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418
부처님이 우리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시는 그 마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아닙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라. 우리 보통사람은 자비심(慈悲心)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자비심은 보통 자비심이 아니라 조금도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자비심이나 남한테 좀 베푼다 하더라도 꼭 뭣인가 좀 남아있단 말입니다. 내가 남한테 베풀면 저 사람 나를 좀 좋게 알겠지 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그 눈에 보이는 보상(報償)이 아니더라도 무슨 보상 이 좀 있겠지 하는 그런거라든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그런 삿된 것이라든가 개인적인 헤아림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부처님은 그러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낼 수가 있는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한 점도 오류가 없고 조금도 염오(染汚) 안 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부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우리 마음도 부처님 마음하고 지금 똑같은 마음입니다. 설사 금생(今生)에 잘못 우리가 살았다 하드라도 그것은 우리 차원(次元)에서 볼 때에 내가 아직 멀었구나 그러는 것이지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왜 같을 것인가? 부처님도 역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같이 몸으로 나투신 화신(化身) 부처님이 있고,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잘 알으실 것입니다만, 잘 모르시면 부처님의 개념정리를 분명히 하셔야 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같은 모양으로 나투신 부처님도 계시는 것이고 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이른바 진리(眞理)부처님, 진리부처님은 언제나 우주(宇宙)에 계신단 말입니 다. 따라서 진리부처님은 이 세상에 둘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모두가 다 진리 부처님으로 해서 세상이 되었단 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또는 이슬람교의 알라나 말입니다. 유교(儒敎)의 도(道)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진리(眞理)아닙니까. 그런 진리도 내내야 한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얼마만치 깨달았는가. 그 깨달은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우주(宇宙)란 것은 모두가 다 진리(眞理)로 해서 우주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란 것이 다만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그건 생명입니다.
이 종교(宗敎)란 것은 그 이치(理致)만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를 다스리는 진리가 바로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는 모든 종교(宗敎)가 하나의 생명으로 다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헌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우주(宇宙)의 도리 인생(人生)과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알고 보면 그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도리를 알고서 행동해야 참다운 보살행(菩薩行)이 됩니다.
자비(慈悲)도 방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衆生)들이 차별을 두고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조금 인심을 쓰는 정도 그런 것은 참다운 자비(慈悲)가 못된단 말입니다. 꼭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도리 우리 생명(生命)이란 것은 본래 뿌리가 다 같은 것이고 또는 본래로 다 하나란 말입니다.
저는 가끔 비유를 듭니다만 저 바닷가에 가서 다도해(多島海)를 본다고 생각할 때에 물이 들 면은 섬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모다 하겠지요. 그러나 물이 다 쓸어버리면 그때는 뻘로 해서는 다 하나의 육지란 말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지금 일본열도도 모두 구주(九州)나 또는 사국(四國)이나 모다 그런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또 그런 것도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의 육지입니다.
영국(英國)도 스코틀랜드나 또는 아일랜드나 모두가 다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은 내내야 이른바 육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육지란 말입니다. 물이 있으니까 섬으로 보이지만 그와 똑같이 이렇게 많은 수의 우리 불자님들이 다 계시지만은 우리 중생(衆生)의 제한된 눈으로 보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있고 하는 것이지 현미경(顯微鏡)만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벌써 우리가 다 지금 붙어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깨달은 눈이란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 (眞如佛性)으로 보이는 것이 깨달은 눈입니다.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근본바탕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거든 다 부처님으로 안보이겠습니까.
우리 공부가 부족해서 우리 업장(業障)으로 보는 것이니까 너로 보이고 나로 보이고 밉게 보이고 좋게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성자(聖者)의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립고 다 사랑스럽고 어느 때 가서는 자기들이 바라면 자기 몸도 줄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안보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타의 구분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내 몸이라 그래서 특별히 좋고 그대 몸이라 그래서 별것도 아니고 이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대자대비(大慈大悲) 부처님의 그런 자비라는 것은 우리 중생(衆生)들이 느끼는 그런 선심 좀 쓰고 뭐 좀 베풀어 주고 그런 동정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동정하는 자비(慈悲)보고는 불교(佛敎)말로 해서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잘 외워두십시오.
여러분들께서 누구한테 무얼 베푸실 때나 자기 아들이나 딸한테 줄 때도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애견대비(愛見大悲) 이것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자리에서 베푸는 그런 자비(慈悲)가 애견대비(愛見大悲) 입니다. 사랑애(愛)자 볼견(見)자 중생견해(衆生見解)를 미처 못 떠나고서 베푸는 자비(慈悲)를 가리켜서 애견대비(愛見大悲)라 그래요. 우리 중생들은 보통은 애견대비(愛見大悲)입니다.
애견대비(愛見大悲)는 자타를 구분하는 중생심에서 남한테 보시(布施)도 하고 베푸는 그런 자비(慈悲)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성인(聖人)들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저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다 부처님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저 사람만 부처님이고 나는 부처님이 아니라고 그렇게 보면 그러면 안 되겠지요. 똑같이 부처란 것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 (天地宇宙)가 다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이루어 졌단 말입니다.
바다 위에서 무수한 거품이나 파도가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물이란 점은 똑같지요.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른바 수파(水波)의 비유(比喩)라 그 파도 같은 것은 그것은 우리 중생(衆生)에 해당하고 물 자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파도가 바로 물이고 물이 바로 파도이듯이 우리 중생이 바로 부처고 부처가 바로 그때는 우리 중생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자비(慈悲)라는 것은 대자대비(大慈大悲)기 때문에 대자대비는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무연자비(無緣慈悲)라,
그러니까 불교(佛敎)를 공부하실 때는 우리 불자님들께서 그 어려운 말씀도 좀 외워둘 것은 외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 스스로 공부를 않고서는 살수가 없는 것이고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더 많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자연적으로 또 어려울 수밖에는 없겠지요. 아무리 쉽게 말해도.
헌데 우리 중생들의 자비(慈悲)는 이것은 아(我)를 자기를 못 떠나는 그런 자비(慈悲)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제한돼있고 참다운 사랑, 참다운 자비가 못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기한테 기분 나쁘면 그냥 그때는 성내고 또 그야말로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때리고 그럴 수도 있게 안 되겠습니까.
헌데 그런 무연자비(無緣慈悲), 무연자비란 것은 불심(佛心)자리에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똑같은 한결같은 모두가 부처님이다. 그런 자리에서 마음으로 헤아림이 없이 저절로 베푸는 자비(慈悲)가 무연자비(無緣慈悲) 입니다. 없을 무(無)자, 인연 연(緣)자, 무슨 인연(因緣)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因緣)을 초월(超越)해서 말입니다. 저절로 불심자리에서 남한테 베풀고 잘하는 자비(慈悲)가 이것이 무연자비(無緣慈悲)란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보다 조금 못한 것은 또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은 법연자비(法緣慈悲)라, 법법(法)자, 인연 연(緣)자 말입니다. 제법공(諸法空)도리에서 우리는 제법공(諸法空)하면 상당히 마음으로 부담을 느끼실 분도 계시겠지요. 공(空)이 아닌데 꼭 공(空)이라 하니까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고민을 좀 하시고 마음으로 연구(硏究)를 하셔야 됩니다. 꼭 이것은 공(空)을 알지 못 하면은 불교(佛敎)를 모르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밖에는 모르고 대승(大乘)은 모르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 되어야 참다운 불교(佛敎)인데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대승(大乘)이 돼야 그래야 공(空)이 아닌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부처님뿐이라는 소식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그 자리를 알라고 하면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 이 보는 이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그 허무하다는 것은 사실로 있으면 허망(虛妄)하지가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사실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 이렇게 많은 수가 지금 계시지만은 저 사람과 나와는 모두가 이것은 무관한 사이다.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보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수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자리에서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나요 너요 이렇게 구분해 나타난 것이지 이것이 근원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生命)에서 우러난 하나의 불성 (佛性)에서 우러난 모두가 다 화신(化身)부처님이다. 이렇게 봐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은 잘못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의 철인(哲人)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가장 중요한 말을 해온 것이 즉 그 말 때문에 철학(哲學)의 아버지라고 그분을 말하지 않습니까만은 ‘먼저 그대 스스로를 알아라 먼저 그대 스스로의 무기를 알아라’ 우리 중생(衆生)들은 자기가 좀 배워 노면은 자기 아는 것이 상당히 많이 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별것도 아닌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衆生)들은 중생(衆生)이란 허물을 못 벗어나면 사실은 뭐 안다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것만 그렇게 좀 우리가 외웠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衆生)들은 꼭 먼저 자기 무지(無知) 자기가 지금 아직은 범부(凡夫)다. 내가 성자(聖者)가 아닌 범부(凡夫)다. 이것을 우리가 사무치게 느껴버리면 남하고 다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한 것이 사실 옳은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맑스주의요. 무슨주의요. 모다 그 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모르고 그래요. 잘 모르고.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 도그마에 빠진단 말입니다. 독단에, 그런데 그런 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衆生)들이란 그런 입장에서는 그런 차원에서는 어느 누구나가 독단에 빠집니다.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도 우리 중생(衆生)들은 꼭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고집을 해진단 말입니다.
더구나 무슨 권위(權威)가 있으면 더욱 그럽니다. 우리가 대통령이 되면 자칫하면 독재(獨裁)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어떠한 분야에서나 독단이란 것은 도그마란 것은 굉장히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독단을 부리기 때문에 남하고 화합(化合)도 못하고 또는 사회(社會)도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독단을 않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자기가 아는 것이 이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 범부 (凡夫)는 지금 다 무지(無知)한 상태단 말입니다.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돼요.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그래야 사람도 겸손하고 또 그마만치 남하고 화합(化合)도 되고 그러겠지요. 그렇게 하는데서 자비심(慈悲心)을 내야 그래야 이른바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