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14

본연스님 2021. 7. 12. 06:27

 

 

보살계 법회(1)

우리 불자님들은 대단히 희유한 선지식善知識들이십니다. 금생에 여러 가지 많은 종교가운데서 하필이면 부처님 가르침을 믿게 되고 또 부처님의 그런 가르침 가운데도 방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정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본체本體를 그대로 드러낸 법문을 여러분들은 지금 공부하고 계십니다.

 

방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역시 그냥 보통 방편적인 그러한 법문이 아닙니다. 그 보리방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마음의 본성품本性品이 무엇인가, 내 존재의 근본실상根本實相은 무엇인가, 또는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러 관계를 아주 간명직절簡明直切하게 표현하신 그런 법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그렁저렁 형식적으로 믿는 분도 계시지만은 또는 우리 불자님들은 여태까지 집안에서 계시든지 또는 절에 와서 계시든지 정진하시다가 오늘도 보살계菩薩戒를 받게 되셔서 대단히 장한 일이고 또한 축복하는 마음 한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성本性은 무엇인가. 즉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참사람이 무엇인가, 그런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도덕적인 가르침 또는 철학적인 모든 문제가 이런 문제가 사실은 인간성人間性이 무엇인가 하는 우리 인간의 참 마음을 밝히고자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 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 내 마음의 본성, 또는 우주의 본래 참 실상實相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 가르침같이 진리 그대로 우주의 사실 그대로를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공자孔子님 가르침 또는 예수님 가르침, 노자老子의 가르침도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공자님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몇 100년을 두고 싸움판이 되어 있는 그런 전란 시대인지라 공자님은 우선 도덕적道德的인 그런데다 역점을 두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참다운 성품자리, 또는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어떻게 우리 인간이 윤회輪廻하는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소홀히 생각했단 말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유태지방에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유태교의 박해迫害 밑에서 우리 인생문제의 그런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낱낱이 말씀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3년 동안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가 빨리 가신 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여러분들도 지금 부처님 가르침이 훌륭하시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시지 않습니까마는, 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지금 현대 정밀한 물리학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다 밝히고 있지는 않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 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대상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물질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현대 물리학도 그 정밀한 체계를 자랑하지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어떤 것이고, 또는 이 현상적인 대자연계大自然界는 어떤 것이고, 이런 문제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실은 우리가 금쪽 같이 아끼는 우리 몸뚱이도 실존적인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대상으로 욕심을 내고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하는 이 물질이라는 것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사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것은 사실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고 뜬구름 같은 것이지 사실로 실상 적으로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실히 밝힌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우리가 그때그때 고민하고 또는 서로 싸우고 전쟁이 일어나고, 모든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 데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고 자기 재산도 자기 지위도 대상적인 모든 그런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나 이런 것도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보고서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받으시는 보살계는 한번 받았으니까 다시 안 받는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때그때 자주자주 받으셔야 됩니다.

 

우리 중생이 지은 업장業障도 많고 따라서 그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우리가 두고두고 성불成佛하기까지 지켜야 될 그런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를 다시 확실히 지키기 위해서도 보살계는 그때그때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 네는 한 달에 두 번씩 보름마다 대중이 모여서 이 보살계를 그때그때 서로 피차 차서에 따라서 어느 선배가 계율을 읽어주면 다른 대중들은 참회懺悔하여야 하고 또는 받아야 되고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두 번씩 이나 그와 같이 보살계 계문戒文을 읽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을 성불의 길로 나가도록 그래야 됩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철저하게 육재일六齋日을 지켜서, 6재일 날마다 우리가 8가지 계를 지켜야 됩니다. 우리 한국의 신라 때나 고려 때나 이조 때도 궁중에서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팔관계八關戒, 8가지 계행을 지켰습니다. 이 계율이란 것은 우리 인간존재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 인간존재는 과거세의 업장 따라서 금생에 태어났기 때문에 참다운 사람이 아직은 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나 우리 실상이 본래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도 지금 마음이야 어떻게 됐든지 간에 우리의 본래 마음은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입니다. 그 부처님의 성품은 내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불성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를 다른 이름으로 하면 불성계佛性戒, 부처 불자 성품 성, 불성계라, 본래 부처가..., 우리가 실제로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될 그런 계율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각기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도 있고 불여의不如意한 그런 불행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더듬어보면 모두가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도덕倫理道德이 바로 계율인데 윤리도덕을 바로 지키질 안했습니다. 아내가 지키지 않았든가 남편이 지키지 않았든가 또는 우리 조상들이 지키지 않았든가. 모두가 다 우리가 인간된 도리道理를 지키지 않았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개인적인 성불을 위해서나 우리 가정의 화목和睦을 위해서나 또는 사회의 평안平安을 위해서나 어떤 면으로나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를 심지계心地戒, 마음 심자 땅 지, 심지계心地戒, 우리의 참다운 마음 바탕은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의 도리, 부처의 도리에 걸맞는 우리 인간의 윤리행위가 바로 이것이 불성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부처 불, 성품 성, 불성이라는 것은 그냥 이론적으로 대상적으로 저만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생명生命의 빛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생명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생명자체도 그 광명光明 빛으로 충만해 있고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도 바로 광명으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감득感得도 못하고 눈으로 보지도 못할 뿐인 것이지 그러한 생명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은 둘이 아닌 것이고, 우리 본래 성품이 우리 심지心地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늦고 빠른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꼭 다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능력도 부족하고 또는 내가 별로 마음도 그리 선량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가 안 되어야 되겠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땐가는 꼭 부처가 될 의무義務가 있는 것이고 부처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게으름부리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지키고 안 지키고 그런 차이에 따라서 조금 더디 되고 할뿐인 것이지 어느 누구나 종당終當에는 다 부처가 됩니다. 성불의 길에는 여러 가지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 행위行爲를 그 진여불성眞如佛性, 우주의 도리에 맞게시리 하는 계율戒律을 먼저 지켜야 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지도 않고 또는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智慧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같이 우리 스스로 범부심凡夫心을 미처 못 떠난 것은 우리가 참다운 지혜를 몰라서 그럽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이란 것은 없을 무, 밝을 명, 무지無知나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나는 무지하지 않다, 이렇게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주의 진리를 모르면 다 무지 무명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 무지가 아닌 진리일 것인가? 진리眞理를 증명證明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때는 수행修行을 많이 해야 되겠지마는 수행을 않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간단한 것은 외셔야 됩니다. 무명이 아닌 것은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많이 알고 복잡한 교리를 통달한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실존實存이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모르면 그때는 아직은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주 자체를 하나의 진리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혜智慧가 짧아서 하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이래저래 이것과 저것과 나와 너를 항시 구분해서 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나와 너를 구분해서 볼 때는 우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남하고의 화해도 안 되는 것이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개인적인 행복幸福을 위해서나 또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나 또는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나 꼭 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인데 진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생명자리를 여실히 아는 것은 성자聖者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짧아서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보니까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부처님의 청정안목淸淨眼目이라. 부처 불자 눈 안, 불안佛眼인데 부처의 눈으로 봐야 만이 바로 보이는 것이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 설사 공부를 많이 하셨더라도 아직 자기가 모든 문제를 하나의 진리로, 모든 존재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아 지지 않으면 아직은 공부가 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菩薩戒는 그 하나의 자리, 하나의 자리에서 말씀하신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다 우리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의 진리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고 그 다음은 그런 진리 밑에서 우리말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고 우리 생각을 바르게 해서 불교말로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생각과 또는 우리말과 우리 행위를 진리에 맞추어서 하는 것이 이것이 계율의 참다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말씀드리고 싶으나 또 너무 말씀을 다른 일반적인 말씀을 많이 드리면 정작 보살계 10가지 무거운 계(십중금계十重禁戒)와 또는 48가지 가벼운 계(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만 줄이고..., 우리가 계율을 받을 때는 먼저 참회를 해야 됩니다. 참회를 하고서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허물을 다 뉘우치고 뉘우친 뒤에 우리가 그야말로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청정계율을 받도록 하십시다. 그러시면 지금 연비를..., 연비라는 것은 우리 팔뚝이나 우리 손가락이나 우리 몸을 불로 지지면서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연비와 참회진언>

 

우리 중생들이 지켜야 할 그런 계의 종류, 어떠한 무슨 계가 있는가 하는 그런 계율의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불교의 법으로 해서 여러 가지 소승계小乘戒도 있고 또는 대승계大乘戒도 있고 합니다마는 보살계는 이것은 모든 계율을 다 종합한 그런 최상의 계율입니다. 가사 비구比丘250, 또는 비구니比丘尼348계라든가 또는 10계라든가 여러 가지 계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모든 계를 종합한 가장 중요한 가장 중대한 그런 순수한 청정한 계율이 바로 보살계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보살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보살계를 받는 분들은 그 보살이 다 완전히 된 셈치고서 자기 행동을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로 경계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시면 여러 불자님들께서 참회를 하셨으니까 보살계의 그런 10가지 무거운 계와 또는 48가지 가벼운 계를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일第一 불살생不殺生이라, 살생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또는 주문呪文으로 죽이는 그러한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죽이는 그런 원인原因이나 죽이는 연이나 또는 죽이는 방법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일체 생명이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보살은 응당 항시 변치 않는 그런 자비심慈悲心과 효순심孝順心을 내어 방편으로 일체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방자한 마음과 즐거운 생각으로 살생殺生하는 이는 보살의 바라이죄波羅夷罪니라.

 

바라이죄는 이것은 중죄重罪란 뜻입니다. 바라이죄는 마치 단두대斷頭臺, 우리 목을 한번 끊어버리면 우리 목이 다시 본자리에 돌아갈 수가 없듯이 우리가 이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그런 죄가 이른바 바라이죄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은 바라이죄를, 그런 중죄인 바라이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보다 더 큰 죄여서 다시 용서받을 수가 없고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이것은 가벼운 죄에 해당해서 우리가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아까도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면 자기도 남도 다 하나의 생명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죽임을 당하는 그 사람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그 사람도 살생하는 그 사람도 역시 똑같이 그러한 무거운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당할 수가 있지만 우리 인간이란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과거 전생에도 끝도 없고 또는 미래 내생에도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인가는 자기가 다른 생명을 죽인만치 거기에 상응된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이는 그러한 살생계殺生戒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