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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나무아미타불

 

마음의 고향 제 14 집


* 곡성 태안사에서는 매월 첫째주 일요일 청화(淸華) 대선사를 모시고 정기법회를 열고 있습니다 이 법문은 불기2537년(서기1993년)11월7일 태안사 정기법회에서 설하신 법어입니다.


-. 나무아미타불 [1]


《나그네 길》

추풍낙엽이라, 만추(晩秋)의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인생을 가리켜서 '나그네 길'이라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이 나그네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분명히 '나그네 길'입니다. 그러나 이 인간 세상뿐만이 아니라 과거 전생이나 미래 내생도 모두 나그네 길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삼계유여객사(三界喩如客舍)'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모두가 하나의 객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나그네 길'은 마땅히 출발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종착점이 응당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출발했을 것이며, 또 지금은 인간 세상에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서 종착점에 갈 것인가?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먹고, 살고 , 입고하는 의식주에 바쁘다 보니까 보통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잃어버리고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가지가지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또는 같은 인간끼리 사귀는 남녀 간이나 친구지간이나 어떤 관계나 모두가 다 완벽한 그러한 관계를 우리는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추구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 인간의 근본 번뇌, 고(苦) 가운데도 있듯이, '구불득고(求不得苦)'라. 구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끔 인간은 인간대로 또는 아들은 아들대로,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정다웁게 분수에 맞는 것을 요구한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다 자기 분수를 떠나서 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얻을 수가 없이 항시 불만스러운 것이 전부입니다.

'아프지 않겠다' 이렇게 맘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느 날엔가 우연히 아프고 맙니다. 젊은 날은 내 소중한 젊은이 조금도 변화가 안 되고서 항시 계속되면 쓰겠다. 그러나 세월 따라서 주름살도 생기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나그네 길'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변화무상(無常)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좋은 쪽으로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 인생은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고생 바다이고 종단에는 그렇게 하다가 이 몸뚱이 몽땅 버리고 죽고마는 것인데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생하고 울창하던 숲들이 이렇게 다 이울어지고 추풍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만추의 계절, 이런 때는 정말로 우리 인생도 저와 같이 될 수밖에는 없겠구나.평소에는 우리가 들뜨고 바빠서 미처 못 느꼈다 하더라도 이 가을 만추에만은 자기 본질적인 인생의 문제를 회고해 보고 성찰을 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나그네 길'의 등불》

대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각자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정다웁게 살고 있는가?

성자의 가르침은 우리 나그네 길에서 하나의 등불입니다.

그 분들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깨달은 분들이고 또 우리 출발점은 어디고, 목적지는 어디고, 어떻게 가야만이 바르게 한눈팔지 않고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것을 극명하게 우리한테 가르쳐 주신 것이 성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 국제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성인들의 가르침도 포섭하고 같이 대비해 가면서 화합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최고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화해를 못합니다.

또는 다른 가르침에는 진리가 없고 우리 불교만이 유일하게 옳다고 생각할 때는 할 수 없이 다른 가르침을 배격도 해야 하겠습니다만 사실 핵심은 다 똑같습니다.

이른바 근본주의(根本主義) 또는 원리주의(原理主義)라,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리에 있어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이런 편협한 경색주의를 떠나야 합니다.

꼭 자기 것만이 옳다하는 이런 것을 떠나지 못하면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어떤 면으로나 우리가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더욱 더 부담스럽고 남한테 화해도 못하고 국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 지표, 우리 등불이 바로 성자의 가르침인데, 성자들의 가르침은 출발점이나 목적지는 똑같습니다.

다만 어떻게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그런 방법적인 문제만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그런 방법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제가 말씀을 주로 드리겠습니다.

여태까지는 그냥 윤곽만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한테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를 해서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 어떤 방법이 지름길인가? 이런 것에 역점을 두고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생사대사(生死大事)》

생사대사라, 이것저것 인간 세상에 중요한 일이 많이 있으나 역시 죽고 살고 하는 그 문제가 제일 크지 않습니까. 어떠한 물질적인 풍요라든가 고귀한 지위라든가 우정이나 애정이나 그런 건 모두가 다 죽음 앞에서는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소홀히 생각합니다.

위대한 분일수록 죽음의 문제를 항시 끼고 삽니다.

사실은 우리 삶 자체가 죽음의 물결 위에 잠시간 떴다 꺼졌다 하는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죽음 문제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불교의 말씀으로 하면 이것은 염사(念死)라, 생각할 념(念)자, 죽을 사(死)자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항시 건강할 것 같이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을 합니다만 아파보면 그때는 주의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죽음을 좀 생각을 독실히 한다고 할 때는 우리 행동을 함부로 못합니다.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나는 종단에 죽어야 할 것인데, 아직 젊은 세대는 다른 사람의 죽음도 별로 경험도 않고, 또 부모님도 살아 계시는 지라 죽음에 대한 실감이 별로 안 나지만 저같이 나이가 꽤 많이 먹은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서 죽은 사람도 많이 보고, 또 6.25사변이라고 하는 그 무시무시한 때에 총으로도 아니고 장작개비로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것도 무수히 보았습니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별고나 기타 천재지변으로 인한 죽음이나 어떻게 죽든지 간에 어느 누구나 조만간에 빠르고 더딘 차이뿐인 것이지 다 죽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도 '불출세 일대사 인연(佛出世 一大事 因緣)이라'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가장 큰 일이 무엇인가 하면 '생사대사(生死大事)'라. 죽음의 문제란 말입니다.

공포, 공포 하지만 죽음의 번뇌가 제일 큽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모두가 생사대사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영생(永生)이라, 영생은 죽음의 반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영생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무진 애를 많이 씁니다. 삼천갑자 동박삭이도 그렇게 살려고 애써서 삼천 갑자동안이나 살았지만 결국은 죽음인 것이고, 진시황이 불노장수라 늙지 않고 장수하기 위해서 가지가지 꾀를 많이 부렸지만 지금 어디 흔적이나 있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성자의 가르침은 죽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큰 문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가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큰일입니다. 우리가 재가불자로서 부처님 공부를 할 때나 또는 수행자가 되어서 공부할 때나 이 문제하고 맞닥뜨려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인생으로 태어난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죽음의 무덤에 함께 다 들어갑니다.

소중한 금쪽같은 자기 몸뚱이가 죽음의 무덤에 들어가거든 자기 집이나 자기 금, 패물이나 그런 것이 죽음의 무덤에 같이 안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나 성자의 가르침에는 죽음을 이기는 참 지혜가 있습니다. 또는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 나무아미타불 [2]


《부처님 가르침은 공식과 같다》

그런 지혜와 수행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나 성자의 가르침은 공식과 같습니다. 공식같이 명료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어쭙잖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공식 같으므로 공식대로만 생활하면 됩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라, 계율을 잘 지키고, 참선(參禪) 염불(念佛)해서 우리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다 보면 본래 생명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가 훤히 밝아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참다운 해탈의 지혜가 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생명의 실상(實相) 자리, 생명의 본질을 미처 모르는 것이므로 우선은 부처님이나 또는 정통 조사(祖師)나 과거 선지식들의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선 중생들에 있어서는 믿음이 가장 소중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진리를 체험도 못하고 우리한테는 소원한 그런 진리이기 때문에 우선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앙을 갖는 분들이 대체로 믿음이 부족합니다. 저도 여태까지 그때그때 법문을 했습니다만 믿음을 보다 더 역설을 해야 할 것인데 너무나 추상적으로만 흘러버렸구나 이렇게 반성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행론에 있어서 믿음에 대해서 역설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생 이것이 현상적인 존재입니다. 현상이라 하는 것은 실상이라는 우주의 본질로부터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 현상(現象)과 실상(實相)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이것은 자기를 위시해서 삼천 대천 세계 모두가 다 현상입니다. 잠시간 존재하는 그런 현상에 불과합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여실상(眞如實相)은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성자는 그 자리와 홀연히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불멸한 그 자리로 부터서 인과의 법칙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나툰 것이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이래 우리 인류가 불행한 것은 무엇인가?

기왕 우리가 인류로 태어났으면 같이 화합하고 같이 평등하고 같이 자유스럽게 살면 좋을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분열과 반목과 싸움과 이런 것이 연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한국도 단군 개조 이후에 얼마나 많이 싸웠습니까. 병자호란이라 임진왜란이다 그 큰 것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 민족이 외침을 당한 것이 900번 이상이라 합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서 이조 말엽에 당쟁을 하다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끼리 싸우는 것을 보십시오. 물론 정당한 싸움도 있겠지만 대체로 보면 자기 당적인 이익, 이른바 집단적인 이익 때문에 싸운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가 인생과 우주의 참 뜻을 잘 못 보는데서 옵니다.

참다운 지혜에 입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위급하고 급박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는 현대 사회는 과거와 같은 시행착오를 지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무서운 핵무기 때문에 한 번 시행착오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내 민족이나 또는 그때 민족이나 단 한 번에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무서운 때가 아닙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핵 자체가 우리 지구 덩어리 몇 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그런 위력을 낸다고 합니다.


《인류가 핵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면 영생불멸한 성자의 지혜를 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칼이나 또는 소총이나 활이나 이러한 것들로 싸울 때는

좀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죽을 사람 죽고, 산 사람 살겠지만 지금 역사적인 이 위기상황 핵 시대에 있어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시행착오를 범하면 전 인류가 파멸되고 맙니다. 따라서 지금만큼은 꼭 우리가 영생불멸한 성자의 지혜를 따라야 됩니다. 안 따르면 파멸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각 성자가 말씀하신 그 지혜를 남의 일로 생각을 마십시오.

지혜에 따라서 살지 못하면 우리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행복 아닙니까.

금생에 기왕이면 편히 살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바이지만 행복하지 못하단 말입니다.

행복하게 못사는 것은 과거 전생에 우리가 잘 못 지어서 그랬을 것이고, 또 금생에도 태어나서 유치원 때부터서 대학까지 배운다는 것이 참 한심스러운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 한심스러운 일인가?

우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지금 혼란스러운 우리 대학가를 보십시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른 지혜를 배우지 않고서 눈에 보이는 것, 아까 제가 말씀드린 허망 무상한 것에 불과한 그런 현상 이것이 사실로 존재한다. 이렇게 배웠단 말입니다. 꿈이 사실로 존재하겠습니까?

그림자가 사실이겠습니까?

사실 우리 인간의 때 묻은 범부중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뿐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범부의 때 묻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착각뿐입니다. 전도몽상 이것을 참말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뻔 한 것입니다. 인생고가 바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식입니다.

혹업고(惑業苦)라.

번뇌가 있으면, 그 번뇌에 따라서 입과 몸과 뜻으로 죄를 범하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범하면 그때는 틀림없이 인생고(人生苦)가 있습니다.

공식입니다. 따라서 인생고를 떠나고자 하면 그 역으로 무명심(無明心), 무지, 무명 때문에 고(苦)가 있는지라 우선 무지, 무명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무지, 무명을 떠나는 지혜(智慧)가 바로 부처님 지혜고, 예수의 지혜고, 공자의 지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가는 위대한 성자이므로 그렇다지만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석가같이 행동을 할 것인가?

부처님이나 예수 같은 성인들은 본래 잘나고 거룩하므로 그렇게 행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 같은 중생은 그렇게 안 해도 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렁저렁 살지 않는가? 이제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어도 그렁저렁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현대라 하는 그 무서운 시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가사 하나의 음악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음악도 역시 지금 꽉 막혀 있습니다. 왜 막혀 있는가 하면 요즘 재즈 음악이나 락 음악 같은 것을 보십시오. 반은 미쳐서 이른바 광란 가운데서도 그런 광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젊은 세대들이 좋다고 날뛰고, 또 젊은 소년, 소녀들은 그것에 미쳐 가지고서 이따금 아프기도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지금 광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시대는 바르게 못살면 자기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다 망칩니다. 그렇게 방정맞고 자극적인 음악을 좋다고 생각하는 우리 현대 젊은이들 마음은 거칠고 혼란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만 미술도, 저는 미술이나 음악을 잘 모릅니다.

이른바 추상적인 미술형태, 선만 몇 개 찍찍 그어 놓고서 이걸 작품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우리 같은 문외한들이 다 이해를 못하겠지요. 그런대로 또 우수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들이 불안스러운데서 그런 작품들을 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그 마음이 예수 같고 석가 같고 공자 같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예술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술도 바른 영생해탈의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꽉 막혀 있습니다.

과학도지금 얼마만큼은 물질의 한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떠나서 물질의 저 근본인 피안(彼岸)은 무엇인가?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것은 지금 과학도 모릅니다. 과학은 내내야 시간성, 공간성에 가려 있는 그 범부 내에서만 아는 것이지 시간, 공간을 떠나버리는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 나무아미타불 [3]


《정말로, 정말로 다 빈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생명 자체만 영생합니다.》

우리 마음이 물질입니까?

우리 마음이 시간이 있습니까, 공간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은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순수한 생명 자체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정밀한 전자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보입니까?

그러나 좋다, 궂다, 행복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마음이 아닙니까. 아무리 몸뚱이를 아껴도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 것이지 몸뚱이가 주인공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당면해 있는 모든 문제는 너무나 각박합니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문학도 말입니다.

오늘은 가장 길게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할 수 없이 짧게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날씨가 우리를 돕지 않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제가 너무 잔 말씀을 안 드린다 하더라도 현상적인 문제라 하는 것, 이것은 모두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입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이 몽환포영의 말씀은 그런 경을 보신 분들은 모르신 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다 실감이 미처 안 납니다. 가사 자기가 그런 설법을 하고서도 내려서면 그냥 눈에 보이는 것에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제법이 비었다는 것에 대해서 참말로 체험적으로 실감이 안가서 그럽니다. 정말로, 정말로 다 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좀 해 보십시오.

해 보셔서 우리가 기도를 모시나 참선을 하나 무아무중(無我無重)이라. 적어도 공부를 하셔서 무아무중이라는 경계를 좀 맛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아무중에 딱 들어가면 그때는 자기 몸뚱이가 아무 무리가 없단 말입니다.꼬집어 뜯어도 아프지도 않는 것입니다.

삼매(三昧)까지는 미처 못 들어가도 기압을 하는 분들이 기압을 지르면서 칼로 자기 배를 찔러도 피가 안 나는 것이고, 칼을 빼면 다 오므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본래로 그런 것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 때문에 몸에다 칼로 찌르면 피가 나고 또 아프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삼매에 들 때는 그런 것을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성자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체(當體)가 즉 공(卽空)이라, 분석을 한 뒤에 공이 아니라 이 몸 이대로, 이 책상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당체가 즉 공이라는 그런 부처님 법문을 깊이깊이 음미하십시오.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물질 아닙니까.

색즉공도 그와 똑같이 물질을 분석한 뒤에 깨고 부수고 해서 공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성자들은 그렇게 강도가 높은 금도 역시 금 그대로 공이라,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려서 그 자리를 미처 못 보는 것입니다.

왜 공(空)인가?

이것은 일체 존재가 물질이 아닌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상(相)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간 상(相)을 냈습니다. 상 이것은 본래(本來)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영생불멸한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요, 불성(佛性)이고 법성(法性)이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잠시간 모양을 낸 것입니다.

잠시간 모양을 내서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찰나도 머물고 있지를 않습니다. 찰나(刹那)라 하는 것은 일초의 75분지 1이라고 합니다. 그보다도 훨씬 짧은 동안도 고유하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거니 똑같은 것이 어디 있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내 몸은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차고 있는 금시계는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다. 우리 중생이 보아서 같은 것이지 순간순간 마멸되고 맙니다.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체만유는 인연생, 인연멸이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이 세밀한 것을 잘 못 보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인연생(因緣生)이라,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인연생 아닙니까. 인연생인 그것은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이 부처님입니다. 원인이 불성, 법성입니다. 우리 중생은 인연법 하면 그 연(緣)만 보는 것이지, 연도 중생은 확실히 못 봅니다. 근본 원인을 못 봅니다. 근본 원인을 보는 것이 성자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라. 뭘 깨닫는 것인가? 근본 성품(性品)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 성품 자리는 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이것은 항시 영생 그대로 있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그러한 도리(道理)입니다.

상주불변하는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무상한 것이니까 다 허망하지 않은가? 이것도 저것도 공이 아닌가?

여기까지만 알 때는 이것은 허무주의(虛無主義)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이지 본래로 영생불멸한 진여불성이 언제 어느 때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불타관(佛陀觀), 부처님이 무엇인가? 하는 불타관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을 믿는 참다운 믿음입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허망 무상한 것이고 본래로 없는 것이고 참말로 있는 것은 영생불멸한 진여불성이다. 부처님이다.

진여불성 이것은 생명의 본체입니다. 생명의 본체이니까 이것은 하나의 인격(人格)입니다. 제한된 인격이 아니라 무한한 인격입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면 그냥 깨달아버린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면 단박에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지금 현재라 하는 것은 금생에도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이런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습기(習氣)로 해서 꽉 차 있습니다. 과거 무수 생 동안에 더러는 지옥(地獄) 중생으로, 더러는 인간(人間)으로, 더러는 축생(畜生)으로 이렇게 흘러 내려 올 때 그때그때 생마다 지었던 업장(業障)이 지금 우리 의식에 또 꽉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식이 염불(念佛) 좀 하고 화두(話頭)좀 하고 이런 걸로 해서 단박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서 선량하고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특수한 사람뿐인 것입니다.

우리 인류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을 보십시오. 기독교 인구가 세계 18억이고, 불교 인구가 세계에서 10억이라. 이슬람도 10억은 넘는다고 합니다.

세계 총 인구의 반 이상이 넘으면서도 지금 혼란스럽고 죄악은 차근차근 더 짙어 가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제법 그럴듯하게 입으로만 한단 말입니다. 입은 알지만 몸으로는 못 느끼고 못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참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구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삿된 견해에 따라서 세속적인 관념에 따라서 그렁저렁 살다 고생고생 하다 반목, 분열, 투쟁만 하다가 죽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한테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택을 잘하셔서 불자가 되었는데 그렇더라도 그 선택한 진리(眞理) 밑에서 진실하게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 나무아미타불 [4]


《우리 생명의 고향은 바로 부처님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 생명의 고향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바싹 마른 어떤 도리나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 구하는 참다운 신앙심(信仰心)입니다. 우러러서 우리가 구한단 말입니다.

그냥 저기에 무엇이 좀 있으니 내가 구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 무슨 학문적인 문제를 푸는 그런 식의 종교는 아닙니다. 우리 생명자체를 온전히 우리가 바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생명의 본체인 것입니다. 만 생명, 모든 만물의 생명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단순히 '부처'라고 하지 않고서 '부처님'이라, 정말로 님 가운데 님 인 것이고, 우리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의 고향 자리를 우리 생명의 근본 자리를 어떻게 빨리 구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을 흠모하고 연모해서 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이치이므로 이치로 구한다. 이것도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부처님은 바로 생명이므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러러서 신앙적으로 구한단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 소박합니다. 그래도 지금 18억이나 되는 인구가 믿는 것은 '오! 주여!' 하는 그 마음, 덮어놓고서 이치는 모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해서 그래도 이만큼 이 과학문명 시대에도 18억이라는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간절히 구하는 연모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때그때 부처님 이치로 법문만 많이 하는 것이지 정말로 생명으로 구하는 그런 쪽에다 역점은 별로 못 두어서 오늘만큼은 그런 쪽에다 보다 더 관심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고향을 떠나면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가 얼마나 그립습니까?

부모님 슬하를 떠나면 부모님이 얼마나 그립고 간절히 갈망(渴望)을 합니까?

그와 똑같이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에 대해서 정말로 갈앙심(渴仰心)이라, 목마를 갈(渴), 우러를 앙(仰), 병든 사람이 약을 구하듯이 어린애가 자기 어머니를 찾듯이 부처님을 그렇게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못 찾고서 그냥 그렁저렁 이기심으로 구하니까, 공부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감성으로 간절히 구하는 그 마음으로 감상하면 굉장히 마음이 정화가 됩니다.

훌륭한 음악이라든가 또는 훌륭한 미술이라든가 작품을 대할 때에 우리 마음 감성이 순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도 역시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 번뇌(煩惱)에 따라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치러 운 마음을 정화시키려면 생명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갈앙심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앙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부처님이 그렁저렁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자비를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행복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한테는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을 위해서 우리 하찮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으로 나투는 이 몸뚱이 100개를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습니까?

과거 전생에 부처님이 살타왕자로 태어났을 때는 굶주린 범의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 몽땅 자기 몸을 바쳤던 것입니다.

또는 나찰한테 부처님의 소중한 법문을 듣기 위해서 해탈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후회도 없이 자기 목을 순식간에 다 바쳤습니다.

그걸로 해서 몇 생을 넘어서 성불을 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성불의 지름길》

불자님들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렁저렁 공부를 해서는 이 공부는 더딘 것입니다. 자기 교만심을 그대로 두고서 부처를 구한다. 억지로 앉아서 화두를 한다. 이렇게 해서는 공부가 순탄하게 나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 바쳐서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마음이 부처 아닙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몽땅 부정해 가지고서 참다운 불심(佛心)에다 마음을 두고서 구해야만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의 고향에 대한 하나의 갈앙심입니다. 정토경(淨土經)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 번만 부르면 그걸로 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갈앙심이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짓말로 생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현재 내 마음, 이 마음 떠나서 부처는 없습니다. 이 마음이나 부처 마음이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마음을 나다 하고 스스로 업장(業障)을 지어서 이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지 이 마음 바로 부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이 마음 가운데는 조금도 번뇌나 그런 찌꺼기가 없다.

그래서 100% 부처님 마음같이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을 할 때는 이 마음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를 이루는 것이고 극락세계의 공덕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라. 한 마디에 깨달아 버린다. 그것도 역시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벼워서 부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자나 선지식의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보통은 다 그럴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깔고 듣습니다. 겉으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100% 수용할 때는 정말로 딱 믿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깨달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 나무아미타불 [5]


《믿음이 최상의 방편이다.》

사람도 사람 사람끼리 믿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도 평화스럽고 그리고 믿음 그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다 상통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의심쩍어 해 놓으면 그때는 그냥 그 마음이 건너가서 나를 안 믿는단 말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불신의 시대라, 서로 믿지를 않는 것이 병입니다. 서로 믿지 않는 것은 자기 마음의 본성도 모르고 남의 마음의 본성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도 부처고 저 사람 마음의 본성도 부처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너무 믿다가 저 사람이 나를 속이면 손해가 아닌가?

더러는 시행착오로 손해를 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영원적인 차원, 해탈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설사 몇 번 속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손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 가장 좋은 방편이 무엇인가?

그것은 저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고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 사람끼리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우수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하신 방편이고 석가모니가 하신 방편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다. 목숨이 영생불멸한 생명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가 우주에 충만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는 지혜다.

부처님은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본질이고 그 가운데는 만 공덕이 다 들어있다. 우리가 이렇게 듣고서 한 생각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80만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란 오랜 무수한 세월동안 계행 지키고 법문도 하고 보시도 하는 바라밀 공덕과 비교할 때 믿는 그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량무변하다.내 생명이나 일체 부처님의 생명이 영생불멸하고 만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한번 딱 믿는 그것과 무량 세월 동안에 계행 지키고 보시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이런 공덕에 비해서 다시 비교할 수 없는 한도 끝도 없이 더 공덕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경(法華經) 공덕품(功德品)에 있는 법문입니다.

법화경은 대승경(大乘經) 아닙니까.

법화경 공덕품에 가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데 그 가운데는 무량의 공덕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서 그 자리를 딱 믿으면 한 번 믿는 그 마음이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에 보시하고 계행 지키고 참선하고 이런 공덕보다도 훨씬 더 수승하다는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다른 공부하는 법을 무시하는 그런 법문이 아닙니다. 다만 앞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무량지혜(無量智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믿는 그것이 참다운 신앙(信仰)입니다.

그 자리를 믿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이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해야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이 그와 같이 일체 만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지혜도 자비도 행복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분명히 딱 믿고서 그 자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갈앙심으로 해야 공부가 빠른 것이고 또 피로하지도 않고 병도 생기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그런 경계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으로 나오고 또는 신장이 나오고 말입니다. 별스러운 경계가 다 있으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근본 목적이 부처님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이고 그 자리는 만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자리다.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다. 이렇게 분명히 믿어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나쁜 경계가 공부할 때에 엿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시원찮고 그래저래 묽으니까 경계가 이것저것 나오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100% 가고자 하는 근본 도리, 진여불성 도리에 마음을 딱 못

박고서 그 자리를 굳건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가 굉장히 속 빠른 것입니다.

공부를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마음의 고향 자리, 어차피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떠나온 것도 역시 그 자리에서 떠나왔습니다. 진여불성에서 우리가 떠나온 것이고 그러다가 몇 만생을 지옥으로 아귀로 우리가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돌아가는 것도 역시 근본 자리인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삼계유여객사(三界喩如客舍)라.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모두가 다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욕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헤매어 왔는가, 여기 계시는 분들 과거에는 천상에도 계셨고 그랬으리라 믿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역시 지옥, 아귀, 축생을 다 거쳤습니다.

거쳐 왔으므로 기분 사나왔을 때 남을 미워하는 것을 보십시오. 금방 그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지요. 그것은 바로 지옥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아귀 같은 욕심(慾心), 아수라 같은 진심(嗔心)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발동을 다 막아야 합니다. 진심이 사무치면 자기 부모도 죽이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면 그 욕심 때문에 보십시오. 가정불화, 단체불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말입니다. 그 하찮은 물질 욕심. 물질은 본래로 없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살기 위해서 몸을 타고 나왔으므로 최소한으로 먹고 최소한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은 위험스러운 시대입니다.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 경쟁 또는 지식 경쟁 또는 기술 경쟁 각기 민족끼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시일 내에 일본을 능가할 수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물질로 해서는 지금 다른 선진국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정다운 믿음, 정다운 가치관 이것은 우리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냥 당장에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어떤 나라나 자기들이 애쓰고 물질을 많이 생산하고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네들도 종단에는 부처님 가르침 같은 우주의 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의 궤도에 따라야 파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네들도 역시 몇 번 시행착오를 경험하다가 종당에는 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번뇌를 이기는 것도, 또는 국내 사회에서 자기가 이기는 것도, 또는 국제간에 이기는 것도 모두가 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것으로 해서는 이길 길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이겼다 하더라도 별것도 아닙니다. 물질을 남보다 더 많이 가지면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기를 하겠지요. 감투나 물질은 그것은 많이 가져 보아도 이것은 사실은 불화의 씨앗밖에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보십시오. 빈익빈 부익부라.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계급의 고랑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나무아미타불 [6]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행복, 참다운 평화를 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능념불무량력공덕(能念佛無量力功德)'이라. 앞의 법문이나 거의 같습니다만

우리가 능히 부처님의 무량의 힘을 생각할 때는 즉시 '입필정(入必定)'이라.

곧바로 참다운 삼매(三昧)에 든다는 말입니다.


문자는 외울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뜻은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부처님의 공덕을 능히 생각할 때는 즉시 반드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안정이 되고 통일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럽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오로지 부처님을 지향해서 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산란스럽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무량공덕이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틀림없이 바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비하(卑下)를 마십시오. 자기의 위치가 어느 위치에 있던지 비하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바로 석가모니 마음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의 무량한 공덕을 그때그때 여러분들이 깊이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무량의 공덕을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허나 기도를 잘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해 놓으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량의 힘이 많이는 못 솟아 올라와도 어느 정도는 자기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무량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물질적으로 돈이 없다고 슬퍼 마십시오. 내가 내 목숨 다 바쳐서 만 중생(萬衆生)을 제도해야 되겠다. 이렇게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물질도 옵니다. 물질 그것도 역시 진여불성이 물질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자님들 물질이라 하는 것도 역시 현상이니까 이것도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잠시간 허깨비같이 상을 낸 것에 불과합니다.

일체 존재 만유는 모두가 한결같이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하는 것입니다.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내 소유는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없다고 한탄을 마십시오. 금생에 태어나서 한사코 부처님 법을 깨닫고 만 중생을 위해서 이 몸뚱이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치겠다. 이렇게 마음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것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만을 생각하므로 자기 생각이 안 따라오는 것이지 정말로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을 딱 붙여 두고서 우리 행동 말하나 모두가 다 중생의 복리를 위해서 하고, 남한테 베푸는 마음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물질도 오는 것입니다.

물질이 감정이나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티끌 하나 전자(電子) 하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코 우리가 참다웁게 부처님 법대로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꼭 틀림없이 건강도 올 수가 있는 것이고 물질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가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만유의 생명입니다. 자기를 절대로 과소평가를 마시고 자기 비하를 마십시오. 부처님을 100% 믿으시는 것이 최상의 행복한 길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지혜입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시겠지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깊이 생각할수록 지나간, 가사 지금 나이가 50같으면 49년 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에 자기 한평생을 헤아려 회고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여태까지 산 것이 무엇입니까. 한바탕 꿈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무상(無常)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은 공식이고 현대 물리학의 공리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온 이것은 바로 시간적으로 무상이고 공간적으로 공입니다. 현대물리학도 다 증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정말로 부처님 지혜로 보고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 물질이나 내 몸뚱이나 다 있는 것은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하고 또는 공이고, 무상하고 공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고(人生苦)는 거기서 옵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내 몸뚱이가 나다 하는데서 옵니다.

내 몸뚱이 이것이 나다. 중생들 입장에서 이것은 거짓말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과거 전생에 이 몸뚱이는 없었단 말입니다. 또는 죽은 뒤에 이 몸이 있을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에도 순간 찰나도 이 몸뚱이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것도 네 것도 아닙니다.

내 몸뚱이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상(相)을 내서 상이 지금 변화해 가는 과정(過程)에 불과한 것이지 고유한 내 몸뚱이는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 자리는 영생불멸해서 그때는 조금도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일체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갖추고 있어서 원만한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만 꽉 차 있습니다.


《진여불성 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상의 가치이다.》

그 자리를 우리 중생은 보지 못하지만 성자는 그 자리하고 항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최상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자리를 느끼고 그 자리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인류가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체이다.'라고 하는

부처님 지혜로 가야만 핵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무서운 환경의 파괴도 이길 수가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끼리 단체끼리 화합도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지혜로 해야 만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는 서구적인 사상, 서구식의 분열로 보는, 이것저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런 사고방식 이런 걸로 해서는 절대로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이 없습니다.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 이런 것이 저절로 안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반야바라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나그네 길이 팍팍한 길입니다. 인생이 참 팍팍한 길 아닙니까.

갈등하고 질투하고 헤어지고 생이별, 사이별 이러한 길인데, 이런 길에서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아야 할 것인데, 편하게 살려면 바른 지혜의 등불, 앞서 말씀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등불로 해야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 몸뚱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지고 가도 변하고 맙니다. 죽을 때 우리가 운다고 안 죽습니까.

우리는 보다 똑바로 봐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허망 무상하다고 확실히 느끼면 그 무겁던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인생은 가뿐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몸뚱이 이것이 언제 가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모두는 다 이것은 허망하다. 원래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생각할 때는 그렇게 귀찮은 몸이 귀한 몸이 그때는 아무런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범 새끼한테 이 몸뚱이를 주나 개한테 주나 그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도 제일 편하고 마음도 제일 편합니다. 부처님 법은 몸도 마음도 제일 편하게 하는 최상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방법, 화두(話頭)면 화두, 염불(念佛)이면 염불, 주문(呪文)이면 주문 모두가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차별도 없고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자리, 우리 본래면목 자리, 어떤 수행법이나 본래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자리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당장에 그 자리를 가지고 깨달으면 좋은데 업장 때문에 습기 때문에 바로 안 되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성 때문에 옳다고 이치로는 믿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행동은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각 생각에 그 부처님 생각, 화두 하는 사람들은 화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실상 자리를 놓치지 않고 습을 녹여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그럽니다. 부처님이 생명인지라 생명으로 구하면 좋을 것인데 바싹 마르게 화석화시켜서 구한단 말입니다.

내 생명이고 만중생의 생이 바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도 화두를 하는 것은 보다 고도의 참선인 것이고, 염불은 그냥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적어도 달마스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존재한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계시다가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 추구하고 염불을 하면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그것은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 자체가 바로 내 생명의 근본 자리이고 근본 성품이고, 우주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에 참다운 염불은 바로 우주의 근본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염불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방편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과 참선공부가 아닌 것과 차별은 무엇인가?

이 구분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구분을 하셔야지 그렇지 못하면 공연히 부처님 법을 비방을 합니다. 참선 이것은 이름이나 상에 걸리지 않고, 명상에 걸리지 않고서 본 성품 자리 본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가상(假相)이나 가명(假名)이나 그런 것에 걸리지 않고서 근본 성품을 안 여의는 공부는 다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나 '무자'를 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다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원래 문이 없이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인데 부처님 법 가운데서도 꼭 자기들 하는 식이 옳다고 합니다. 그 외는 옳지 않다고 그럽니다. 그럴 수가 어디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입니다. 그 아만심(我慢心), 법성(法性)을 미처 못 보아 놓으면 법집을 합니다. 그러나 법성을 본 사람은 법집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법이거니 어떻게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느 것만 옳고 어느 것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설사 하나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 그것이 우리 부처님같이 천지우주의 근본 성품을 의미하면 됩니다.

의미가 문제인 것이지 그냥 형식상 그런 가상가명(假相假名)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나 또는 '똥 마른 막대기'라 부르나 다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잘 모르니까 극락세계도 저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이지 서쪽이나 동쪽이나 아래나 위나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어두워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스스로 극락을 만듭니다.


-. 나무아미타불 [7]


《부처님 법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 지혜의 등불, 반야바라밀의 등불이 있어야 불교입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증명하시고 무수한 성자가 증명하신 가르침, 무수한 성인들이 자기 몸뚱이를 바쳐서 증명했던 것입니다. 이 태안사(泰安寺)도 과거의 위대한 스님 네가 그 험준한 밀림을 헤치고 절을 창건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생명을, 우리 생명의 가르침인 부처님 법을 위해서 지금 무엇을 했는가 말입니다.

과거의 스님 네들은 자기 몸뚱이를 바쳐 부처님 법을 지키고 믿고 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행복과 부처님 법이 따로 있습니까? 부처님 법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자의 길에만이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건강도 명예도 어느 무엇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성을 위하는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법 우주의 도리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는 참다운 자성을 위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누구를 위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반야의 도리, 인간의 번뇌로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하다. 허망무상해서 이것은 공이고 무아인 것이다.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 이것은 불교의 공식입니다. 부처님 공식을 잘 외워 두십시오.

모든 현상계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 못 보아서 우리가 보는 대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본질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고(苦)이고 공이고 무상하고 무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잘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구하기 때문에 인생고가 있습니다. 고, 공, 무상, 무아라, 인생은 고요,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라. 이것이 공식입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난 법은 모두가 다 이것은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잘 못 구하기 때문에 인생고가 있습니다. 이 공식은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고 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고를 떠나려고 생각할 때는 잘 못 보아서 인생고가 있기 때문에 바로 보아야 하겠지요.

바로 보는 것이 반야바라밀, 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제법이 공이라. 다른 사람이 나한테 좋게 하는 것이나,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나 내가 배신당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출가한 우리 비구, 비구니는 걸사다. 거러지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평생 동안 자기 소유란 승복 한 벌과 바리때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물론이고 영생을 구하는 부처님 제자들은 그와 같이 검소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승들은 보다 더 자기 마음을 다잡아서 항시 부처님 법에 따라야 합니다.

적게 먹는다고 해서 꼭 몸에 나쁜 것도 아닌 것이고 칼로리를 안 채운다고 해서 몸이 건강하지 아니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 우리 마음 자체가 우리 몸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세포가 우리 몸을 기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보조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부처님 말씀대로 믿어야지 우리가 가감해서 자기가 편리한 것은 그대로 취하고 편리하지 아니한 것은 안 믿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의 등불, 반야바라밀의 광명, 이 광명을 딱 믿고서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앉으나 서나 누우나 또는 우리가 잠을 깨나 언제나 그때그때 부처님 자리,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의 청정무비한 진여불성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 화두가 있고, 염불이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검기는 칠보다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하늘을 받히고 땅을 괴고 이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알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내내야 '우주에 가득차고 영원히 빛나는 그 자리,

생명의 본체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자리가 무엇인가?' 이런 것입니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이 있습니다.


《우주는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무량생명을 이름 자체에 리듬 자체에 다 포함시켜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부처님 이름이 아닙니다. 부처님 이름 자체에 무한의 공덕이 거기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는 범부 중생이 볼 수 없는 수승한 하나의 리듬, 하나의 음률(音律)입니다. 영생의 음악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음률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부처님 이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를 한 번 외이면 외인 만치 우리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정화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신장이나 귀신도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견지하시고 동시에 그 지혜를 순간도 놓치지 말고, 사업에 실패하고 며칠 동안의 굶주림도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생명의 손해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도 조금도 차이가 없이 버스를 타나 밥을 먹으나 어디서나 간에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놓치면 그때는 손해입니다.

그 자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분명히 그러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릴 때는 굉장히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중이 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아파보지를 못했습니다.

그건 뭐 잘나서도 아닌 것이고 본래 건강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도 바보같이 부처님을 믿어 왔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부처님 법 떠나서 다른 생각을 마십시오. 이 시대만큼은 꼭 부처님 법을 따라야만 우리 민족도 삽니다. 세계 경쟁력도 부처님 법 따라야만 우리가 이깁니다. 참다운 기술도 말입니다.

영생해탈의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연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발명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중한 우리 인연, 우리 불자님들 꼭 금생에, 우리는 달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니겠습니까.

어쩌다가 우리가 정말로 모처럼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好機)를 만난 것입니다. 이 귀중한 기회 이걸 놓치지 마시고 꼭 정말로 손해 없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면으로나 좋습니다.

장사를 할 때도 역시 다른 고객들 다 부처님같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자비스러운 말로 우리가 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두 번 오고 세 번 오고 또 온단 말입니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