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323

본연스님 2017. 8. 7. 06:16


 

(청화(淸華)큰스님 친필 유고에서(1))

 

*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차음(此陰;이 망념(妄念)덩어리)이 멸(滅)하면 피음(彼陰)이 상속(相續)할 뿐이다.

 

* 우리가 나의 존재(存在)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삶의 그림자가 모여 있는 망념(妄念)덩어리다.

 

* 불꽃이 타면서 나오는 빛은 있지만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는 촛불은 존재(存在)하지 않듯이 업보(業報)는 있으나 업(業)을 지어 과보(果報)를 받는 나의 존재(存在)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아(無我)이고 우리 존재(存在)의 실상(實相) 즉(卽) 현재(現在)이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 있을 때 욕탐(欲貪)이 생(生)겨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의 세계(世界)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세속(世俗)의 법(法)이다.

 

* 우리 참 모습은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현재(現在)이다.

 

*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世界)는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緣起)한 법계(法界)이다.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는 시간(時間)도 없고 공간(空間)도 없고 존재(存在)도 없다. 나의 존재(存在)가 삼세(三世)라는 시간(時間)과 세계(世界)라는 공간(空間)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世界)는 항상 한 곳에 함께 나타난다. 내가 있는 곳에 나의 세계(世界)가 있고 내가 나타날 때 나의 세계(世界)가 나타난다. 이것이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의 모습이다. 이 때의 나는 존재(存在)하는 나가 아니라 행위(行爲)하는 나이다. 나의 세계(世界)는 내가 짓고 있는 업(業)의 과보(果報)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업보(業報)의 인과관계(因果關係)는 필연적(必然的)이며 무시간적(無時間的)이다. 업(業)을 짓는 나와 그 과보(果報)로서의 세계(世界)가 시간적(時間的)으로 분리(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기(緣起)한다. 우리 모두는 절대(絶對)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자유(自由)로운 존재(存在)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다. <390>

* 사랑하지 않는 자(者)는 신(神)을 모른다. 신(神)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요한”

 

* 현재(現在)를 자각(自覺)하면 욕탐(欲貪)이 곧 원(願)이 된다.

 

* 실로 새로 구(求)하고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해탈(解脫)이요 자유(自由)이다. 이와 같이 자유(自由)는 경쟁(競爭)과 투쟁(鬪爭)을 통(通)해서 쟁취(爭取)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現在)의 자각(自覺)을 통(通)해서 발견(發見)된다.

 

* 이와 같은 절대자유(絶對自由)의 현재(現在)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이란 허망(虛妄)한 자기존재(自己存在)를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게만 존재(存在)한다.

 

* 법계(法界)와 연기(緣起)하는 현재(現在)에게 죽음이란 인연(因緣)이 변(變)하는 하나의 사건(事件)일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행위(行爲) 가능성(可能性)을 추구(追求)하는 하나의 새로운 계기일 뿐이다.

작업(作業)자(者)는 없으나 업보(業報)는 있으므로 죽음을 통(通)해서 사라지는 것은 망념(妄念)에 의(依)해서 취착(取着)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일 뿐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緣起)하는 현재(現在)는 항상 법계(法界)와 함께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하나의 착각(錯覺)일 뿐 현재(現在)의 종점(終點)이 아니다.

 

* 원(願)을 축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 존재(存在)는 아무리 짧은 시간(時間)이라도 자유(自由)동일성(同一性)을 유지(維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自己) 동일성(同一性)(상일주재(常一主宰)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존재(存在)는 어디에도 없다.

<391>

그것은 모든 존재(存在)는 주변(周邊)의 조건(條件)과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存在)의 동일성(同一性)은 외부(外部)의 사물(事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존재(存在)하고 있는 개념(槪念)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槪念)은 사실(事實)이 아니라 허위(虛僞)이므로 존재(存在)의 동일성(同一性)은 그 자체(自體)가 허위(虛僞)이다.

 

* 무위(無爲)는 허구적(虛構的)인 개념(槪念)이 사라진 상태(狀態)에서 인식(認識)되는 연기(緣起)하는 법(法)이다. 따라서 이 법(法)은 생주이멸(生住異滅)도 인식(認識)되지 않는다.

 

* 모든 법(法)은 언제나 조건(條件)만 갖추어지면 주변(周邊)의 조건(條件)과 함께 나타난다. 이렇게 연기(緣起)하는 법(法)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無爲)이며 연기법(緣起法)이다.

 

* 반야(般若)는 연기법(緣起法)을 바르게 아는 지혜(智慧)이다.

 

* 연기법(緣起法)은 모든 법(法)이 조건(條件)에 따라 나타난다는 법칙(法則)이다.

 

* 무위(無爲)의 세계(世界)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충만(充滿)한 세계(世界)이다.

 

* 자기(自己)존재(存在)라 인식(認識)되는 존재(存在)를 개별(個別)의 존재(存在)로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원(願)하는 것을 소유(所有)하고자 한다. 이렇듯 존재(存在)하려는 것이 욕탐(欲貪)이다. 곧 욕탐(欲貪)은 식(識)으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을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생긴다. 존재(存在)는 본래(本來)허망(虛妄)한 것이기 때문에 소유(所有)할 수 없다. 중생의 모든 고뇌(苦惱)는 소유(所有)할 수 없는 것을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自己)의 존재(存在)를 영원(永遠)히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이 생(生)기고 원(願)하는 것을 영원히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투쟁(鬪爭)과 불만(不滿)이 사라지지 않는다. <392>

 

* 반야(般若)에 의(依)해서 인식(認識)되는 것은 법(法)이다.

 

* 존재(存在)의 허구성(虛構性)을 자각(自覺)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림으로써 모든 법(法)은 연기(緣起)하고 있음을 통찰(洞察)하는 것이 반야(般若)이다.

 

* 원(願)하는 법(法)은 그 법(法)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條件)을 만들어야 한다.

 

* 소유(所有)하려 하지 않고 창조(創造)하려고 하는 것이 원(願)이다.

 

*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의 차이(差異)는 무명(無明)의 상태(狀態)에서 욕탐(欲貪)이라는 의지(意志)를 미래(未來)의 자기존재(自己存在)를지향(志向)하는 축으로 삼느냐 반야(般若)로 법(法)을 통찰(洞察)하면서 원(願)이라는 의지(意志)를 미래(未來)의 자기존재(自己存在)를 지향(志向)하는 축으로 삼느냐의 차이(差異)뿐이다.

 

* 행(行)에 의(依)해서 조작(造作)된 존재(存在)를 대상(對象)으로 인식(認識)하는 가운데 존재(存在)의 생멸(生滅)과 자신(自身)의 생사(生死)를 인식(認識)하는 것이 오취온(五取蘊)의 식(識)이고, 연기(緣起)하는 일체(一切)의 법(法)은 무아(無我)이고 공(空)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업보(業報)만 있을 뿐 작자(作者)는 없기 때문에 자신(自身)은 본래(本來) 생사(生死)에서 해탈(解脫)해 있음을 확실(確實)하게 인식(認識)하는 것이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 의(依)하면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은 함께 연기(緣起)하면서 공존(共存)하고 있다.

 

* 본다는 업(業)에 의해 그 과보(果報)로서 나타난 것이 눈(眼)과 색(色)이다.

<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