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396
우리 몸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자기 직업적인 생활을 어떻게 하던 지간에 가사 누어서나 앉아서나 부엌에서나 또는 어느 점포에서 장사를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그 자리를 강인한 의지로 떠나지 않는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우리가 염주(念珠)를 헤아리는 것이나 또는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하마 부질없는 허망한 것 때문에 분별시비(分別是非)를 할까보아서 우리 마음을 딱 모아서 생명 자체에다 우리 마음을 귀일(歸一)을 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생명자체 불심을 지향해서 우리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고 염불(念佛)도 백번 천번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지장보살」도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 실상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다니면서 보면 참 딱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들은 꼭 미륵존불(彌勒尊佛)이라. 미륵존불만 해야 만이 공(功)이 많다. 이렇게 편협하게 말하시는 분도 있고, 어느 분들은 특히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들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 일본 말 투로 하면 「나무호랭겟교」라 이렇게 해야 만이 공부가 된다. 그래야 만이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다. 이렇게 고집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보고 불교에서는 법집(法執)이라. 자기 법만을 집착한단 말입니다.
천지 만법이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떻게 꼭 한 법만 옳고 다른 법은 아닐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범부 때는 귀가 얄팍해서 좀 재주 있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법문을 하면 거기에 쏠려갑니다. 절대로 거기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법인데 우주가 바로 부처님 덩어리인데 어떻게 해서 어느 한가지 이름만 좋고, 가령 「지장보살」을 하면 좋고 「관세음보살」을 하면 별 공덕이 없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오랫동안 하신 분에게도 그것을 그만두고 요즈음 많이들 하는 지장보살을 염하라.
불법을 어떻게 믿고 그러는가? 저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분산된 것을 모두 통합해서 원융하게 하나의 것으로 뭉쳐야 할 때란 말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뿐만 아니라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부처님 품안으로 우리가 안아 들일 때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선전하는 그런 세계화(世界化)도 참다운 세계화라는 것은 흩어진 진리를 하나로 모아서 참다운 진리로 뭉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화해(和解)가 됩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후기 산업사회(産業社會)에 와서는 국경(國境)은 무너지고 맙니다. 경제적인 면도 국경이 무너지는데 하물며 진리의 본가에서 마땅히 국경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이나 공자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똑 같은 우주의 진리입니다.어느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說)이 있습니다. 그 시대 그 상황 그 사람에 따라서 맞는 법문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의 방편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가운데서 방편설을 떠나서 알맹이만 간추려 가지고 지금 하나가 될 때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어느 부처님은 공덕이 더 많고 어느 것은 공덕이 낮다. 또 신장기도만을 모셔야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불자님들 꼭 깊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꼭 정다웁게 부처님 공부만 믿으셔서 외도를 닦지 마시고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모양은 불교인 같은 모양을 하지만 사이비 불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공덕이 없습니다. 자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한 어떠한 이름이 본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때 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생명(生命) 자리에서, 공덕(功德) 따라서 잠시간 이름이 붙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총체적인 총 대명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또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고 말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나 천상세계로 인도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러는 것이지 따로 따로 뿔뿔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뿔뿔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불법이 아닙니다. 그 때는 원시종교(原始宗敎)란 말입니다. ‘명상(名相)을 떠난다’ 하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름 명(名)자, 서로 상(相)자 말입니다. 진리는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름과 상을 못 떠나면 이것은 범부(凡夫)입니다. 소승도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인데 하물며 불법의 그런 정수인 대승을 믿는 분들은 꼭 허망한 이름과 상을 떠나야 됩니다.
금강경(金剛經)의 핵심도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상이 있으면 범부고 상이 없으면 성자입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했으면 되겠단 말입니다. 세상은 바쁘고 또 이름이 달라지면 사람들끼리도 서로서로 마음도 갈라질 수가 있겠지요.
기독교는 다행히 ‘오! 주여!’ 한 분을 하므로 좋은데 불교는 너무나도 이름이 많으므로 가르치는 분마다 자기 개성 따라서 가르치므로 혼란이 온단 말입니다. 현명하신 여러분들은 잘 판단하셔서 될 수록 그런 쪽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기도를 모신다고 기도가 적게 되겠습니까. 공이 적겠습니까.
참선을 꼭하시기 바람이다. 참선을 해야 그래야 바른 불자가 됩니다. 참선(參禪)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방(禪房)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소재가 우리 마음이 부처님! 부처님이라 하는 생명(生命)의 실상(實相), 생명의 그 본질(本質)에 머물러서 다른 허튼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참선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절대로 고통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사실은 성불(成佛)하는 길이 항시 저는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생각이 무엇인가? 가장 위대한 분이 누구인가? 또는 우리 생명의 근본 고향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주의 법도에 우주의 질서에 바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내가 없는 것인데 나는 나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해도 무방하다. 이런 때는 벌써 우주의 도리에 빗나갑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남한테 베풀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비양심적인 짓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은 그만큼 불안하고 어두워집니다. 그 얼굴도 어두워집니다. 남한데 자비(慈悲)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 때 그 얼굴은 벌써 그 표정도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에 따르는 우주에 도리에 따르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건강을 위해서나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과 화해(和解)를 위해서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나 어느 분야로 보아도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현대는 인간성(人間性)의 부재(不在)라, 이세상이 혼란스럽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또는 가치관(價値觀)의 부재다. 이런 말씀을 누구나가 다 쓰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것이 참다운 인간성일까? 어떠한 것이 참다운 가치관일까? 이렇게 반문해 들어가면 확답을 잘못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부처님 인생관, 부처님 가르침 같은 참다운 인간관, 부처님 가르침 같은 참다운 진리에 따르는 가치관, 이것만 제대로 선다고 생각할 때는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최선으로 바르게 발달이 됩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낸다 하더라도 ‘아!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바람소리나 물소리나 다 부처님 법문이 아님이 없다.’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깨달을 때도 역시 ‘산의 모습은 부처님 법신, 부처님의 몸 아님이 없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소리 아님이 없다.’ 이렇게 느꼈단 말입니다. 소동파 같은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시인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여러분들 한번 해 보십시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을 수만 번 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고요해 옵니다. 그래서 자기 집 근처에 시냇물이 흘러가면 그 시냇물소리가 틀림없이 염불소리로 들려옵니다.
비록 시냇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냥 바람소리가 들려와도 그 바람 소리가 그 신묘한 음악소리로 들려옵니다. 그런 바람 소리나 물소리나 좋은 소리뿐만 아니라 나쁜 소음도 공부가 되어 놓으면 그 나쁜 소음 공해까지도 정화가 되어서 아주 신묘한 멜로디로 우리한테 들려옵니다.
행복(幸福)으로 가는 길은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무수한 성자(聖者)들이 순교(殉敎)도하고 또는 무수한 성자가 신명을 바치고서 우리 인간한테 탄탄대로(坦坦大路)를 열어주신 성불의 길, 성자가 되는 길, 그 길 이외는 절대로 참다운 행복(幸福),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평화(平和)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을 다했습니다. 검증(檢證)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부처가 되고 성자가 되는 길이 굉장한 어려운 길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지금 몸이 어디가 아프신 분도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정말로 여러분들께서 내 생명의 본 성품은 모든 것을 갖춘 만능(萬能)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온전히 생각을 할 때는 여러분들 그 잔병이 그냥 즉시에 똑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대구(大邱)를 갔다 왔는데 그 곳에서 어느 처사님이 허리가 아프다고 절을 잘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한테 ‘당신은 지금 정말로 만능의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몇 번했더니 ‘대저 허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과장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틀림없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은 신비(神秘) 부사의(不思議)한 것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능력(能力)이나 모두를 다 완벽한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완벽한 그러한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100% 믿는다고 생각을 할 때는 어떤 분야로 보나 우리 인간의 생명을 최선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생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바로 믿어 버리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 第一法)이라. 보배가운데 제일 큰 보배가 부처님 가르침 천지 우주의 생명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바로 믿어 가시면 부처님을 한번 외이면 한번 외인만큼 부처님 생각을 한번 하면 한만큼 우리 몸과 마음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佛)은 바로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한 광명(光明)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을 한번 외이고 한번 생각을 하면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염불(念佛)하시고 거울 한번 보십시오. 훨썩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부처 같이 생각을 하고 정말로 염불해 가시면서 거울을 보시면 꼭 차이가 있습니다.
건강과 우리 마음과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밝아지고 차근차근 표정이 더 빛나가고 그러는 것입니다. 제 뒤에 계시는 부처님을 보십시오. 금색(金色)으로 해서 이렇게 우리가 장엄스럽게 모시는 것은 부처님은 본래 생명의 빛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지만 하나의 훤히 빛나는 만능을 갖춘 바로 광명입니다.
그러한 소중한 우리 마음을 두고서 우리 다른 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본래 부처한테서 와서 부처한테로 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부처님 법을 외도(外道)로 믿지 마시고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