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큰스님 법문
금강심론 설법
金剛心論 說法
* 이 법문은 淸자華자 청화 큰스님께서 2002년10월27일 전남 곡성 성륜사에서 하신 금강심론 특별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날씨도 쾌청하고 계절로 봐서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인데 이렇게 많이 오셔서 대단히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존적인 생명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양이 없지만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모양을 허상적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라 하는, 모양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나 법신法身 부처님도 역시 모양은 없지만 우주의 진리로 존재하는 실존적인 하나의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알라신이나 바라문신이나 모두가 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존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형상이 있고 또는 이름이 있어야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양이 없으니까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간단한 논리로 보더라도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알라신이나 또는 바라문 신이나 우리 마음이나 모두다 본래는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천착을 하지 않고서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이 훨씬 우월하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은 훨씬 더 하열下劣한 것이다, 이렇게 차별분별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본래적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인 진리 안에 있단 말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금타선사金陀禪師의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나와 있는 그러한 체계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생각합니다.
근대에 있어서나 또는 현대에 있어서나 우리 한국에도 휼륭한 선지식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도 그런대로 우리 한국불교를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큰 공헌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타선사도 아주 훌륭한 대선사님이신데 사실은 그분 인연이 …,
선지식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부복을 더 많이 타고 나오신 분도 있고 또는 세속복世俗福을, 가사 권속복眷屬福이라든가 그런 복을 많이 타고 나오신 분도 있고 하는데 금타선사는 권속복이라든가 세속복이라든가 그런 복은 좀 부족하신 분이어요. 그러나 공부복은 어느 선지식 못지 않게 훌륭한 그런 선사입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금타선사의 가르침을 조명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법집法執에서 벗어나자는데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병통病通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이른바 법집法執이란 말입니다. 무슨 법이 옳다, 내가 공부하는 법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들이 숭상하는 그러한 수행법이 제일 낫고 그렇지 못한 것은 별 볼일이 없다고 그렇게 비하를 합니다.
이 무서운 정보지식사회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천차만별의 분별시비에 있어서 가장 수승한 정보,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선택하고 여과를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법집은 현대적인 말로 하면 근본주의 교조주의입니다.
같은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교조주의라, 맑스ㆍ레닌이나 그 분들 말만 모두가 100프로로 옳다고 시인한단 말입니다. 그런 주의가 이른바 교조주의 아닙니까? 현실적인 사회상황도 감안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나중에 비뚤어지고 파멸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를 보아왔지 않습니까? 그렇게 탄압도 많이 하고 숙청도 많이 하고 했지만 가까스로 한 70년 넘도록 까지 지탱하다가 파멸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자기들이 우상같이 숭배하던 레닌의 동상마저도 끌어내리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근본주의, 불교말로 하면 법집에서 꼭 떠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의 싸움이라든가 유태교와 기독교의 싸움, 그리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싸움도 모두가 다 그런 집착에서 옵니다. 근본주의 교주주의 때문에 인류사회에 무시무시한 해악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극복해야 한단 말입니다. 불교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자기들 수행법만 옳다고 고집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금타선사의 가르침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성자聖者문제입니다. 불교 역사상 빛나는 성자들이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많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을 통해서 종교를 빛내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신 위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자기 종교의 성자만이 위대한 성인이다’는 주장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가령 유교라 하면 공자님이나 맹자님이나 또는 성리학을 대성한 주자나 그런 분들을 위대한 성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국은 다 외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자의 표준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가령 각 종교마다 다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위대한 성자라 하면 그것은 인류사회에 도움보다는 혼란을 주게 되고 나중에는 또 싸움을 야기 시킵니다.
우선 중국만 보더라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한 나라가 흥망하기도 하고 또는 여러 문제와 갈등으로 중생들이 고난을 당하는 그런 패악이 많았단 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금타선사께서는 각 종교의 성자들의 한계를 정했습니다. 그러면 금타선사가 정한 각 성자의 한계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를 것인가, 그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믿는 사람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종교는 그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똑같은 성자여도 공부를 어떻게 얼마만큼 하는가, 또는 삼매에 얼마만큼 깊이 드는가, 이런 것에 따라서 공부의 한계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위차位次가 있단 말입니다. 그 위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화엄경의 십지론十地論이나, 십지경론十地經論입니다.
십지경론에서, 우리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서 범부심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영원적인 진리자체의 그런 성자의 영역에 들어가서 성불까지, 갓 견성오도한 그러한 도인이나 성불한, 그야말로 완벽한 도인이나 다 똑같은 성자의 범주에 넣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자라도 그 업장을, 불교전문적인 말로 하면 습기(습관성)를 얼마만큼 더 녹였는가, 거기에 따라서 위차를 정합니다.
맨 처음에 견성오도해서 성자된 그런 지위를 보살초지라 그렇게 말하고 점차 올라가서 이지, 삼지 완벽한 보살 십지를 다 성취할 때는 이른바 성불이라고 합니다. 금타선사께서는 그러한 위차에 따라서 세계 각 종교의 교조와 성자를 감정하셨습니다.
그런 그 감정이 얼마만큼 정확한가, 이것이 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은 그런 문제는 어느 누구나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공부를 했다고 해서 예수가 얼마만큼 올라간 성자고 마호메트가 얼마만큼 위대한 분인가 그런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바른 깨달음을 한 사람들은 꼭 거기에 걸맞는 법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법의 능력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명히 거기에 상응하는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입니다. 삼명육통을 제대로 해야 바로 깨달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삼명육통도 못하면 그때는 아무리 자기 스스로 ‘내가 도인이다’, ‘우리 스님이 위대한 분이고 우리 문중을 다스리는 어른이 위대한 도인이다’ 한들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는 그냥 보통으로 그렁저렁 마음이 열려가지고 되신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수생 동안에 젖어온 여러 가지 번뇌망상을 모조리 다 없애고서 비로소 성취하신 것입니다. 모조리 없애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없애면 없앰과 동시에 무량공덕이 다 거기에 나타납니다. 그 무량공덕이 이른바 삼명육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삼명육통을 제대로 했으면 온전한 도인입니다. 못했으면 당연히 온전한 도인이라고 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했다는 것에 대해서 수승한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몇 생을 두고 범부노릇 많이 하고 잘못 살아서 저 지옥도 가고 또는 축생도 되고 하다가 금생에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존재의,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 아닙니까? 사람만 성불한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종국적으로는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마땅히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무거운 번뇌가 무엇이냐면 ‘지금 나라는 존재가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있다’는 이른바 아견我見입니다.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란 번뇌가 제일 무거운 근본적인 번뇌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 입니까?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시초부터 무아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 가르침은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나라는 것은 왜 없는 것인가. 그냥 무턱대고 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 아닙니까? 사람 몸뚱이 뿐 아니라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현대의 유물론과는 정반대 아닙니까?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모두가 다 공인 것입니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져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나투어 있는 유위법이라 하는 이것은 일초의 몇 천 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가장 철학적이요 가장 과학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것은 어느 순간도 가만 있지가 않는 그러한 이른바 제행무상의 법이란 말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다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존재가 없는 것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인간이 대상화시켜서 볼 수 있는 그런 존재는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움직이고 또 이렇게 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초의 몇 천 분의 일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유위법이라는 것은 제행무상이라, ‘있는’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럼 결국은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제법무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 세포가 그대로 가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일 초 전과 일 초 후가 같지가 않습니다. 일 초의 몇 조 분의 일도 우리 세포가 지금 그대로 가만 있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교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의 하나가 말하자면 무아란 말입니다. 왜 무아인가 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움직여서 마지않고 무상한 것은 결국 그야말로 참 바로 그때는 공空이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법집, 이른바 근본주의를 지양해야 됩니다. 지양을 시키려면 바른 정보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수행법이 성불하는데 가장 요긴한 수행법인가? 수행법 때문에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고민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선 참선하는 법만 두고도 생각해봅시다. 특히 조계종에서는 참선하는 법으로 화두공안을 의심해라, 그거 아닙니까? 또 일본에도 역시 임제종이 있습니다. 임제스님은 화두공안을 한 분도 아니지만 임제종이란 이름 밑에서 일본 임제종도 화두공안을 의심합니다.
또 반대파가 있습니다. 묵조선이라, 화두공안을 배격하고서 화두공안이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 잠깁니다. 가사 한국으로 말하면 원불교나 그런 종교의 가르침 아닙니까? 일본 조동종은 화두 하는 임제종보다는 훨씬 수가 많습니다. 조동종은 화두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만 잠깁니다.
또 한 파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별로 없지만 일본은 황벽종黃檗宗이 있습니다. 황벽종 선원이 수백 개, 수천 개나 있습니다. 황벽종은 공부하는 방법을 염불선에 두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미타불을 공안삼아서 공부하는 그런 염불선이 일본 황벽종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이 세계 불교의 주인공같이 행세를 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화두공안을 드는 임제종도 있고 화두공안을 안 드는 이른바 조동종도 있고 그런가하면 묵조도 화두공안도 아닌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선도 있습니다. 세 파가 솥발모양으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이라든가 중국이라든가 베트남에서는 염불선을 주로 합니다.
그런 방법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 한국에 있는 스님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 안하면 외도선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그런 풍토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 좋든 싫든 간에 어린이가 되었든 노인이 되었든 화두공안을 의심해야 이른바 참선이라는 영예스런 이름을 얻는단 말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근본주의와 무슨 법만이 옳다는 법집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들한테 우리가 말씀을 들은 경우 같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리 스스로가 불교를 역사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공부를 해야 어떤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융성했고 어떠한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쇠미하였던가를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금타선사께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아주 관심을 많이 두고 육조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든가 묵조를 한다든가 또는 염불선을 특별히 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두고서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신수봉행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육조 혜능스님께서 떠나신 지가 130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1300년 동안에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육조 혜능스님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금타선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까 우리가 보리방편문의 그 내용을 간단히 읽었습니다만 보리방편문이라는 내용이 육조 혜능스님께서 하신 선법하고 똑같습니다.
그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하셨는데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경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서 연구발표도 숱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저도 육조단경을 번역하려고 또 다시 몇 번을 봤습니다.
몇 번을 보니까 육조 혜능대사가 스스로 공부도 하시고 일반 중생들한테 교화하신 법문내용이 말하자면 보리방편문 내용하고 똑같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육조스님께서 한 몇 천 명 모인 대중 앞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을 단정히 해서 내 말씀을 잘들으시오” 해놓고서 “여러분들이 지금 나 혜능 따라서, 세 번씩 되풀이 하십시오” 하셨습니다. 육조단경의 고본이 돈황본인데, 돈황본 보면 석 삼三자, 부를 창唱자, 삼창三唱이라고 써졌습니다.
육조스님께서 “내 입 따라서 세 번씩 부르시오” 한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귀의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 또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 화신불에 귀의합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육조단경이라는 경전의 내용의 핵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그 가르침을 주석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을 금타선사께서 조금 더 풀이해서 알기 쉽게 해 놓으신 것이 아까 스님이 읽은 보리방편문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삼위일체로 종합하면 아미타불입니다. 혜능스님께서는 참선의 그야말로 할아버지 같은 그런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이가 한 것을 알고보니까 내내야 염불이란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염불 그러면, 가장 쉽고 차원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면 훨씬 차원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있다면서도 부처님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너무나 홀대합니다. 내 본래면목이 부처고 천지우주 또한 바로 보면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모두다 진여불성덩어리입니다. 그 부처님을 생각한 것이 염불 아닙니까? 본래 부처인 우리 마음이 망상에 젖어 있다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본래 부처인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서 다시 또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우리네 공부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참선의 할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치고 육조 혜능스님을 들먹이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육조 혜능스님이 그러한 말씀을 했는데 그것은 비단 육조 혜능스님의 말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조 홍인스님, 특히 사조 도신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달마 때부터서 일조 달마,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인데, 삼조 승찬 시대까지는 탁발하고 지내면서 일정한 처소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사조 도신스님 때 비로소 도량을 꾸며서 오백 명, 칠백 명 같이 단체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조 도신스님께서 법문을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능가사자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사조 도신법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그대로 계승해서 밝혀 놓으신 것이 육조단경에 있는 일체삼신자성불一切三身自性佛입니다. 우리 마음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있고,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 이것은 우리마음의 공덕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 화신불, 이것은 우리 마음의 모든 작용을 말합니다. 체體와 상相과 용用을 다 겸비한 것이 말하자면 이른바 삼신불입니다. 이러한 삼신불 귀의라는 사상이 육조단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육조단경을 번역하신 분들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두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재주가 있어서 그것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육조단경의 세계’라는 김지견 박사가 낸 책이 있어요. 그 책에는 일본사람 중국사람 대만사람 등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육조단경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그 논문 가운데 경도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다미키 고시로란 분이 있어요. 그 분은 나이가 아주 고령인데 임제종 선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 분이에요. 학자인 동시에. 그래서 도를 깨달았다고 인가를 몇 번 받았습니다. 깨달았다고 인가를 받았는데, 생각하니 깨달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런 공덕도 없고 신통한 지혜도 없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선방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스승한테 가서 인가를 또 받았어요. 몇 번 인가를 받았지만 내내야 결국은 범부심을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육조단경을 다시 봤더랍니다. 재차 보니까 단경의 중심사상이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법신을 관찰하고 우리 마음의 보신을 관찰하고 우리 마음의 화신을 관찰해서 하나의 아미타불로 귀의를 시킨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조단경의 가장 핵심사상은 내내야 결국은 일체삼신자성불一切三身自性佛인 것입니다. 우리 자성불에 귀의하라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더 연구해보니까 비단 육조혜능스님 말씀뿐만 아니라 사조 도신스님 때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금타선사의 수행법은 육조대사의 그런 수행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시간이라든가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서 올바른 정통으로 바로 갈 것인가,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공부할 때에 있어서 필요한 그런 차서 문제입니다. 1년 동안 참선을 했는데 내 맘이 지금 얼마만큼 정화가 되었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몇 십 년 동안이라든가 몇 년 동안 공부를 했으면 우리 맘이 얼마만큼 정화가 되었는가 가늠해야 할 것인데 통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그렇게 점차로 올라가는 과정이 없다면 또 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유식론이나 화염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또는 능엄경을 보면 공부해서 올라가는 그런 차서가 있어요. 모두가 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차서가 있긴 있는데 우선 공부한 사람들은 맘이 급해서 그런 차서를 일일이 보고 있으면 골치가 아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보려고도 않고서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점수법이다고 합니다.
그런 한계도 모르고 자기공부가 얼마만큼 되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서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서 어두울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 그럽니다.
몇 십년동안 공부했다하더라도 자기 공부가 얼마만큼 되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늠할 수 있는 가르침이 원래 불경 가운데 없다고 그러면 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새삼스럽게 연구할 수 없고, 그러나 원래가 다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능엄경을 강원 나오신 분들은 다 배우셨겠지요. 능엄경에 세밀하게 올라가는 과정이 다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열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고 오십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참고 않고서 암증선이라, 어두운 가운데서 그냥 이렇게 암중모색하는 그런 식이란 말입니다. 암중모색할 때 더러 맘이 활짝 열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맘이 활짝 열리면 그냥 내 공부는 이제 다 되었다. 한계를 알면 공부가 얼마만큼 갔겠거니 하고서 가늠할 수가 있지만 그런 것이 없으니까 자기가 그때그때 기분이 좋으면 ‘아, 공부가 지금 잘 되어서 그런다’ 이렇게 착각한단 말입니다.
일본에서 18세기경에 임제종의 중흥조란 위대한 선사가 있어요. 이 선사가 백은白隱선사라고, 흰 백白자, 숨을 은隱자, 일본서는 아주 유명한 선사입니다. 이 분이 18세기 때 사람인데,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그래요. 그래서 화두선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부처님같이 숭상하는 그런 분입니다.
이 이가 공부를 몇 년 동안 하니까 마음이 활짝 열린단 말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통쾌하고 쾌적한 기운을 어디에 비길 데가 없단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일본 참선불교에 있어서 3백 년 동안 나같이 통쾌히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식으로 자부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대선사가 된 양 하고 지내는데 나중에 얼마 안가서 차근차근 맘이 어두워진단 말입니다. 몸도 아파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중에 숨어있는, 그 분은 불교인이 아니라 도가공부를 하는 분인데(제가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분한테 가서 관법공부를 해가지고서 일체유심조라는 맘공부를 주로 하였습니다. 그런 관법공부를 해가지고서 자기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조그마한 책자가 있어요. 거기에 즉 말하자면 공부하고 고생하고 스승 만나서 자기 병을 고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자기가 공부하는 것이 얼마만큼 깊이 들어갔는가, 그런 한계를 모르면 그런 오류를 범하고 고생을 많이 합니다. 불경 가운데나 불교의 여러 가지 논장 가운데는 올라가는 과정 과정의 말씀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런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또 범부의 머리로는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아예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아예 무시해버리니까 화두만 들고서 죽도록 의심하고 몇 년 동안 그렇게 지내지요. 그렇게 하다가 세월이 흘러서 몸도 쇠약해지고 억지로 의심하다가 상기가 되어 또 병이 들고 그러면 또 약 먹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금 우리 한국의 보통 선원에서 하는 것이요, 금타선사께서는 그런 것을 해보다가 지극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과거 숙세에 많이 닦아가지고 마음이 열려서 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뒤로 훤히 트인 머리로 각 경론을 참고해서 차서의 순서를 매겼단 말입니다. 그후 이것이 이른바 해탈 16지입니다.
금강심론 가운데 해탈 16지란 장절이 있습니다. 해탈 16지에 부처님이나 위대한 조사스님들 그리고 우리 범부가 성불까지 올라가는 그런 한계를 조목조목 하니 비교해가면서 해설을 했어요. 어떠한 데에 올라가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맑아지고 또는, 우리 마음에서 어떠한 증상이 나오고 말입니다.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안 해보신 분들은 별로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참선을 적어도 10년이고 얼마고 해본 분들은 그렇게 공부를 무던히 했지만 깜깜하단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아까 깨달음의 증상을 다 말씀드렸지만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업장이 다 녹아지니까 숙명통을 깨달으셨습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훤히 아는 지혜란 말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과거, 바로 앞에 있는 과거가 아니라 무시이래로 무한 세월동안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가 숙명통 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그때그때 쾌적하고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솔한 사람들은 그냥 내가 지금 공부해가지고 이만하면 무던히 됐겠지, 이렇게 착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때라도 숙명통을 못했으면 공부가 아직 멀었단 말입니다. 숙명통을 꼭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야 깨달았다는 증거가 된단 말입니다.
그 다음 무엇인가. 천안통 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까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것인데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알고 또는 우주 만유를 모두가 앉아서 다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태양의 중심을 볼 수가 있고 별의 중심도 볼 수가 있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맘이란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마음 깨달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무량공덕이 우리 마음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꿀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안통이 생겨서 미래세계를 다 내다보고 우주만유를 그대로 통괄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진통이라, 우리 중생의 번뇌망상, 무명심을 다 없애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석 삼三자, 밝을 명明자, 삼명통인데 삼명통을 해야 제대로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부를 학문적으로 많이 했다고 해서 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하고는 오히려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 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학문을 많이 해놓으면 자꾸만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다가 결국은 참선을 못해버리니까 우리 마음이 안통하지요. 어떤 경우나 꼭 삼매에 들어야 깨닫는 것이지 교리체계를 이리 뒤집고 저리 보태고 깎고 해가지고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분들은 불교의 많은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렇게 공부하고 저렇게 공부하고 해서 여러 가지로 훌륭한 논문도 쓰고 하는 것은 갸륵합니다. 갸륵한데 그렇게만 해서는 도움이 못됩니다. 어느 때인가는 다 놔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의 자리, 본분 자리는 부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까 입이 닳도록 소개한 육조 혜능스님도 일자무식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일자무식인가 아닌가는 확증을 못하지만 아무튼 학문을 많이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랬어도 참선 그러면, 육조 혜능스님을 할아버지 같이 우리가 존중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과정을 불경 내에 있는 것으로 총망라해서 16단계로 체계화한 것이 후학들을 위한 금타선사의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통해서 성자가 되는 한계를 분명히 외워 두시기 바랍니다. 꼭 삼명육통이 되어야 올바른 성인입니다. 아무리 자기 문중어른이고 또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숭앙을 많이 하더라도 도를 통해야 도인 아닙니까? 이름만으로 해서는 그때는 도인이 못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얼마만큼 공부를 해야 되는가, 얼마만큼 참선공부를 해야 되는가는 꼭 깊은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려면 또 무엇이 필요한가, 그냥 삼매에 들려면 철저히 계행을 지켜야 합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그러면 계율이 청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음식 함부로 먹지 말고 남녀이성간의 음욕을 떠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못 떠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우리 불자님들, 특히 재가불자님들은 그야말로 육재일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제가 그때그때 법문 때마다 역설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스님네는 항시 육재일 기분으로 출가생활을 해야 되지만 재가불자들은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한 셈치고 하루 일종하고 고기나 술이나 기타 그런 잡스런 것을 먹지 마십시오. 또한 육재일만이라도 남녀 이성 간에(자기 내외라 하더라도) 꼭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들 능엄경을 보신 분들은 알지만, 능엄경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음식을 떠나지 않고서 삼매에 들려고 하는 것은 증사蒸沙가 작반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아서 밥이 됩니까? 음심을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외간이라 하더라도 다생겁래의 훌륭한 도반으로 알고 사귀어야지 그야말로 세속적으로 사귀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렁저렁한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불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 가운데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이 열반 드실 때는 공중에 올라가서 신통을 다 하셨습니다. 다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한테 다 있는 것입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도 한탄스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래도 무던히 애쓰고 한다고는 했는데 지금껏 신통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명할 여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전히 제대로 다 지키지를 못하고 온전히 공부를 못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래서 삼매에 들려면 그 전제조건으로 해서 꼭 음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도로, 가급적이면 일종하면 더욱 좋고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먹어야 됩니다.
고기나 또는 오신채 그런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게 하고 남녀 이성 간도 같이 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데 하여튼 음욕만은 삼가십시오. 음욕하고 먹는 것 하고 그 두 가지 못 끊으면 능엄경 말씀 마따나 증사蒸沙가 작반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유의하셔서 꼭 삼매에 드십시오. 요즘 별 명상이 다 나오지만 가장 수승한 명상이 우리 참선법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과 행복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십시다.
여러분들께서 주의하셔야 할 것은 성인들이라는 것은 내내야 우주의 본래면목자리, 자성ㆍ불성자리를 깨달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나 마호멧이라든가 또는 소크라테스라든가 그런 성인들 마음은 절대로 두 마음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보다 더 깊고 옅은 것은 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우주의 본래 진리자리,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 마음의 본성자리ㆍ불성을 깨달은 것은 결국 똑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분들이 그때그때 시대상황 따라서 조금씩 차이 있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진리 내용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종교적인 이른바 국집주의局執主義, 또는 교조주의敎祖主義를 떠나야 됩니다.
따라서 간디의 말처럼 참다운 기독교인은 동시에 참다운 힌두교인ㆍ불교인이 될 것이고, 참다운 불교인은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고, 힌두교인이 된다고 봐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여태까지 여러분들께서 집착을 한 그런 마음은 다 놓으시고, 우리 본래면목은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한 것이니까, 무량무변한 그 자리로 다 돌려서 열린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처님 눈으로 보는 바로 그 자리가 우주의 실상을 바로 보는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사견私見에 불과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중생은 상대적인 견해를 면치를 못해요. 모든 존재의 본래 성품자리를 봐야 바른 견해가 되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성품을 보지 못하고 상相만 봅니다. 그 상이란 것은 우선 나라는 상, 너라는 상입니다. 그 상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금강경에 있는 바와 같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 사실이 아니듯이 또는 거품이 사실이 아니듯이 우리가 느끼는 나라는 관념이라든가 또는 대상적으로 봐지는 너라는 것이라든가 좋다 궂다 예쁘다 밉다하는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어眞語라, 진리만을 말씀하시고 또는 여어如語라, 여법히 항시 법대로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비었다 하면 사실로 빈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집착이 많으니까 집착을 떼라고 해서 방편으로 비었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일체一切가 다 유심조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뿐인 것이지 물질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가장 고약한 삿된 견해가 무엇인가 하면 물질이 우리 중생이 느낀 그대로 사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일체유심조라는,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그 말씀이 잘못된 것이 되겠지요.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이 나오지 않을 때는 물질이 없다는 소식을 증명을 못했어요. 밖에 산이 있으면 산이 분명히 있고 물이 있으면 물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분석하고 분석해서 나가다 보면 결국은 모두가 비어버립니다.
분석해나가다 보면 결국은 나중에는 원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를 전자가 빙빙 돌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이치나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전자가 원자핵을 도는 이치나 이치는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물질의 가장 미세한 원자나 전자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 분석해 놓은 것을 보면 결국은 소립자素粒子라, 하나의 우주에는 소립자라 하는 장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전자기장 또는 중력장ㆍ강력장ㆍ악력장. 그러면 그런 장場은 무엇인가? 장은 소립자를 말하는 것인데 소립자란 것은 다시 또 분석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순간순간 일어났다 없어지고 일어났다 없어지고 서로 바꿔지고 그럽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바와 같이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라, 끝에 가서는 결국은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 버린단 말입니다. 그 운동도 위치에 어떻게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모두가 다 공空이라는 것이나 똑같은 도리예요. 우주란 것은, 물질이란 것은 결국은 그야말로 본래 없는 것이란 것을 현대물리학도 증명했습니다. 그러면 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건 물리학은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물리학이란 것은 시간성ㆍ공간성이 좀 있어야 어떻게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가 있는 것인데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으니까 이름 지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결국은 다 공입니다, 물질은 원래 없는 거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앞서 오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마음이 지금 형체가 없지 않습니까? 없으나 내가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분명히 있듯이 물질도 무엇인가는 있는데 결국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이 참말로 있는, 시간ㆍ공간성으로 있지 않고, 형이상학적으로 참말로 있는 그것이 말하자면 불성佛性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결국은 다 그와 같이 허망한 것이고 본래 없는 것인데 우주는 불성으로 꽉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부처님뿐입니다.
너를 보나 나를 보나 자기 아내를 보나 자기 아들을 보나 뭘 보나 다 부처라고 봐야 비로소 바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보지 못하면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에요. 대총상법문이라, 불교 모두를 다 총합해서 하나의 진리로 포괄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이 다른 것은 좀 모른다 하더라도 대총상법문을 알아버리면 항시 마음이 안심이 되고 편합니다.
우주는 사실을 바로 보면 다른 것이 없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하나님 눈으로 보면 하나님뿐이고 부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사견 때문에, 삿되게 망상분별해서 스스로 괴로워 할 뿐입니다.
금타선사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도리를 극명하게 잘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과거숙세부터서 업을 너무나 많이 지었습니다. 남 좋아하는 업, 남 싫어하는 업, 그런 업을 잔뜩 지어 놓으니까 다 없앨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오랫동안 닦기 위해서는 깊은 삼매, 깊은 명상에 들어야 돼요. 그래야 찌꺼기가 녹아납니다. 그런데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면 철저한 계율이, 철저한 도덕률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이성관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삼학도가 항시 근본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欲界에 있습니다. 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 우리가 전생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사람으로 태어나 이와같이 축복을 받고 있는가’, 이러지만 지금의 우리 세계가 그렇게 높은 차원이 아니에요.
욕계가 있는가 하면 보다 더 차원 높은 색계色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차원 높은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욕계번뇌ㆍ색계번뇌ㆍ무색계번뇌를 다 떼버려야 본성, 진여불성자리로 우리가 들어갑니다. 우리의 본래자리, 본래 고향자리는 부처의 자리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고향에 가려면 싫든 좋든 간에 우리의 욕심을 털어버려야 돼요.
욕심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먹는 욕심, 이성 욕심입니다. 식욕食慾과 남녀이성간의 음욕淫慾이란 말입니다.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당연히 부부내외 관계가 되시겠지요. 그러나 서로를 꼭 도반으로 알으셔야 합니다. 어느 때인가 헤어질 것, 헤어질 때는 평소에 너무나 집착하게 되면 그야말로 이별에 있어서 슬픔도 더 깊어질 것이고 상처도 더 받을 것이고 충격도 더 크게 느끼실 것입니다. 서로 최선으로 친절을 다하고 하나의 동기로 해서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때 이별이 온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전에 제가 이른바 암중모색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부의 차서 또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타일러 주신 분이 금타선사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 있는 것인데 너무나 번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참고로 하지 않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그런 차서에 대해서 별로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법희선열을 느끼지 못합니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공부한 것은 틀림없이 그때그때 마음도 개운해지고 행복감도 느끼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그냥 아무런 공덕 없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가면 한걸음 나간만큼 우리 행복이나 기쁨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인데 그와같이 조금 기쁨이 오고 그만큼 마음이 열리면 ‘공부가 상당히 되고 있구나’ 이렇게 착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경계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올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이 한 번 두 번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그때 공부해 나가는 그런 위차位次를 모르면 안됩니다.
착각도 교만심입니다. 불교전문술어로 증상만이라, 미처 공부가 안되었는데 되었다 하는 것, 어느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이르렀다고 하는 것 보고 증상만이라고 그래요. 증상만이 되면 그때는 공부가 다시 안됩니다. 아만我慢이란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여요. 결국은 자기 스스로 ‘무던히 공부가 되었다’고 아만하면 이러니까 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호법선신이 딱 지키고 있어요. 공부할 때는 호법선신도 더불어서 우리하고 같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심을 낸다든가 이상한 짓을 하면 그때는 호법선신이 떠나버립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독실히 믿고 계신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나의 행동을 지금 호법선신이 다 지키고 감시하고 있다, 이렇게 느끼셔야 돼요. 분명히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호법선신 뿐 아니라 무수한 귀신들이 이 공간속에 꽉 차있습니다. 우리 행동을 다 감시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금타선사를 우리가 위대한 분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히 견성오도한 분이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증거 없이는 누구든 믿을 수가 없겠지요. 사실 우리는 자기 스승이라든가 자기 문증어른들을 정도이상으로 우상시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허나 금타선사님은 천안통天眼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숙명통宿命通을 분명히 하신 분이고 누진통漏盡通을 분명히 하신 분입니다.
우선 숙명통 하신 것은 직접 제가 듣지는 않았지만 그 어른의 여러 가지 기록으로 해서 알 수가 있고 또 천안통을 하신 것은 금강심론에 의해서는 분명히 다 증명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안통을 안했으면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아주 정밀하게 수치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태양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금성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또 우리 지구의 내용은 어떻게 되고 그런 것을 모두 다 수치로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물질이란 것이 순수 생명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그런 것도 모두 다 수치로 표시를 하고, 삼천대천세계인 불교우주를 모두 수치화해서 증명했습니다. 현대물리학이 미처 증명을 못하는 그런 분야까지도 다 했어요.
전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는 양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원자의 구성과 구성되는 이유도 다 말씀했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소립자로 구성된 우주에는 말하자면 근본에 가서는 아주 순수한 물질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 모든 장에너지를 통일시키는,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분들이 말한 이른바 통일장統一場이라, 통일장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가 없어요.
즉, 그런 단계는 인간의 시간ㆍ공간 안에 있는 그런 견해로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우주관의 술어로 해서 금진금륜金塵金輪이란 말이 있어요. 금진금륜 이것은 일반물리학에는 없습니다. 불경佛經에는 있어요. 특히 금타선사께서는 그와같은 금진금륜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모든 에너지의 장을 통괄하는 이른바 통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금진이나 금륜 이것은 물질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모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미세한 근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금진이 어떻게 선회하는가, 어떻게 도는가에 따라서 이른바 전기가 되고 자기가 되고 합니다. 금강심론에 보면 좌선금진左旋金塵이 수진이요, 우선금진右旋金塵이 화진火塵이라, 그런데 수진이란 이것은 원자핵체를 말하는 것이고 화진이란 것은 하나의 전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우주관이 삼천대천세계인데 이 세계를 현대적인 체제로 풀이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80억 우주예요. 80억 우주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태양계 같은 우주의 80억 배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 태양계만 생각해도 상당히 놀랄 만큼의 크기가 아닙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라든가 각 달이라든가 각 위성이 돌고 있는데 이런 태양계 같은 즉 말하자면 하나의 작은 우주가 80억 개가 있는데 80억 우주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량무변無量無邊입니다. 천지우주란 것은 그와같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 체계를 금타선사께서 다 세우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수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태장계胎藏界 수치라, 형이상학적인 수치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런 형이하학적인 물리학적인 수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공부를 하시면 좀 난해한 것이 풀어지게 됩니다. 또 수묘게數妙揭라, 가사 수묘게란 것은 1부터 10까지의 그런 수치에 대해서 나온 하나의 원리를 풀이한 것입니다. 1은 어떠한 것이고 2는 어떠한 것이고 3은 어떠한 것이고 그와같이 각 수에 포함되어 있는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현대가 이른바 산업사회시대이고 물질과학이 발달되어 있어놔서 또 그런 분야를 생각할 때는 우주론적인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얼핏 윤곽만 얘기했습니다마는 역시 우리 공부인들 한테 있어서는 수행론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 스스로가 지금 현재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또는 성불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인가?
보리방편문은 육조단경의 수행론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십년 전 쯤, 제가 태안사에 있을 때는 금타선사의 그런 보리방편문이 육조단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미처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뒤에 여러 가지 경험이라든가 또는 나름대로 명상도 하고 해서 나중에 보리방편문이 육조 스님의 수행법을 그대로 말씀한 법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가신 지가 1천3백 년이 됐는데 육조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역시 금타선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 육조단경을 다시 보시고서 육조단경 가운데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이라는 대목과 금강심론의 보리방편문 대목을 대조해 보시면 과연 그렇구나,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금타선사님이 성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때는 할 수가 없지요. 믿음이란 것은 자유인 것이니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안통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분명히 누진통을 했다고 생각이 들고 또 맨 처음에 깨달을 때 나오는 숙명통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도인이지요. 도인의 증거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말씀드렸지만 우선 삼명통은 꼭 해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숙명통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까지도 포함해서, 무시이래의 무수만생 동안의 과거를 다 아는 지혜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포함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냥 투시해 다 아는 것입니다. 누진통은 우리 번뇌를 없애는 수행방법을 모두 다 통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지 깨달았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와 같이 숙명통이 나오고 또는 천안통이 나오고 누진통이 나와야 이른바 참다운 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도인은 어떻게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스님이나 육조 혜능스님이나 또는 금타선사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착해서 미처 공부를 안해서 깨닫지 못할 뿐이지 깨닫지 못한 단계에도 마음의 역량은, 성품은 똑같습니다. 결국 상相에 있어서만 우리가 미처 못닦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금 닦아나가는 과정, 이른바 위차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금강심론에 있는 16해탈지解脫地입니다. 16단계로 위차를 밟아서 가는 것인데 16해탈지 이것은 어느 한 가지 경론만 참고로 한 것이 아니라 유식론 또는 화엄경, 대승ㆍ소승, 밀교ㆍ현교 모든 경론을 다 망라해서 16단계로 차서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유식론을 보나 무엇을 보나 그런 경론에는 경론대로해서 수행하는 단계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을 다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인용하고 체계를 세워놨기 때문에 16해탈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다른 경론에 있는 수행론까지도 충분히 다 참고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영을 배울 때 물에 가서 배워야지 육지에서 수영을 배우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듯이 참선도 실제로 닦아야 됩니다. 자기가 느끼고 닦고 그래야 납득이 될 문제 아닙니까? 명상 가운데 최상명상이 참선 아닙니까? 참선에 들어가려고 하면 쉽지가 않아요. 이른바 사선근四善根이라, 사선근을 다른 말로 하면 사선행四加行 그래요. 사선근은 사선정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닦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는 사선정에 그냥 비약적으로 막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점점 닦아가다가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야 사선정에 들어갑니다. 사선정四禪定ㆍ사공정四空定ㆍ멸진정滅盡定…,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이 아홉 단계의 선을 기본선 또는 근본선이라고 그럽니다.
우리 신심이 사무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은 언제나 비약할 수가 있어요. 바이블을 보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대들에게 조금도 빈틈 없는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죽은 사람들한테 ‘그대, 꼭 살아나라’ 그러면 살아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사실 자기가 증명을 다 했어요. 마리아의 동생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어서 파묻어서 사흘이나 됐는데 예수님이 어디 갔다오니까 마리아가 아주 간청을 해요. “주여, 제 동생이 죽었으니 꼭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입니까마는 예수님은 그 무덤 앞에 가서 한참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자기의 마음이 조금도 빈틈없게 밀착하는 그런 순수한 기도가 되었겠지요.
그렇게 모셔가지고 장엄한 음성으로 “라자로야, 일어나라” 그렇게 몇 번 하니까 라자로가 정말로 몸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묶은 끈도 다 끊어져 걸어갔다는 것이 기록에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저런 것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으로 과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신앙심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빈틈없이 자기가 온전히 진여불성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기적을 충분히 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행하신 신통묘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그냥 우리한테 방편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렇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모두들 다 할 수 있고 모두들 다 알 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렁저렁한 것이 아닙니다. 명문학교도 안나오고 또 비록 깊은 명상을 안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내재해 있는 능력은 결국은 석가모니나 예수나 똑같습니다. 어느 순간도 우리는 비약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제자 앙굴리마라는 999인이나 죽인 잔인무도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죽여도 그것이 무시무시한 업장인데 999명이나 죽였어도 석가모니 부처님 만나가지고서 마음 돌이키니까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라한과는 도인道人입니다.
불교는 그와 같이 어느 순간 비약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못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딱 마음을 바로 먹고서 스스로 ‘지금 내 마음이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다 똑같은 마음이다, 진여불성이다, 청정무비한 본래면목이다.’ 이렇게 온전히 1백 프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이든 다하는 것입니다. 신통도 부리고, 또는 모르는 것도 없고 말입니다.
현대는 원자력시대 아닙니까? 원자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나 뭐나 참 기기묘묘한 재주를 부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따지고 보면 밑에 가서는 다 진여불성이여요. 천지우주에 진여불성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바른 견해, 가장 행복스런 견해, 옳은 견해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것도 모두 다 부처로 봐야 된단 말입니다. 자가 아내를 봐도 아내이기 이전에 다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아내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나 누구를 보나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도 똑같이 결국은 조금도 어김없는 부처입니다. 그렇게 봐야 참다운 정견正見입니다. 그렇게 보지를 못하는 것은 다 사견私見이여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부처님 법은 조금도 우리를 그늘지게 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한 법문입니다.
이른바 참선해서 깨닫는 방법이,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아홉 차원인데 이것은 사선정四禪定ㆍ사공정四空定ㆍ멸진정滅盡定 그래요. 사선정은 네 차원의 그런 선정에 드는 것이고 사공정은 그보다도 한 차원 더 높여서 무색계를 관조하는 삼매입니다. 멸진정은 우리 범부중생의 번뇌를 모조리 다 없애는 그런 참선입니다. 멸진정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참다운 성자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그렁저렁 하다보면, 저와 같이 80세가 되면 그야말로 처량하지요. 80이란 참 무서운 나이입니다. 무서운 나이지만 부처님께서 80세에 가셨고 제가 존중하는 그리스 철인인 플라톤도 그 나이에 갔어요. 또 인광대사라고, 중국의 위대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도 80세에 가셨고 해서 내가 그 분들 나이에 가게되면 영광이요 한편으론 내가 참회가 되겠구나, 그렇게 자기 위안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인광대사는 인격이 굉장히 고매하신 분입니다. 그이는 계행도 아주 청정하고 모두를 다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신 자기 이름을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 그러니까 항상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그런 중이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법문은 누구나가 다 그대로만 닦으면 꼭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닦지를 못하니까 지금까지도 확철대오 못하고 범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정견그대로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들 같으면 마땅히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느님 아님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일반 신도들한테 “너희들은 저 하늘에 계시는 주님 같이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 되어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무엇인가, 진리에 맞는 진리 그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공자의 논어에도 소중한 말씀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성자의 말이란 것은 모두가 다 옳습니다. 우리 중생의 작은 지식 가지고서 그런 성자를 함부로 논해서는 안됩니다. 성자들은 우선 진리를 바로 깨달은 분들이니까 그때그때 사정 따라서 다르게 표현이 됐다하더라도 우선 저분들 말씀은 다 옳거니, 이렇게 전제를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불교만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도 한 가지 법집法執입니다.
우리 수행법도 그래요. 염불한 사람들은 염불만 최고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께서나 성인들, 조사스님들께서 말씀한 수행법은 다 옳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묵조 하는 것이나 염불이나 다 옳습니다. 다만 그 마음태도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고 하면 그 부처님 도리,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아야 참다운 공안이라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 라든가 또는 ‘무無’자 라든가 그 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 도리에다 진여불성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불성을 찾는 방편으로 해서 ‘이뭐꼬’가 생기고 ‘무’자가 생깁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찾기 위해서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나온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령 염불선을 갖다가 부처님 당시에나 그 뒤에는 별로 없던 것을 청화가 만들었다든가 그래버리면 그것이 큰 탈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슨 ‘하나의 선’을 만들 만큼 그렇게 출중한 사람이 아닙니다.
염불선이란 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육조 혜능스님 선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또 사조 도신스님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진여불성을 안 떠나고서 염불하면 다 염불선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장보살을 외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시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체, 우주의 본바탕자리인 불성을 떠나지 않으면 그것 모두가 참다운 염불선입니다.
참선과 일반 차원 낮은 공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화두를 하건 묵조를 하건 또는 염불을 하건 진여불성자리, 우리 생명의 본래면목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다 참선입니다. 설사 ‘이뭐꼬’, ‘이뭐꼬’ 땀을 흘리면서 선방에서 애쓴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을 떠나면 그때는 참선이 못돼요. 본래의 자리를 안떠나면 ‘똥막대기’를 부르나 뭘 부르나 그때는 모두가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존재의 실상자리를 안 떠나면 돼요.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두가 다 바로 보면 그때는 실상 아님이 없지 않습니까?
참선은 그냥 애만 쓰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깨달을 때에야 활연대오해서 다시없는 행복을 느끼겠습니다마는 깨달은 뒤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부해 나갈 때도 한 걸음 가면 한걸음 간 만큼, 우리 마음이 조금씩 열려 가면 열려간 만큼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훨씬 좋아집니다. 사실 보통 명상공부를 한다 해도 잔병이 떨어지고 머리도 더 좋아지고 눈도 밝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선해서 약간 힘을 얻어 놓으면 밤새껏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별로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원래 근원자리가 바로 불성입니다. 무한의 공덕자리, 무한의 가능성이 거기에 포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행복감이라든가 건강이나 그런 모든 것이 거기에 상응됩니다. 그래서 참선의 이름을 현공덕주라, 모든 공덕이 나타나는 그런 공부란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할 때 그냥 고통만 생각하고 거기서 얻는 것은 나중에 깨달을 때 외에는 별로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이렇게 느끼고서 참선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참선할 때는 꼭 기본적인 준비가 있어야 됩니다.
누구나가 다 참선에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맨 처음부터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가령 밤에 염불도 하고 그러다가도 한 30분이나 1시간 그렇게 앉는 버릇을 붙이면 나중에는 더 앉기도 훨씬 쉽고 우리 마음도 그만큼 차근차근 정화되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갖는 습관성이 중요합니다. 참선하는 자세를 간단히 말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상삼매란 것은 모든 것이 부처라는, 하나의 실상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체존재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정견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잔여불성뿐이고 대총상법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상삼매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을 끊임이 없어 생각생각에 계속하는 것을 일행삼매라 그럽니다.
우리는 보통 그때그때 순간 생각은 더러 할 수 있지만 지속을 시키지 않지 않습니까? 기분이 좀 좋거나 환경이 괜찮을 때는 모르지만 시끄러운 데라든가 또는 기분이 언짢을 때는 그냥 그런 쪽으로 우리 마음이 달려가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두 다 진여실상뿐이다, 불성뿐이다 하는 그런 일상삼매를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이 지속을 시키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이라든가 사조 도신스님, 또는 금타선사 가르침도 내내야 모두가 다 그런 쪽으로 포괄이 됩니다. 육조단경에서 부촉품咐囑品이라, 부촉품은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거기서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님의 무량지혜를 알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공부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여란 것은 하나의 진리인 동시에 다른 것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참다운 도리가 아닙니까? 또 그 자리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 그래요.
그러니까 진여불성을 항시 놓치지 않아야 일상삼매입니다. 또는 그런 자리를 생각 생각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리에 누울 때나 안 놓치면 그때는 꿈속에도 공부가 되어 갑니다. 우리 범부들은 과거 전생부터서 업장을 많이 지어놓으니까 별스런 꿈을 다 꾸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잘 때까지도 강인하게 우리 의지를 진여불성에다 딱 매어놓고서, 일상삼매를 하고 또는 일행삼매를 해야 됩니다. 우리가 저절로 졸음이 오면 잘망정 빈틈없이 하다보면 결국은 꿈속에서도 부처님 공부 쪽으로 우리 진여불성이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갑니다.
금강심론은 장절마다 또는 구절마다 굉장히 소중한 법문입니다. 제4절에 관음문자觀音文字란게 있어요. 관음문자란 무엇인가 하면 성자의 눈으로 모든 소리를 다 부처님 소리 부처님의 청정한 범성梵聲으로 본 것입니다. 가사 사람 말소리라도 어떤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욕심이 많고 또 어떻게 말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진심瞋心이 많고 말입니다. 그 음성으로 사람의 성질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도리가 관음문자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로 해서는 여러 가지로 음을 다 표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아주 괴상한 소리라든가 한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다 관음문자의 구조로는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런데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불성공덕이 얼마만큼 위대한 것인가, 우리가 진여불성을 견증하고 본다고 생각할 때 얼마만큼 위대한 것이 어떻게 빛나고 어떻게 위대하고 하는 것인가 하는 불성공덕을 간단히 다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또는 모든 것을 모든 물질을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서 나중에 진여불성까지 딱 도달하는 그런 경구도, 다만 그것이 하나의 불교의 도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물리화학적인 그런 도리와도 절충을 시켰습니다.그러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따지기 좋아하고 분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그걸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불성 쪽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우리들이 보통 책을 내는 경우는 이른바 결정설決定說이라, 조금도 오류가 없는 결정설을 낼 수가 없습니다.그러나 성자가 내신 책은 결정설이라,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구절을, 어느 장절을 펼치고 본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성불의 길로 우리 마음을 편달하는 귀중한 금옥 같은 법문입니다. 각 경론의 정수를 뽑아놨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일반 책 보듯 말으시고 정독을 하십시오.
가령 화엄경 정수는 어떤 것이고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어떤 것이고 또 능엄경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고 그런 것을 다 여기에 뽑아놓았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천안통을 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언급할 수가 없는 그런 소중한 법문입니다. 현대는 그야말로 우주시대 아닙니까? 따라서 우주론적인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기 때문에 일반 학자분들, 특히 불교학자분들께서 본인들이 느끼고 있는 애매모호한 점이라든가 또는 수행론에 대해서 생각하실 때, 꼭 금강심론을 참고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꼭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이치로 해서는 불성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근기 따라서 더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상당한 시일동안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적어도 한 3년 그래도 삼매에 들 수 있는 그런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금생에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가정에서 내외분 같이 지내는 경우에도, 똑같이 앉아서 참선공부 하시기 바랍니다. 또 출가한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명이란 것이 언제 갈지를 모릅니다. 나이가 많다 그래서 빨리 가고 젊다고 해서 많은 시간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파거불행破車不行 노인불수老人不修라, 역시 게을러지는 몸뚱이 가지고서는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주의하셔서 그야말로 아주 건전한 몸일 때에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가장 좋은 일, 가장 손해 없는 일이 공부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고 장사도 말고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더라도 고객을 다 부처로 보고, 하나의 물건을 팔더라도 다 부처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서 오늘 나누어 드리는 이 책을 보고 또 보고 하십시오. 성불의 길에 있어서 순서로 해서는 지금 나온 책 가운데는 이런 책이 없습니다. 근본선을 사선정ㆍ사공정ㆍ멸진정인데 이 아홉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선근, 사가행지四加行地를 밟아야 돼요. 근본선을 닦아나가는 것이 즉 말하자면부처님 모든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최제일最第日ㆍ최상最上ㆍ최승最勝ㆍ최묘最妙라, 이렇게 부처님 스스로 찬탄을 하셨습니다. 제가 아함경에서 그런 대목을 조사해보니까 마흔 한군데나 있어요. 얼마나 부처님께서 그와같이 역설 강조를 하셨으면 마흔 한군데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걸 본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 행복과 직결됩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호법선신 또한 더욱 더 환희심을 낼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한 발이라도 우리 본래 성품, 우리 본래 주인공자리와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가 금생에 나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저기에 있는 금타선사의 법문을 모아서 정리해 책으로 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머리말에 두시고 그와같이 의미 있게 봐주셔야 여러분들한테 좋고 그래야 공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꼭 금생에 대오철저大悟徹底를 하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