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424
제가 여기서 몇 시간 동안 얘기 해 봐도 무슨 이것저것 제가 주워 외인 것을 갖다 얘기 해봐도 그것은 하나의 참고 밖에 안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성불(成佛)할 것인가 말입니다. 즉 이 문제 단 말입니다. 성불 하는 것, 부처가 되는 것, 영원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 우리한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 무엇인고 하면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가르침입니다. 그러면은 지금 선방에서 우리 스님네가 참선을 하고 계십니다만 참선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선은 이것은 다른 자질구레한 이론들은 거기다가 마음을 두면은 가장 소중한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도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복잡한 것은 다 그만 두고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 깨달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같은 마음이나 공자 같은 마음이나 예수님 같은 마음은 바로 마음이 부처라 해도 좋지만은 우리같이 더러는 이상한 생각도 하고 모다 그런 별 보잘것없는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봐서 그런 것이지 본래의 자리, 불교는 본래(本來)란 말씀을 굉장히 소중 하니 여깁니다. 본래의 자리. 본래 생긴 대로, 본래 실존(實存)대로 즉 실상(實相)대로 얘기하면은 잘난 사람 마음이나 도둑놈 마음이나 석가모니 마음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깨달아서, 깨닫고 난 뒤에가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역시 지금도 이 가운데는 상당히 공부도 많이 하고 또는 학식도 높으신 석학들도 많이 계시고 또는 정히 하여튼 별로 그렇게 신앙적(信仰的)으로 탐구 하지 않는 그런 분들도 계시고 그렇게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그 분들 마음이 겉에 뜬 그런 마음은 천차만별이 되겠지만 밑에 바탕 이른바 성품(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 같습니다.
참다운 성품이 불교에서는 불성(佛性)그래요. 불성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아닙니까. 또는 우주를 말 할 때는 법 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 그럽니다. 이것도 표현만 차이가 있을 것이지 우리 마음의 본성인 불성이나, 또는 우주의 근본 바탕인 법성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인위적으로 그때그때 편의 따라서 이루어진 이름 때문에 자꾸만 걸린단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꼭 그 이름 때문에 허망한 그런 그야말로 가명(假名)이라 가짜 이름 때문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도 모두가 본래 타고 나온 이름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가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가명이나 가상(假相)을 떠나서, 철학(哲學)이나 종교(宗敎)를 공부 할 때는 될수록 가명가상을 떠나야 됩니다.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은 상을 떠난, 상을 없앤단 말입니다. 그러게 금강경(金剛經)에도 아상(我相)이라, 나라는 상, 인상이라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 본래에서 보면 결국 다 같은 똑같은 하나의 진리 존재인데 이것저것 우리가 하나의 것을 설정해 가지고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잡아맨단 말입니다.
그러니 중생상이라 또는 수명도, 우리 목숨도 역시 본래 길고 짧은 그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조금 어렵게 들어갑니다만 원래 우리가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성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수명이 짧다 길다 한 것도 이것은 없단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지요. 왜 그런고 하면은 원래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낳고 죽는 것도 역시 우리가 모양만 각 물질로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모양만 없어지고 있어지고 보이고 안보이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본래 죽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생불멸이라. 낳을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가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참선도 많이 하고 하면은 그때는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차근차근 더 선명해 집니다.
그러기에 경에도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구구순숙, 생각 생각에 오랫동안 진리를 지향해 닦다 보면 아주 순수하게 닦다 보면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自然內外打成一片)이라. 밖에 보이는 것이나 우리 마음이나 타성일편이라. 모두가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얼마나 분열돼 있습니까. 너 따로 나 따로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짧다 길다 여러 가지로 분열돼 있지만은 우리 마음이 순수화 되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겉으로 집착한 모든 것이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하나가 돼버린 그런 정도가 돼야 참다운 자비심(慈悲心)이 나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런 관념적(觀念的)으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꼭 나한테는 좋게 해주고 또 나 아닌 사람한테는 그때는 소홀히 대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이 차근차근 더 확신이 깊어 지면은 처음에는 확신이 깊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구구순숙이라. 오래 구(久)자, 오래 구(久)자 오래 오래 우리 마음이 하나의 진리로 해서 이렇게 딱 모아지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나와 남의 관념(觀念)이 다 흐려지고 말입니다. 나와 남의 관념이 흐려지면 그때는 그에 정비례해서 우리 자비심이 생겨납니다.
누구한테 보시(布施)를 많이 해라, 또는 사회적으로 희사를 많이 해라. 그런 말 저런 말 많이 하지만은 그 말로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 그도 어느 정도 맑아져야 되는 것이지 억지로 시켜놓으면 그것이 그땐 위선(僞善)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상이 없이 해야 위선이 안 되는 것이지 상이 있는 것은 항시 그때는 해도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잖습니까. 그 참선(參禪)하는 법이나 또는 기타 주문(呪文)을 외이는 법이나 또는 경(經)을 베끼는 법이나 여러 가지 법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다 요체(要諦)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統一)시켜서 통일된 염력(念力)이라. 염력이라 하는 것은 진리(眞理)에 대해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모은 이른바 집중력(集中力)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실 때에 경이 이것이 유교경(遺敎經)이라. 그것은 짤막한 경입니다만 부처님께서 마지막 설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경이지요. 거가서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염력강고(念力强故) 라. 염력이 하나의 진리에다가 마음을 딱 붙여 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변치 않는 그 마음, 염력이 강한 고로, 염력이 강하고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
오욕을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내고 남을 미워하고 또는 재물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감투에 욕심을 내고 그런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망들이 오욕인데 그것이 오욕적중이라. 적어도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런 오욕을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그 오욕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바로 못 하고 나쁜 행업(行業)을 지어서 고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혹업고(惑業苦)라. 우리가 무명(無明) 때문에 업(業)을 짓고 업 때문에 고(苦)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업을 짓는 그런 원인은 무엇인가? 내내야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결국은 바로 못 보는 것인데 우리 마음을 한가지 진리에다 딱 붙여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힘을 모으면 그때는 차근차근 염력이 강해집니다. 염력이 강해지면 그때는 오욕적중불위소해라. 그 오욕이라 하는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자기 생명욕(生命慾) 그런 욕심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우리 불자님들은 꼭 그런 욕심이나 우리가 세간적으로 보통 생각하는 상에 대한 것을 모두가 다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그런 오욕의 욕심 그런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불위소해라. 어떻게 해치지를 못 한단 말입니다. 수행이 많이 된 스님 네한테 가서 당신한테 무슨 감투를 줄 테니까 써라 하면 쓰겠습니까. 중국에 장자(莊子)가 있습니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제자 아닙니까. 장자도 살기가 굉장히 아주 구차했습니다. 구차해서 그 나라에서 와서 사람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또 아주 경륜이 밝으니까 장자를 참 등용을 시킬라고 장자한테 와서 재상을 줄 터이니 왕자 신분에 와서 재상을 줄 터이니 가셔서 재상이 되시라고 그러니까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하루에 설사 한 끼 먹고 죽을 먹고 산다 하드라도 나는 왕자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역시 위대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우리 마음을 닦아서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마음자리가 이것이 불교로 말하면 불성(佛性)이고 또 기독교로 말하면 그때는 하나님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까지 갈려는 것이 우리 할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 입을 채우고 창자를 채우려고 또는 부당한 욕망을 위해서 뭣 때문에 가서 재상은 될 것인가? 이렇게 해서 거절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참 수행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저런 여러 가지 그런 상을 떠나야 쓰고 오직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공부 할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가장 잘 모으는 그런 방법이 될 것인가? 이 문제가 또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우리 중생들은 그 흩어질 산(散)자, 마음 심(心)자, 산심(散心)이라. 이른바 산란한 마음을 도저히 잠재우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히 산란한 마음 산심을 잠재웠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성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중생심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전에는 산란한 마음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길 것인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야말로 참 주문(呪文)도 외이고 경(經)도 쓰고 또는 참선(參禪)도 하고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영원적인 진리에다가 딱 붙여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생각 생각에 간단이 없이, 끊임없이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집중을 시켜 나간단 말입니다.
맨 처음에는 우리 버릇이 별로 좋지가 않기 때문에 잘 안됩니다. 그것이 그래서 참선(參禪)도 하다 보면은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까지 버릇이 된 그런 산란한 마음 때문에 이른바 상 때문에 걸려서 공부가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억지로 앉으면 그때는 기(氣)가 올라가 가지고서 상기(上氣)가 되어서 병나고 하지요.
따라서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어려운 공부는 하시기가 좀 곤란스럽지 않습니까. 선방에 공부하는 것도 우리가 밖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쉽지만은 하루에 그렇게 몇 시간씩 한 여남은 시간씩 앉아서 지내는 것이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 자기 무슨 어머니가 계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오직 그냥 외로운 데서 그렇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그 선방(禪房)에서나 산중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을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해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동정을 좀 하셔야 됩니다.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은 종교가 다 거의 공통이 됩니다. 공통이. 기독교도 ‘오, 주여!’ 하고 ‘하느님이시여!’ 하지 않습니까. 역시 그 표현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불교도 그와 거의 다 같습니다. 표현만 차이가 있지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부처님의 이름을 외인단 말입니다. 왜 그냥 가만히 있어놓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생(今生)에도 어려서 부터서 가지가지의 여러 가지 업을 많이 지어놔서 그 업 때문에 공부가 어디로 그냥 간곳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름을 외는 것은 그래도 하면 좀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한 시간도 염주(念珠)를 헤아리면서 할 수도 있고 또는 염주 없이도 할 수가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이른바 염불(念佛)이 제일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도 공부하는 수행법에 관해서 염불 말씀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염불 그러면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은 그냥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고 우리 노인네나 하는 것이지 유식한 사람들이나 현대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염불 할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염불도 염불의 차원(次元)이 있단 말입니다. 그냥 덮어놓고서 부처님 이름만 외이는 그런 염불도 있습니다.
이런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이니까 산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덕상 (圓滿德相)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얼굴은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이라, 눈이나 코나 입이나 모두가 다 아주 완전한 상호란 말입니다. 부처님 얼굴이 왜 그렇게 태어났는가 하면은 부처님은 무량(無量)세월 동안에 상을 떠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그때 몸을 몇 번이나 몇 천 번 바치고 했단 말입니다.
맑아지면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우리 마음의 형상에 불과합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어떻게 살았든가? 우리 업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삼십이대인상,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相)은 우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세에 무수한 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중생한테 보시하고 말입니다.
헌데 사실 참 그야말로 우리가 염불(念佛)할 때 있어서도 부처님 이름만 외일 때 하는 염불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부처님의 원만상, 법당에다 모시고 모다 여기도 뒤에 가 부처님 화상이 있잖습니까만 부처님의 그런 원만한 상호를 우리가 관찰하면서 말입니다. 관조(觀照)하면서 염불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뭣인가 하면은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의 생명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실상염불이라.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우주(宇宙)의 근본(根本)바탕, 근본바탕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불성(佛性)이고 또는 법성(法性)이고 합니다. 그래서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보리나 열반(涅槃)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