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456
우리가 흔히 말씀을 하기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대도무문이라, 대도(大道) 큰 도는 본래 일정한 고유한 문이 없단 말입니다. 스님들도 대도무문이란 말을 더러 가끔씩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도무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이라는 것은 모든 법(法)을 총망라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원만(圓滿) 무결(無缺)한 그런 뜻을 가리켜서 대도무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도무문에 따르는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선(禪)의 참선(參禪)의 논장(論藏)에 가 있습니다만 무문관에 있는 것을 보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라. 대도라 하는 것은 큰 진리(眞理)라 하는 것은 본래 문이 없지만은 또 인연(因緣)이 따르면 그때는 천차유로라, 천 가지 만 가지의 길이 있단 말입니다.
투득차관(透得此關)하니 그 대도의 무문이란 문이 없다는 관문을 두드려서 통과를 할 라고 생각할 때는 건곤독보(乾坤獨步)라, 건곤이라는 것은 천지(天地) 아닙니까. 독보라, 홀로 독(獨)자, 걸을 보步자, 천지를 조금도 장애(障碍)없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든 것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무장무애(無障無礙)한 그러한 경계(境界)가 이른바 건곤독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대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이고 또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인데 그건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문관이라 하는, 요새 우리 승가(僧家)에도 무문관을 지어가지고서 가서 6개월 코스로 공부도 하고 1년 코스로 독방에서 공부도 하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튼 무문이란, 본래 문이 없는 그러한 도리를 우리가 통과한다고 생각 할 때에 건곤독보라, 모든 것에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제법공(諸法空)도리, 제법 공 도리를 깨닫는 것이 무문관을 통과 하는 것입니다. 제법 공 도리를 통과하지 못 하면은 무문관을 통과를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제법 공 도리는 어떠한 것인가? 아까도 얼핏 언급을 했습니다 만은 사실은 제법 공 도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논리적(論理的)으로 우리가 사견(私見)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體驗)으로 해서 아는 것이 이른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몸 체(體)자, 빌 공(空)자, 바로 체공(體空)이란 말입니다.
현대과학(現代科學)적으로 물질(物質)을 분석(分析)해서 원소(元素)가 되고 원자(原子)가 되고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한 것은 하나의 석공(析空)적인 것이 되겠지요. 사실 물질(物質)을 언급했으니까 말하는 것이지 물질이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나 또는 일반 여기계신 분들이나 불교(佛敎)를 공부할 때에 물질이 어째서 없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납득하기가 참 곤란스럽습니다.
옛날에는 납득이 안 갔지만은 현대정밀 물리학(物理學),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물리학자는 물질이 없다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그 원자구조(原子構造)론, 라터포드나 보아라든지 그런 분들의 원자 구조론을 보면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으로 가까스로 추측 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걸로 해서 원자구조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인데 원자구조가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각 위성들이 태양의 주변을 뱅뱅 도는 그런 도리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도저히 볼래야 볼 수도 없는 모든 존재,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아주 미세(微細)한 단계까지 가서 보면은 그런 것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地球)라든가 달들이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나 구조가 다 비슷비슷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작은 알갱이 이른바 전자(電子)라든가 양자(陽子)라든가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은 그러면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은 순간순간에 이루어 졌다가 소멸(消滅)되었다가 또 상호전환(相互轉換)되었다가 그 조그마한 물질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거니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간순간 소멸되고 이루어지고 또 서로 바꾸어지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조금도 측정 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 할 수가 없으니까 이른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그 운동량(運動量)이나 위치(位置)나 이런 것을 정확히 측정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에 대해서는 사실은 지금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관측(觀測)이 되고 또는 실험(實驗)이 되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온전히 있어야 관측할 수가 있는 것이고 실험할 수가 있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끄트머리에 가서 지금 현대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끄트머리에 가서는 도저히 그것이 관측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실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음양(陰陽)이 부딪히면 마이너스 플러스가 부딪히면은 그때는 텅비어버리고 에너지만 남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物質)의 근원(根源)은 결국은 다 공(空)으로 되어버린다. 물질이 종당에 가서는 다 비어버린다. 이런 것이 지금 현대물리학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다 비어버렸으니까 그 이상 또 알 수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 공간적으로 존재가 있어야 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시간 공간적으로 존재 할수 없는 것은 현대물리학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 비어버린 그 연원은 무엇인가? 저쪽 끝 피안(彼岸)은 무엇인가? 물질의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대총상법문이 여기에 해당되는 법문이 되겠습니다.
다 비어버린 그 자리, 제법공이 비어버린 그 자리,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가까스로 제법공(諸法空)도리를 증명합니다. 증명하나 공이 아닌 자리, 공의 저편은 무엇인가? 그 물질이 비어버렸으면 물질은 그러면은 근원적인 물질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장 미세한 원자력(原子力)이 비어버렸다고 생각 할 때에 따지고 보면 결국은 우리 몸도 비고 다 비어있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나 결국은 다 본래로 비어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이 제한(制限)된 시각(視覺)으로 보는 것이니까 나같이 보이고 너같이 보이고 금으로 보이고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것이지 정말 정밀과학(精密科學)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실은 그대로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분석(分析)한 뒤에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 이른바 원자구조(原子構造)라, 그런 원자들이 주로 움직이고 서로 상호전환(相互轉換)되고 상호작용(相互作用)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끼고 그렇게 소중하니 건사하고 간직한 우리 몸뚱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원자구조의 그러한 관계성을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불행(不幸)이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하는 데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바로 보면은 분명히 모두가 다 제법이 공이다. 비어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업장(業障)에 가린 대로 보이는 것인데 따라서 그것은 바로 볼 수가 없는 그런 차원인데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미움도 있고 사랑도 있고 그런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남을 사랑하라. 또는 자기 것을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布施)해라. 그런 말씀을 부처님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꼭 다 모두가 깊은 철학적인 깊은 도리가 전제가 되어있단 말입니다.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남한테 해꼬지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 나와 남이 둘이 없거니 자기만 위해서 이득을 취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현상(現象)만 가지고 따집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상(相)만 가지고 따진단 말입니다.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섭상귀성(攝相歸性)이라, 모든 상(相)을 거두어서 본체(本體)로 가는거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과 깨달은 분들은, 중생은 상만 가지고서 상(相)의 범주(範疇)내에서 시야비야하고 갈등합니다 만은 깨달은 성자(聖者)들은 성품(性品)을 깨달아서 성품에 입각해서 모두를 다 제자리로 하고 판단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상 이것은 근원적으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제법이 공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원적(本源的)인 도리기 때문에 제법공(諸法空)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곱다는 상, 밉다는 상,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사실은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을 우리는 즉 말하자면 속아 사는 것입니다. 속임수에 그대로 우리가 속고 있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있는 법문(法問)아닙니까 만은 아상(我相)이나 나라는 상이나, 인상(人相)이나 너라는 상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또는 수명(壽命)이 짧다 길다하는 수자상(壽者相)이나, 이런 상은 모두가 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허망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이 있으면은 그때는 중생(衆生)인 것이고 범부(凡夫)고, 이런 상이 없어야 그래야 비로소 성인(聖人)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그 명백히 금강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은 쉬운데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그렇게 보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 가운데서 그때그때 자기 마음이 내키면은 그때는 그냥 조금 자기스스로 기분도 좋고 모다 그럴것이지 만은 상에 보이는 것이 자기한테 해로우면은 그냥 또 진심(嗔心)을 내고 우리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를 공부하는 분들은 어떻게 해서 상(相)을 없앨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불교의 수행력(修行力)이 되겠지요. 오랜 동안 우리가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경(經)도 보고 하면은 차근차근 상이 줄어지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단박에 어떻게 하는게 상이 없이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불자들 또는 일반사람들도 모두가 다 굉장히 마음으로 간구해서 마지않는 중요한 문제 안 되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말로만 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문자(文字)적 갈등이라. 또는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아주 차별적(差別的)인 그런데서 머물러 버리면 은 참다운 불법(佛法)이 되려야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우리 중생들이 이론적(理論的)으로만 느끼라는 그런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꼭 교행증(敎行證)이라,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면 우리가 가르침대로 실천(實踐)하고 또는 그다음에는 반드시 증명(證明)해야 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