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287
287. 부처님 법法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어렵게 생각들 하십니다마는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宇宙의 법法입니다. 우주의 도리道理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님 법 밖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그 부처님 법을 어렵게 생각하고 또 부처님법을 그대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시고 그 부처님 법을 닦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만 먹으면 부처님 법은 제일 쉬운 법입니다.
부처님법이 어디에가 있고 어디에가 없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가운데도 부처님 법은 온전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말로 하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이런 어려운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본래성불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애쓰고 난행고행難行苦行해서 닦아서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본래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가 이미 부처가 돼있단 말입니다.
그 화엄경華嚴經의 야마천궁품夜摩天宮品이란 그런 품品이 있어요. 그런데 이 분단이 있는 것인데 거기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또는 중생이나. 그 중생가운데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動物이나 또는 생물生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또는 그런 두두물물頭頭物物까지 다 들어가는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아님이 없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창조創造하는 창조주創造主가 따로 있고 또 창조를 받는 그러한 피창조가 따로 있고, 또 하나님 따로 있고 중생따로 있고 그러한 가르침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그 어디에도 차별분별差別分別하는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그 차별이 없는 정말로 평화스럽고 정말로 화해스럽고 모든 그런 복락福樂이 다 들어있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공중에 나는 날짐승을 본다하더라도 그 어리석고 미련한 날짐승은 그 바람을 타지를 못합니다. 이른바 역풍逆風을 탑니다. 바람은 동으로 부는데 그 반대로만 날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은 그 부처님가르침이 바로 우주의 도리인데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면 참 쉬울 것을 그렇지 못하고서 우주의 도리 그 반대로 행동할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 어떠한 것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 도리에 안 따를 것인가.
우주의 도리에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법이 평등무차별의 그런 법이기 때문에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도 사실은 바른 도리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나와 남은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나我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그러한 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지금 대상적對相的으로 보이는 모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그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사실은 가상假相만 보고 있습니다. 가상만 우리가 느끼고 보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집착執着해서 고생苦生을 스스로 받고 있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도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눈으로 보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법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물거품같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사실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지금 어떻습니까. 몸도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모양이 있는데 그 모양이 항시 그대로 있으면 모르거니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늙어지고 또는 아파 죽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변화가 크니까 그냥 짐작이 되겠지만 사실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순간순간 우리 세포는 그때그때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그 변화가 되는 것을,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는 10년 후에나 똑같은 자기다. 이와같이 고집固執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허망虛妄한 생각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느낀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 가운데서 이른바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맨 처음에 부처님께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뒤에 녹야원鹿野苑에서 하신 법문法門이 맨 처음에 법의 바퀴를 굴리신 법문이 이른바 초전법문입니다. 초전법문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 아실 분들은 잘 알으시겠지만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사제법문은 이것은 짤막한 네 가지 차원의 그런 법문에 우주의 진리를 거기에 다 담아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생고人生苦는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우리가 느끼는 중생이기 때문에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나고 죽고 늙고 병드는 한계상황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닙니까. 또 그 외에도 인생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이것저것 구하기는 무척 많이 구하는데 우리가 얻는 것은 구하는 몇 십분지의 일도 못 얻는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것은 어느 누구나가 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러한 수명壽命을 다 바랍니다. 영원히 죽지 않아야 되겠다, 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춰야되겠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완벽하니 다 알아야 되겠다, 그 제한적인 인간존재이면서 구하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한도 끝도 없는 그 자리를 다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수명도 한계가 있고 능력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그 한도 끝도 없는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기에 그때는 자동적으로 인생고가 안 따를 수가 없습니다. 헌데 그러한 것은 우리 인간이 잘못 봐서 그러는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초전법문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정견正見이라.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 바른 우주관宇宙觀이란 말입니다.
바른 가치, 바른 견해가 없으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우리 인생고가 따를 수밖에는 없지만 바른 견해,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은 바로 우주의 도리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그 순리順理대로 가는 생활이기 때문에 조금도 무리도 없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그 만공덕萬功德을 다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자후자명결정설獅子吼者名決定說이라. 사자후라는 것은 사자의 그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사자후 아니겠습니까. 그 사자란 놈이 그 포효하는 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이 자기 직성대로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법문도 역시 조금도 무리도 없고 우주의 진리 그대로 아주 권위있는 그런 말씀만 하신단 말입니다. 이른바 결정적決定的인 말씀만 부처님은 하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법문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후자결정설이라. 사자후가 아주 결정적으로 진리를 그대로 말씀한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을 부처님성품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 것은 중생의 그 업業에 가리어서 모든. 아까 실상사주지스님 선운사주지스님 그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들은 실상을 보지를 못합니다. 허망상이나 그런 가상假相만 보고 실상實相이라고 우긴단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온 법문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여래는 부처님 아닙니까. 여래상주라. 항상 상常자, 머무를 주住자, 부처님은 항시 머물러 계신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2500년 전에 계시다가 지금은 안계시고 또는 미래에 안 계실 것이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계십니다. 또 부처님은 여기만 계시고 저기만 계시고 또 그렇지도 않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무처소無處所라. 어느 곳이나 부처님은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나 계시거든, 이 법당내에도 부처님은 충만해 계시는 것이고 법당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가운데도 부처님은 그대로 온전히 충만해 계십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 몰아서 얘기하면 아, 그러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뿐이 아닌가. 사실 그렇습니다. 꼭 그렇습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바로 보지를 못해서 나요 너요 또는 사랑하요 또는 미워하요 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 중생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바로 다 부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그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우리 중생이 자기라는 존재가 금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전생 전생을 소급해 올라가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면서 무수한 그런 생을 거듭해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중생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고를 도저히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그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생사의 고해를 벗어날 길이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이라야 비로소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말씀하신 부처님 가르침이라야 비로소 그 본래 고향자리로 가는 본래 참다운 자기로 돌아가는 그런 가르침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안 계신 데가 없고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의 본래의 자리, 본래 생명자리, 참다운 자기자리,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큰 대大자, 나 아我자 대아大我라. 그런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과거숙세부터서 버릇을 많이 붙어놔서 버릇이 많이 따닥따닥 붙어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본래의 자리를 모른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견해란 것은 그 소승적小乘的으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깨달으면 바로 인정하면 바른 견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대승적大乘的으로 말하면 대승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그 우주의 진리그대로 조금도 흠절이 없이 바로 말하는 것이 대승적으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대승적으로 말하면 아까 제가 여러 차례 거듭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信仰도 역시 그렇게 신앙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정신正信이 됩니다. 바를 정正자 믿을 신信자 참다운 바른 신앙이 됩니다. 그래야 대승신앙이 됩니다.
* 올 해 마지막 능소화