, 마치 음(陰)과 양(陽)이 있듯이 말입니다.

모든 문제를 상대적으로 이해하고 풀려고 하는, 즉 우리 인간 존재가 느끼고 판단하는 그런 범위 내에 있는 불법 이것이 세간적인 불법입니다.

사실 세간적인 불법은 부처님 법이 아니더라도 익힐 수가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다른 가르침에도 세간적인 것은 있습니다. 윤리(倫理)나 과학(科學)이나 우리 상식(常識)이나 그런 것은 모두가 세간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 세간적인 차원에서 그쳐버리면, 가령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좋은 것은 좋고 궂은 것은 궂고, 누가 비위에 거슬린 행동을 했을 때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하고 제재를 가해야 되는 것이지 그대로 용납을 할 수가 없다.

이런 것은 모두가 세간법입니다. 법률(法律), 경제학(經濟學) 그런 것은 모두가 세간법입니다.

그러나 세간법이 부처님 법의 전부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와 같이 얄팍한 법이 아닙니다.


소승법(小乘法)

그 다음에는 소승법(小乘法)이라, 소승법은 세간법 보다는 더 깊습니다. 인간 세상을 정말 분석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떠나서 부처님 법은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인연이라는 것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잡아함경(雜阿含經)에 "인연을 알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알면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연을 모르면 사실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인연은 앞서 언뜻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내가 있으면 네가 있고, 또 인간이 있으면 인간과 더불어서 그 주변 환경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보는 견해이기 때문에 사실 인연으로 따져서 보면 고유한 존재는 어느 것도 없습니다.

지금 자기라 할지라도 과거 전생(前生)에 업(業)을 지어서 그 하나의 정신 영체(靈體)가 있었겠지요.

그 영체가 부모님의 인연 따라서 금생(今生)에 태어났단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영체 또는 현세의 부모님의 그런 인연만이 지금의 자기를 있게 한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공기 그리고 모든 영양물질 이런 인연들이 복합적으로 갖추어져서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인연은 부모님 아닙니까마는 어머님을 떠나고 아버님을 떠나고 자기 존재가 있게 한 이러한 모든 인연들을 다 떠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는 없어져 버린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라는 것도 불교식으로 말하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땅기운(地氣), 물기운(水氣), 불기운(火氣), 바람기운(風氣), 이른바 질량, 수분, 온도, 동력 이런 것들이 화합해서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에서 온도를 몽땅 빼내버리면 그냥 주검이 오지 않습니까.

하여튼 우리 몸뚱이 자체가 어느 한 조건을 잃어버리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전생에 지었던 그 업(業)의 소질 위에다 금생에 태어나서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그런 것을 더해서 자기 마음이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그런 것들을 다 해체해 버리면 자기 마음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있게 한 인연이 함수관계를 깊게 생각해 보면 고유한 자기 존재는 없어져 버립니다.

보통 우리 중생들은 내 몸은 분명히 내 것이고, 다른 사람 것이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가정의 가장이 되고, 주부가 되어 놓으면 가족들을 자기 소유같이 많이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인연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선 직접적인 인연은 그렇다 하더라도 간접 인연까지 따진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독립된 고유한 자기는 없습니다.

요즈음 카오스(Chaos) 이론에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다행히도 부처님 법을 차근차근 지금 현대 물리학이 밝혀가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기쁘게 환영을 합니다.

그 나비효과는 나비 한 마리가 영국의 어느 시골 꽃밭에서 공기를 살랑거리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다음 달 한국의 서울에 폭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그 먼 나라에 있는 나비 한 마리, 그야말로 가벼운 동작 하나가 지금 우리하고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으로는 부모나 가족들하고 관계가 있고, 또 우리 주변 사람들하고만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음식이나 물이나 주변에 있는 국토나 이런 것들하고만 관계가 있다. 이것을 떠나면 내가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확장을 시켜서 생각을 한다면 저 미국이나 영국에 있는 그 나비 한 마리 또는 새 한 마리, 그 쪽의 기상관계, 그 쪽 사람들의 생각 하나까지도 모두가 다 내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불교의 어려운 말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緣起法)이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얽히고설키고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의 관계성(關係性)위에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것도 관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나 그대가 존재하는 것이나 또는 나무 하나 성장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 전체하고 다 관련성(關聯性)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말로 하면 이 우주 자체가 이른바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란 말입니다. 내 몸뚱이만 유기체(有機體)가 아니라 또 동물이나 식물만 유기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가 다 관계성 때문에 관계의 고리로 얽히고설킨 하나의 유기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을 할 때 현상적인 모든 존재는 항상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무상(無常)하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여서 모두가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어려운 불교술어로 말하면 전변무상(轉變無常)이라, 항시 움직이고 변해서 마지않는다는 것입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2]


내 몸을 구성한 그런 세포라든가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이나 어떠한 것이나 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는 전변무상의 허무(虛無)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현대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굉장히 불안스럽습니다. 자기 자신도 불안스럽고,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삶의 장차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불확실하고 불안스러운 것이 우리 생활이고 따라서 인생고해(人生苦海)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불안하지 않으면 좋을 것인데 왜 불안할 것인가? 우리 인간 존재라는 것이 너무나 모든 조건이 만족되어서 좋아버리면, 부모님 덕택으로 아무런 고생도 않고 운수가 좋아서 쪽쪽 좋은 직장이 생기고 행복스럽게 잘 살아버리면 그때는 불안스런 마음이 별로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은 성숙(成熟)을 못합니다. 성장(成長)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상(無常)이라 하는 우리 인간에 있어서 필연적인 알아야 할 무상이란 도리를 몰라버립니다.

무상이란 도리를 몰라 버리면 이기심(利己心)만 강해져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이웃 사회나 국가나 인류의 고통스러운 문제는 조금도 헤아리지를 못해버립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상한 존재가 아닌가. 내가 지금 젊다 하더라도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곧 늙어질 것이 아닌가. 지금 죽는 사람과 더불어 나도 어느 땐가는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닌가.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 가운데 등불같이 오늘 꺼질지 내일 꺼질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이 무상을 느끼면 무게가 있어지고 그만큼 인생에 대해서 깊이 음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행은 옅게 보면 고통만 주는 것이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이 되지만 우리 인간을 성숙시키는 차원에서 볼 때는 꼭 불행은 있어야 됩니다.

불행이 있음으로 해서 소중한 무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무상(無常)이라 하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없을 무(無)자, 항상 상(常)자 아닙니까.

따라서 무상 이것은 이 우주 시공(時空) 안에 조금도 같은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항상(恒常) 되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또 같은 존재도 역시 어느 순간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현실적인 의식주(衣食住)에 너무나 골몰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 생명이 흘러가는 것을 잘 파악을 못합니다.

이른바 과학은 인간이 존재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아닙니까. 과학의 기초인 물리학으로 관찰할 때도 나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도 같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상 이것은 모든 존재를 바로 정확히 관찰할 때는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오늘 나는 똑 같은 사람이 아닌가?

내일도 똑 같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데서 우리가 함부로 해지는 것이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진다고 바르게 알면 허튼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세포는 순간순간, 찰나, 찰나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공간적(空間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일점의 시간에 일정한 존재가 거기에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느 공간을 사실은 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한 것은 따지고 보면 공(空)이다. 느낄 수가 없으므로 공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무상하고 움직이어서 마지않고, 항상 한 것은 조금도 없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이것은 비어 있다, 공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불교 부처님 가르침을 말할 때에 무상(無常)을 말하고 또는 공(空)을 말하고

무아(無我)를 말하지 못하면 부처님 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운다고 하면서 그저 상식적으로, 세간적으로 또는 속세적으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와 같이만 생각한다고 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불법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상을 모르고 공을 모르고 또는 무아를 모를 때는 이것은 부처님 법에 붙어 있으면서 외도 짓을 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불법을 올바르게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서에서도 "그대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는 볼 수 없느니라"

하느님 이것은 부처님의 법신불(法身佛)이나 같은 차원에서 해석하면 됩니다. 우주의 진리가 참다운 하느님입니다.

인도(印度)의 성웅(聖雄) 간디(Gandhi 1869∼1948)같은 분도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일부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도 그런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불법(佛法) 자체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잘못 믿는 불교인(佛敎人)은 싫어할 수가 있습니다.

그네들이 부처님 법을 바르게 믿고 부처님을 닮아가려고 부처님 법을 닦으면 좋을 것인데 그렇지 않고서 엉뚱하게 세간적인 생각으로 부처님 법을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코란(Koran)에도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대로 따른다고 생각을 할 때는 가정도 평화스럽고 단체와 단체끼리도 또는 국내는 물론 국제간도 항시 화해하고 화평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코란에 쓰여 있는 대로 이슬람교도들이 믿지를 아니한단 말입니다.

종교 인구는 나날이 불어가지만 세상은 나날이 험악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겉으로만 믿고 사실은 진리에 따르지 않는 외도 짓거리, 외도(外道)는 진리에 벗어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첫째 무상을 좀 알아야 됩니다.

무상을 알아야 허튼 짓을 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가령 하나의 감투를 놓고 생각해 본다고 합시다. 누구나가 감투를 싫어할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감투가 있으면 권력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따르고 숭배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감투가 사람 수만큼이나 많으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사람 수는 많고 감투가 적다고 생각을 할 때는 필연적으로 무시무시한 경합이 따른단 말입니다.

경합이 따를 때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친구지간도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또 거기에 따르는 낭비라든지 불화합스러운 분위기라든가 이루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이 귀중한 시간에 그런 말씀을 일일이 다 하기를 싫어합니다.

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한 감투나 권력이 우리 인간의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파고 들어가 볼수록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가 감투 때문에 자기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습니까. 공자가 그러했겠습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나 예수나 공자가 산 길이 가장 바른 길입니다.

바른 길이라는 것은 우리가 언뜻 생각할 때에 재미도 없고 우리한테 별로 행복을 주지 않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참다운 행복은 바른 길에만 있습니다.

참다운 진리(眞理), 참다운 평등(平等), 참다운 평화(平和)는 오직 진리와 더불어서 만이 있습니다.

검은 것을 검다고 해야지 검은 것을 희다고 우겨 놓으면 그때는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존재나 모두가 다 무상인데 무상하지 않다 이렇게 우기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머지않아서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은 무상하므로 늙어지고 아파지고 죽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고, 무상하므로 사실은 나라고 할 것도 없는 무아(無我)고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란 말입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3]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렇기 때문에 이 세간적인 것을 바르게 따지고 따져서 인과적으로 볼 때는

누구나가 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상하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 무상한 것을 있다고 생각해서 취하려고 할 때는 고통스럽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고(苦)란 말입니다.

무상한 것은 의례 것 무상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달관(達觀)하고 통찰하면 우리가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인데, 무상한 것을 있다고 고집할 때는 우리한테 고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본래는 무상(無常)한 것이므로 공(空)이고, 나라고 할 것도 없는 이른바 무아(無我)인데, 그 자기(自己)를 고집(固執)하고, 집안에서도 보면 아버지는 부권(父權)만을 행사 하려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모권(母權)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정당한 행사는 응당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권위의식(權威意識)으로 행사한다고 생각할 때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진리를 벗어나서 세속적인 관념으로 권리를 부린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젊은 사람들은 꾀 영리하므로 승복을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여러 가지 패륜아(悖倫兒)들이 생겨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진리대로 행동을 못해서 그럽니다.

우리 기성세대들도 부처님 법이나 예수의 바이블이나 공자의 법이나 그런 법, 진리대로 생활을 못해서 그럽니다.

그 명심보감(明心寶鑑)이나 논어(論語)도 굉장히 위대한 저술입니다. 공자의 말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군자(君子)는 성인지미(成人之美)하고 불성인지악(不成人之惡)하나니 소인(小人)은 반시(反是)니라.'

군자는 위대한 훌륭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남녀 구분 없이 훌륭한 사람은 다 군자입니다. 군자는 남의 좋은 일은 도와서 이루게 하고, 남의 나쁜 일은 좋은 쪽으로 선도(善導)하니라,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다. 항시 다른 사람들을 허방에 떨어트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은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대인들은 남의 단점을 안보고 장점을 봅니다.

장점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장점을 볼 것인가?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장점이 있습니다. 정말로 진정한 장점 모든 사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처님입니다.

어떤 사람을 참말로 잘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을 부처님 같이 보아야 그 사람을 참말로 바르게 잘 보는 것입니다.

본래가 다 부처님인데 어떻게 장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숭배 안 할까 봐, 자기를 인정하지 않을까 봐서 몹시 자기 과시를 많이 합니다. 뽐내고 그 별짓도 다하지 않습니까. 꾸미기도 하고 말입니다.

또 명심보감에 '유사(有麝)에 자연향(自然香)이니 하필(何必)이면 당풍입(當風立)잇고’, 즉 사향(麝香)을 가졌으면 저절로 향기가 날 것인데 어찌 반드시 바람 부는데 서서 향기가 풍기기를 바랄 것인가

사향은 그야말로 좋은 향기가 풍기는 훌륭한 향료가 아니겠습니까. 사향을 우리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하면 자연적으로 향기가 풍겨날 것인데 하필 바람 앞에서야 향기가 날것인가?

대체로 짐작이 되시겠습니다마는 정직한 사람, 또는 양심이 바른 사람, 항시 남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남한테 베풀고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숭배를 받으려고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숭배하고 눈에 안 보이는 귀신이나 신장들도 다 숭배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어떠한 과학보다도 더 정밀하기도 하고 확실한 과학입니다.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제법은 무상이고 모든 것은 항상이 없이 항시 변화해서 마지않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본래로 공이고 나라고 할 것도 없다.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고 이렇게 느껴야 불법의 입문(入門)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되어버리면 너무나 허무하단 말입니다.

살맛이 없고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이고 공이고 나라할 것도 없는데, 무슨 우리가 살 필요가 있는가? 그렁저렁 마음 따라서 이제 내키는 대로 먹고 놀다가 죽으면 그만이 아닌가? 이른바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정도가 이제 소승(小乘)입니다. 무상만 느끼고 공만 느끼고 무아만 느끼면 이른바 과학적으로만 따질 때는 결국은 소승입니다. 현대 과학도 소승의 범주를 못 벗어나 있습니다. 아무리 생산을 많이 해서 소비를 많이 해 보아도 그걸로 해서는 마음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좋은 이성을 많이 접촉하고 별 짓 다 해보고 감투를 제 아무리 많이 써 보아도 세간적인 그걸로 해서는 절대로 우리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대승법(大乘法)

부처님 법은 소승에도 그치지 않고 대승(大乘)이라, 바로 불승(佛乘)입니다.

바로 모두가 부처님이 되는 법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무상이고 무아고 공일망정 성자가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나, 너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우주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고, 다 텅텅 비어 있지만 그 공 자리, 공의 정체(正體)는 무엇인가? 공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공은 다만 공이 아니라 그 불성(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진리만 공덕(萬功德)을 갖춘 우주의 참다운 진리인 그 부처님 성품 불성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른바 일불승(一佛乘), 모두가 다 부처님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시고자 하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인생은 고다. 인생은 무상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이런 것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우리 중생들이 잘못 보는 것을 객관적으로 털어 버리기 위한 하나의 길목인 것이고 참다운 불법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어느 것도 가림 없이 부처님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나 그런 분들은 가사 자기 부모님을 살해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라 하더라도 원수같이 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성자의 눈에는 원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자의 눈은 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다행히도 세상이 차근차근 좋은 세상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운동(生命運動)이라. 아주 재주 있는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운동을 지금 하는데 생명의 정체(正體)가 무엇인가? 잘 모르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 본질을 가장 확실하게 깨달은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서 보통 "생명이 위대하다. 생명이 소중하다."

이렇게만 소박하게 느끼고 하는 생명운동은 소승적인 상대유한한 과학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일불승의 참다운 생명운동은 못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우리가 뚫어지게 달관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공이고, 무상이고, 무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의 정체, 그 허무하지만 허무하지 않는 생명 자체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라고 그러는 것이고, 또는 하나의 명이기 때문에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대승(大乘)도 불승(佛乘)도 모두가 다 그 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법을 판단할 때도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기라는 것에 항시 집착(執着)을 하고 자기 이기심(利己心)만 부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요즈음 부모한테 효도(孝道)하라 하니까 다른 부모한테는 패(敗)가 되든 말든 자기 부모만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은 참다운 효도가 못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따라서, 진리에 맡게끔 절제 있게 효도를 하여야 참다운 효도입니다.

따라서 세간법으로만 따지는 그러한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또 허망 무상하다 하는 소승 쪽으로만 불교를 믿어서도 안 됩니다. 소승을 가리켜서 패근(敗根)이라, 패할 패(敗)자, 뿌리 근(根)자, 본래로 우리 중생의 실상(實相)이 부처인지라 어느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당위적으로 꼭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생(一生)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지금 인간 세상에서 인간 수련 도장에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든 모르든 간에 다 그러는 것입니다.

고생 많이 하면 고생 많은 걸로 해서 보다 더 과거에 지었던 업(業)을 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살이 모두가 허망 무상한 것이 아닌가?

무상하고 공이고 무아이므로 허무하지 않는가?

이렇게만 느낀다고 생각을 할 때는 이것을 가리켜서 불교 대승에서는 패근이라, 부처님 될 종자를 없애버린다는 말입니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정부도 부정하고 다 부정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은 결국 성불을 하여야 할 것인데 성불을 못하게 만들므로 패근이라. 못된 근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객관적으로 공을 느끼고 무상을 느끼고 무아를 느낀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버러지 말고서 꼭 생명의 실상, 내 생명의 근본 참 모습인 동시에 우주 모두의 근본 모습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 바로 부처님이란 것을 철두철미 믿고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4]


성불(成佛)의 방법론

이렇게 느껴서 불타관(佛陀觀)을 확립하시고 부처님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그 부처가 되는 문제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로 종파가 많지 않습니까?

한국도 50종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던히 우리 중생들 분별시비(分別是非)가 많은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부처님 되는 공부를 가장 좋은 길로 밟아야 할 것인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것을 진지하게 연구를 해가면서 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가 부처가 될 것인가? 각기 종파마다 자기가 하는 방법이 제일 옳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 내에도 자고로 여러 가지 논쟁이 심했던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좀 있어 보니까 미국은 세계 종교 박람회 같은 그런 곳이기 때문에 같은 불교도 저 동남아(東南亞) 불교, 티베트(Tibet)불교, 인도(印度) 불교, 일본(日本) 불교, 중국(中國) 불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관찰을 해보니 상당히 그것들이 비교가 되어서 도움을 많이 얻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가, 지금 한국불교만 해도 50종파가 넘는다 하더라도 결국 한국 불교의 핵심이 세계 불교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70이 다 된 사람이 국내 어느 토굴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인데 구태여 시차 문제도 있는 것인데 갔다 왔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한국 불교만이 참다운 불법의 그런 정수라고 생각이 되고, 또 미국 사람들 역시 꼭 한국 불교를 믿어야 그 사람들이 정말로 참다웁게 일등국으로 해서 오랫동안 발전되어가고 세계평화(世界平和)에도 기여하리라 이렇게 생각이 되기 때문에 저는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은 다른 나라 불교는 그 종파성 때문에 상당히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일본 불교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일본 일련종 계통은 상당히 세력이 강합니다. 일련종 하나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한국 불교 전체보다도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런 종파들이 일본에도 많이 있는데 그 중 진종은 염불종인데 진종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절 수가 1만 5천 개가 넘습니다.

거기에 따른 신도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양적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도저히 미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승려 생활이나 도덕적인 행동을 잘못해서 그러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단 말입니다.

티베트 스님들이나 스리랑카 스님들이나 그런 스님들은 철저하니 승려생활도 참 잘합니다. 그런데 그네들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을 믿는데 있어서 꼭 일불승(一佛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런 식으로 잘 믿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어렴풋이 아시는 분도 많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생활도 못할 뿐만이 아니라 그네들이 이루어 놓은 종교적인 사상체계도 역시 그렇게 뚜렷하게 확실하게 제대로 말씀을 못해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네들의 종교 생활이 애매모호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도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달라이라마」성왕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누구나 숭배하는 린포체 출신 아닙니까. 린포체는 과거 전생에 도인(道人)의 후신(後身)으로서 꼬마 시절부터 성왕의 한 후계자 대접을 받는 사람입니다.

저번에 한국에서도 그 어린 린포체를 모셔다 숭앙하고 그럽디다만 저는 그런 것을 별로 좋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린포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 각자 중요한 위대한 다 본래에서 보면 부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의 위대한 도인의 후신일는지, 예수의 후신일는지, 공자의 후신일는지 누가 압니까.

어느 특수한 누구만 딱 골라 가지고서 그 사람만 어려서부터 왕자 같이 그렇게 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회 균등한 교육을 시켜서 부처를 만들면 되는 것이지 어느 특수한 사람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또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지도 안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 제도 자체를 안 좋아합니다. 부처님 법대로 지키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지금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비방하고 비판하고자 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불교가 얼마만큼 위대한가 이런 것을 내세우고 우리 한국불교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서 공부를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라(新羅) 원효(元曉 617 - 686), 의상(義湘 625 - 702), 원광(圓光 ? - 630)대사, 고려(高麗) 대각(大覺 1055 - 1101), 보조(普照 1158 - 1210)국사, 지공(指空 ? - 1363), 나옹(懶翁 1320 -1376), 태고(太古 1301 - 1382)대사, 이조(李朝) 서산(西山 1520 - 1604), 사명(四溟)대사 줄줄이 이어지는 정통 도인들 그런 도인들은 조금도 안 치우치게 시리 부처님 공부를 다 했습니다.

그 분들은 어디에 조금도 안 치우쳤습니다. 참선(參禪)에만 치우친 것도 아니고, 염불(念佛)에만, 화두(話頭)에만, 또는 송주(頌呪)에만 치우친 것도 아닙니다.

불법 자체가 모두 일체존재의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불법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듣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큰 진리는 원래 문이 없단 말입니다. 동쪽 문이나 서쪽 문이나 사방팔방으로 문이 있어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 가운데까지 갈 수가 있겠지요.

조그만 한 어설픈 가르침이 되어야 이것이고 저것이고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지 천지 우주가 바로 불법인데 무엇만 좋고 무엇만 좋지 않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진리에 맞지 않는 '이것만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것은 결국은 참다운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그 일불승이라,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실상적으로 참모습을 본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부처님의 진수를 말씀하신 것이고 맛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만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가령 우리가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화두라는 것은 이른바 천칠백 공안(公案)이라, 그때그때 도인들이 우리한테 그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우리 참다운 생명이 무엇인가? 이런데 따라서 그때그때 방편으로 제시가 되었습니다.

「이뭣고」화두나 「무(無)」자 화두나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 근본, 자리 우리 생명의 본질 자리를 가리키고자 해서 이런 자리를 문제시해서 우리 마음의 나쁜 버릇을 없애고 부처가 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해서 그런 화두가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선행적으로 일체 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여야 화두도 참다운 화두가 됩니다.

가령 우리가 「옴마니반메훔」같은 주문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냥 덮어놓고서 주문만 외워도 공덕은 있습니다. 그런 음(音)이라는 것도 천지 우주의 부처님에 따른 음률(音律)이기 때문에 음만 외도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고 마음이 부처님한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 자리, 천지 우주,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어느 것도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느끼면서 「옴마니반메훔」을 하여야 참다운 주문(呪文)공부가 되고 그렇게 하면 「옴마니반메훔」을 하여도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염불(念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지장보살」 이름만 외워도 공덕(功德)은 됩니다. 왜 공덕이 되는가 하면 부처님 명호(名號)라 하는 것은 명체불이(名體不二)라, 그 이름과 공덕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는 이름과 그 본체, 근본정신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부처님의 무한의 공덕이 거기에 묻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외이면 외우는 만큼 우리 업장(業障)은 녹아지고 우리 마음은 더욱더 맑아지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단순한 주문이고 단순한 염불은 돼도 참선은 못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선행적으로 우리 마음이 헤아림이 없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천지우주를 오직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생명으로 딱 결정(結晶)을 시켜버려야, 그래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가운데는 참선 설법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고, 여러분들도 많은 책들을 보시고 참선 공부를 하실 것입니다.

참선 이것은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방편이 아닌 진리 그대로의 가르침, 진리 그대로의 수행법(修行法)이 참선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분별시비 하지 않고서 헤아림이 없이 오직 생명 자체, 우리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모든 생명의 근본 자리인 부처님한테 가서 우리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하여야, 그래야 참선입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5]


화두에는 「똥 마른 막대기」화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은 거룩한 것이고, 똥이나 그런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과 구분되는 마음도 이것이 불심이 아닙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우리 중생, 인간 존재가 보아서 더러운 것이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는 모든 것을 근본자리에서 봅니다. 근본, 본래에서 보는 것입니다. 근본 성품에서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나 똑 같이 일체가 불성(佛性)이고 진여(眞如)이고 진리(眞理)고 또는 부처님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그 근본 자리에서 보면 똥 마른 막대기도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운문(雲門 ? ∼949)스님한테 「여하시불」잇고? 부처가 무엇입니까? 묻는 사람은 부처님은 거룩하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마음에서 차별하는 마음에서 물었겠지요.

운문스님이 '똥 마른 막대기다' 제일 더러운 것을 하필이면 성스러운 부처님에 대해서 묻는데 대답을 내놓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대승적으로 어느 것이나 부처 아님이 없다. 또는 저한테도 여러분들께도 또 귀가 닳도록 까지 많이 들으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부처같이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분명 그렇고 대승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부처님께서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많이 듣는다 하더라도 사실 경계를 대하면 미운 사람 미워지고 좋은 사람 좋아진단 말입니다. 우리 공부는 그러므로 하는 것입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먼저 믿고 해석을 하고 또 실천하고 증명하고 부처님 법은 항시 네 가지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한 번에 물론 거치는 분도 있지만 보통은 점차로 거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믿음으로 해서, 어느 종교나 믿음이 없으면 신앙이 안 됩니다. 신시보장(信是寶藏)이라, 믿음 이것은 정말로 보배 같은 법입니다. 바로 믿으면 자기 마음도 편하고 행동도 바르게 유도가 되는 것인데, 바로 믿지 못하면 도덕적인 행동도 못 따르는 것이고 우리 마음도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바로 믿는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간적인 믿음이 아니고 또는 소승적인 허망한 믿음도 아니고 부처님께서 보신대로, 부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할 때는 닦은 뒤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모두가 본래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는 지금 잘 못나고 옹졸하므로 부처가 아니겠지? 이것은 우리 중생이 판단하는 자기입니다.

그러나 나 같이 못난 이 사람도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성자의 맑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너나, 나나, 도둑놈이나, 누구나 다 똑같이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겉은 버릇을 잘 못 들여서 도둑놈이 되고 무엇이 되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 알맹이는, 본 성품은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성자(聖者)는 본 성품에서 따지는 것이고, 중생(衆生)은 겉만 보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도 확실히 해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 범부들은 겉만 보고서 선악 시비를 가릅니다. 겉은 참말로 허망한 것입니다. 겉은 무상하고, 공이고, 무아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무상한 것을 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인 것을 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본래로 본다고 생각하면 무아인 것인데 나 라 할 것도 없는 것인데 나는 실존적으로 내가 존재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괴롭단 말입니다.

무아(無我)에 대해서는 어려우므로 제가 예를 한 가지 들어서 '내가 없다'는 소식에 대해서 보다 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질(物質)은 분석하면 다 원자(原子)가 됩니다.

또 어떤 원자나 분석하면 전자나 양성자 같은 소립자가 됩니다. 그 소립자들은 또 쿼크(quarks)같은 초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 역시 분석하면 에너지(energy)의 작용(作用)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원자를 분석해 보면 결국은 에너지의 활동만, 정기(精氣)만 남는 것이지 물질은 남지가 않습니다.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그런 조그마한 알맹이를 지금 현대 물리학자들이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 운동(運動)을 알려고 하면 위치(位置)를 잘 알 수 없고, 또 위치를 알려고 하면 그 운동(運動)을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이젠베르크(W. K. Heinsenberg 1901 ∼ ?)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입니다.

일체 존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소립자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인슈타인」의 훌륭한 제자인 「하이젠베르크」같은 분도 불확정성의 원리라, 모두가 불확실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를 분석해 보면 무엇인가 확실히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에너지의 하나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에너지는 물질이 아닙니다. 우주의 정기란 말입니다. 우주라 하는 것은 에너지로부터 이 은하계가 생기고 태양계가 생기고 지구가 생기고 달이 생기고 다 그랬던 것입니다.

지구가 생긴 다음에 우리 중생이 나오고 말입니다. 나중에 오랫동안 몇100억년 지나가면 천지 우주는 파괴되어서 다시 텅텅 비어 버리는 에너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자가 증명을 합니다.

우리 지구도 역시 이대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약 150억 년 전쯤 생겨나서 이와 같이 흘러 왔단 말입니다.

장차는 다시 이것이 차근차근 쓰레기가 축적되어서 이른바 엔트로피(entropies)라, 다시 활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차근차근 축적되어서 드디어는 다 불타버려서 우주가 텅텅 비어 버린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자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몸을 구성한 것이나 다이아몬드를 구성한 것이나 금을 구성한 것이나 모두가 다 소립자라 하는 물질인가 무엇인가 모르는 그러한 에너지의 진동(振動)이 적당히 결합되고 보태고 보태져서 이러한 내 몸도 되고 다른 것도 되었단 말입니다.

본래 근본이 비었거니 아무리 결합되고 보태고 보태도 내내야 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항시 저는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공(空), 제로(zero)를 몇 번 보태나, 곱하나, 제로는 제로 아닙니까, 공은 공 아닙니까?

그와 똑 같이 에너지라 하는 물질이 아닌 것이 어떻게 진동해서 모양은 사람 같은 모양으로, 금 같은 모양으로, 다이아몬드 같은 모양으로 되었다 하더라도 내내야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이치로 말씀드려도 잘 모르신 분들은 실감이 안 나겠지요.

나는 분명히 나고, 내 모습 잘 꾸미기 위해서 양복도 기왕이면 값이 비싼 것으로 입고 반지도 몇 개나 끼고 그래야 할 것인데 그런 귀중한 내 몸 더러 '공이다' 그래버리면 참 살 맛이 안 나고 그렇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물리학자가 객관적으로 증명한 것이므로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점차 하여 가시면서 마음에 맞는 공부 방법을 딱 추슬러서 공부를 잘 해 가시면 차근차근 60키로가 되던 자기 몸뚱이가 50키로도 못되고, 또 더욱 분발하여서 공부를 더해 가시면 40키로도 못되고 말입니다.

공부가 익어지면 그때는 아! 이 몸뚱이가 있는가, 없는가 짐작을 못한단 말입니다.

드디어는 몸뚱이가 공중에 뜬 기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이라고 하드만 정말로 공이구나 확신을 하시는 것입니다.

도인들같이 참다웁게 욕심(慾心)을 다 끊어버린 사람들은, 욕심의 뿌리까지 뽑아버린 사람들은 정말로 몸이 하늘로 공중에 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충분히 뜰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해서 정말로 참다운 도인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삼명육통 가운데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자기 몸뚱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그 장작더미로 자기 몸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뚱이 가운데서 삼매(三昧)의 불을 내서 몸뚱이를 태운 분도 한 두 분이 아닙니다.

그 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가운데 계시는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생명(生命)을 최선으로 살리는 길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나 삼명육통을 한 도인들이나 지금 우리가 호리불차(豪釐不差)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의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參禪)을 꼭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들은 참선을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참선을 안 하니 열등감이 생기겠지요. 그리고 나는 선방(禪房)에도 못 가는데 어떻게 참선을 할 것인가? 이렇게 걱정을 마십시오. 참선은 꼭 선방에 가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도 제가 언뜻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부처님인데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딱 붙이고 그 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방에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모양은 그럴싸한데 마음은 이것저것 상대적인 생각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선도 아니고 불법도 아닙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6]


참선(參禪)과 실상관(實相觀)

우리 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자기 직업적인 생활을 어떻게 하던지 간에, 가사 누워서나 앉아서나 부엌에서나 또는 어느 점포에서 장사를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그 자리를 강인한 의지로 떠나지 않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는 것이나 또는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하마 부질없는 허망한 것 때문에 분별시비(分別是非)를 할까보아서 우리 마음을 딱 모아서 생명 자체에다 우리 마음을 귀일(歸一)을 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생명자체 불심을 지향해서 우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백 번 천 번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지장보살」도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 실상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다니면서 보면 참 딱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꼭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 미륵존불만 해야 만이 공(功)이 많다. 이렇게 편협하게 말하시는 분도 있고, 어느 분들은 특히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들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 일본 말투로 하면 「나무묘호우렌게교」라 이렇게 해야 만이 공부가 된다. 그래야 만이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다. 이렇게 고집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보고 불교에서는 법집(法執)이라. 자기 법만을 집착한단 말입니다. 천지 만법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떻게 꼭 한 법만 옳고 다른 법은 아닐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범부 때는 귀가 얄팍해서 좀 재주 있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법문을 하면 거기에 쏠려갑니다. 절대로 거기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법인데, 우주가 바로 부처님 덩어리인데 어떻게 해서 어느 한 가지 이름만 좋고, 가령「지장보살」을 하면 좋고 「관세음보살」을 하면 별 공덕이 없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오랫동안 하신 분에게도 그것을 그만두고 요즈음 많이들 하는 지장보살을 염하라. 불법을 어떻게 믿고 그러는가 저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분산된 것을 모두 통합해서 원융하게 하나의 것으로 뭉쳐야 할 때란 말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부처님 품안으로 우리가 안아 들일 때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선전하는 그런 세계화도 참다운 세계화라는 것은 흩어진 진리를 하나로 모아서 참다운 진리로 뭉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화해(和解)가 됩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후기 산업사회에 와서는 국경은 무너지고 맙니다. 경제적인 면도 국경이 무너지는데 하물며 진리의 본가에서 마땅히 국경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이나 공자,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똑 같은 우주의 진리입니다. 어느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設)이 있습니다.

그 시대, 그 상황, 그 사람에 따라서 맞는 법문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의 방편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가운데서 방편설을 떠나서 알맹이만 간추려 가지고 지금 하나가 될 때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어느 부처님은 공덕이 더 많고 어느 것은 공덕이 낮다. 또 신장기도만을 모셔야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불자님들 꼭 깊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꼭 정다웁게 부처님 공부만 믿으셔서 외도를 닦지 마시고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모양은 불교인 같은 모양을 하지만 사이비 불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공덕이 없습니다.

자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명상(名相)을 떠나있다.

부처님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어떠한 이름이 본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생명 자리에서 공덕(功德) 따라서 잠시간 이름이 붙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총체적인 총 대명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또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고 말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나 천상세계로 인도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러는 것이지 따로 따로 뿔뿔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때는 원시종교(原始宗敎)란 말입니다.

'명상(名相)을 떠난다' 하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름 명(名)자, 서로 상(相)자 말입니다. 진리는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름과 상을 못 떠나면 이것은 범부(凡夫)입니다. 소승도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인데 하물며 불법의 그런 정수인 대승을 믿는 분들은 꼭 허망한 이름과 상을 떠나야 됩니다.

금강경(金剛經)의 핵심도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상이 있으면 범부고 상이 없으면 성자입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했으면 되겠단 말입니다. 세상은 바쁘고 또 이름이 달라지면 사람들끼리도 서로서로 마음이 갈라질 수가 있겠지요.

기독교는 다행히 '오, 주여!' 한 분을 하므로 좋은데 불교는 너무나도 이름이 많으므로 가르치는 분마다 자기 개성 따라서 가르치므로 혼란이 온단 말입니다.

현명하신 여러분들은 잘 판단하셔서 될수록 그런 쪽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기도를 모신다고 기도가 적게 되겠습니까? 공이 적겠습니까?

참선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참선을 해야 그래야 바른 불자가 됩니다.

참선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소재가 우리 마음이 부처님! 부처님이라 하는 생명의 실상, 생명의 그 본질에 머물러서 다른 허튼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참선입니다.

제 아무리 모양 좋게 한 철 선방에 가서 공부해서 공부 잘했다. 이렇게 돼도 분별시비하고 자기라는 것에 걸리면이것은 참선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한 가지 의심을 품으실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해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고, 아내는 아내가 되어야 더 정이 있고 남편은 남편이 되어야 할 것인데 다 부처님 같이 보아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인가?

또는 사업도 해야 되고, 별일 다 해야 될 것인데 그래버리면 무엇이 될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으실 것입니다만 사실은 그 사실을 사실대로 보아버려야 훨씬 좋습니다.

자기 아내한테도 부처님 같이 대한다고 생각할 때는 절도 있게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고 말입니다. 절도 있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아들한테나 누구한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들을 자기 소유물같이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아들을 부처님같이 대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들을 사랑하지 말라 해도 누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아들같이 사랑하면서 아들이면서 부처님이란 말씀입니다. 아내는 아내이면서 부처님이란 말씀입니다. 이렇게 현상은 비록 아내고 남편이지만 그러나 본바탕은 다 부처님이 아닌가.

사업을 하나 또는 같이 정당(政黨)을 하나 말입니다. 정치를 하나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 상대편이 대립적으로 우리 인연 따라서 내가 되고 네가 되었다 하더라도 겉은 그렇지만 참다운 알맹이는 똑같은 부처님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인간관계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제일 좋은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절대로 고통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사실은 성불(成佛)하는 길이 항시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생각이 무엇인가? 가장 위대한 분이 누구인가?

또는 우리 생명의 근본 고향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주의 법도에 우주의 질서에 바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내가 없는 것인데 나는 나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해도 무방하다. 이런 때는 벌써 우주의 도리에 벗나갑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남한테 베풀 때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비양심적인 짓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은 그만큼 불안하고 어두워집니다. 그 얼굴도 어두워집니다. 남한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 때에 그 얼굴은 벌써 그 표정도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에 따르는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건강을 위해서나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과 화해를 위해서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나 어느 분야로 보아도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 일체존재는 한 생명체 [7]


현대는 인간성(人間性)의 부재(不在)라,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또는 가치관의 부재다. 이런 말씀을 누구나가 다 쓰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것이 참다운 인간성일까?

어떠한 것이 참다운 가치관일까?

이렇게 반문해 들어가면 확답을 잘못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부처님 인생관, 부처님 가르침 같은 참다운 인간관, 부처님 가르침 같은 참다운 진리에 따르는 가치관, 이것만 제대로 선다고 생각할 때는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최선으로 바르게 발달이 됩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낸다 하더라도 '아!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바람소리나 물소리나 다 부처님 법문 아님이 없다'.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깨달은 때도 역시 '산의 모습은 부처님 법신, 부처님의 몸 아님이 없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소리 아님이 없다.' 이렇게 느꼈단 말입니다.

소동파같은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여러분들 한번 해보십시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을 수만 번 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고요해 옵니다. 그래서 자기 집 근처에 시냇물이 흘러가면 그 시냇물 소리가 틀림없이 염불소리로 들려옵니다.

비록 시냇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냥 바람소리가 들려와도 그 바람 소리가 그 신묘한 음악소리로 들려옵니다.

그런 바람소리나 물소리나 좋은 소리뿐만 아니라 나쁜 소음도 공부가 되어 놓으면 그 나쁜 소음공해까지도 정화가 되어서 아주 신묘한 멜로디로 우리한테 들려옵니다.

행복(幸福)으로 가는 길은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무수한 성자(聖者)들이 순교(殉敎)도 하고 또는 무수한 성자가 신명을 바치고서 우리 인간한테 탄탄대로(坦坦大路)를 열어주신 성불의 길, 성자가 되는 길, 그 길 이외는 절대로 참다운 행복,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화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을 다했습니다. 검증(檢證)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부처가 되고 성자가 되는 길이 굉장한 어려운 길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지금 몸이 어디가 아프신 분도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정말로 여러분들께서 내 생명의 본 성품은 모든 것을 갖춘 만능(萬能)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온전히 생각을 할 때는 여러분들 그 잔병이 그냥 즉시에 똑 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대구(大邱)를 갔다 왔는데 그 곳에서 어느 처사님이 허리가 아프다고 절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한테 '당신은 지금 정말로 만능의 힘을 감추고 있습니다.'이런 말씀을 몇 번 했더니 '대저 허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과장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틀림없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은 신비 부사의(不思議)한 것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능력(能力)이나 모두를 다 완벽한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완벽한 그러한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100% 믿는다고 생각을 할 때는 어떤 분야로 보나 우리 인간의 생명을 최선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생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바로 믿어버리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시보장 제일법(信是寶藏 第一法)이라.

보배 가운데 제일 큰 보배가 부처님 가르침 천지 우주의 생명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바로 믿어 가시면 부처님을 한번 외이면 한번 외인만큼, 부처님 생각을 한번 하면 한만큼 우리 몸과 마음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광명(光明)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을 한번 외이고 한번 생각을 하면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염불하시고 거울 한번 보십시오. 훨씬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부처같이 생각을 하고 정말로 염불해 가시면서 거울을 보시면 꼭 차이가 있습니다.

건강과 우리 마음과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밝아지고 차근차근 표정이 더 빛나가고 그러는 것입니다.

제 뒤에 계시는 부처님을 보십시오. 금색으로 해서 이렇게 우리가 장엄스럽게 모시는 것은 부처님은 본래 생명의 빛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지만 하나의 훤히 빛나는 만능을 갖춘 바로 광명입니다. 그러한 소중한 우리 마음을 두고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본래 부처한테서 와서 부처한테로 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 광주에 계신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부처님 법을 외도로 믿지 마시고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남을 원망할 일도 많이 있겠지요. 더러는 억울한 일도 당하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가 인연(因緣) 따라서 허투로 겉만 허망한, 겉만 잘되고 못되고 그러는 것이지 설사 내 아들이나 내 딸이나 내 동생이나 내 친척 가운데서 누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것도 허망한 상입니다.

인연 따라서 다 그러는 것입니다. 바로 살다 가셨으므로 죽자마자 좋은 쪽으로 생을 받습니다.

광주는 빛나는 고을 아닙니까.

명실공이 광주가 빛나는 고을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내 부모를 죽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용서하고 말입니다. 부처님같이 보면 그때는 정말로 우리 광주가 빛이 납니다. 다른 묘방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것은 무수한 성자들이 다 검증한 길입니다.

불자님들 꼭 부처님 법을 스스로 닦아서 바로 믿으시고 우리 가정도 부처님 법으로 빛나고 우리 빛나는 고을 광주도 꼭 빛나는 고을 되어서 우리 한국불교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진리로 해서 세계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고 신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비록 분단의 조국이지만 틀림없이 우리 한국이 세계적으로 진리의 선진국이 꼭 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우리 광주가 그 근본 본거지가 되고 진리의 발상지가 되도록 까지 해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의 법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